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이양중선생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토요저널>의 요청으로 ‘우리고장 문화유적 답사기’를 연재 집필하면서부터다. 2000년 2월 22일자 <토요저널>에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연구한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2년 강동구지를 편찬하면서 『江東區誌』인물편에 이양중선생을 기술하였으며, 2010년 강동문화원에서 발간한 『강동의 역사와 문화』에 이양중선생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2011년 『賞鶴學術會誌』‘구암서원 연구의 기초’ 논문에 같은 내용을 수록하였다.
2004년부터 강동문인회에서는 『강동문학』에 강동을 빛낸 역사인물을 한 분씩 선정하여 특집으로 재조명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2010년에 이양중 선생을 선정하였으나 석탄공종회의 사정으로 결열되었다가 2013년도 강동의 역사인물로 재조명하게 되었다.
2012년 3월 27일 석탄공종회를 방문하였더니 이종덕(李鍾德) 석탄공종회 회장이 “우리 조상을 강동문인들이 재조명하여 주신다니 이보다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면서 석탄공의 묘소 고유제와 추모시 낭송회를 개최하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적극 협조하겠다 하였다.
<사진3. 고덕산 정상 간판>
그러면서 고덕산 93번지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고덕산에 얽힌 이야기’(이양중 선생과 이시무 정려문) 입간판이 없어진 것을 개탄하면서 다시 설치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고덕산 93번 정상은 사유지여서 불가하고 오히려 돌여울(石灘)에서 가까운 ‘고덕생태공원’에 돌비(碑石)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해 주었다. 왜냐하면 이양중 선생께서 돌여울 근처에서 태종과 만나 회포를 풀었고, 호(號)도 석탄(石灘)이라 짓지 아니하였는가.
2012년 3월 31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무갑산 기슭에 있는 이양중 선생 묘소를 두 번째 찾아보았다. 12년 전에는 후손인 이종완씨의 안내로 쉽게 찾아보았는데 이번에는 혼자서 찾느라고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한적하던 신월리가 신축건물과 공장건물로 가득 차 있고 새로운 길이 생겨 있어 이 골목 저 골목을 승용차로 돌아다니다가 신도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신도비 근처에 고덕재(高德齋)가 있고 산기슭에 묘소가 있다. 성묘를 마친 후 고덕재 옆에 살고 있는 종손인 이창희(李昌熙)씨 집을 찾아가 의문점을 묻고 싶었는데 이창희씨가 출타하고 없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이양중 선생은 문집이나 다른 자료가 없음이 안타까웠다. 돌여울이 하일동(지금의 강일동)에 위치해 있고 하일동 평촌(벌말)에 그의 후손 광주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돌여울(石灘) 건너편 가까운 곳에 왕숙천(王宿灘)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양중 선생은 고덕산 기슭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묘소는 하남시 입구 수리골에 있었는데 도시화가 되면서 지금의 초월면 신월리 무갑산으로 이장하였다.
2. 고려 충절신(忠節臣) 이양중선생
<사진4. 이양중 선생 묘소>
이양중은 고려조 말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참의에 올랐으며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서견(徐甄), 이방원(李芳遠 : 太宗)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우왕은 요동 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회의를 하였다. 이 때 이양중은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이니 요동을 침이 불가라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 때 조민수(曺敏修)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이양중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이태조 혁명초에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하(지금의 고덕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으니 그 글 뜻이 매우 강개울분하여 보는 사람이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다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이양중의 집으로 왔다. 서견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 이런 변을 안 볼 것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그 무렵 태조가 이양중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양중은 고려조 때 수절 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하니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이양중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이양중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 버렸다. 태종은 이양중에게 한성판윤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친히 남한산 아래 돌여울에 와서 만나 보았다. 이양중은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렸다. 태종은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여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酬酌)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嚴子陵)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漢)나라 왕도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는가?” 하니 이양중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오.”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이양중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신하들이 이양중을 탄핵하되 “이양중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 가장 큽니다,”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맞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 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이양중을 헐뜯지 못하였다.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이양중에게 보냈다. 그 글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천년(富春山千年)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 하리로다.’ 태종은 즉시 이양중의 큰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司?主簿)를 특배하였다.
동생 이양몽(李養蒙)은 벼슬이 형조판서였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으로 관직을 버리고 남한산 아래 수리골(현 하남시 덕풍동))로 은거하였다가 태종이 이양중을 찾아오자 원적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양중은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묘는 수리골에서 광주시 초월면 무갑산으로 1989년에 이장하였다. 고덕재(高德齋)와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찬(撰)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公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과 같고
公의 높은 절의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漢나라 같이 창성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나는 기러기는
어찌할 수 없구나. 성군(聖君)의 도량이 아니였다.
