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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것과의 소통
<컨택트(Arrival)>(드니 빌뇌브, SF/스릴러, 12세, 2017)
<디스트릭트 9>(닐 블롬캠프, 2009)에서 외계인에 대해 인간이 보여준 폭력적인 태도는 남아공의 인종 차별의 현실을 반영한다. 소통의 의지가 분명했던 외계인들에 대해 인간은 그들의 거주 지역을 제한하고, 행동을 규제하며, 또한 그들을 지구인들의 유익을 위한 소비적인 의미 그 이상으로 결코 상대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감독은 남아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의 현실을 폭로했지만, 굳이 남아공에만 제한할 수 없는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화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그것이 남아공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입증한다. 갑을 관계로 상징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외계와 외계인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UFO 출현에 대한 보고나 여러 SF 장르의 문학과 영화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런데 영화적인 상상력은 외계인이 정말로 존재하느냐는 질문보다는 그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이런 점은 <디스트릭트 9>과 <미지와의 조우>(스티븐 스필버그, 1997) 그리고 <E.T.>(스티븐 스필버그, 1982)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늘 방어적이고 또 공격적이다. 오염을 염려한다는 점에서 방어적이며, 인간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과 염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미래의 파트너로서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소통을 시도하는 노력이 없지 않지만 언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질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린이나 여성이나 주변인이다. 영화 속 외계인, 그들은 인간에게 영원한 타자일 뿐이며, 또한 인간 사회에서 타자를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외계인들은 소통을 위한 존재이기보다는 인간이 타자에 대해 보이는 태도를 통해 인간의 폭력적인 본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외계인을 등장시키고 있는 <컨택트>는 소통 자체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신선한다. 물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작품으로 조디 포스터가 주연으로 출연한 <콘택트>(1997) 역시 외계와의 소통 자체를 다뤘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계인’과의 소통이라고 볼 수는 없는 내용이다.
<컨택트>는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 소설 “Story of Your Life”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니만큼 주제의 선택을 발뇌브 감독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계인과의 소통과정을 단순히 제3자의 입장에서 보도록 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한 것은 감독의 뛰어난 능력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외계인을 사각의 앵글에 가두어 놓은 것은 인간이 외계인을 대하는 전형적인 시각이 어떠함을 반영한다. 이런 시각에 대해 7개의 다리를 갖고 있다 해서 헵타포드(heptapod)로 명명된 외계인은 자신의 손으로 인간의 세계와 직접 접촉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일단 영화의 내용과 관련해서 본다면, 영화는 다음의 질문을 전제한다. 만일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소통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이며, 지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것은 사실 새로운 기술 혁명을 염려하며 제기하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미래를 여는 기술혁명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동력임에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의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SF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인간은 외계인에 대한 반응에서 매우 방어적이고 또한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많은 경우 지구를 오염시킬 수 있는 존재였고, 또한 인간을 공격하는 괴물로 표현되었고(<에일리언>, 1997), 휴머노이드 로봇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디스트릭트 9>),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첨단 무기로 표현되기도 한다(<월드 인베이젼>, 2011). 동물을 연상하기도 한다(<E.T.>). 단지 상상력의 산물이고 또한 지구중심적인 상상력에서 비롯한 것이긴 해도 외계인에 대한 인간의 편견이 반영된 이미지임에는 분명하다. <컨택트>에게 새로운 점은 한편으로는 종래의 방식을 취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통의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스포일러 있음)
외계에서 온 12개의 괴물체들이 지구 곳곳에 착륙해 있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전의 SF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구인의 경고와 방어 그리고 공격을 위한 요란스런 반응도 없이 어떻게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영화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도착했고, 일정 지역에 머물러 있으면서 18시간 마다 문이 열릴 뿐이다. 인간과의 접촉을 원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하나가 아니라 12개이며 세계 곳곳에 착륙한 걸까? 도대체 무엇으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외계물체의 출현에 대해 인간이 무엇보다 궁금해 하는 것은 그들이 왜 이곳에 왔는가 하는 것이다. 각국의 정부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과 비교언어학자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소환된다. 루이스는 언어를 과학적으로만 연구하기보다는 언어적인 표현이 담고 있는 느낌을 통해 의미를 연구하는 학자다. 루이스가 외계인과 소통하는 과정은 영화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 루이스는 어린이가 언어를 배우는 방식을 사용한다. 개별 단어를 주고받으면서 거기서 얻은 것을 자신의 언어체계 안에서 의미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말하고, 이름을 소개하며, 또한 오염을 막기 위한 방호복을 벗는다.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열었다고 알린 것이다. 루이스는 단어학습을 통해 조금씩 소통하면서도 말 자체의 의미보다 말에서 오는 느낌에 주목하려 노력한다.
