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투표는 권리이자 의무다 —국방의 의무와 같은 자리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2026-10-15
며칠 전 한 분에게 투표를 의무로 하자고 말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투표하지 않을 권리도 있지 않으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국가가 억지로 등을 떠밀지 않을 자유는 분명히 있다.
다만 그 자유가 가리키는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도 내 선택을 보이지 않을 자유, 무엇을 찍을지 간섭받지 않을 자유. 이것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투표장에 아예 가지 않는 것은 다르다. 내 몫으로 맡겨진 판단을 내놓지 않은 채, 남이 내린 판단의 결과만 함께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금도 법도 파병도 투표하지 않은 사람을 비켜 가지 않는다.
그래서 투표장에 가서 백지를 내는 기권과, 아예 가지 않는 불참은 같지 않다. 기권은 어느 쪽도 아니라는 판단을 남긴다. 불참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헌법은 이미 그 형식을 써두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4대 의무는 납세 국방 교육 근로다. 그리고 투표는 헌법 제24조에서 권리로만 적혀 있다.
그런데 헌법은 권리와 의무를 서로 밀어내는 말로 쓰지 않았다.
제32조를 보면 분명하다. 제1항은 근로의 권리를 정하고, 제2항은 근로의 의무를 정한다. 같은 조문 안에 둘이 나란히 있다. 제31조의 교육도 권리와 의무가 한 조문에 담겨 있다. 다만 그쪽은 보호자가 자녀에게 지는 의무라 구조가 조금 다르다.
그리고 근로의 의무에는 처벌이 없다.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원칙과 부딪히기 때문에, 법으로 강제하는 의무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향하는 의무로 본다는 것이 통설이다.
의무에도 층위가 있다는 뜻이다. 반드시 벌금과 처벌이 따라야 의무인 것은 아니다.
국방의 의무와 같은 자리
투표를 어디에 놓을지는 국방의 의무와 나란히 두어보면 분명해진다.
둘은 구조가 같다. 내가 복무하지 않아도 나라가 지켜지면 나도 보호받고, 무너지면 나도 함께 무너진다. 투표도 그렇다. 내가 빠져도 결정은 내려지고, 그 결과는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부담의 크기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국방은 몇 년의 시간을 요구한다. 때로는 목숨까지 요구한다. 투표는 몇 년에 몇 번, 한 번에 몇십 분이다.
더 무거운 것을 의무로 받아들인 공동체가 더 가벼운 것을 권리로만 두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국방의 의무는 지금 남성에게만 실물로 부과된다. 그래서 늘 형평의 논란이 따라다닌다. 투표는 다르다.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해당된다. 성별도 직업도 재산도 가리지 않는다. 의무로 삼기에 이보다 공평한 것이 없다. 전 국민이 같은 무게로 지는 유일한 의무가 될 수 있다.
세계는 이미 하고 있다
스물여섯 나라가 이 제도를 두고 있다. 몇 곳만 보자.
벨기에는 1893년에 도입한 가장 오래된 나라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제재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관위가 불참자 명단을 법원에 넘겨도 법원은 보관만 하다 폐기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2024년 총선 투표율은 88퍼센트를 넘었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였는가. 처벌이 아니다. 이것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일이라는 합의가 움직인 것이다. 앞서 말한 근로의 의무와 같은 층위다.
칠레는 되돌아온 사례다. 2012년에 자율투표로 바꿨다가 투표율이 떨어졌고, 2022년 헌법 개정으로 의무투표를 다시 도입했다. '없애봤더니 아니더라'는 실험 결과인 셈이다. 그것도 헌법을 고쳐서 되돌렸다.
브라질은 설계의 유연함을 보여준다. 18세부터 70세까지는 의무이고, 16~17세와 70세 이상은 선택이다. 전부 강제하느냐 마느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호주는 1924년에 법으로 정했다. 투표장에 가지 않을 경우 벌금은 우리 돈 2만 원이 되지 않는다. 처벌이라기보다 이것이 의무임을 알리는 표지에 가깝다.
룩셈부르크는 2023년에 87퍼센트, 볼리비아는 2020년에 88퍼센트였다. 볼리비아와 페루는 오후 네 시, 브라질은 다섯 시면 투표가 마감되는데도 그렇다.
다만 이 나라들을 이상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무효표가 늘어난다는 지적이 있고, 그 무효표가 교육과 소득이 낮은 층에 몰린다는 연구도 있다. 투표율이 오르는 것과 대표성이 고르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그래서 목표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의무투표가 정치의 질을 높인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특정 계층의 목소리만 과대 대표되는 편향은 줄인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처벌 없는 의무라면 실효가 있겠느냐는 물음이 남는다. 순서가 있다.
먼저 국가가 조건을 갖춘다. 선거일을 쉬는 날로 하고, 일하는 사람과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이 빠지지 않도록 사전투표와 우편투표를 넓힌다. 조건을 갖추기 전의 의무는 의무가 아니라 전가다.
아테네가 그것을 알았다. 다만 뒤늦게 알았다. 살라미스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난 기원전 4세기 초부터, 민회에 참석한 시민에게 수당을 지급했다. 가난한 시민이 하루 벌이를 포기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모자란 일이 있었다. 투표를 개인의 선택적 권리로 보면 행정은 예상 투표율만큼만 준비한다. 공적 기능으로 보면 모든 이가 온다고 상정하고 준비해야 하고, 남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당연한 여유가 된다. 투표를 무엇으로 보느냐가 이미 선거행정의 설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다음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일임을 법으로 밝히는 것'. 호주의 2만 원이 하는 일이 그것이고, 벨기에는 그마저 집행하지 않고도 작동한다.
마지막이 정치의 몫이다. 사표가 줄고 내 표가 결과를 바꾸는 선거제도가 함께 가야 한다. 그리고 의무만 지우고 정치가 그대로라면 그것은 절반의 개혁이다.
투표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 기권할 권리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더 무거운 의무를 이미 오래 져왔다. 국방의 짐을 수십 년 동안 졌고, 두 번의 광장에서 배가 좌초하기 직전에 스스로 키를 되찾았다. 그보다 훨씬 가벼운 이 의무를, 모든 국민이 똑같이 지는 이 의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