公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드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3. 석탄 이양중선생 묘비문(石灘公(諱養中)墓碑文)
<사진5. 신도비>
고려조 때 통정대부 형조좌참의 이공(李公) 휘는 양중이다. 이태조 혁명 당시 신하되기를 거절하고 광주 남한산하에 은퇴하여 부르는 영에 응하지 않고 귀양을 갈지라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평소 때의 우의로 특별히 가선대부 한성판윤 직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태종이 오히려 광주에 가서 옛 정을 베풀거늘 공이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리니 태종이 기꺼이 놀다가 환궁할 뿐이요. 마침내 그 굳은 의지는 돌이키지 못하고 다만 석탄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관직을 내려 장려하고 석탄에게는 궁중선물과 안부를 자주하나 다만 시(詩)를 올려 사례하니 무릇 석탄의 굳은 지조는 옛날 백의숙제 뜻으로 엄자릉의 자취를 따르니 백세하(百世下)에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고 태종의 융숭한 은혜 또한 옛날 광무황제에 지지 않으니 그 세교(世敎)에 관계됨이 심히 중한지라, 태사씨(太史氏)가 사책(史策)에 자세히 적어 자릉(子陵)과 더불어 무궁하게 아니 전하겠는가.
공의 손자 찬성(贊成) 한산군(漢山君)이 자손이 오래되면 선조의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막내아들 부사 성언(誠彦)과 손자 현감 망(網)을 시켜 그 친구 의성 김안국(金安國)에게 부탁하여 공의 사적을 대강 적어 돌에 새겨 뒷사람에게 끼치게 하니 내가 이르되 대절(大節)이 이같으니 다른 것은 대게 추상할 수 있다. 가범(家範)을 지켜 관작이 혁혁하고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사백여명이 되니 이 어찌 하늘이 공의 덕을 보답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因)해 명(銘)하여 가로되,
공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松柏)과 같고 높은 절의(節義)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주(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한(漢)나라 같이 창성(昌盛)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날으는 기러기는 마침내 어찌 할 수 없구나. 성군의 도량이 아니었나 공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嚴子陵)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기리 끼쳐주어 떨어뜨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석탄공은 고려조 말기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이색과 정몽주 길재 서견 및 태종과 형제의 의를 맺고 고려 공민왕을 섬기다가 우왕 때에 요동 땅을 치려하거늘 석탄이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 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로다. 요동을 침이 불가하다고 극히 반대하되 왕이 듣지 않으니 때마침 조민수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석탄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내었다. 이태조 혁명초에 석탄은 이미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었다. 그 글 뜻이 극히 강개분울하여 보는 사람으로서는 슬픔을 참기 어렵더라. 석탄은 항시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여 어찌하리요 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다가 문득 삼각산을 바라보며 탄식하되 간신 조민수여 나의 한이로다.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평상을 치니 손바닥이 다 터졌더라.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석탄의 집으로 왔다. 서견(徐甄)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서 이런 변을 안볼 것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길재는 이미 산중으로 갔으니 과연 선각자로다. 즉시 이색은 오대산으로 가고 서견은 금천장으로 도망하였다.
그 무렵에 태조가 석탄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모(이양중)는 고려조 때 수절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합니다.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듣고 끝내 석탄을 부르지 않다가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석탄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석탄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버렸다.
태종은 석탄을 불러도 병을 핑계삼아 안 올 것을 알고 친히 남한산 아래로 와서 석탄을 만나보고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하며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漢)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은가? 하니 석탄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요. 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지낸 일을 말하였다. 태종이 석탄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대신(臺臣)들이 석탄을 탄핵하되 석탄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가 가장 크다 하였다.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석탄을 헐뜯지 못하더라.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뒤에 친필로 시를 써서 석탄에게 보내었다. 그 글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富春山)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 시키지 못하리로다’ 했더라. 즉시 석탄의 큰 아들 우생에게 사온주부(司?主簿)를 특배하였다.
석탄의 동생 이름은 양몽(養蒙)이요 벼슬은 판서였는데 명석한 분이다. 먼저 고려의 국운이 다 됨을 알고 남한산장으로 도피하여 농부가 되었다가 이조 혁명 후에 왕촉전(王蜀傳)을 지어 석탄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형은 정몽주와 같이 고려조를 섬기다가 정몽주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은 아직 생명을 보존하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하였다.
석탄공 종중이 이날부터 만권 서책을 다 한강에 던지고 의관을 벗어 불사르고 영영 산에서 나오지 않고 남녀 혼인을 다 전조 대신들과 하고 이조 대신들과는 절대 상대하지 않았다. 지금 광주 사람들은 석탄 형제의 굳은 절의를 옛날 백이와 숙제에 비하고 경기도 광주 구암에 서원을 짓고 둔촌선생과 석탄선생을 봉향(奉享)하였다.
5. 석탄공 행장(行狀)
<사진7. 고덕재>
석탄공께서는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벼슬에 오르셨으며 고려조의 강직한 충절신으로 명성이 높으셨다.
당시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가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하에서 요동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궁중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이때 석탄공께서는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강대해져서 소장지변(蕭牆之變)이 일어날 우려가 있음으로 요동의 정벌은 불가하다고 직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 하였다.
그 무렵 석탄공께서는 길재, 이색, 서견, 정몽주, 이방원과 더불어 6결의형제를 맺고 지내오던 중이었다. 얼마후 공의 예견과 같이 대신들 사이에 알륵이 극심하더니 드디어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석탄공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당시 고려조 칠십이현(七十二賢)의 충절신들과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세상과는 일체 연락을 끊고 살았다.
