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6~1951년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독립을 맞았지만 광복의 기쁨을 나누기도 전에 삼팔선을 경계로 남북한이 분단되었고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했다. 남한에서는 약 3년간의 미군정이 실시되었다(1945.9~1948.8.15).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통하여 제헌국회가 구성되었고,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 단체들이 조직되어 이합 집산하였고, 제주 4.3등 좌-우익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해방 후부터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약 3년간 소련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소련 군정의 지원을 받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지배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인사들은 숙청되었다. 공산정권에 반대해서 일어난 신의주 반공학생사건(1945.11.23)등 반소- 반공 시위들은 무력으로 진압 되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심한 박해를 받았고 토지개혁, 국유화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한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남북의 분단이 고착된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침공했다. 전쟁 초기에는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북한국에 점령당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 되어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압록강 근방까지 진겼했으나 중국의 참전으로 유엔군은 후퇴하였고 3년간 지속되던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부한사이의 휴전으로 끝이 났다. 전쟁으로 전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수많은 피난민과 이재민을 남겼다. 교회도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
부산은 전국에서 밀려 온 피난민들로 가득했고, 학교와 교회는 임시 숙소로 변했다. 이때 몰려든 피난민들은 1955년 100만여 명을 넘어서 부산 인구는 전쟁 이전보다 5배나 증가되었다.
한편 일제 말기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란 이름으로 통폐합 되었던 한국교회는 각 교단별로 환원하면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에 항거하다 평양, 대구, 광주, 부산 등 여러 형무소에 투옥되었던 충성스런 종들 가운데 30여명은 이미 옥중에서 순교하고 20여명은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한 이들은 교회의 재건 운동, 곧 영적인 쇄신운동을 전개했다. 장로교 총회 안에는 단순히 조직의 재건에 초점을 맞춘 그룹과 영적인 쇄신을 통한 교회의 재전을 원하는 두 그룹이 있었다. 이 두 그룹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자세로 임했다. 남북의 분단으로 남한의 교회만 회집한 장로교 제1회 남부총회(1946.6.12~15, 서울승동교회)에서는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 하기로 한 결정은 합법적으로 가결된 것이 아니므로 무효화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의는 1947년과 1854년에 거듭되었다. 이들은 단지 교회의 회의, 곧 '절차상의 잘못'을 수정하는 선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 성도들과 그 지지자들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와 자숙을 통한 영적쇄신과 교회의 쇄신을 이루고자 했다. 이들은 이것이 '진리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이 운동에 동조하는 교회 인사들과 교회들은 이 문제로 총회와의 갈등을 겪다가 총회로부터 부당하게 축출 당하게 되었다. 이에 교회쇄신 운동을 지지하던 이들과 교회는 1952년 9월 11일 진주성남교회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고, 1956년 9월에는 고신교단, 곧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