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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43. [역경의 열매] 신인식 (1-11) 앞을 못봐 불편?… 신학 공부에 세계 일주까지
사람들은 종종 내게 “앞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불편하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기에 “지금의 나의 모습이 좋다”고 말한다.
만일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경남 의령군의 오지마을인 ‘달밭마을’에서 예수님도 알지 못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것이다. 농부의 삶도 감사하지만 나는 장애로 인해 주님을 알게 된 후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에 지금의 삶이 더 감사하다.
신학을 공부했고 웬만한 악기는 모두 연주할 수 있으며, 세계일주와 국토순례도 했다. 무엇보다 전화로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는 ‘종달새전화도서관’을 만들어 시각장애인들에게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 태어나 잠시나마 세상을 보고 또 즐길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고 다친 곳이 팔다리가 아니라 눈이라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음껏 걷고 뛸 수 있으니 다행이고 사람들을 만나 악수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 줄 수 있으니 다행이고, 그 모든 고난을 통해 오늘을 만들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아니고서야 이런 기적은 불가능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는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말씀이다.
4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술래잡기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숨죽인 채 숨어 있는 것도 조마조마했고 꼭꼭 숨은 술래의 머리칼이나 옷자락을 찾아내는 것도 즐거웠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도 신났다. 그날따라 더욱 신이 나서 폭주 열차처럼 달려가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날은 좀 많이 아팠던 것 같고 다친 곳은 이마였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다 넘어지고 다치는 건 매일 벌어지는 일이었다. 병원이 있는 도시까지는 아주 멀었으니 우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나을 거라 믿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를 다쳤던 난 시력이 계속 나빠지다가 급기야 전혀 볼 수없게 되어 버렸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될 거라고는 나도 식구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둠에 익숙해져 갔지만 숱한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최악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크고 거센 파도가 덮쳐왔다. 넘어뜨리고 무릎을 꿇리고 쓰러뜨렸다. 더 견딜 수 없다고 울고 있으면 더 큰 울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는 눈물조차 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그냥 두지 않는 분이 계셨다.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지 않도록 몰아세우시는 분이 계셨다. 골방 바깥으로, 대문 바깥으로, 넓고 험난한 세상으로 내모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가난한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기에 사실 긍정적이고 명랑한 성격을 갖기 힘들다. 그러나 환경에 굴하지 않고 명랑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지금의 내 성격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성격이다. 수준급 코미디언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을 잘 웃긴다.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짚고 버스에서 내릴 때 큰소리로 외친다. “여러분!” 사람들이 금 세 집중한다. 뭔가 팔려고 그러는가 보다 한다. 그러면 “여러분! 저 요번에 내립니다”라고 말한 후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레드 카펫을 밟는 영화배우처럼 우아하게 버스 계단을 내려온다. 버스는 웃음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들썩거린다.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고 파이팅을 해 준다. 물론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미친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귀는 좋은 말만 듣는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 [역경의 열매] 신인식 (1) 앞을 못봐 불편?… 신학 공부에 세계 일주까지
* [역경의 열매] 신인식 (2) 11세에야 미션 初校 입학… 방과후는 껌·볼펜 팔이
* [역경의 열매] 신인식 (3) 엎친데덮친 ‘결핵 말기’… 4년간 약 14만알 복용
* [역경의 열매] 신인식 (4) 문교부장관 만나 “시각장애인도 일반高 입학을”
* [역경의 열매] 신인식 (5) 돈을 벌자! 시각장애인들의 ‘영적 눈뜸’ 위해
* [역경의 열매] 신인식 (6) 시각장애인 잡지·심부름센터… 궁핍에도 늘 은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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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57년 경남 의령 출생,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 졸업, 미국 페이스신학교 박사과정 수료, 대구대학 이학박사, 현 종달새전화도서관 관장, 한국시각장애인기독교연합회 회장, 대구대학 겸임교수
***[역경의 열매] 신인식 (2) 11세에야 미션 初校 입학… 방과후는 껌·볼펜 팔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라고 부모님이 나를 집에만 있게 하거나 안쓰러워만 했다면 나는 평생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해보라고 하셨다.
어린시절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했다.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 혼자 동분서주하셨고 생활은 점점 더 기울어 갔다. 어떻게든 먹고사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했으므로 할 수 있는 건 뭐든 했다.
동갑인 아이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고, 아침마다 학교 가자며 연신 내 이름을 불러도 나는 일만했다. 새로운 걸 들으면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인지라 무엇이든 어떻게든 배우고 익혔다. 내가 하는 일이 밥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신났다. 소도 몰고 논도 갈고 벼 묶기, 모심기, 지게질도 수준급으로 했다. 새끼줄도 많이 꼬았는데 솜씨가 좋아서 우리 집 새끼줄은 다른 집에서 꼭 챙겨달라고 할 정도였다.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4학년이 될 무렵 학교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 시절 장애인들은 교육이랄 게 없이 소외되고 방치된 채 지냈는데, 그런 형편의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우리 집을 방문한 선생님들은 시각장애인들을 별도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며 나를 학교에 보내라고 설득하셨다.