그 후 남한산하로 퇴거한 석탄공에게 이방원은 수차에 걸쳐 조선에 협조할 것을 간청해 왔으나 공께서는 응하지 않았다. 후일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공에게 한성판윤으로 보위할 것을 전하러 왔으나 공께서는 사양하시고 나오지 않았다. 태종은 직접 남한산하로 공을 찾아 갔는데 공은 야복(野服)에 거문고를 들고 왕을 맞이하였으며 옛 벗의 예로 대접하였다. 이때 태종은 시를 지어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나 한(漢)나라의 왕도정치도 모두 우의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 하니 공(公) 또한 시로써 답하기를 옛나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의 수작(酬酌)이 있으리오 하였다. 왕도 공의 굳은 절개를 이해하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다.
환궁한 뒤에 대신들은 석탄공을 탄핵하여 간하기를 “일개 필부로써 군주의 권위를 무시한 죄과는 가장 크옵니다” 하며 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태종이 대노하며 가로되 “무릎을 마주하며 술을 함께 마시는 것은 우정의 두터움이다. 자고로 왕자에게는 이러한 굳은 친우가 있었느니라”고 말씀하였다. 그 이후로는 조정대신들도 공의 언행에 대하여 일절 왈가왈부 하지 않았다.
태종은 공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四?主簿)의 벼슬을 내리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태종이 남한산하에 은거하고 있던 공을 찾아 하루 밤을 숙박하고 갔다 하여 왕숙탄(王宿灘)이라 전해오고 있다.
후일 태종이 승하한 후에 태종이 묻힌 헌릉(獻陵)에 백발에 흰 옷차림의 한 노인이 찾아와 슬프게 호곡하면서 술잔을 드리고 정성껏 제를 올리던 그 분이 바로 석탄공이었다. 이러한 일이 사사로운 일 같으나 공과 사를 분명하게 가르쳐준 충절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강동구 고덕동은 석탄공과 암탄공 형제분이 사시던 곳으로 두 분의 높은 음덕을 기린다는 의미로 고덕(高德)이라 이름 붙혀 진 것이다. 고로 고의 재사명(齋舍名)을 고덕재(高德齋)라 명명하였으며 그 당시 광주의 사림들은 공을 각별히 흠모하여 암사동 구암서원에 주벽으로 배향하였다.
공의 묘소의 초장지는 덕풍리 수리골이었으나 묘소 주변의 도시개발로 인하여 1983년 3월에 많은 석탄공 후손들이 영면하고 계시는 유서깊은 무갑산 기슭 양지바른 명당터에 천묘 이장하였다. 1989년 9월 3일에는 그토록 열망하던 재사(齋舍)를 완공하고 그 이름을 지고지충(至高至忠)의 높은 충절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하여 ‘高德齋’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탄공 재사 상량문(上樑文)을 대들보 내에 봉안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탄공의 재사명을 고덕재라 명명했네
고(高)와 덕(德)은 높음과 큰 것을 이름이니
고덕재는 공의 덕을 숭모코자 함이로세
무갑산 힘찬 줄기 여기에 뻗어내려
정기어린 능선을 만들고 멈추었네
좌청룡 우백호가 유택을 둘러쳤네
안산과 조산이 적당하게 자리했네
초장지 수리골을 개발로 잃었기에
무갑산 8대 명당 유택으로 마련하니
홍복이요 음덕임을 누구인들 부인할까
신라 충신 후손으로 욕위향리(欲爲鄕吏) 하였기에
얼마나 많은 세월 와신상담 하였던가
후손에겐 천한 신분 물려주지 않으려고
호시탐탐 실지회복 꿈에선들 잊었을고
공의 대에 이르러서 소망이 성취되어
옥관자 형조참의 당당한 경대부(卿大夫)네
인품이 순후하고 학덕 또한 높았기에
방원과 결의형제 고려사직 지키더니
방원이 역성혁명 조선조 건국했네
미련인들 없었으며 갈등인들 없었을까
그러나 공에게는 불사이군 절개만이
위신의 도리이며 고려인의 길이라고
유회(柔懷) 뿌리치고 두문동에 숨었네라
태종이 즉위하여 한성판윤 자리 놓고
공에게 입조하길 간곡히 권했건만
끝내는 협조하길 완곡히 거부했네
태종이 공을 아껴 삼고초려 할량으로
광주땅 우거지로 어가 몰아 찾았건만
군신주의(君臣主義) 없다하며 옛 정으로 대하셨네
장하도다 충신후예 충절을 계승했네
늦으나마 후손들이 종의(宗意)를 모았기에
양지바른 명망터에 재사를 창건코자
재목깎는 자귀소리 무갑산에 메아리쳐
공의 높은 충절처럼 천지를 진동하네
재사(齋舍)가 완공되면 시월 상달 시사(時祀)에는
후손들 여기 모여 공의 고덕 기리면서
정성껏 제사하고 숭조돈목(崇祖敦睦) 할지리니
고덕재는 더욱더욱 고덕전(高德殿)이 될 것이고
후손들은 해동갑문(海東甲門) 옛 영화 찾으리라.
