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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사 안내
용문사(龍門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예천읍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소백산 줄기인 매봉 기슭에 위치한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지명(李知命)의 중수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김룡사본말사지 (金龍寺本末寺誌)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신라 두운(杜雲)대사가 범일(梵日)대사와 함께 입당구법(入唐求法) 후 귀국하여 통일신라 말기인
870년(신라 48대 왕인 경문왕 10년) 이곳에 들어와 용을 몰아내고 못을 메운 뒤 풀을 엮어 두운암(杜雲庵)이란 암자를 마련하여 거처한 것이 용문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두운(杜雲)대사는 이 고장 출신으로 풍기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하기도 했던 당대의 고승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을 위하여 이 근처를 지나다가 두운대사의 명성을 듣고 방문하고자 절 입구에 이르니 바위 위에서 청룡 2마리가 나타나 인도하였다” 하여 산명을 용문산이라 하고 사명을 용문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훗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고 두운대사와 약속을 하였는데 그 뒤
936년(태조 19년)에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 이후 두운대사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스님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祖膺)스님에게 법(法)을 전하였고, 조응스님은 제자 자엄(資嚴)스님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5년(의종 19년)에는 왕의 칙명으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통해 93칸의 대찰을 만들었으며 1171년(명종 1년) 절의 왼쪽에 있는 봉우리에 세자(世子)의 태(胎)를 묻고 사액(寺額)을 용문산 창기사(龍門山 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어 낮에는 《금광명경 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의식을 행했다.
이 법회를 끝마친 뒤 다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斷俗寺)의 선승 효돈(孝惇)이 《전등록 傳燈錄》 《능엄경》 《인악집 仁岳集》 《설두집 雪竇集》 《염송》 등을 강(講)하였다.
1173년 나라에 내란(무신의 난,1170년)이 일어나자 나라를 위한 기도를 위해 3만 승재(僧齋)를 열었고
1180년∼1182년에도 대법회를 열었는데, 개태사(開泰寺)의 국통 전치(顚緇)스님이 강(講)을 맡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왕실의 지원은 계속되어
1457년(세조 3년)에는 세조가 친필 교지를 내려 용문사의 잡역을 감면토록 하였고,
1478년(성종 9년)에는 페비윤씨(제헌왕후, 연산군 어머니)의 태실(胎室) 을 이곳에 안장하고
1480년 정희왕후(貞熹王后, 조선 7대왕 세조의 왕비, 1418~1483))가 중수하여 성불산 용문사라 하였으나,
1783(정조 7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년 ~ 1786년, 정조의 장남으로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아들)의 태실을 이곳에 안장하고 사명을 소백산 용문사로 환원하고 인빈궁(仁嬪宮) 원당으로 삼았으며, 당시의 건물로는 광명전(光明殿), 지장전(地藏殿), 원통전(圓通殿), 응진전(應眞殿), 미타전(彌陀殿), 대장전(大藏殿), 응향각(凝香閣), 만월당(滿月堂), 청심당(淸心堂), 명월료(明月寮), 적묵당(寂默堂), 삼강실(三綱室), 천왕문(天王門) 등과 함께 암자로는 서전(西殿), 비전(碑殿), 양로암 등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1835년(헌종 원년)에는 큰불이 나서 소실된 보광명전과 해운루를 중건하였으며,
1840년대에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 등 여러 스님들이 힘을 모아 큰 불사를 마쳤다.
근현대에는
1979년에는 대장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1984년 초파일인 5월 9일 밤 제등행렬 후 연등을 넣어 놓은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보광명전, 해운루, 응향각, 영남제일강원, 요사, 종무소 등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당시 응향각(凝香閣)에는 조선 세조 때 잡역을 면제해준 교지(보물 제729호)가 대형금고 속에 들어있었는데 절에서 공부하던 변진용(당시 20才)이라는 학생이 장정들이 목도를 이용해도 억지로 들 수 있는 무거운 금고를 초인적(超人的)인 힘으로 방안에서 문턱을 넘어 마당까지 굴려서 떨어드려 귀중한 문화재를 구했으며, 특히 응향각을 삼킨 불이 바로 옆에 있는 단하각(丹霞閣)에 접근하자 지역 소방대, 공무원, 주민 등 30여 명이 위험을 무릎 쓰고 불길을 헤쳐 들어가 단하각을 허물어 불길을 잡았으며 불행 중 다행으로 대장전, 명부전, 응진전, 자운루, 진영당, 동향각 등의 전각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대장전에 있는 용, 물고기, 귀면(鬼面, 도깨비) 등의 조각과 그림이 물(水)을 상징하는 벽사(辟邪, 재앙을 물리침)의 역할을 하여 화마(火魔)를 막았다고 한다.