1967년, 11세가 되던 그해 드디어 대구 광명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미션스쿨이었는데 1학년 담임선생님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소개해주셨다. 젊고 예쁘신 선생님이 최고로 인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 같았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 역시 최고로 쳐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알게 된 하나님은 내 평생 동안의 빛이 되어 주셨다.
늦은 입학을 한 탓에 덩치는 크고 또래 아이들보다 생각하는 것도 빨랐다. 뭘 해서 돈을 벌까 늘 고민하고 다녔는데 길에서 껌이나 볼펜을 팔면 돈을 남길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역으로 나가 껌과 볼펜을 팔았다.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신문이나 잡지도 팔았는데 첫날부터 날개 단 듯 잘 팔렸다.
어느 날 누군가 등을 툭 툭 쳤다. “잡지책 드릴까요?”라고 말하는데 주먹이 날라 왔다. 그리고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가더니 집단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장사를 하려면 일부를 바치거나 그게 아니면 여기를 떠나라고 했다. 실컷 맞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온몸은 아프고 코피를 흘렸는지 코가 얼얼하고 이가 흔들거렸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팔러 나갔고 또 맞았다. 그 다음날도 나가서 또 맞았다. 그러기를 몇 차례하고 나니 그들은 나를 독한 놈이라고 불렀다. 사는 꼴이 불쌍하니 건들지 말자고 했다. 뭐든 끝까지 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1970년대 초에는 전화가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학교에 전화교환원이 있었다. 평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인 나는 전화교환원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전화교환실 앞으로 달려가 쉬는 시간 내내 서성거렸다. 귀를 기울이고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이것저것 물었다.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고 했던가. 한번은 전화교환원이 출근하지 않아 난리가 났다. 그때 선생님께 해보겠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고는 기억을 더듬어 전화를 연결해 드렸다. 이후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견학차 학교를 방문하면 나는 전화교환 업무를 멋지게 시연해 보였다. 교사들은 시각장애인도 할 수 일이 무궁무진하다며 교육의 기회를 많이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한 선생님께서 실무에 나를 투입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내셨다. 월급도 제대로 주겠다고 제안하셨다. 사실 초등학생을 고용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그나마 옛날이라 가능했던 것 같고, 먹고살기 힘든 우리 집안 상황을 잘 알고 계신 선생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신 것 같았다. 월급을 받아 학비도 내고 살림에도 보탰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3) 엎친데덮친 ‘결핵 말기’… 4년간 약 14만알 복용
초등학교 시절 뭐든 잘했다. 공부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했다. 1등과 반장을 도맡아 했다. 학교를 늦게 간 만큼 배움에 대한 욕심이 큰 탓이기도 했고 다른 아이에 비해 월등히 큰 키와 목청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던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늘 피곤하다 싶었는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팠다. 고민하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 아버지와 함께 갔다. 의사는 나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결핵 말기에 신경성 폐렴입니다. 6개월이나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집에 데려가 잘 먹게 해주시고 푹 쉬게 해 주십시오.”
진료실 밖으로 들려온 의사의 목소리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워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다니 내가 죽다니. 이제 공부도 일도 인정받고 즐겁고 신나는데, 죽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운동을 해도 지치지 않던 강한 내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공부야말로 내가 살아갈 유일한 길이었다.
“제발 학교에 다니게 해주세요. 공부만 하게 해 주세요”
진료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의사선생님께 말했다. 의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당시 결핵 말기라면 열에 아홉은 죽던 시절이었다. 살려 달라는 게 아니라 학교에 다니게 해 달라고 비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을까. 의사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인식아. 진찰결과는 네가 들은 그대로다. 하지만 살고 죽는 건 어차피 하늘이 알아서 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약은 매일 매 끼니마다 한주먹씩은 먹어야 할 거다. 주사도 꽤 아픈데 매일 맞아야 한다. 약이 독해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그래도 해낼 수 있겠니?”
긴 싸움이 시작됐다. 언제 끝날지 분명하지 않지만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실 거라고 믿었다. 의사선생님은 먹고살기도 힘에 겨운 우리 집 사정을 알고 계셨다. 그 모든 약이며 주사를 무료로 주셨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버스로 병원을 오가는 일은 힘에 겨웠지만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빨리 나아야 이 모든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분의 계획과 바람이 아니었다면 시력을 잃은 첫 번째 고난에 일찌감치 굴복하다 지쳐 흔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 덕분에 오늘 이 시간이 있다.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은 가장 쉬운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내가 6개월을 넘겼다. 또 한 해를 넘기고 4년이 지나던 어느 날 의사선생님이 환호성을 지르셨다.
