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8~25 동정녀 잉태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잉태가 나오는데,
교회사를 보면, 사도신경은 이단들 때문에, 표준을 세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이다.
동정녀 잉태라는 것은 처녀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인데, 남자 없이 어떻게 처녀가 잉태를 하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그런데 마리아는 남자의 씨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다. 아니 이걸 믿으라구? 구약에서 메시야, 곧 창세기에서부터 ‘여자의 후손’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족보는 남자의 씨로 된 족보인데, 도대체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오심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단들은 동정녀 잉태를 믿지 않는다. 과거 아리우스파 및 이단 등은 그냥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와 참된 교회들은 공동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백 곧 사도신경이 탄생한 것이다.
18 예수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에게 관계하기 전에 성령으로 임신한 것을 깨달으니라.
그런데 혹자는 성령으로 잉태해도 죄인인 여자의 피가 섞이지 않는가? 그러므로 예수님도 피에 죄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는가 생각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보니 나병환자와 정상인이 결혼하면, 나병환자가 정상인을 낳는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의사 선생님이 보니 하나님께서는 산모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태반을 통해서 필요한 영양분만 공급하고 피는 한 방울도 넘어가지 않게 만드셨으며, 오로지 태아의 피는 태아 자체의 조혈기관에서 생성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 예수님은 자연인 남자의 씨처럼 죄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파트너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하였다는 것을 두고 조용히 끊으려고 하였다.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막았고, 천사는 성령잉태가 맞다고 하였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서 말씀하셨을 때, 요셉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가끔 성경에서 이상한 결혼이 있는데, 예를 들어 근친결혼을 분명히 성경이 반대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 또는 모세의 아버지 어머니 아므람과 요게벳, 유다와 다말 등, 정말 이상한 결혼이 있었다. 그런데 이 결혼도 임신한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정말 이상한 결혼이었다. 또한 이름도 천사가 지어주었다. 아기 이름을 예수라 하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 왜냐하면 그는 그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천사에 의해 이름이 주어졌다. 세례요한도 그러했거니와, 예수란 이름은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복음사건을 볼 때, 하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동정녀 잉태를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흠없는 제물로 오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화목제물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하게 구원하는 영원한 제물이다.
히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죄로부터 자유함은 예수께서 십자가로 내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는 사실 모든 것이다. 죄가 안 묻은 곳이 없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죄의 사람 곧 아담 옛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기업의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이 적응이 잘 안 된다. 언제부터인가, 흰 티가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입으면 뭔가 언벨런스한 것 같고, 좀 깨끗한 척하는 것 같고, 그런데 흰 티를 입는 것이 영적으로 볼 때, 새 사람을 입는 것과 같다. 거지가 왕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적응이 어렵나. 적응이 안 된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왔더니 누더기를 벗기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혔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었을 것이다. 또한 무당끼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아니 저 사람 왜 기도할 때 저렇게 지랄을 해요. 저 사람 원래 예수 믿기 전에 무당이었데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체험한 일인데, 교회에 알콜중독자였다가 회심한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전혀 알콜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평생을 알콜과 싸웠다는 것이다. 거듭나도 죄의 끼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피조물로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산다. 항상 믿음으로 갱신하며 살아야 한다.
여자의 후손 곧 동정녀 잉태는 대속하신 희생하신 사랑을 내포한다. 복음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정녀 잉태 곧 성육신을 믿고,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방장관 4스타가 이등병이 될 수 있나. 그러므로 바울은 이 낮아짐을 두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성육신은 사도신경에서처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하사,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사람 되심의 역사, 캐논 곧 표준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그분의 동정녀 잉태에 의한 성육신과, 오직 그분의 죄를 대속하신 희생 때문이다. 우리는 본성상 아담 안에서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다. 매일 삐져나오지 않나. 두더지 뿅망치처럼, 매일 쳐서 밀어 넣지 않나. 중생하였어도 그런 것이 성도에게도 불쑥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죄는 성화가 중요하다. 그러나 피조물은 완전히 해결이 안 된다.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나, 정의롭게 살아야 하나, 우리는 죄 덩어리이다. 죄 짱아치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산상수훈은 구원받은 자가 살아야 할 지침이다. 산상수훈은 중생자가 아니면,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말씀이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 보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 자체가 이미 간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조심해야 한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둥지를 틀지 않도록 막을 수는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중요하다.
동정녀 잉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흠 없는 제물이 되신 사건이다. 성자는 성부께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오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하나님이 보이나. 영은 바람 같은 것인데, 바람이 보이나 안보이나.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 잉태로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 영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는 구약에 예언된 것이었다.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는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라.
처녀잉태 이 말씀은 구약의 사7:14가 성취된 사건이다. 마태는 신구약의 예언과 성취를 자주 말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너무 신기한 일이었다. 아하스는 분별이 없는 왕이었고, 남유다는 당시 역사상 구약에서 처음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그런데 이 때, ‘임마누엘’의 약속을 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간기를 거쳐, 말씀이 끊긴 소강상태에서 로마의 압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예수께서 오셨다.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천사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니 25 아이를 낳기 전에는 관계하지 않더니 낳으매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니라.
요셉은 꿈을 믿고, 순종하였다.
십자가와 율법은 죄의 심각성을 알려주는데,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우리 속에서 양심이 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 값을 보여준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같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를 감싸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생각하면 동시에 죄인들을 사랑해야 한다. 주는 죄인들을 사랑하셨다.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실천해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웨슬리가 창녀촌에 갔더니, 그를 보자마자 회개가 일어나고, 창녀들이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나도 웨슬리처럼 해보자.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고, 촌에 들어갔는데, 그런 건 없었고, 오빠 왔어? 소리만 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심육계 줄행랑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과거 술친구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위험할 수 있다. 또는 상태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일본에 우치무라 간조도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런데 잘 보면, 사실 우리도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도저히 친구가 되어 주실 수 없는 인간들 아니었나.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안에서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을 적용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고, 기도로 성령으로가 아니고는 어림도 없다.
옛날에 어떤 선배들은 꾸짖고 혼이 나도, 사랑이 있었다. 내가 봐도 너무 형편없는데, 그럼에도 나를 무시하지 않고, 늘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교에도 사감 선생님 혹은 교장 교감 어떤 선생님들 중에 그런 분들이 있었는데, 겉으로는 엄격하나 속에는 사랑이 있었다. 율법도 사실 그런 것이다. 율법의 딱딱한 껍질 안에는 이미 창세기부터 사랑의 약속이 있었다. 모세도 그러했다. 구약의 긴 역사 율법의 껍질 안에 메시야 예언이 흐르고 있었다. 약속의 말씀이 숨겨 있었다. 실미도라는 영화가 있는데, 영화만 놓고 볼 때, 영적으로 보면, 조중사가 모세이고, 중대장이 예수님이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는데, 성경을 볼 때, 죄인을 구원하는 방식은, 대체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고, 복음을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것을 알 수가 없다. 누가 사람 속을 알리요. 궁예도 모른다. 오직 성령께서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도록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