戊辰 가을에 19代 傍孫 昶淳 謹撰
6. 고송정 회동지사 련구(孤松亭會同志士聯句)
<사진8. 글씨>
故國三杯酒 옛 나라의 석잔 술에 운곡(耘谷)
慇懃共?簪 은근하게 모였도다. 원천석(元天錫)
?篁仰雪穩 약한 곳에 눈이 내려도 제대로이고 고송(孤松)
晩菊傲霜? 늦은 국화 서리에도 향기롭네. 허도(許도)
天日天無二 하늘에는 해가 두 개 있을 수 없고 호은(浩隱)
人生?有三 인생에는 세 강영이 엄연히 있네. 길재(吉再)
剛薇澄肺腑 고사리는 사람 폐부 맑게해주고 도은(陶隱)
禿抑織람? 낙엽진 버드나무는 축 늘어졌네. 이숭인(李崇仁)
珍中無瑕玉 진귀하고 흠없는 구슬은 둔촌(遁村)
浮?不染藍 부침해도 티 끝에 물들지 않네. 이집(李集)
孤臣餘故舊 고신만은 옛 친구로 남았는데 참의(參議)
良友盡西南 어진 친구 사방으로 다 흩어졌네. 이양중(李養中)
袞?春秋義 나라일은 추추대의 본받고 상촌(桑村)
農桑日夕談 농사일은 밤낮으로 말해야지. 김자수(金自粹)
愴?憑落照 슬픈 회포 낙조에 싣고 사인(舍人)
?蟄掩松菴 엎드려서 솔 암자에 묻히겠노라. 서견(徐甄)
7. 태종의 위로 서찰(慰勞書札)
<사진9. 고덕재 정문>
석탄공께서는 1392년 7월 17일 고려가 패망하고 이성계가 나라를 창건하여 태조의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여말충신(麗末忠臣)들과 함께 개성 근처의 두문동으로 들어가신 72현 중의 한 분이시다. 공께서는 고려충신으로써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태종으로부터 수차에 걸쳐 부르심을 받았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굳게 지키시며 거절하셨다.
그러나 태종이 직접 어가를 타고 지금의 고덕동에서 내려와 또다시 권유하였으나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시므로 태종이 환궁하여 거문고에 ‘白酒三盃彈琴一曲富春千載嚴瀨高節終不能屈’이라는 시를 친필로 써서 하사하시므로써 공의 높은 충절을 치하 격려하셨다. 이 시의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하리로다’ 라는 내용이다.
태종은 그 후 충절을 굳게 지키며 살아오신 석탄공과 암탄공 두 분의 지고지충(至高至忠)한 덕망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석탄공이 살고 있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부르게 하였다.
8. 맺는말
석탄 이양중(石灘 李養中) 선생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 본관은 광주(廣州)다. 고려의 형조참의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군수인 그의 아들 수생(遂生)과 같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두문동(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 실기(杜門洞 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이를 두문동이라고 부르는 곳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두문동 72현을 조선 조정에서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자 장살(杖殺)을 감행하였다.
선생은 고향(지금의 강동구)으로 퇴거하여 울분으로 지내던 중 결의형제를 맺은바 있던 이방원(李芳遠)이 태종(太宗)이 되자 직접 회유 설득하여 조정에 불러들이고자 결심하고 친히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왕이 온다고 하자 아우인 암탄 이양몽(巖灘 李養蒙)은 광주 원적산하(元積山下)로 피하고 선생 혼자서 입던 옷 행색 그대로 왕을 접대함에 탁주를 따라 권하고 자기는 거문고를 튀기니 왕과 신하의 예는 전혀 없고 한낱 필부들의 모습 그대로인지라 수행했던 신하들이 대노하여 왕을 능멸하는 역신이니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태종이 큰 소리로 제지하고 "이 분은 진정 나의 벗이다"하면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제수하고 출사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그의 굳은 의지를 돌리지 못하고 환궁하였다. 석탄의 높은 지조를 찬양하며 사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명명하도록 하여 지금의 고덕동의 유래가 되었다.
필자는 발길을 돌려 오래만에 빈양(지금의 고덕생태공원)을 찾아가 바위 절벽에 서서 고려 절신(節臣) 이양중선생과 태종이 만나던 장소가 어디쯤인가를 살펴보았다. 빈양은 올림픽대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각급학교의 소풍장소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름철에는 강수욕을 즐기고 천렵을 하고 야영을 하던 곳인데 지금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가 없는 외딴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도 빈양은 우리고장에서 가장 산수(山水)가 빼어난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옛날에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을 건널 수 있는 돌여울에서 말조개를 잡기도 하고 어항을 놓아 피라미와 매자를 많이 잡았었다. 선생은 이 돌여울을 호로 지어 석탄(石灘)이라 부르는 뜻을 알겠다. 강을 따라 걸었다. 강동대교를 건너 왕이 이양중선생을 만나기 위해 유숙하였다는 왕숙탄(王宿灘)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선생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음을 서글퍼 하였다.
강동문인들과 후학들은 많은 연구를 하여 이양중선생에 대한 논문과 시문을 발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내용들을 모두 발표한다.