“인식아, 네가 이겼다. 우리가 해냈어. 병이 다 나았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4년간 약을 14만 알을 먹었다. 주사는 매일 한대씩 1400대 이상 맞았다. 돈을 내고 치료를 받아야 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치료를 포기했을 것이다. 모든 치료가는 무료였고 병은 기적처럼 완치됐다. 그 의사 선생님과는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내는데 여든이 넘으신 선생님이지만 통화할 때마다 “인식아, 너는 내 삶의 기적이야” 하시며 어제 일처럼 기뻐하시곤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독히 큰 병을 주셔서 의사를 놀라게 하시는 분이고, 그 병을 고치심으로써 모두를 더 놀라게 하시는 분이다. 병 주시고 약 주시는 그분의 깊은 뜻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 무렵 나는 전화교환원을 하며 자신이 특별하고 대단한 아이인 줄 알았다. 하나님은 나를 고쳐서 제대로 쓰시길 원하셨다. 그래서 내게 병을 주시고 그걸 견뎌낼 힘과 이겨내는 기적을 주신 것이다. 이후 수많은 고난을 만나 내공이 쌓였기에 이젠 고난이 다가오면 “또 왔는가? 자네” 한다. 고난을 살피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한다. 잠시 기다릴 때도 있고 훅을 날리고 발차기를 할 때도 있다. 결국 고난이 제풀에 지쳐 달아난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4) 문교부장관 만나 “시각장애인도 일반高 입학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교 숙직을 2년 동안 서며 월급을 받았다. 매일 40여장의 연탄을 갈고 교무실과 복도를 청소했다. 시각장애인이니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지만 썩 잘 해냈다. 연탄불을 한번도 꺼뜨린 적이 없었다. 내가 숙직을 서는 동안 도둑도 들지 않고 안팎으로 깨끗했다고 하니 꽤 훌륭한 숙직 당번이 아니었나 싶다. 월급은 당시 어려운 집안 살림에 아주 요긴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대구광명학교는 초중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학교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정안인들과 함께 배우고 싶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 무렵이 고입 연합고사가 부활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에겐 시험 응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서 학교를 졸업한들, 어려운 기술을 배우고 익혀 나간들 정안인들의 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없을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그냥 앉아서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힘을 모아 읍소라도 하자.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바위에 남지 않겠니” 친구들을 설득했지만 다들 싫다고 했다. 무더운 여름, 정부 청사를 물어물어 찾아 갔다. 문교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어지럽고 목이 탔다. 다음날 또 갔다. 그 다음날도 또 갔다. 며칠 째였을까. 드디어 장관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장관님 기회를 주십시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모르시지 않습니까? 기회를 주지 않으면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문 하나가 닫히는 게 아니라 삶의 문이 닫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만약 장관님의 자제 분이 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암흑 속에 방치하실 겁니까?”
장관님은 연신 “그렇지 그래”라며 나의 말을 이해해주셨다. 하지만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자고 했다. 쉽게 될 일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결국 일반고교 입시를 치를 기회를 얻지 못해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대구 광명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벌이가 좋던 전화교환원 일, 숙직일도 끝났다. 뭘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궁리하느라 잠을 설친 어느 날 아침 교무실에 들어갔다.
코로 맡아지는 잉크 냄새,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 바로 이거다. 신문 배달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수업시간과 일하는 시간이 겹치지 않으니 공부에 방해될 것도 없고 다리품을 팔아야 하니 건강에도 좋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그날 모 일간지 대구지국을 찾아갔다. 더듬더듬 문을 열고 들어가 옷깃이 스친 사람에게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신문배달을 하고 싶어왔다고 하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혹시 장님 아니가 이거보이나?” 내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혀를 찼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보네. 앞도 못 보면서 배달 일을 한다고? 그냥 돌아가라.” 누군가 내 등을 떠밀었다. 다음날 또 갔다. 누군가 또 등을 밀었다. 나가지 않겠다고 버둥거리니 또 한 사람이 와서 양팔을 잡아끌었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서 나를 밀어 넣었다. 다음날 수업이 끝나면 거기 가서 앉아있었다.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대답을 안했다. 그래도 갔다. 일주일 후에야 지국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사장님. 월급은 안받을 테니 신문 배달만 좀 하게 해주세요. 소원입니다.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간청하니 기회는 한번 주마. 영리하게 생긴 녀석이 왜 이리 무모한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우리 직원들이 너 때문에 불편해지거나 고객이 너 때문에 불쾌해하시면 당장 그만둬야 한다. 알겠니.”
