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태종실록]
[1. 제2차 왕자의 난과 방원의 세제 책봉]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하였고, 이 일로 방원은 세제의 자리를 확보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과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일파에게 유리하게 변화되어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세력이 방원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협요소였다. 특히 넷째 형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때문에 방원은 이들 형제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하던 병권집중운동을 이어받아 다른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 쪽으로 흐르자 방간은 시기심과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그 말의 진위도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한 장본인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피봉되지 못했음을 불평하다가 도리어 죽주(영동)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평소 방원에 대해 품고 있던 원망을 이 기회에 풀어보고자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를 한 것이다. 방간은 박포의 말을 확인하지도 않고 분기탱천하여 사병을 동원해 방원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방간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형제들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방원을 지원하고 있었다. 개성 한복판에서 형제간에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방원의 승리였다. 싸움에서 패배한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당하고, 박포는 붙잡혀 사형당하는 것으로 방간의 난은 막을 내렸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 대한 반대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결과적으로 방간의 난은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조정 내의 방원 세력은 방원의 왕위 계승권 확보를 위해 전력을 쏟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세력 판도는 물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권력이 방원에게 집중되면서 왕권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간의 난이 수포로 돌아간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간언 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방원은 오히려 방간이 병을 당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치세 때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했다. 적어도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방원의 강한 형제애의발로였을 것이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2. 태종의 등극과 조선의 개혁 작업](1367-1422, 재위 기간 1400년 11월-1418년 8월, 17년 10개월)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 정벌론이 대두 되었다. 정도전은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한 요동 정벌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병이 혁파되어야 하며, 병권이 나라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방원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사병이 혁파될 위기에 놓이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방석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형제들간의 권력 관계를 고려하여 세자 추대를 사양하였으며, 단지 정안군으로 봉해지면서 의흥삼군부 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 1 등에 논정되었으며,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록되었다. 그리고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제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 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한편으로는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고려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 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세제 시절에 이미 손댄 바 있던 노비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태종은 교육과 과거 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었다. 개국 당시 유학자들은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이는 대명외교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겼으며,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두었다. 과거 제도에서도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 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종교 정책에서는 숭유억불이라는 개국 이념에 따라 불교와 도참사상을 억제했다. 그 일환으로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시켰고 연등제, 초파일제 등을 폐지시켰다. 한편 유교를 장려하여 문묘 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하였다. 이와 함께 단군,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키는 등 개인적인 자연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 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대외 정책 또한 안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켰다. 왜인에 대해서는 왜인범죄 논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시키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했다.
이 밖에도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선원록을 정비하여 비 태조계를 왕위계승에서 제외시켰고,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제 시절부터 빠르게 추진하던 이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1418년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 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절제 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그는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1만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정비 원경왕후를 비롯 12명의 아내에게서 12남 17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헌릉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소재하고 있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함께 조성되어있는 쌍릉이다.
[3. 태종의 가족들]
태종은 총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정비 원경왕후 민씨가 4남 4녀를, 효빈 김씨 1남, 신빈 신씨 3남 6녀, 선빈 안씨 1남, 의빈 권씨 1녀, 소빈 노씨가 1녀를 두었다. 또한숙의 최씨가 1남을, 안씨 1남 2녀, 최씨 1남, 김씨 1녀, 이씨 1녀, 다른 후궁이 1녀를 두었다.
표: 제3대 태종 가계도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방원, 정안대군)은, 1367년에 태어나 1422년에 세상을 떴다. 재위기간은 1400년 11월부터 1418년 8월까지로 17년 10개월간이다. 아래에 태종의 가계도를 약술한다.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의 제3대 왕이 되었으며, 부인 12명에게서12남 17녀의 자녀를 두었다.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4남 4녀를 두었는데, 양녕대군, 효령대군, 조선의 제4대 왕인세종(충녕대군), 성녕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가 그들이다. 효빈 김씨에게서 1남 경녕군을 두었으며, 신빈 신씨에게서 성녕군, 온녕군, 근녕군, 정신옹주,정정옹주, 숙정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 등 3남 6녀를 두었다. 또한 선빈 안씨에게서1남 익녕군을, 의빈 권씨에게서 1녀 정혜옹주를, 소빈 노씨에게서 1녀 숙혜옹주를, 숙의 최씨에게서 1남 희령군을 두었으며, 안씨에게서 혜령군, 소숙옹주, 경신옹주 등 1남 2녀를, 최씨에게서 1남 후령군을, 김씨에게서 1녀 숙안옹주를, 이씨에게서 1녀 숙순옹주를, 다른 후궁에게서 1녀 소선옹주를 두었다.