학습은 비록 매우 더디게 이뤄져도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구 쪽 사람들이 먼저 폭탄을 터트리면서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다. 게다가 외계인의 말에서 ‘무기’라는 말을 들은 후로 상황은 급변한다. 그동안 루이스의 작업에 의문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무기’라는 말을 들은 즉시 모든 소통의 노력을 중단하고 공격 태세를 취한다. 특히 관건은 중국이다. 왜냐하면 외계 물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서 중국의 역할이 가장 크고, 또 실제로 가장 강력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말 자체의 의미보다 말에 담겨진 느낌을 통해 심층적인 의미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외계인이 사용한 ‘무기’라는 말이 지구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사실은 ‘선물’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루이스는 중국의 책임자를 설득하여 공격을 막는데 가까스로 성공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영화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현재의 시간에 과거와 미래가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어 내용의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한 가지 두드러진 현상은 외계인과 소통이 깊어질수록 단편적인 장면들의 등장이 더욱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각종 의문이 풀리고 또 현재의 상황에서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 장면들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외계인과의 소통을 통해 루이스는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루이스가 위기의 순간에 중국 책임자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미래에 그의 아내가 남길 유언을 미리 전달했기 때문이다. 자막이 없이 중국어로만 되어 있지만 다음의 내용이라고 한다.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 오직 과부만 남을 뿐이다.(War does not make winners, only widows)”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갑자기 루이스 개인의 문제로 집중된다. 이것을 매우 낯설게 느끼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우주전쟁>(스티븐 스필버그, 2005)에서 외계인의 침입과 그에 따른 우주전쟁을 한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말하기 위해 사용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야기 서술에서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다. 영화는 거창하게 포장되긴 했어도 한 개인의 삶의 의미를 조명하는 이야기일 뿐임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주제와 메시지의 매치가 잘 안 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만큼 개인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한 개인의 죽음을 계기로 인류의 생명을 성찰했던 <트리 오브 라이프>를 떠올려도 좋겠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와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다.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지만,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이다. 남편과는 별거하는 것 같고 딸은 암으로 죽는다. 과연 이런 미래를 알고도 그녀는 현실의 감정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불행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 부정할 것인가?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현재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녀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풀어가는 방식이 새롭다. 이야기는 우주적인 차원이라도, 사실은 너의 이야기 곧 나의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Arrival이란 영화의 원제는 어디서 왔는가를 묻게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 사용된 ‘컨택트’는 소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의미의 일부만을 반영할 뿐이며 오히려 영화의 의미는 소설의 원제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현재에서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경험될까? 그것은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과거가 다시 회귀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을 경험하는 세대에게는 여전히 낯선 것이다. 다가올 미래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것이겠는데, 소통의 의지에서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는 새로운 것을 기존의 것으로 읽어내려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새로운 것을 새롭게 볼 수 있기 위해선 지금과는 다른 시각이 필요하지만, 그런 시각을 갖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늘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학은 이것을 사피어-워프 가설로 설명한다. 곧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언어학적인 가설이다. 이 가설은 증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학계에서는 전적으로 수용하지도 않고 있으며, 그렇다고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위키피디아 참고)
낯선 것에 대한 지각을 단지 언어적인 사고에만 맡길 수는 없다. 사고 이전에 먼저 감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고 이전에 감정적으로 먼저 반응을 보이는 것과 관련해서는 뇌 과학이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인간의 생존을 위해 외부의 위협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편도체의 작용 때문이다.
루이스가 보여준 태도는 우리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미래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먼저는 언어에서 느낌을 얻는 것과 마음을 여는 일이 중요하며, 기존체계로 낯선 것의 의미를 해독하려하기보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낯선 것과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선 무엇보다 감성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이곳에서 낯선 것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가 아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현재의 느낌에 충실하게 반응하면서 살아야 할까? 영화는 바로 이런 많은 질문들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볼 때, 미래를 말하는 방식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계기이다. 하나님은 오시는 자로서 미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알지 못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염소와 양의 비유에 비춰 본다면, 하나님은 분명 낯선 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낯선 자와 타자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을 신학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교리를 통해 인간의 신앙 경험을 통제하려는 신학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신앙 경험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신학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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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 일단 관람후 댓글을...ㅋㅋ
순천에 상영하는 곳이 있나요?
순천 영화인구가 많나봅니다
라이언을 아이들과 함께 보는 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