***[역경의 열매] 신인식 (5) 돈을 벌자! 시각장애인들의 ‘영적 눈뜸’ 위해
신문을 돌리려면 매일 8∼10㎞ 거리를 걸어야 했다. 지국 총무는 “앞을 못 본다고 대강 넘어갈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보통 2, 3일이면 길을 파악하는데 내겐 특별히 1주일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총무가 길을 알려 준 그날 밤에 혼자 가서 복습했다. 이틀 사이 같은 길을 네 번 다닌 셈이다. 3일째 되는 날, 혼자 배달하겠다고 선언했다. 총무는 “뵈는 게 없으니 겁도 없느냐”고 화를 냈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분은 내가 길눈이 아주 밝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 그러나 당시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담당한 150집이 신문을 그만 보고 싶어 하는 ‘절독 위험 고객들’이란 사실이다. 혼자 신문배달을 시작한 날, 마지막 집 신문까지 무사히 넣고 휘파람을 불며 돌아서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총무 아저씨였다. 불안해서 내 뒤를 따라온 것이다.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는 “한 집도 안 틀렸다. 3시간 10분만에 배달 완료면 초짜치고는 신기록”이라고 했다. 매일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4㎞를 걸어서 지국에 도착해 신문을 차곡차곡 챙겨 나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한 달이 지나도록 신문 구독을 철회하는 집이 없었다. 철회는커녕 옆집 뒷집을 소개해 주어 내 담당은 조금씩 늘어갔다.
지국 사장님이 불러서 갔다. 내 손을 잡으시고 손바닥에 봉투 하나를 얹어 주셨다. 뭔가 두툼했다. 고맙다는 인사부터 드렸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다. 네 덕분에 신문을 계속 보겠다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잘 해낼 줄 몰랐다” 너무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월급이었다.
사실 나는 ‘꿈에도 소원’이 잘사는 것이었다.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에 돈을 벌고 싶었고, 그 돈으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런데 차츰 생각이 변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복음의 광명’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들의 영적인 개안(開眼)을 위해 사는 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잘살고 싶은 마음은 하나님께 반환했다.
1978년 ‘한국맹인서비스센터’를 세우고 장애인을 위한 구체적인 일을 시작했다. 시각장애인들의 경우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가 아닌 누군가에게 맡겨져야 한다. 자원봉사자 15명을 모아서 대구 시내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자녀를 돌보기로 했다. 우리의 첫 봉사대상은 알코올에 중독된 시각장애인 부부였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 둘을 자원봉사자들이 순번과 역할을 정해 도왔다. 청소, 과외, 학교 선생님과의 상담, 방과 후 놀아주기 등 할 일이 다양하게 많았다.
1년 후 아이들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생활습관이 좋아졌다. 학습능력도 빠르게 향상됐고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 회복이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장애를 덜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부모 역시 아이들을 방관하지 않았다. 진정한 가족으로 변화됐다. 입소문이 나서 많은 곳에서 서비스를 원했다.
처음 봉사를 요청했던 가정의 어머님을 최근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님은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아이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성장했다면서 그 모든 게 오래전의 도움 덕분이라고 했다. 그게 꼭 우리의 도움 때문만은 아님은 잘 안다.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그분들이 열린 마음이었고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변화되는 아이들을 통해 그분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 사회가 발전하려면 그들의 자녀들이 올바르게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부부의 자녀들은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받기 어렵다. 사춘기 자녀들은 열등감이 많다. 어른이 된 후에도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시각장애인 사회는 비전이 없다. 나는 시각장애인의 자녀를 돌보고 기르는 ‘모세조기교육센터’를 세우는 꿈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6) 시각장애인 잡지·심부름센터… 궁핍에도 늘 은혜가
1979년 서울에 올라온 후 한국맹인재활센터 교사로 일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 일을 하면서 시각장애인의 가장 큰 불편은 아무래도 정보의 부족이라고 여겨졌다. 어떤 일을 할 때 방법을 알고 있으면 어떻게든 노력할 수 있지만 방법을 알지 못하면 미리 포기하게 된다. 당시 인터넷 정보 검색의 신속성이 높이 평가 받고 있었고 그 다음이 책자 형태의 자료였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에게는 두 방법 모두 불가능했다.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정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잡지를 구상했다. 녹음테이프로 만들어져 귀로 듣는 ‘사랑의 메아리’가 탄생했다. 유명인사의 인생이야기, 소록도에서 온 편지 같은 경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고들 하셨다. 덕성여대 박동현 교수님의 과학상식, 김정태 박사님의 성이야기, 정연희 작가님의 음성 녹음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다니며 담았다.
제작비용도 없으면서 한 호 한 호 만들어가는 게 기적 같았다. 살 집이 없어 한 달에 집을 서너 번이나 옮겨 다니며 살던 시절이었다. 당장 살 집의 전세금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고 친구 집을 전전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늘 마음을 함께해 주는 분들이 있어서 그 많은 일들이 가능했다. 녹음과 제작, 배송까지 함께 해주던 분들, 미친 짓이라며 말리던 분들도 일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자금이 바닥날 때면 중간 중간 멈추어가며 5년간 34호까지 발간할 수 있었다.
