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유지 목사와
1. 전남 선교와 배유지 목사
(1) 전남선교의 양상
1892년 11월 3일 제물포를 통하여 서울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 호남 선교의 길을 열게 되는데, 처음에 내한한 선발대 7인은 레이놀즈(이눌서) 목사와 그 부인 팻시 볼링, 정킨(전위렴) 목사와 그 부인 매리 레이번, 테이트(최의덕) 목사와 그 여동생 매티 테이트(최마태) 그리고 리니 데이비스(뒤에 하위렴-해리슨 목사와 결혼) 등이었다. 이들은 1893년 전라도에 부임하여 회장에 이눌서, 서기에 전위렴, 회계에 최의덕으로 구성된 남장로회 미슌회를 조직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최의덕 목사와 최마태 양은 전주 선교부를 이루어 복음을 전파하였고 전위렴 목사와 뒤에 온 유대모(드루) 목사에 의하여 1896년에는 군산교회가 시작되고 금강 입구에 있는 군산에 선교부가 개설된다.
한편 1896년 연례회의에서 나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1897년 봄에 그 책임을 맡은 유진 벨(배유지) 목사는 하위렴 목사와 함께 나주에 가서 성안에 임시 숙소로 쓸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고 성 밖에는 선교기지로 쓸 땅을 매입하여 전도를 시작했는데, 보수적이고 완고한 양반세력의 아성인 나주사람들의 태도는 심히 적대적이었다. 청년들이 작당하여 행패를 부리고 선교사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토지와 건물을 환매하고 목포를 선교지로 선택하게 된다. 목포는 1897년 10월 1일에 개항된 도시로서 발전의 가능성이 있었다. 1898년 가을에 배유지 목사 가족과 오 원 의사가 이곳에 이사하여 목포 선교를 개시하고 1899년에는 스트레이퍼 선교사가 여성과 어린이 전도에 힘썼고, 1900년에는 오 원 의사가 조지아나 휘팅 양과 결혼하여 목포 선교는 더욱 활발해진다.
이에 비하여 광주는 조금 늦게 190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에 배유지 목사 가족과 오 원 선교사 가족에 의하여 선교부가 개설되고 광주교회가 시작되는데, 그 곳은 당시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로 광주의 남문 밖에서 멀리 떨어진 구릉의 벌거숭이 산이요, 묘지가 많은 외딴 곳이었다. 거기에 목포 교회에서 김윤수(金允洙) 집사 가족이 미리 와서 선교부 터를 잡고 두 채의 집을 먼저 지었으며, 임시 숙소가 마련되자 그 해 12월 20일 배유지 목사와 오 원 의사 두 가정이 12상자나 되는 짐을 가지고 광주에 이주해오는데, 처음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배를 타고 온 후 부인과 어린이들은 인력거를 타고 20마일 떨어진 광주까지 오게 된다. 목포에서 광주까지의 여행은 기차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이틀이나 걸린 것이다.
"복음 사업의 활발한 진행이 인근 지방에서는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선교사들이 도착하기까지 광주에서는 시작되지 못했다. 초기에 있어서 많은 다른 점과 마찬가지로 복음사업은 주로 큰 도시보다 마을들에 빨리 전파되었는데, 광주도 전형적인 경우다. 이 도시에서의 첫 번째 교회예배는 1904년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날 벨 목사의 임시 사택에서 열렸다……. 여자 남자들이 서로 딴 방에 들어오자 중앙에 서 있던 벨 선교사는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설교했다. 이 간단한 시작에서 광주 교회는 성장하게 되었으니, 불과 6년 안에 500명을 헤아리는 교인들이 모이게 되었다. 1910년까지 거의 대부분을 교인들의 기부에 의하여 건축된 이 교회는 넘치는 무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확장되었다. 선교부가 개설된 후 벨과 오 원에게는 굉장한 활동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들은 함께 25개 군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과 매년 급속도로 성장하는 사업 속에서 일했다. 처음 5년간에 예배 처소의 수는 4곳에서 77개로 증가하였고, 세례교인의 수는 72명에서 1,500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여러 가지로 불확실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나타난 그 무렵 이 고장의 교회개척은 다음과 같다.
1898년 목포부 陽洞교회 (배유지, 변창연)
1899년 나주군 三道里교회 (정원삼, 이문오, 윤상삼)
1900년 함평군 文場里교회 (박찬익, 임봉춘, 정기선)
1901년 광주군 松汀里교회 (배유지, 오기원)
1902년 장성군 寶生里교회 (배유지)
화순군 大浦里교회 (이경래)
해남군 右水營교회 (배유지), 先頭里교회 (오기원, 변창연)
1903년 장성군 栗谷里(永信)교회 (오기선, 도정희),
黃龍里교회 (봉덕거, 김도인, 지원근)
영광군 大田里교회 (김문삼, 변창연, 표익선, 문양삼)
나주군 廣岩里교회 (김윤환, 김치묵, 김영환, 최치삼, 김동섭, 이유장)
1904년 광주군 楊林里교회 (배유지, 오기원, 김윤수)
영광군 新川里교회 (노응표, 강사홍
□ 묘량 신천리교회는 영광선교의 길목이었다.
묘량 신천리교회는 영광과 광주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여 영광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1904년은 배유지 선교사가 선교지를 광주로 옮기기 위해 활동하던 시기로 그의 전도활동을 통해 신천리교회가 성립된 것을 알수 있다. 이 신천리교회를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노응표 씨는 배유지 선교사의 유급조사로 크게 활동하던 자였다.
이 교회는 1904년 3월 10일 신천리교회라고 명하고 20평 초가집을 묘량면 신천리 후동에 마련하여 첫 예배를 드렸고 1907년 묘량교회라 개명하면서 2칸 초가집을 마련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하였다. 그후 1920년 김평국 장로 장립을 계기로 교회가 안정되어 갔으나 1950년 6.25 한국전쟁 시 교회당이 전소되고 1950년 8월 김평국 장로, 최연촌집사, 김순량 집사, 김경인 집사, 조영민 집사, 김삼철, 김영팔, 갓난이 등 8명이 신천리 구동부락 후동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하는 고난의 과정을 겪기도 했다.
1956년 신천리 후동 교회터가 마주 보이는 마을 입구에 예배당을 새로 짓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열악한 농촌 현실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복음전도 사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위와 같이 선교사들의 열성적인 전도활동과 교인들의 노력에 의하여 단기간에 각 처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현재의 행정구역에서 보면 광주 선교는 송정리교회(1901), 광주교회(북문안교회, 1904), 삼소지교회(1905), 효기리교회(1905), 중흥리교회(1907), 일곡교회(1909)순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광주·전남에 많은 교회가 개설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된 것은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송한 배유지 목사와 오 원 선교사의 선교활동에 크게 힘입었다고 하겠다. 광주 선교부의 개척자요 광주교회의 창설자요 또한 수피아와 숭일학교를 설립한 배유지 목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고찰한 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