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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 소개
다음의 사진은 프랑스의 학자인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이 찍은 사진으로,
촬영 시기는 1890년에서 1892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그림 1. 모리스 꾸랑의 활쏘기 사진,
Tireurs à l’arc dans le Vieu Palais des Mûriers à Séoul. (서울의 뽕나무 고궁에서 활쏘기를 하는 궁사들) >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 『모리스 꾸랑의 서울의 추억』, 서울역사박물관, 2010년.
다음의 <그림 2>의 사진은 같은 사진으로서,
프랑스 BnF Gallica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은 것 입니다.
<그림 2. 모리스 꾸랑의 『Souvenir de Séoul, Corée : 1900 』에 실린 사진>
이곳에는 모리스 꾸랑의 『Souvenir de Séoul, Corée : 1900 』 프랑스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 사진 바로가기 : 모리스 꾸랑,『Souvenir de Séoul, Corée : 1900 』 44페이지, http://gallica.bnf.fr/m/ark:/12148/bpt6k54937409/f44
2. 모리스 꾸랑에 대하여
모리스 꾸랑은 1900년대의 대표적인 동양학자로서,
통역관으로 조선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 모리스 꾸랑 : 위키백과, 『모리스 쿠랑』, http://ko.wikipedia.org/wiki/%EB%AA%A8%EB%A6%AC%EC%8A%A4_%EC%BF%A0%EB%9E%91
직지심경을 서양에 소개한 학자이며,
광개토대왕비문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1) 모리스 꾸랑의 일생
1865년 10월 12일 파리 프랑크랭 거리에서 태어남.
1883년 대학 자격 시험 통과, 파리 대학 법과 입학
1885년 대학 학업과 동시에 동양어학교에 등록, 중국어와 일본어 공부 시작.
1886년 파리대학 법학학사 학위.
1888년 동양어학교 중국어.일본어과 졸업.
1888년 9월부터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관에서 통역 실습생으로 근무.
1890년 5월 23일 서울 프랑스 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속, 빅또르 꼴랭 쁠랑시 공사를 보좌.
1892년 2월 20일 북경으로 전속 발령, 3월 10일 21개월의 조선 체류를 마치고 떠나다.
1892년 10월 중국을 떠나 귀국.
1893년 1월 30일 결혼, 11월 일본 동경 공사관 통역관으로 발령.
1894~1896년 『한국서지』 3권을 출판하고 학술원상 수상.
1895년 6월 중국 텐진 프랑스 영사관으로 발령.
1895년 12월 23일 대리 근무를 마치고 정식 통역관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이 직업을 포기하고 학문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프랑스로 귀국.
1897년 2월 4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 서적의 새로운 목록 작성 작업 담담.
1897~1899년 병이 든 에두아르 샤반느 대신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강의.
1898년 논문 『고구려 왕국의 한문 비석』 발표.
1899년 동양어학교 교수 채용 경쟁에서 실패.
1900년 5월 1일 문교성에서 리용대학교 문과대학 강사로 임명, 이후 일생을 이 대학에 봉직함.
1913년 2월 1일 박사학위 논문 발표, 국가박사 학위를 받고 정교수가 되다. 48세.
1919년 학교 사절로 일본에 6주 동안 체류, 이 때 한국을 방문하여 평양, 서울, 대구 등지에서 머무르다.
1919년 귀국 이후 리용 중법대학에 설립되면서 이사, 학장대리를 역임하고 1927년 실무직에서 물러나다.
1935년 8월 18일 깔뤼르에서 영면에 잠들다.
☞ 자료의 출처 : 서길수, 『한말 유럽 학자의 고구려 연구, 모리스 꾸앙과 에두아르 샤반느』, 여유당출판사, 2007년.
☞ 국립중앙도서관 도서정보 : 『한말 유럽 학자의 고구려 연구, 모리스 꾸앙과 에두아르 샤반느』, http://www.nl.go.kr/nl/search/SearchDetail.nl?category_code=ct&service=KOLIS&vdkvgwkey=77621067&colltype=DAN_HOLD&place_code_info=100&place_name_info=%EC%84%9C%EA%B3%A0%EC%9E%90%EB%A3%8C%EC%8B%A0%EC%B2%AD%EB%8C%80%281%EC%B8%B5%29&manage_code=MA&shape_code=B&refLoc=null&category=&srchFlag=Y&h_kwd=%ED%95%9C%EB%A7%90+%EC%9C%A0%EB%9F%BD+%ED%95%99%EC%9E%90%EC%9D%98+%EA%B3%A0%EA%B5%AC%EB%A0%A4+%EC%97%B0%EA%B5%AC&lic_yn=N&mat_code=GM
2) 모리스 꾸랑의 조선 관련 저술 목록
다음 <그림 3>는 모리스 꾸랑의 조선 관련 저술을 간략히 정리한 것을 캡춰한 것입니다.