1981년 시각장애인을 위한 심부름센터를 시작했다. 100일 철야기도를 두 번이나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후에 시작했다. 자원봉사자 250명을 모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원하는 일을 대신 해 드리는 게 목표였다. 예상대로 할 일은 산더미였다. 쇼핑대행, 민원서류 처리 대행, 편지, 대필, 도서 등 종류도 다양해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분주했다. 하루에 평균 100건 이상씩 처리했다. 언젠가 정부가 이런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헛되지 않게 지금은 지역별로 시각장애인 심부름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센터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금 문제였다. 자원봉사자들에게 기본적인 차비나 점심 값은 지급해야 했는데 그것조차 넉넉하지 못했다. 1984년까지 치열하게 운영했지만 더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문을 닫아야 했다. 수족이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빚은 늘고 몸은 쇠약해졌다. 사람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마음을 괴롭혔다. 출구가 없는 감옥에 갇힌 것 같았다.
당시 감사가 부족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러지 못했다. 일도 즐겁고 보람도 컸지만 늘어가는 빚이며 사람들의 오해에 100% 감사하지 못했다. 지금도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는 것만으로 매달 빠듯해 35개월째 나의 급여는 챙길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젠 기쁘고 감사하다. 내가 가장 소망하던 일을 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다.
1986년 한국시각장애인선교회를 설립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볼 수 없는 내가 듣고 노래하면서 행복을 느끼듯 많은 사람이 음악을 통해 행복을 느끼길 바랐다.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한국비전선교중창단의 활동도 큰 주목을 받았다. 나를 포함해 모두 여덟 명의 멤버들이 연습할 때면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볼 수 없지만 노래할 수 있는 음성이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가. 교회나 병원 기관 등에서 노래를 했다. 우리들의 노래에 뭔지 모를 따뜻함이 담겨 있다고 했다. 노래를 듣고 나면 볼 수 없음에도 불평하지 않고 이토록 삶을 열심히 살아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더 즐겁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반성한다는 말씀들도 하셨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7) 눈 아닌 음악으로 본 세상은 더 아름답고 따뜻
4살 이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캄캄하다. 하지만 눈 대신 몸과 마음을 열어 온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은 언제나 진실하고 밝다.
특히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내가 처음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코디언 연주를 처음 들었는데 천상의 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주해 보고 싶었다. 선생님은 절대 빌려 줄 수 없다고 하셨다. 고장을 낼까 싶어 그러셨을 텐데 나는 음악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을 조르기 시작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음악선생님이 “그렇게 좋으면 조심해서 딱 한 번만 연주해보렴”이라고 말했다. 영하 15도의 겨울. 너무 추워서 펴지질 않는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빈 교실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소리도 제대로 낼 줄 몰랐지만 마음속으로 이미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됐다.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연주했다. 한참 연주하고 있을 때 교실 문이 열렸다.
“인식아 아직도 하고 있니. 그렇게 좋으냐. 그럼 언제든지 네가 하고 싶을 때 해라. 아까 교장선생님이 가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만세!”
소망이 간절하면 이뤄진다. 이후 다른 악기에도 관심을 갖고 피아노, 트럼펫, 기타, 드럼 등 각종 악기들을 익혔다. 볼 수는 없어도 들을 수 있으니 음악의 세계에 있을 때 나는 장애를 느낄 수 없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한국시각장애인선교회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방향으로 이뤄졌다. 한국비전선교중창단이 울릉도 군민회관에서 노래할 때가 기억에 남는다. 장시간에 걸친 자동차 여행과 뱃멀미에 다들 기진맥진해 과연 노래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손을 맞잡고 기도드린 후 무대에 올랐을 때 우리는 각자의 목청에서 솟아나오는 뜨거운 힘을 느꼈다.
단원들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생업이 또 있으니 연습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간신히 시간을 맞추고 숨 가쁜 연습을 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으니 안마나 침술 등의 생업을 하던 분들로서는 더욱 피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피로가 노래 부른 후의 보람과 행복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행복중창단’이라는 별명을 얻은 우리는 2005년 ‘국회개원축하음악회’와 2008년 ‘국회개원 60돌과 정기국회개원축하음악회’에서 노래했다.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가 지난 5월 18일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빛 사랑의 소리’ 연주회 마지막 순서에 내가 무대에 올랐던 것도 잊지 못할 순간이다. 김남윤씨가 지휘하는 W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여기에 모인 우리’를 불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또한 음악은 내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1984년 10월, 서울 강서구에 있는 온누리교회 부흥성회에서 특송을 했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잊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기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다오….”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나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날 하나님께선 특히 몇 사람에게 나의 모습을 깊이 각인시켜 주셨다. 큰처남인 김일환 목사가 당시 그 교회 담임 교역자였다. 집회엔 아내뿐 아니라 장인 장모님이 참석해 계셨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다. 부흥회가 있던 그날 밤, 김일환 목사가 여동생을 불렀다고 했다. “오늘 찬양하던 그 청년 보았니. 그 청년과 결혼해서 일평생 그를 섬기지 않겠니. 하나님께서 오빠에게 그런 감동을 주셨다.”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했던 여동생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도 그런 감동을 받았다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 김민희 사모이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8) 아들·딸 “시각장애 극복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보석 같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이 기적으로 여겨진다. 사실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콤플렉스로 여길까 두려웠다. 다행히 아이들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해 주었다. 우연히 딸 지혜의 일기를 보고 코끝이 찡했다.