대화재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간 불사가 이루어져 보광명전(普光明殿), 대장전(大藏殿), 응진전(應眞殿), 명부전(冥府殿), 천불전(千佛殿), 원통전(圓通殿), 진영각(眞影閣), 회전문(廻轉門), 산신각, 일주문, 해운루, 자운루, 범종루, 영남제일강원, 응향각(凝香閣), 동향각, 서향각, 요사채, 두운암(杜雲庵), 성보박물관 등 20여동이 자리한 대도량을 이루고 있으며, 2010년부터는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받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용문사에는 세 가지 이적이 전해지고 있는데
1.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두운대사를 방문하기 위해 산 입구에 다다르자 갑자기 골짜기 입구 바위에서 용이 나타나 태조를 맞이하여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고 짓고 사찰을 용문사라 했다는 것.
2. 처음 절을 닦을 때 옛 들보 위에서 무게 16냥짜리 은병을 얻어 공사비에 충당했다고 하며 3. 1172(명종)에는 도량의 남쪽에 청석탑(靑石塔) 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에워 싼 일이다.
중요 문화재로는
1. 대장전(大藏殿:보물 145) :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과 경판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용문사 대장전은 사찰의 이름에 용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와 옛날 인도의 고승이 용궁에 대장경을 소장하였다는 고사에 따라 마련된 건물이다.
고려 명종 3년(1173)에 초창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초창 당시의 건물은 아니고 1767년 중수 때의 상량문에 1173년의 초창뿐만 아니라 1467년, 1534년, 1597년, 1665년의 중수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걸로 볼 때 17세기 건물로 추정하며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 건물로 나지막한 자연석 기단(基壇) 위에 막돌 주초(柱礎)를 놓고 민흘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높이에 비하여 지붕이 큰 편이다.
공포(栱包)는 안팎 똑같이 2출목(二出目)으로 짰으며, 그 결과 내목도리(內目道里)를 쓰지 않고 주심도리(柱心道里)로 서까래를 직접 받게 하였다. 주심도리가 대들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자리하게 되어 지붕이 높아진 만큼 기둥은 짧아 보인다.
측면의 박공(牔栱 : 경사지붕 옆면에 붙인 부재)에서 보면 귀포의 다포구성(多包構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귀기둥으로 길게 뻗어나온 장여(長舌)가 처마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
건물내부의 가구형식(架構形式)은 고주(高柱) 없이 4분변작(四分變作)하는 가구법을 사용하여서, 대들보를 얹은 중대공(中臺工) 위에 뜬창방을 끼워서 천장의 반자틀을 지탱하게 하였다.
천장은 소란(小欄 : 가는 테두리 대)을 꽃무늬 모양으로 조각하고 그 안쪽 반자틀에 화려한 단층을 베풀어 장엄하였다. 대들보와 종보 사이에 초각(草刻)한 화반(華盤 : 장여를 받는 받침)을 설치하는 등 곳곳에 장식적인 부재들을 넣어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외부 귀공포 위 창방 뺄목에 붙인 귀면·용머리·연꽃봉오리 등의 조각이나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위의 용조각, 대들보 위 용조각 등은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과 어울려 화려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단청도 금단청(錦丹靑 : 비단 자락과 같이 오색으로 갖은 무늬를 써서 그린 단청)으로 칠해져 내부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건물 내외부의 용과 물고기 장식은 중수상량문에 있는 일찍이 서역의 구담(瞿曇)씨가 팔만대장경 전장을 용궁에 안치하였는데 이로 인해 대장전이 세워졌다는 내용과 상통한다.