필자가 이양중선생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토요저널>의 요청으로 ‘우리고장 문화유적 답사기’를 연재 집필하면서부터다. 2000년 2월 22일자 <토요저널>에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중심으로 조사연구한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2년 강동구지를 편찬하면서 『江東區誌』인물편에 이양중선생을 기술하였으며, 2010년 강동문화원에서 발간한 『강동의 역사와 문화』에 이양중선생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2011년 『賞鶴學術會誌』‘구암서원 연구의 기초’ 논문에 같은 내용을 수록하였다.
2004년부터 강동문인회에서는 『강동문학』에 강동을 빛낸 역사인물을 한 분씩 선정하여 특집으로 재조명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2010년에 이양중 선생을 선정하였으나 석탄공종회의 사정으로 결열되었다가 2013년도 강동의 역사인물로 재조명하게 되었다.
2012년 3월 27일 석탄공종회를 방문하였더니 이종덕(李鍾德) 석탄공종회 회장이 “우리 조상을 강동문인들이 재조명하여 주신다니 이보다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면서 석탄공의 묘소 고유제와 추모시 낭송회를 개최하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적극 협조하겠다 하였다.
<사진3. 고덕산 정상 간판>
그러면서 고덕산 93번지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고덕산에 얽힌 이야기’(이양중 선생과 이시무 정려문) 입간판이 없어진 것을 개탄하면서 다시 설치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고덕산 93번 정상은 사유지여서 불가하고 오히려 돌여울(石灘)에서 가까운 ‘고덕생태공원’에 돌비(碑石)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해 주었다. 왜냐하면 이양중 선생께서 돌여울 근처에서 태종과 만나 회포를 풀었고, 호(號)도 석탄(石灘)이라 짓지 아니하였는가.
2012년 3월 31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무갑산 기슭에 있는 이양중 선생 묘소를 두 번째 찾아보았다. 12년 전에는 후손인 이종완씨의 안내로 쉽게 찾아보았는데 이번에는 혼자서 찾느라고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한적하던 신월리가 신축건물과 공장건물로 가득 차 있고 새로운 길이 생겨 있어 이 골목 저 골목을 승용차로 돌아다니다가 신도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신도비 근처에 고덕재(高德齋)가 있고 산기슭에 묘소가 있다. 성묘를 마친 후 고덕재 옆에 살고 있는 종손인 이창희(李昌熙)씨 집을 찾아가 의문점을 묻고 싶었는데 이창희씨가 출타하고 없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이양중 선생은 문집이나 다른 자료가 없음이 안타까웠다. 돌여울이 하일동(지금의 강일동)에 위치해 있고 하일동 평촌(벌말)에 그의 후손 광주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돌여울(石灘) 건너편 가까운 곳에 왕숙천(王宿灘)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양중 선생은 고덕산 기슭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묘소는 하남시 입구 수리골에 있었는데 도시화가 되면서 지금의 초월면 신월리 무갑산으로 이장하였다.
2. 고려 충절신(忠節臣) 이양중선생
<사진4. 이양중 선생 묘소>
이양중은 고려조 말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참의에 올랐으며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서견(徐甄), 이방원(李芳遠 : 太宗)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우왕은 요동 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회의를 하였다. 이 때 이양중은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이니 요동을 침이 불가라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 때 조민수(曺敏修)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이양중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이태조 혁명초에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하(지금의 고덕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으니 그 글 뜻이 매우 강개울분하여 보는 사람이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다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이양중의 집으로 왔다. 서견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 이런 변을 안 볼 것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그 무렵 태조가 이양중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양중은 고려조 때 수절 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하니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이양중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이양중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 버렸다. 태종은 이양중에게 한성판윤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친히 남한산 아래 돌여울에 와서 만나 보았다. 이양중은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렸다. 태종은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여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酬酌)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嚴子陵)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漢)나라 왕도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는가?” 하니 이양중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오.”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이양중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신하들이 이양중을 탄핵하되 “이양중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 가장 큽니다,”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맞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 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이양중을 헐뜯지 못하였다.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이양중에게 보냈다. 그 글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천년(富春山千年)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 하리로다.’ 태종은 즉시 이양중의 큰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司?主簿)를 특배하였다.
동생 이양몽(李養蒙)은 벼슬이 형조판서였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으로 관직을 버리고 남한산 아래 수리골(현 하남시 덕풍동))로 은거하였다가 태종이 이양중을 찾아오자 원적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양중은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묘는 수리골에서 광주시 초월면 무갑산으로 1989년에 이장하였다. 고덕재(高德齋)와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찬(撰)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公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과 같고
公의 높은 절의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漢나라 같이 창성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나는 기러기는
어찌할 수 없구나. 성군(聖君)의 도량이 아니였다.