“아빠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큰 믿음과 기도로 나를 키워주셨다. 아빠의 꿈은 다른 사람과 많이 다르다. 부자가 된다거나 명예를 얻는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잘 사는 것, 하나님 나라의 큰 일꾼이 되는 게 아빠의 꿈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일 수 있지만 아빠는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오셨다. 내가 보고 자라 온 것은 큰 꿈을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묵묵히 헤쳐 나가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나 역시 혼자만의 성공이 아닌 남을 위한 성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지 않고, 계속 공부해서 지혜를 쌓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유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내가 결심을 바로 옮기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따지다가 유학 보내달라는 아이들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목회자 월급으로 가계를 꾸려가기도 벅찼지만 ‘열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말해준 자녀들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길 원했던 다윗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헌팅턴 비치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윗을 입학시켰다. 다윗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이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지혜도 보냈다.
두 아이 모두 낯선 곳에서 사춘기를 맞게 된다는 점이 염려됐다. ‘옆에서 늘 바라보고 챙겨줘야 하는 게 아닌가’란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 때도 많았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를 했다. 아이들이 귀찮아할 때도 있었고, 걱정거리가 있어 상의해 올 때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전화로라도 함께할 수 있으니 감사했다. 아이들도 힘들 때나 기쁠 때나 감사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다른 유학생들과 달리 계속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점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방학이 되어도 한국에 오지 못한다는 점도 아이들의 감사기도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신앙으로 똘똘 뭉쳐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래도 1년에 6만 달러가 넘은 사립대학의 비싼 등록금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일단 학비가 저렴한 커뮤니티칼리지에 입학한 후 UCLA 3학년으로 편입, 1년 3개월 만에 조기 졸업했다. 다윗은 통역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다니고, 지혜는 한동대 로스쿨에 다니고 있다.
자녀를 키우면서 나는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3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내가 앞을 보지 못했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인식아 네가 볼 수 있다면 내 눈 줄게”란 말을 입고 달고 사셨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을 주신다고?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거지. 그럴 리 없어’ 그런데 다윗이 5살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을 때 울면서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 다리를 드릴게요. 아이의 다리를 낫게 해주세요.” 시각장애인인 내가 다리까지 쓸 수 없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겠지만 진심으로 내 다리를 주고 싶었다. 그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돼 눈물로 회개했다.
또한 언제나 나를 믿고 뭘 해도 잘했다고 하셨던 어머니는 내 인생의 가장 큰 힘이다. 내가 앞을 볼 수 없게 됐다는 말에 나보다 더 절망하셨지만 어머니는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흔들리셨다면 아마 나는 바로 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어머니가 얼마 전 소천하셨다. 효도하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린다.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9) 시각장애인 최초 히말라야 6476m 메라피크 등정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환경은 모두가 장벽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걸려 넘어질 수 있고 다칠 수도 있다. 가끔씩 만만치 않은 장벽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 그게 진짜 장벽이라고 받아들이고 주저앉으면 그 자리가 자신의 한계가 되어 버린다. 그게 장벽일 리 없다고 넘고 또 넘는 노력을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도약대가 된다고 믿는다.
2006년 5월 헌법재판소가 안마사 자격증을 시각장애인에게만 주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후 수많은 시각장애인이 길에 나앉게 될 상황이었다. 안마사 자격증은 시각장애인들의 유일한 생존권이었다. 절망감에 목숨을 끊는 시각장애인들이 생겨났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해 7월 2일부터 18일 동안 30여명의 시각장애인과 창원, 부산, 울산, 경주, 포항, 영천, 대구를 거쳐 서울까지 총 620㎞를 걸었다. 무더위 속에 발 여기저기에 물집이 생겨 터졌다.
“성경의 비유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양 100마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가난한 과부 집에 있는 한 마리의 양을 빼앗아 손님 접대를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양 100마리를 가진 사람의 욕심이 지나친 게 아니겠습니까.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사라는 직업은 한 마리의 양과 같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의 유일한 직업을 빼앗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사’라는 직업이 어떤 가치인지 알렸다. 무척 힘들었지만 그해 8월 말, 안마사 자격 인정은 시각장애인에게만 해야 한다는 법이 마련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2008년 위헌 신청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현재 법적으로는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증이 허락되지만 실제로는 정안인들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깨어있게 하셨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도록 ‘세상에 도전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의 생각은 늘 새로운 도전으로 차있다.