<그림 3. 모리스 꾸랑의 조선 관련 저술>
자료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길수, 『한말 유럽 학자의 고구려 연구, 모리스 꾸앙과 에두아르 샤반느』, 여유당출판사, 2007년.
<그림 3>에서 알 수 있듯이, 모리스 꾸랑의 연구는 광범위하여 문화와 역사 전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치, 외교, 서지학, 역사, 문화, 종교, 화폐, 노래와 춤과 같이 다양하였던 것이지요.
3) 광개토대왕비문 연구
모리스 꾸랑은 1893년 11월 부터 1895년 6월까지 일본 동경 공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을 보면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림 4. 모리스 꾸랑의 광개토대왕 비문 연구 논문>
다음의 <그림 5>은 그의 석문 연구를 비교한 것의 일부 입니다.
<그림 5. 모리스 꾸랑의 석문과 다른 석문의 비교>
3. 사진의 분석
1) 촬영시기
다음의 <그림 6>는 촬영 시기를 분석하기 위한 비교 그림입니다.
<그림 6. 촬영시기 추정>
모리스 꾸랑은 1890년 5월 23일 부터 1892년 2월 20일 까지 서울 프랑스 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림 1>의 사진은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한국관이 세워진 것을 기념하며 소개된 것입니다.
모리스 꾸랑이 1919년에 조선을 다시 방문했지만, 이 때 찍은 것은 아닌 셈이죠.
<그림 6>에서 보면 갓을 쓰고 있는 2명은 방한 보호대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의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털모자와 털외투를 입고 있구요.
추운 날씨인 것을 감안하면 1890년 가을에서 1891년 가을 까지의 사진으로 추정됩니다.
<그림 7>의 사진을 보면, 나뭇잎들의 모양이 큰 것을 윤곽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와 위의 잡초들도 많이 자라있는 상태이구요.
<그림 7. 사진 속 나무와 잡초>
<그림 7>에서 이 사진이 가을에 찍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봄이었다면 나뭇 잎사귀들이 아직 자라지 않을 것이고요,
눈이 많이 내렸던 조선 후기의 상황에서 해를 넘긴 잡초들이 멀쩡히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의 촬영 시기가 가을이었다면,
부임한지 1년도 안된 1890년 보다는,
1891년 늦가을 정도가 촬영시기로 타당하다고 추정됩니다.
2) 사진의 반전 여부
<그림 8>의 복장에서 우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반전되지 않은 것 입니다.
<그림 8. 복장의 우임>
국가기록원에서는 민속놀이의 남성놀이 편에 활쏘기 사진으로 반전된 사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날 필름을 게재하다 보면 흔히 저지르는 실수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림 9. 반전된 국가기록원의 활쏘기 사진>
☞ 국가기록원 활쏘기 사진 바로가기 : 사진 대한민국 → 민속놀이 → 남성놀이, http://theme.archives.go.kr/next/photo/folkPlay03List.do
3) 궁사의 숫자
저자도 궁사가 7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좌궁 3명에 우궁 4명으로요.
<그림 10. 갓을 쓴 궁사>
<그림 10>에서 갓을 쓴 궁사의 허리 춤에 있는 화살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화살촉이 앞으로 향하게 매었지요.
이 궁사 분을 좌궁이라고 추정하면,
좌궁 4명에 우궁 4명으로 궁사는 모두 8명이 됩니다.
갓을 쓰고 활을 쏘았다는 것은 활대를 상당히 눕혀서 쏘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림 1>의 사진에서 만작을 하고 있는 궁사도 활을 많이 뉘였구요.
갓을 쓰고 있는 궁사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단발령의 시행과 맞물려서 이 사진이 오래된 것이라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갓을 안 쓴 나머지 궁사들도 망건을 이마에 두루고 탕건을 썼습니다.
갓이 혹시나 망가질까봐 대청에 벗어 두었을까요?
4) 활대의 두께
<그림 11>의 사진에서 당시에는 각궁의 활대가 지금보다 두꺼웠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림 11. 활대의 두께>
<그림 11>의 사진 속에 만작을 하고 있는 궁사의 검지 손가락을 확인해 보십시요.