公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드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3. 석탄 이양중선생 묘비문(石灘公(諱養中)墓碑文)
<사진5. 신도비>
고려조 때 통정대부 형조좌참의 이공(李公) 휘는 양중이다. 이태조 혁명 당시 신하되기를 거절하고 광주 남한산하에 은퇴하여 부르는 영에 응하지 않고 귀양을 갈지라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평소 때의 우의로 특별히 가선대부 한성판윤 직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태종이 오히려 광주에 가서 옛 정을 베풀거늘 공이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리니 태종이 기꺼이 놀다가 환궁할 뿐이요. 마침내 그 굳은 의지는 돌이키지 못하고 다만 석탄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관직을 내려 장려하고 석탄에게는 궁중선물과 안부를 자주하나 다만 시(詩)를 올려 사례하니 무릇 석탄의 굳은 지조는 옛날 백의숙제 뜻으로 엄자릉의 자취를 따르니 백세하(百世下)에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고 태종의 융숭한 은혜 또한 옛날 광무황제에 지지 않으니 그 세교(世敎)에 관계됨이 심히 중한지라, 태사씨(太史氏)가 사책(史策)에 자세히 적어 자릉(子陵)과 더불어 무궁하게 아니 전하겠는가.
공의 손자 찬성(贊成) 한산군(漢山君)이 자손이 오래되면 선조의 뜻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막내아들 부사 성언(誠彦)과 손자 현감 망(網)을 시켜 그 친구 의성 김안국(金安國)에게 부탁하여 공의 사적을 대강 적어 돌에 새겨 뒷사람에게 끼치게 하니 내가 이르되 대절(大節)이 이같으니 다른 것은 대게 추상할 수 있다. 가범(家範)을 지켜 관작이 혁혁하고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사백여명이 되니 이 어찌 하늘이 공의 덕을 보답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因)해 명(銘)하여 가로되,
공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松柏)과 같고 높은 절의(節義)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주(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한(漢)나라 같이 창성(昌盛)함에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가는데 저 멀리 날으는 기러기는 마침내 어찌 할 수 없구나. 성군의 도량이 아니었나 공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嚴子陵)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기리 끼쳐주어 떨어뜨림이 없도다. 공경히 이 글을 새기노라.
석탄공은 고려조 말기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이색과 정몽주 길재 서견 및 태종과 형제의 의를 맺고 고려 공민왕을 섬기다가 우왕 때에 요동 땅을 치려하거늘 석탄이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 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니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로다. 요동을 침이 불가하다고 극히 반대하되 왕이 듣지 않으니 때마침 조민수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석탄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 보내었다. 이태조 혁명초에 석탄은 이미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었다. 그 글 뜻이 극히 강개분울하여 보는 사람으로서는 슬픔을 참기 어렵더라. 석탄은 항시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하여 어찌하리요 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다가 문득 삼각산을 바라보며 탄식하되 간신 조민수여 나의 한이로다.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평상을 치니 손바닥이 다 터졌더라.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석탄의 집으로 왔다. 서견(徐甄)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서 이런 변을 안볼 것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길재는 이미 산중으로 갔으니 과연 선각자로다. 즉시 이색은 오대산으로 가고 서견은 금천장으로 도망하였다.
그 무렵에 태조가 석탄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 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모(이양중)는 고려조 때 수절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합니다.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듣고 끝내 석탄을 부르지 않다가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석탄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석탄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버렸다.
태종은 석탄을 불러도 병을 핑계삼아 안 올 것을 알고 친히 남한산 아래로 와서 석탄을 만나보고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하며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漢)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은가? 하니 석탄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요. 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지낸 일을 말하였다. 태종이 석탄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대신(臺臣)들이 석탄을 탄핵하되 석탄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가 가장 크다 하였다.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석탄을 헐뜯지 못하더라.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뒤에 친필로 시를 써서 석탄에게 보내었다. 그 글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富春山)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 시키지 못하리로다’ 했더라. 즉시 석탄의 큰 아들 우생에게 사온주부(司?主簿)를 특배하였다.
석탄의 동생 이름은 양몽(養蒙)이요 벼슬은 판서였는데 명석한 분이다. 먼저 고려의 국운이 다 됨을 알고 남한산장으로 도피하여 농부가 되었다가 이조 혁명 후에 왕촉전(王蜀傳)을 지어 석탄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형은 정몽주와 같이 고려조를 섬기다가 정몽주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은 아직 생명을 보존하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하였다.
석탄공 종중이 이날부터 만권 서책을 다 한강에 던지고 의관을 벗어 불사르고 영영 산에서 나오지 않고 남녀 혼인을 다 전조 대신들과 하고 이조 대신들과는 절대 상대하지 않았다. 지금 광주 사람들은 석탄 형제의 굳은 절의를 옛날 백이와 숙제에 비하고 경기도 광주 구암에 서원을 짓고 둔촌선생과 석탄선생을 봉향(奉享)하였다.
5. 석탄공 행장(行狀)
<사진7. 고덕재>
석탄공께서는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벼슬에 오르셨으며 고려조의 강직한 충절신으로 명성이 높으셨다.
당시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가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하에서 요동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궁중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이때 석탄공께서는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강대해져서 소장지변(蕭牆之變)이 일어날 우려가 있음으로 요동의 정벌은 불가하다고 직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 하였다.
그 무렵 석탄공께서는 길재, 이색, 서견, 정몽주, 이방원과 더불어 6결의형제를 맺고 지내오던 중이었다. 얼마후 공의 예견과 같이 대신들 사이에 알륵이 극심하더니 드디어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석탄공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당시 고려조 칠십이현(七十二賢)의 충절신들과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세상과는 일체 연락을 끊고 살았다.