2008년 1월 세 명의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 최초로 히말라야 메라피크에 도전했다. 직접 오르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들의 대장이 돼 등반 준비와 후원을 맡았다. 해발 6476m의 산을 오르기 위해 4개월간 피나는 연습을 하고 22일간의 대장정에 나섰다. 그 힘든 여정은 MBC에서 밀착 동행해 2008년 3월 MBC스페셜 ‘생애 최고의 약속’으로 방영된 바 있다.
우리는 왜 히말라야에 오르고자 했을까. 그것은 세상에 대한 도전,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다.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출발 전 기초체력 검사와 심폐기능 검사, 3개월에 걸친 산악훈련과 보름 동안 진행된 고소적응훈련 등을 받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들은 도우미의 손, 자신의 소리와 감각에 의지해 어둠뿐인 설산을 올라가야 했다.
참가자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은 국군 하사관이었던 34세의 엄도영씨였다. 화마로 두 눈을 잃고 삶을 포기하려 했던 그였지만 사랑하는 약혼자 때문에 다시 용기를 냈다. 또 한 사람은 22세의 여대생이었다. 선천성 녹내장으로 태어난 이나영씨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 8세에는 완전 실명을 하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을 위한 봉사가 꿈이라고 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전문 안마사로 일하는 이유성씨였다. 그도 시각장애인이었는데 사랑하는 아들까지 소아 안구암으로 두 눈을 잃게 되었다. 열두 살 난 아들이 어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등반을 결심했다.
그들이 등정에 성공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란 듯이 메라피크 정상에 우뚝 섰다. 몰아치는 칼바람, 뺨을 때리는 눈보라 속에 흐르던 눈물도 함께 얼어 버렸지만 가슴속에서는 감동의 화산이 폭발했다. 그들은 장애를 더 이상 핸디캡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했고, 정안인들은 시각장애인들의 잠재력을 깨달았다고 했다.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내 가슴에도 환희와 감사가 넘쳐났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10) 1994년 세계 최초 귀로 읽는 ‘종달새 도서관’ 열어
나에게는 아직 하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나라를 지키는 일은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 군대에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초등학교 전화교환원 경력을 세워 통신병으로라도 입대하게 해달라고 몇 번이고 졸랐지만 소용없었다. 군대 가지 못한 아쉬움을 4년 동안의 군목생활로 대신했다.
그런데 그 꿈을 잠시나마 이룰 수 있었다. 2010년 10월 시각장애인들을 모아 병영훈련 체험을 했다. 나를 포함한 37명의 지원자가 1박 2일간 김포 청룡부대에 입대했다. 첫날은 PT체조 24개 동작을 다섯 개씩 소화했고 다음날엔 부대 인근의 문수산을 빠른 걸음으로 오르내리는 산악행군을 했다. 개인 사격은 공포탄 10발을 지급받아 쏘았다. 내무반 침상에서 밤을 보내고 사병들과 똑같은 식사를 했다. 40대 이상인 사람은 나 혼자였지만 정말 환상적인 체험이었다. 한동안 “나는 해병대 출신이야”라는 농담을 하고 다녔다. 진짜 해병대원 분들이 들으신다면 포복절도할 일일 것이다.
초등학교에 늦게 입학한 나는 눈 대신 손가락 끝으로 점자책을 읽었다. 공부에 목이 말랐던 터라 독서량이 많았다. 하지만 눈으로 읽는 것에 비하면 정보 흡수가 한없이 느렸다. 신학대학시절, 오픈 북 시험 때가 기억났다. 다들 책을 펼쳐들고 답을 쓰는데 책이 있어도 볼 수 없어 너무 속상했다. 누가 옆에서 읽어주면 좋겠다 싶었다.
시각장애인에게 언론보도를 ARS(자동음답시스템) 서비스로 들려주거나 기독교 찬송가와 선교 내용을 들을 수 있는 음성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각장애인들의 정보접근성을 돕기 위한 도구로 ARS를 떠올린 것은 나의 아픈 경험 때문이다. 자금난으로 폐간해야 했던 ‘사랑의 메아리’가 바로 테이프에 녹음해 귀로 듣는 잡지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책 말고 다른 형태의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이런 구상을 1994년에 실천했다. 은행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세계 최초의 무형(無形) 도서관 ‘종달새 도서관’을 서울 회현동에 열었다. ‘종달새’란 이름은 쉴 새 없이 노래하는 종달새의 이미지에서 갖고 온 것이다. 당시 일간지 2종과 주간지 4종을 날마다 낭독자 다섯 분이 녹음했는데, 신문 하루치를 녹음하면 12시간 분량이었다. 녹음 시간 때문에 아침에 배달된 신문은 저녁이 돼야 음성서비스가 가능했다.
