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역설의 종교
1885년 4월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17년동안 한국인들 사이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명을 하사 받았다.
이화학당에서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도로 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학교였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에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 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있다.
아펜젤러는 일찍이 1885년 겨울부터 외국인(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성경공부를 시작으로 하여 한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차츰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여 마침내 1897년 12월 26일 정동 제일 감리교회를 국내외의 헌금으로 그 당시 "서울에서 천주교성당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건축하였다. 학교나 교회에서 개인적으로나 혹은 대중적으로 호소한 끝에 처음에는 한 명씩, 다음에는 두 명씩,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고, 거기에는 학교와 병원의 도움이 컸다.
그는 부감리사(집사 목사)로 감리사(장로 목사)로 Union Church 목사로 인천지방 상주책임자로 선교부의 회계로 목회와 선교부 일에 힘써 일하였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 아펜젤러와 그의 조수겸 비서 조한규, 서울에 있던 장로교학생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 등과 함께 목포로 항해하는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