확실하게 검지 손가락 마디의 굵기에 비해 활대가 2배 이상 두껍게 보입니다.
5) 촬영 장소의 추정
<그림 12>의 사진에서 보면 건물이 몇 년간 방치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윗층에서 아래층으로 떨어져 내린 기와, 기와 위의 잡초들, 마당의 돌과 낙엽들,
화면 우측의 연의 얼레 같은 기구, 모서리가 깨진 벽 등등.
<그림 12. 방치된 지 몇 년 된 듯한 활터>
만작을 하고 거궁을 하고 있는 궁사의 겨냥점을 추측하면, 과녁은 100보 밖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층 누각이 많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더라고, 건물의 규모는 상당합니다.
정확한 추정은 힘들지만, 최소한 군 병영이거나 궁궐 안의 건물 정도로 추정됩니다.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 했을 때,
그는 조선의 전통 활쏘기를 보고자 했고 스스로도 화살 1발을 과녁에 맞추었지요.
☞ 관련사항 : 디지털 국궁신문,『근대 활쏘기의 아버지 성문영』, 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88&msection=2&ssection=23&page=1
이 때에 시연을 보인 장소가 중일각(中日閣)이었습니다.
경복궁 후원에 위치했던 정자로서,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있던 누각이지요.
따라서 <그림 1>의 사진의 활터는 중일각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무과를 3일 동안 치루었는데,
가운데가 되는 2일 차에는 경복궁 뒷의 활터에서 시사를 했다고 합니다.
정자의 이름이 중일각(中日閣)이라고 불린 사연이 되겠네요.
조선일보 1938년 1월 3일자에 실린 성문영 공의 증언에 따르면,
황학정은 경희궁 북쪽 기슭에 새로 지은 정자입니다.
☞ 관련사항 보기 : 화랑정,『황학정 창건의 역사적 배경』, http://durl.me/8gsq5b
중일각은 경복궁 후원에 있었기에,
나중에 지어진 궁궐 내의 황학정은 아닌 것 입니다.
고종실록에는 중일각으로 검색하면 11건이 나오며,
중일각에서 무과의 시취를 시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중일각 검색 :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za_12805008_003
고종 28년 1891년 5월의 기록이 마지막으로,
<그림 1> 사진의 촬영 연대로 추정되는 1891년과 겹칩니다.
사진을 촬영한 또 다른 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경희궁에 있던 활터인 경운정(慶雲亭)입니다.
당시에 경희궁에는 뽕나무가 많아서,
당시의 서양인들은 경희궁을 뽕나무 궁이라고 불렀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림 1> 사진의 하단 설명에서도,
뽕나무의(des Mûriers) 고궁에서(dans le Vieu Palais),
활쏘기를 하는(à l’arc) 궁사들(Tireurs)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 '경운정'으로 검색을 해봐도,
한 건도 검색되지는 않았습니다.
6) 활쏘기 사진이 희귀한 이유
당시에 활쏘기는 우리의 일상이었습니다.
일상의 일이기에 특이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현대의 일상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그것을 디카로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구한말 민속 사진을 많이 남긴『Corea e Coreani』와 같은 책에서도,
활쏘기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세계적으로는 맥심기관총의 개발이 벌써 끝난 이 시기에,
활쏘기에 목을 메는 조선사람들의 활쏘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진정 무리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년 후인 1894년 동학 혁명 때에도,
캐틀링 기계식 기관총이 동학 혁명군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1897년 창설된 조선제국군은 캐틀링 기관총을 20정,
맥심기관총을 6정 보유했었다고 하구요.
4. 시사점
<그림 1>의 사진은 국가기록원에서도 소개될 만큼,
한국의 활쏘기를 알리는 대표적인 사진입니다.
저자는 본고에서 촬영 연대를 1891년으로 추정했습니다.
이것은 1885년 조지 포크의 활쏘기 사진 2점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것 입니다.
☞ 바로가기 : 『Foulk의 활쏘기 사진 2점』, http://blog.daum.net/woo-139/81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의 와중에서,
우리의 전통 활쏘기는 잊혀져 갔었습니다.
<그림 1>의 사진 촬영 시기인 1891년이면,
활쏘기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받기 시작한 시기인 셈이 됩니다.
1899년 독일 하인리히 황태자의 방문과 더불어,
우리 활쏘기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며 황학정이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구요.
옛날 활쏘기 사진이 희귀한 현실에서,
이러한 사진에 대한 촬영자와 촬영시기 등의 분석은
우리 활쏘기의 옛 모습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