하나님께선 좀 더 좋은 방법을 연구하게 하셨다. 동료와 함께 2년간의 연구 끝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 내용을 자동으로 음성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전화를 이용한 음성 포털 서비스 제공 시스템 및 그 방법’으로 특허도 받았다. 그래서 2008년부터는 무려 58개 신문·방송과 12개 월간지를 서비스하고 있다. 이용자도 하루 5000명에 이른다. 국내 어디서 걸든 이용자가 시내 통화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용자들 사이에 “애인 없이는 살아도 전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인기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이동에 제한이 많고 점자로 돼 있는 책, 공문서나 표지판이 별로 없어 문자활동에 난관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점자는 배우기가 어려워 시각장애인 중 87.1%가 점자를 못 읽고, 후천적 장애인인 경우엔 극소수만 점자를 읽을 수 있다.
국내 40여 곳에 이르는 점자도서관에서 점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음성도서 등을 제공하지만 배달체계나 이용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다. 이에 비해 종달새 전화도서관은 이용자가 전화만 걸면 되므로 편리하고 즉각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시간도 절약된다.
그러나 종달새전화도서관의 운영은 쉽지 않다. 서울시와 중구청에서 한 해 6000만원을 지원받지만, 실제 운영에는 4억원이 들어가므로 독지가들의 도움과 음악회 수입 등으로 메우는 실정이다. 자치단체나 기업에서 좀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역경의 열매] 신인식 (11·끝) 다시 보고싶은 세상 ‘시각장애인 복음화’로 승화
내가 두 눈으로 본 마지막 풍경은 가재 한 마리와 구름이 잔뜩 낀 하늘 그리고 둥근 우물이다. 그날 할머니는 나를 업고 계시다 우물 속에서 잡은 가재 한 마리를 보여주셨다. 어린 나는 움직이는 가재를 향해 열심히 기어갔다. 가재가 손에 닿을 때쯤이면 할머님이 가재를 집어 멀리 놓으시고 그러면 나는 가재를 잡으러 부리나케 기어갔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할머니는 연신 박장대소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그날은 우물에 새 물을 받던 날이라고 했다. 가끔 이게 진짜 내 기억인지 어머니 말씀으로 상상하는 것인지 긴가민가하지만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소중하게 남아있다.
지금 나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본다. 푸른 하늘, 흰 구름이라고 하면 마음속에 어린시절 본 그 장면을 그린다. 흰 눈과 쏟아지는 비, 날아가는 새와 피어나는 꽃이라고 하면 그 장면을 마음속에 그린다.
어려선 집안이 너무 가난했고 의술도 발달하지 않아서 다친 눈을 고칠 수 없었지만 이젠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1990년쯤 미국 뉴욕에 갔을 때 가장 권위 있는 독일인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병원으로 출발하는 순간부터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만약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들은, 아내는 어떻게 생겼을까. 어머니는 얼마나 늙으셨을까.
하지만 의사의 진단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한 번 더 확인받은 것에 불과했다. 어린시절에 드러난 상처는 이마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시신경을 다친 거라고 했다. 시신경이 완전히 타 버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눈은 망막, 각막, 수정체, 결막 등 여섯 꺼풀로 되어 있는데 나의 경우, 안구를 이식한다고 해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앞이 더욱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보게 되는 일이 오히려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볼 수 있기를 내심 얼마나 갈망했나 싶었다. 잠시 힘들었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마음을 추슬렀다. 볼 수 없음이 내게 축복이었음을 다시 기억했다. 볼 수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죽기 전까지 앞을 볼 수 없다는 확진이야말로 확실한 축복이었다.
초등학교를 늦게 입학한 나는 늘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공부에 대한 목마름은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를 거쳐서 미국 페이스신학교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수료하면서 많이 해소되었다. 좀 더 공부할 필요성을 느껴 명지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2011년에는 대구대에서 직업재활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ARS시스템 기반 시각장애인 웹 사용성 모형 개발’이란 박사학위 논문은 시각장애인들이 웹 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문자를 소리로 바꿔주는 프로그램의 소개와 향후 전망을 담았다.
나의 꿈 이야기로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고 싶다. 나의 어린시절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잘살 수 있는 재능을 주셨다. 침술과 안마로 물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복음화의 소명을 받은 후 나는 잘살고 싶은 재능과 마음을 하나님께 반환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여전히 선교회의 어려움은 계속되지만 나의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늘 감사하다.
오늘도 무한도전을 꿈꾼다. 절망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저를 대체 얼마나 크게 쓰시려고 이런 아픔을 주시나요. 어떤 계획을 하고 계시기에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나요.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래서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며,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다는 걸 안다. 과거의 고난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다. 그동안 나를 응원해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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