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시애틀의 몇 몇 서점은 1973년도 오픈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시기가 책문화계에 유의미한 시점이었을까? 알지 못하겠다. 이 시기는 미국에서 베트남전이 종료된 시점이며, 1960년대 후반부터 폭발적으로 확장된 대중문화가 꽃피운 시기다. 정치적으로는 닉슨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경제적으로는 중동 오일쇼크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1970년대 미국 사회 문화의 흐름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되지만 전문가가 아니니 여기까지.
1973년, 동네 작은 서점으로 출발한 엘리엇베이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계속 공간을 확장시켜나가며 발전했다. 1999년 지금의 운영자인 피터 아론(Peter Aaron)이 인수했고 2010년 지금의 자리인 ‘캐피톨 힐(Capitol hill)’로 확장 이전했다. 장서는 15만 권 내외라고 하는데 지하 세미나실, 1층과 2층의 서점과 카페 등 규모가 놀라웠다.
이곳은 명실공히 시애틀을 대표하는 서점이라 할만하다. 인터넷에 올라온 독자 평점은 최고를 달리고 있고, 시애틀의 다른 책방들을 갔을 때 어김없이 언급된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2011년, 신경숙 작가 만남이 열리기도 했고 2016년에는 배수아 작가 초청 행사가 열려서 데보라 스미스(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배수아 작가의 작품들을 여럿 번역했다)와 함께 독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서점 입구에 걸린 행사 캘린더를 보고 좀 놀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작가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하루에 각기 다른 행사가 2회 예정되어 있는 날도 있었다. 일 년이면 500회 이상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갖고 있다는 설명이 과장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2015년 엘리엇베이 사장과 직원들이 함께한 인터뷰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거기서 엘리엇베이가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묻는 질문에 아론 사장은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공간. 둘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골라놓은 권위있는 북 셀렉션. 셋째, 매년 500회 이상 이루어지는 저자 행사. 마지막으로 훌륭하고 열정적인 직원들.
특히 네 번째 열정적인 직원들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직접 느껴볼 수 있었다. 도서관도 아닌 서점에서 한가운데 데스크를 놓고(계산대가 아니다) 직원들이 고객의 요구에 응답하는 시스템.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이 데스크에 누군가 한 명은 자리를 지키고 매장 전체를 살피면서 고객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나도 용기를 내어 앉아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어봤고 친절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약 20여 명. 전 직원이 그들만의 추천 목록을 갖고있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고 그는 말했다. ‘staff pick’ 코너는 직원들이 직접 읽고 추천한 책들만으로 이루어진 서가인데 모든 책에 추천의 글이 써있는 게 특징이다. 그것도 손글씨로.
물론 이 서가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서가에서 추천의 글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모든 북미 서점에서 가장 주의깊게 살펴본 게 바로 ‘추천의 글’이었다. 반스앤노블 같은 대형 서점을 비롯해서 동네 작은 서점에 이르기까지 추천의 글은 모든 곳에 걸려있었다. 서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광대한 바다를 표류하는 독자들에게 인생의 등대가 되어줄 수 있는 책 한 권을 골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이들 서점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서점의 직원이란 단지 기계적으로 책을 사들이고, 배열하고,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점을 찾은 독자들과 즐겁게 대화하고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도록 전시하며 숨어있는 책의 특징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임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고 오래전부터 해왔던 것이다.
엘리엇베이의 직원은 가장 큰 업무이자 과제이자 보람은 바로 스탭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책을 고르고, 고른 책에 추천의 글을 쓰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이곳은 시애틀에서 정말 사랑받는 서점이라는 걸 잠시 들른 여행객조차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은 자유로웠고 소란스러웠고 다정했으며 품격이 넘쳤다. 1층 한 켠에 있는 카페는 주문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고 좌석은 가득 찼다. 우리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지 않았지만 시애틀에 유학한 적 있다는 한 지인은 “심지어 그곳은 커피조차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스타벅스의 도시이자, 카페라떼를 처음 만들어낸 커피의 도시 시애틀에서 맛없는 커피가 있겠는가마는 심지어......이 서점은 커피까지도 완벽하다니....
엘리엇베이가 위치한 캐피톨 힐(capitol hill) 지역은 문화예술의 거리인데 특히 게이들의 지역이라고 한다. 이곳에선 횡단보도도 무지개 빛깔이고, 스타벅스 매장 입구에도 무지개 깃발이 걸렸으며 대부분 상가에서 동성애를 의미하는 무지개 깃발을 내걸고 있었다.
시애틀은 미국 50대 도시 중 샌프란시스코 다음으로 동성애 인구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2006년 시애틀 타임즈에 따르면 당시 주민의 12.9%가 동성애자라는 기사를 싣고 있다. 특히 캐피톨 힐은 성소수자 공간이 밀집되어 있고 이곳의 아파트들은 성소수자 주거 전용으로 불린다. 2013년 시애틀 시장으로 당선된 Ed Murray 도 동성애자였고 2012년에는 주민투표 53.7%의 찬성으로 동성결혼이 공식 허용되었다. 합법화 이후 첫 9개월 동안 7천 여 쌍의 동성애 커플이 공식 결혼을 했다고 하니 시애틀이 동성애자의 천국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같은 해 주민투포 55.7%의 찬성으로 마리화나 사용이 합법화되었다.
이로써 시애틀은 지식인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진보와 자유의 도시로 완성되어가고 있다. 엘리엇베이 서점은 이런 시애틀에 자부심을 더하는 지적 명소이자 문화 주체로 한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이런 서점을 갖고 싶었다. 엘리엇베이, 이곳은 내가 이번 북미 여행에서 만난 서점 중에 두 번째로 사랑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