2. 윤장대(輪藏臺:보물 684) : 경전을 넣고 회전할 수 있게 만든 불교공예품으로 대장전 안에 2좌(坐)가 안치되어 있으며 대장전이나 장경각처럼 경전의 보관처임과 동시에 경전신앙의 대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윤장대는 중국 양나라의 선혜(善慧)선사가 글자를 모르거나 경전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중생을 위해 만든 것으로 신심이 있는 자가 한번 돌리면 간경(看經,불경을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읽는 것)의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전한다.
윤장대의 구조가 경장을 보관한 책장에 축을 세우고 손잡이를 달아 회전할 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에 전륜장(轉輪藏) 또는 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숭수선원(崇壽禪院)과 남선원(南禪院)에 윤장대가 있었으며 남선원의 윤장대는 용문사 윤장대와 구조가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송나라 때 이명중이 지은 영조법식(營造法式)에는 중국에서 조성된 전륜경장도가 있어 현존하는 용문사 윤장대와 좋은 비교가 된다.
『중수용문사기비,1185』나 『예천용문산창기사대장전중수상량문,1767』에 의하면 고려 명종 3년(1173) 무신의 난(1170년 의종 24 시작)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장전과 윤장대가 자엄대사에 의해 처음 조성되었고, 그 후 1476년부터 1767년까지 6차에 걸쳐 중수 되었고 1621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용문사 윤장대는 무신 난 극복의지가 담긴 만큼 경전신앙 뿐만 아니라 호국신앙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윤장대는 대장전 창방에서 가로지르는 부재인 가구에 위축을 연결하고 마루바닥 밑 초석(받침돌)에 아래 축을 올려 설치하여 회전축을 이루고 있어 돌릴 수 있는 구조이다.
전체적으로 팔각의 전각형(殿閣形)으로
상단부분은 지붕과 공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려뜨린 부재에는 활짝 핀 꽃들이 조각되어 위에서 보면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중앙의 경전을 보관하는 경장(經藏)부분은 경전(經典)을 넣을 수 있게 돼 있고 여덟 개의 문살로 구성하여 난간을 두르고 있고 경전을 넣고 뺄 수 있도록 문살을 여닫이문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는 3단으로 판목을 대어 경전을 쌓아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서가 아래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 뿔이나 대나무 또는 쇠붙이 등으로 전자(篆字)의 心(심)자를 나타내는 고사리모양의 장식문양)으로 투각된 받침대를 두고 천장에는 하늘을 나는 용을 그려 경장을 돌리는 종교적 행위에 생동감이 일도록 하였다.
하단부분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판목으로 마무리하였으며 판목부분에 귀면 문양이 그려져 있고, 몸체에 붙어 있는 긴 횡목 손잡이를 밀어 회전시킬 수 있는 구조이다. 기본적인 구조와 형태는 2좌가 동일하게 만들어져 대칭을 이루고 있어 음양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윤장대는 그 자체뿐만 아니라 경장을 장식한 문살로도 유명한데 단아함과 화려함의 외형적 대비를 통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아름다운 자태가 더욱 돋보인다.
불단을 향해 우측 윤장대에는 8면이 격자살문으로 돼 있고 좌측의 윤장대는 8면에 여러 종류의 꽃을 형상화한 꽃살문으로 돼있다.
격자살문으로 8면을 장식한 윤장대는 건축적으로 건실한 미감이 살아있으며, 특히 꽃살문은 통판 투조기법으로 물고기가 노니는 연못 위에 핀 연꽃과 도드라진 복사꽃 같은 연분홍의 꽃과 국화, 살구꽃, 모란, 미늘형태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등이 매우 다양하며 정교하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규모 불교 목공예품 임에도 불구하고 목조건축양식을 그대로 축소해 옮겨 놓은 신앙물로서 그 표현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단청으로 인해 그 품격을 높이고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초기에 금강산 장안사에 3층 윤장대가 있었다는 기록과 경기도 양주 화암사터와 파주 혜음원터에 윤장대 축과 받침돌 유구가 전해지고 있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모두 유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용문사 윤장대가 유일하다.
용문사가 자리한 면은 용문면인데 일대가 정감록에 나오는 10승지 중의 한 곳이며 6.25 때도 아무런 피해가 없이 넘겼다고 한다.