그 후 남한산하로 퇴거한 석탄공에게 이방원은 수차에 걸쳐 조선에 협조할 것을 간청해 왔으나 공께서는 응하지 않았다. 후일 이방원이 태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공에게 한성판윤으로 보위할 것을 전하러 왔으나 공께서는 사양하시고 나오지 않았다. 태종은 직접 남한산하로 공을 찾아 갔는데 공은 야복(野服)에 거문고를 들고 왕을 맞이하였으며 옛 벗의 예로 대접하였다. 이때 태종은 시를 지어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나 한(漢)나라의 왕도정치도 모두 우의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 하니 공(公) 또한 시로써 답하기를 옛나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의 수작(酬酌)이 있으리오 하였다. 왕도 공의 굳은 절개를 이해하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다.
환궁한 뒤에 대신들은 석탄공을 탄핵하여 간하기를 “일개 필부로써 군주의 권위를 무시한 죄과는 가장 크옵니다” 하며 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태종이 대노하며 가로되 “무릎을 마주하며 술을 함께 마시는 것은 우정의 두터움이다. 자고로 왕자에게는 이러한 굳은 친우가 있었느니라”고 말씀하였다. 그 이후로는 조정대신들도 공의 언행에 대하여 일절 왈가왈부 하지 않았다.
태종은 공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四?主簿)의 벼슬을 내리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태종이 남한산하에 은거하고 있던 공을 찾아 하루 밤을 숙박하고 갔다 하여 왕숙탄(王宿灘)이라 전해오고 있다.
후일 태종이 승하한 후에 태종이 묻힌 헌릉(獻陵)에 백발에 흰 옷차림의 한 노인이 찾아와 슬프게 호곡하면서 술잔을 드리고 정성껏 제를 올리던 그 분이 바로 석탄공이었다. 이러한 일이 사사로운 일 같으나 공과 사를 분명하게 가르쳐준 충절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강동구 고덕동은 석탄공과 암탄공 형제분이 사시던 곳으로 두 분의 높은 음덕을 기린다는 의미로 고덕(高德)이라 이름 붙혀 진 것이다. 고로 고의 재사명(齋舍名)을 고덕재(高德齋)라 명명하였으며 그 당시 광주의 사림들은 공을 각별히 흠모하여 암사동 구암서원에 주벽으로 배향하였다.
공의 묘소의 초장지는 덕풍리 수리골이었으나 묘소 주변의 도시개발로 인하여 1983년 3월에 많은 석탄공 후손들이 영면하고 계시는 유서깊은 무갑산 기슭 양지바른 명당터에 천묘 이장하였다. 1989년 9월 3일에는 그토록 열망하던 재사(齋舍)를 완공하고 그 이름을 지고지충(至高至忠)의 높은 충절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하여 ‘高德齋’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탄공 재사 상량문(上樑文)을 대들보 내에 봉안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탄공의 재사명을 고덕재라 명명했네
고(高)와 덕(德)은 높음과 큰 것을 이름이니
고덕재는 공의 덕을 숭모코자 함이로세
무갑산 힘찬 줄기 여기에 뻗어내려
정기어린 능선을 만들고 멈추었네
좌청룡 우백호가 유택을 둘러쳤네
안산과 조산이 적당하게 자리했네
초장지 수리골을 개발로 잃었기에
무갑산 8대 명당 유택으로 마련하니
홍복이요 음덕임을 누구인들 부인할까
신라 충신 후손으로 욕위향리(欲爲鄕吏) 하였기에
얼마나 많은 세월 와신상담 하였던가
후손에겐 천한 신분 물려주지 않으려고
호시탐탐 실지회복 꿈에선들 잊었을고
공의 대에 이르러서 소망이 성취되어
옥관자 형조참의 당당한 경대부(卿大夫)네
인품이 순후하고 학덕 또한 높았기에
방원과 결의형제 고려사직 지키더니
방원이 역성혁명 조선조 건국했네
미련인들 없었으며 갈등인들 없었을까
그러나 공에게는 불사이군 절개만이
위신의 도리이며 고려인의 길이라고
유회(柔懷) 뿌리치고 두문동에 숨었네라
태종이 즉위하여 한성판윤 자리 놓고
공에게 입조하길 간곡히 권했건만
끝내는 협조하길 완곡히 거부했네
태종이 공을 아껴 삼고초려 할량으로
광주땅 우거지로 어가 몰아 찾았건만
군신주의(君臣主義) 없다하며 옛 정으로 대하셨네
장하도다 충신후예 충절을 계승했네
늦으나마 후손들이 종의(宗意)를 모았기에
양지바른 명망터에 재사를 창건코자
재목깎는 자귀소리 무갑산에 메아리쳐
공의 높은 충절처럼 천지를 진동하네
재사(齋舍)가 완공되면 시월 상달 시사(時祀)에는
후손들 여기 모여 공의 고덕 기리면서
정성껏 제사하고 숭조돈목(崇祖敦睦) 할지리니
고덕재는 더욱더욱 고덕전(高德殿)이 될 것이고
후손들은 해동갑문(海東甲門) 옛 영화 찾으리라.