원경왕후 민씨(1365-1420)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년(우왕 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1400년 2월에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이 해 11월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장비를 모두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그 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남아 있다.태종의 아들은 총 12명으로 정비 소생 4명, 후궁 소생 8명이 있었다.정비 소생은 장남 양녕을 비롯해서 효령, 충녕, 성녕 등이었고, 후궁 소생으로는 효빈김씨의 경녕, 신빈 신씨의 성녕, 온녕, 근녕 형제들과 선빈 안씨의 익녕, 숙의 최씨의 희령,안씨의 혜령, 최씨의 후령 등이 있었다.이 중에서도 양녕, 효령, 충녕 등 정비 소생의 아들은 왕위 계승과 관련한 일화들을 남겨후대 사람들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으며, 넷째인 성녕은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세 때홍역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빈 신씨의 첫 번째 소생의 이름을 성녕으로 한 것은아마 홍역으로 죽은 넷째 아들에 대한 태종의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아래에 태종의 아들 중 대표적인 인물인 양녕과 효령의 삶을 약술한다. 충녕은 세종 편에서자세히 다루고 있다.
양녕대군(1394-1462)
1394년(태조 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주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 되긴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세종과는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가 있었지만 세종에게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명을 누리다가 1462년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다.
효령대군(1396-1486)
효령은 1396년(태조 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 6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1407년(태종8년)에 효령군에 봉해졌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이후 출가한 뒤에는 불도에 전념하여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였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기도 했다.1465년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하기도 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 존친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다.
[4. 태종시대의 주요 5대 사건]
민무구 형제의 옥
1407년 7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1406년 8월에 태종이 세자 양녕에게 선위(왕위를 넘겨줌)할뜻을 표명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네 차례의 선위 파동을 일으키는데, 제1차 선위 파동이 민무구 형제의 옥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오빠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그 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의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옥이 발생한 후 이틀만에 태종은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했으며, 19일 후에는 공신녹권을 빼앗고, 4개월 후에 직첩을 수취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에 유배시켰다. 태종은 옥이 일어난 지 2개월만에 민무구 형제의 죄과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지만 정비 민씨와 장인 민제, 장모 송씨의 면목을 생각해 가급적 생명만은 보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씨 형제는 유배 중에도 대간 등의 논핵을 가중시킬 행동을 자주 하다가 결국 1413년자진하였다.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형제도 사사(죽일 죄인을 예우하여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는 것)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으로써 민씨 일가의 옥사는 종결되었다.
육조직계제 단행
태종은 세제 시절부터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육조직계제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의정부를 설치하면서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한 이 조치는 1414년에야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태종은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나눠 관장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1414년(태종 14년) 태종은 마침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다. 따라서 그때까지 '왕-의정부-육조'체제이던 국정이 '왕-육조'로 전환되면서 왕권과 중앙 집권이 크게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거북선 개발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태종 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 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책이었을 것이다.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떠 설치되었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 간 이유는 우선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 5년)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이후로 한양은 5백 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태종 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했고, 환자 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또한 십학을 설치하고 사부학당을 건립했으며,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고려사'를 개수했다.
[5. '태종실록' 편찬 경위]
'태종실록'은 총 36권 16책으로 이뤄져 있으며, 1401년부터 1418년 8월까지 17년 8개월 동안 이루어진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원명은'태종공정대왕실록'이며 다른 실록과 마찬가지로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고, 당시 편찬했던 것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전주사고본이다.'태종실록'은 1422년 태종이 죽자 그 이듬해 12월 변계량과 윤회의 건의를 받아들여'공정왕실록'과 함께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편찬 작업은 1422년 3월에 시작하여 1431년 완성될 때까지 9년간 계속되었다. 실록 편찬은 변계량, 윤회, 신장 등의 책임 아래 이뤄졌는데 동부 연희방의 덕흥사가 작업장이었다. 작업이 궁 안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궁궐 밖 덕흥사에서 이뤄진 것은 감수관변계량이 병약하여 매일같이 춘추관으로 출퇴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종실록'은 1426년 '공정왕실록'이 편찬된 뒤에도 5년이나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그리고 편찬 도중 1430년 4월 변계량이 죽자 편찬사무소를 의정부로 옮기고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맹사성이 윤회, 신장 등과 함께 편찬 책임을 맡아 1년 뒤인 1431년 3월에 완성했다. 그러나 그 뒤 변계량이 지은 헌릉(태종의 능) 비문 가운데 양대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있자 세종은 비문과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던 '태조실록', '공정왕실록'등도 개수하도록 지시했다. 실록 개수 작업은 1442년, 신개의 감수 아래 권제, 안지 등의 춘추관 관료와 집현전 학사 남수문 등이 주관하였다.'태종실록'은 1401년 1월부터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태종이 즉위한 1400년 11월부터 그 해말까지는 '공정왕실록'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태종시대의 세계 약사
태종시대의 세계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기운이다. 1402년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총장이 된 후스는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시도하려다 발각되어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쫓겨난다. 이후 다시 보헤미아 공화국에서도 파문된 후스는 1412년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선다. 이 때문에 그는 파문당하고, 1414년 콘스탄츠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받고 이듬해 화형당한다. 이 사건 이후 1417년에 교황 베네딕트 13세가 폐위되고 마르틴 5세가 즉위해 5개조의 개혁조령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기운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