근래에 용문사 윤장대를 모범으로 해서 전등사, 보문사, 갑사, 운문사, 대흥사, 월정사, 관촉사, 목아박물관 등에서도 윤장대를 설치하고 있어 윤장대가 많이 알려지고 있다.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싸인다고 하는 유래에 따라 경력에 의지하고자 하는 많은 불자들이 윤장대 돌리기를 기원하며, 윤장대를 돌리면 공부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병자는 병이 나으며 박복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소원성취했다는 사례담도 간간히 들려오고 이 지역 현직 국회의원도 용문사에서 공부해 사법시험에 붙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원 윤장대는 보물이고 훼손의 우려 때문에 직접 돌릴 수는 없으나 본인이 합장을 하고 윤장대를 돌면 같은 효과가 있다고 믿는 분들은 윤장대 주변을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소원을 빌기도 하고, 지금은 성보박물관 안에 돌리기 체험용 윤장대를 따로 만들어 놓아 많은 불자들과 방문객들이 윤장대를 돌리며 소원성취를 빌고 있다.
3. 감역교지(減役敎旨, 보물 729) : 1457년(세조 3년)에 내린 교지로, 용문사에 잡역을 면제할 것을 인정하는 사패교지(공로가 있는 자에게 나라에서 부역을 면해주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이다.
이 교지의 내용은 ‘경상도 예천의 용문사는 일찍이 감사와 수령에게 지시한 대로 더욱 살펴 보호하고 잡역을 면제해주라’는 것이다.
이 교지는 가로 44.8cm, 세로 66.5cm로 세조의 친필 수결(지금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의 탄압이 심했던 시대였음을 상기하면 조선전기 용문사의 지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4.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989-1호) :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과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머리에 소라모양의 나발이 촘촘하며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가 낮게 솟아 있으며 이마 위에 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에 원통형의 중앙계주가 있다.
각이 진 사각형의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 원통형의 코, 입은 약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른손과 왼손을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의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다.
착의법은 두꺼운 대의 안쪽에 편삼을 입고 대의 자락은 오른쪽 어깨를 반달모양으로 덮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왼쪽 어깨의 대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편삼과 복부에서 겹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중앙에 흘러내린 옷자락을 중심으로 좌우로 몇가닥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가슴을 가린 승각기는 수평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불상의 뒷면은 목 주위에 대위를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전형적인 연판형으로 길게 늘어지지 않고 등줄기를 따라 수직의 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본존의 양 옆에는 아미타불의 협시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살상은 화염문으로 장식한 커다란 보관을 쓰고 양손에는 연화가지를 들어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각 상의 얼굴과 이목구비는 본존과 유사하며 특히 관음보살 어깨에 걸친 천의가 밑으로 흘러내리고 복부에는 화문장식의 복갑을 착용하고 있으며 양 무릎에는 갑대를 착용하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복장물이 도난되어 발원문은 남아있지 않으나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에서 출토된 복장기를 통하여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보물 989-2호) : 1684(숙종 10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얼굴은 앞으로 약간 숙여 사바세계를 굽어 살피듯 평범하게 묘사되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있다. 가운데 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墨書)되어 있어 숙종(肅宗) 10년(1684)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들 조각은 17세기 후기의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다.
6. 예천용문사 팔상도(醴泉龍門寺八相圖, 보물 1330호) :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예천 용문사 팔상탱화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폭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제3폭에는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팔상도는 1709년(숙종 35)에 제작되었으며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18세기 작품으로, 이후에 제작된 팔상도와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7. 예천용문사 영산회괘불(醴泉龍門寺 靈山會掛佛, 보물 1445호) : 예천용문사영산회괘불은 입상의 삼존불상을 배경으로 본존불상 머리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시켜 5존도 형식을 취하였다. 삼존불상 가운데 통견(通肩)의 적색 대의(大衣)에 밝은 회청색 내의를 착용한 본존 불상은 머리 높이가 180㎝이고 머리 광배의 폭만도 무려 273㎝에 이르러 10미터가 넘는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적색 대의에는 봉황문과 화문, 격자문, 연화문 등의 둥근 무늬가 전체에 걸쳐 정연하게 시문되어 있으며, 내의에는 흰색의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본존불 하단 좌·우로는 협시보살상을 배치하였는데 두 상 모두 손 모습과 천의(天衣)의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본존불을 향해 몸을 틀고 있는 신체의 자세 및 벌리고 서 있는 발의 모습, 인물의 크기와 형태, 보관, 지물 등이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면 상단 본존불상의 머리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자리하였으며, 배경으로는 황·적·청·녹색의 색구름대(彩雲帶)를 깔고 감청색의 하늘을 두어 공간감을 부여해주고 있다. 또한 그림 내부 하단 가운데 쪽에 왕실의 안위를 발원하는 내용의 글이 있으며, 테두리 하단부에는 화기가 남아 있다.