戊辰 가을에 19代 傍孫 昶淳 謹撰
6. 고송정 회동지사 련구(孤松亭會同志士聯句)
<사진8. 글씨>
故國三杯酒 옛 나라의 석잔 술에 운곡(耘谷)
慇懃共?簪 은근하게 모였도다. 원천석(元天錫)
?篁仰雪穩 약한 곳에 눈이 내려도 제대로이고 고송(孤松)
晩菊傲霜? 늦은 국화 서리에도 향기롭네. 허도(許도)
天日天無二 하늘에는 해가 두 개 있을 수 없고 호은(浩隱)
人生?有三 인생에는 세 강영이 엄연히 있네. 길재(吉再)
剛薇澄肺腑 고사리는 사람 폐부 맑게해주고 도은(陶隱)
禿抑織람? 낙엽진 버드나무는 축 늘어졌네. 이숭인(李崇仁)
珍中無瑕玉 진귀하고 흠없는 구슬은 둔촌(遁村)
浮?不染藍 부침해도 티 끝에 물들지 않네. 이집(李集)
孤臣餘故舊 고신만은 옛 친구로 남았는데 참의(參議)
良友盡西南 어진 친구 사방으로 다 흩어졌네. 이양중(李養中)
袞?春秋義 나라일은 추추대의 본받고 상촌(桑村)
農桑日夕談 농사일은 밤낮으로 말해야지. 김자수(金自粹)
愴?憑落照 슬픈 회포 낙조에 싣고 사인(舍人)
?蟄掩松菴 엎드려서 솔 암자에 묻히겠노라. 서견(徐甄)
7. 태종의 위로 서찰(慰勞書札)
<사진9. 고덕재 정문>
석탄공께서는 1392년 7월 17일 고려가 패망하고 이성계가 나라를 창건하여 태조의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여말충신(麗末忠臣)들과 함께 개성 근처의 두문동으로 들어가신 72현 중의 한 분이시다. 공께서는 고려충신으로써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태종으로부터 수차에 걸쳐 부르심을 받았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굳게 지키시며 거절하셨다.
그러나 태종이 직접 어가를 타고 지금의 고덕동에서 내려와 또다시 권유하였으나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시므로 태종이 환궁하여 거문고에 ‘白酒三盃彈琴一曲富春千載嚴瀨高節終不能屈’이라는 시를 친필로 써서 하사하시므로써 공의 높은 충절을 치하 격려하셨다. 이 시의 뜻은 ‘술 석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하리로다’ 라는 내용이다.
태종은 그 후 충절을 굳게 지키며 살아오신 석탄공과 암탄공 두 분의 지고지충(至高至忠)한 덕망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석탄공이 살고 있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부르게 하였다.
8. 맺는말
석탄 이양중(石灘 李養中) 선생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 본관은 광주(廣州)다. 고려의 형조참의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군수인 그의 아들 수생(遂生)과 같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두문동(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 실기(杜門洞 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이를 두문동이라고 부르는 곳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두문동 72현을 조선 조정에서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자 장살(杖殺)을 감행하였다.
선생은 고향(지금의 강동구)으로 퇴거하여 울분으로 지내던 중 결의형제를 맺은바 있던 이방원(李芳遠)이 태종(太宗)이 되자 직접 회유 설득하여 조정에 불러들이고자 결심하고 친히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왕이 온다고 하자 아우인 암탄 이양몽(巖灘 李養蒙)은 광주 원적산하(元積山下)로 피하고 선생 혼자서 입던 옷 행색 그대로 왕을 접대함에 탁주를 따라 권하고 자기는 거문고를 튀기니 왕과 신하의 예는 전혀 없고 한낱 필부들의 모습 그대로인지라 수행했던 신하들이 대노하여 왕을 능멸하는 역신이니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태종이 큰 소리로 제지하고 "이 분은 진정 나의 벗이다"하면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제수하고 출사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으나 그의 굳은 의지를 돌리지 못하고 환궁하였다. 석탄의 높은 지조를 찬양하며 사는 곳을 고덕리(高德里)라 명명하도록 하여 지금의 고덕동의 유래가 되었다.
필자는 발길을 돌려 오래만에 빈양(지금의 고덕생태공원)을 찾아가 바위 절벽에 서서 고려 절신(節臣) 이양중선생과 태종이 만나던 장소가 어디쯤인가를 살펴보았다. 빈양은 올림픽대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각급학교의 소풍장소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름철에는 강수욕을 즐기고 천렵을 하고 야영을 하던 곳인데 지금은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가 없는 외딴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도 빈양은 우리고장에서 가장 산수(山水)가 빼어난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옛날에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을 건널 수 있는 돌여울에서 말조개를 잡기도 하고 어항을 놓아 피라미와 매자를 많이 잡았었다. 선생은 이 돌여울을 호로 지어 석탄(石灘)이라 부르는 뜻을 알겠다. 강을 따라 걸었다. 강동대교를 건너 왕이 이양중선생을 만나기 위해 유숙하였다는 왕숙탄(王宿灘)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선생의 문집이 남아있지 않음을 서글퍼 하였다.
강동문인들과 후학들은 많은 연구를 하여 이양중선생에 대한 논문과 시문을 발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내용들을 모두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