이 괘불은 괘불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1705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둥글넓적해진 얼굴에 근엄함이 엿보이며, 어깨가 약간 올라가는 등 17세기로부터 18세기로 넘어 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이 아닌 부처상으로써 지물(연꽃가지)을 드는 새로운 도상의 예를 보여주어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8. 예천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醴泉龍門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 보물 1637호) : 여래상의 몸 안에서 원문과 시주자 목록 두 장이 발견되었는데, 1515년 4월 9일에 고쳐 만들었다는 개조(改造)이라는 개조기록을 비롯하여 이를 만든 화원과 목수 철장의 이름 그리고 수백 명에 이르는 시주자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상화원(上畵員) 이영문(李永文)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음을 밝혀 승려가 아닌 일반 장인에 의해 주도된 16세기 전반의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이중의 대의(大衣·설법할 때 입는 옷)를 걸친 불상으로 가슴과 옷주름, 무릎과 발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체의 볼록한 양감이 강조된 모습이 특징이다. 특히 눈꼬리가 길고 앞으로 튀어 나온 양감 있는 얼굴 모습과 자연스러운 옷 주름 등은 조선전기인 15세기의 전통이 남아있어 16세기에 이르러 평면적인 경향으로 변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보이는 작품이다. 16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우수한 조형성과 명문이 확실한 불상이 극히 적게 남아 있는 조선전기의 상황에 비춰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9. 천불도(千佛圖, 보물 1644호) : 천불도는 현존 사례가 극히 드물고, 1709년에 화승 도문(道文),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스님이 제작한 작품이다. 석가팔상도와 같은 시기인 1709년 제작된 그림으로 당시 불사와 후원자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질서 정연한 배치, 이지러짐이 없는 형상과 필선 등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현존하는 천불도는 1754년에 제작된 선운사 천불도가 선운사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고 선운사 천불도가 모두 5폭으로 그려진데 반하여 용문사 천불도는 한 폭에 천불을 모두 그린 것으로 현존 천불도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앞서며 조선후기 천불신앙을 전해주는 예로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10. 중수용문사기비(重修龍門寺記碑, 경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53호) :
고려 명종 14년(1184)에 이지명(李知命:1127∼1191)이 왕의 명을 받들어 기문을 짓고, 이듬해 성인선사(性印禪師) 연의(淵懿)가 비문을 쓰고, 입선(入選) 해석(解錫)이 각자(刻字)한 높이 195㎝, 너비 93㎝, 두께 10㎝ 이다.
비문의 내용은 용문사의 수려한 경관과 두운선사가 이곳에 초암을 지은 일, 태조 왕건과의 만남, 후삼국을 통일한 후 태조가 용문사를 후원한 일 등 용문사의 창건 과정, 고려 의종과 명종 시대에 이루어진 용문사 중창을 중심으로 서술됐다.
특히 이 비에는 1173년에 국가의 어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삼만승재를 열고 윤장대 2좌와 전각을 마련했다는 사실과 함께 뒷면에 사굴산파나 수미산파 제자들의 기록도 있어 당시 선종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현재 고려시대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뿐 아니라 ‘갖은 머리초’라는 화려하게 음각된 예술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형문화재로의 가치도 인정받았다.
11. 용문사 자운루(경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76호) :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에 자엄스님이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에도 고쳐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고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 예천 용문사 사찰안내 자료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용문사 박물관 도록 및 여러 가지 자료를 비교해서 만들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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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용문사 템플스테이 팀장 김승년 010-2539-2866
첫댓글 에천 용문사 템플스테이 김승년 팀장님께서 작성한 자료입니다
답사자료 꼼꼼이 잘하셨습니다
힘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