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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 器중기 21대]1685~1757
*매산고택*
자는 道翁도옹이요 호는 매산이다.함계.석달의 아들로 훈.지수 문인으로 이현일에게도 배웠다.경사에 통달했고 典故전고와 禮制예제에 아주 밝았다.1727년 생원으로 증광문과.병과로 급제 1731년 승정원 주서가 되고 결성현감으로 나아가서는 吏道이도 를 바로잡으며 여씨향약에 의거하여 향속의 순화에 노력하기도 했다. 사간원 정언을 거처 1753년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고 형조참의에 올라 이인좌의 난후에 조정에서 영남인물들을 정권에서 소외시키자 왕에게
연명상소를 올려 부당한 처사를 설명했고 특히 포은속집.가례집요.주서절요집해를 저술하였다. 임금이 公에게 짐이 어떻게 하여야 중신들을 바로 세우겠냐고 하문하시니."公은 말하기를 "신이 옛 선비들에게 들은 말입니다만은'천하만사의 근본이 임금님이 마음 하나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진실로 왕의 마음이 바른 다음에라야 조정이 밝아지고 따라서 사방이 밝아져서 만사와 만민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라 합니다"라고 답변하니 임금은 공의 말이 곳 진리로다..했다. 또 1731년 假注書가주서로 입시하여 장릉(인종의 능)을 옮기는 일에 영조임금이
예복 절차등에 하문하니 천릉도감(총책임자) 윤순이 오직 영릉(효종의 능)의 때와 갔다 답하니 임금은 모든 관리로서 장례에 참석하는 사람은 다 시복을 입거늘 시중 드는 서리는 평상복을 입고 잇으니 미안하지 않는가? 라고 하문하니 윤순이 그렇다고 답하고. 공이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신이 아는 바가 잇기는 하는바이나 외람될까.두렵다하니.공이 아는대로 말하라..
"명나라 선비 구준이 지은 가례의절에 모두가 흰옷을 입는것이 예의라 햇습니다"하니 영조임금이 공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그리 하라" 하명하셨다.여기에 매산 선생이 발문할때 (鄭齊斗정 제두 공도 매산의 말이 타당하다라고 답변하였다.)
선생은 부공 함계공이 지은 가례혹문을 수정보완 하여 가례집요가 되었고 또 퇴계가 지은 주자서절요를 풀이하여 주서절요집해란 예서를 완성하였다.
공이 만년에는 후학에 힘써다 73세 일기로 돌아가실때 방에 있는 서책들을 모두 다른방에 옴기게 하고 가지런이 눕히게해 돌아가시니 공의 문학의 사랑을 가히 짐작케 한다.
*매산고택 장독대*
[壽 崗수강 21대]1672~
좌랑공 치소의 후손 정랑 석남의 현손으로 호;남호로 소년시절 부터 빼어나고 남달라 두터이 공부하여 글에 능했다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해 어버이 곁을 떠나는 법이없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입에 대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의 공양을 반드시 친히삶고 익혀 올렸다.
길을 가다가 충효의 정려가 보이면 필히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한다 이러함을 벗들이 번거로움을 탓하면 말하기를"자연히 느낌이 있어 하지않을수가 없소"라 했다.
또 아버지가 병석에 두달동안 누워있을때 절대 옷과 띠를 벗지 않았고 밤마다 북두칠성에 아버지의 병이 나음을 빌었고 손가락을 찔러 피를 드리워 숨이 끊어 진 것을 회생시켰다 한다.
이리하여 아버지가 천수를 누리시다 별세하시니 3년 시묘를 마치니 고을 사람들이 정효자가
시묘살이한 동네라 칭했고 公이 병석에 누워 어머니께 말하기를 죽고사는것이 삶의 운명이 있는가봅니다.소자가 원하오니 너무 상심치 마십시요.라 하고 또 아우 수헌에게 말하기를"
"너는 효도로서 어머님을 봉양함에 나로하여금 눈을 감게함이 옳으리라"하고 운명하시니..
농부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차마 농가를 부르지도 상예가 끝날때 까지 일을 하지않았다.한다.
[極 극 21대]1689~1757
창대 대임의 5세손으로 자;도원이요. 명고 幹간의 형으로 훈.지수선생에게 나아가 공부하고 재주와 예능이 빼어나고 문장을 잘 엮고 시에도 능했다.이러한 학식에도 발자취를 자연속에감추고 수신양성으로 평생 일을 삼고살았다.
[幹 간 21대]1692~1757
*명고공 (간)의 영정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초휘는 權권 이고 자는 도중이요 호는 鳴皐명고 로 창대공 대임의 5세손 極극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횡계 훈수(만양) 지수(규양) 족형에게 글을 배웠다.
1715년 국자생원에 합격하고 1725년에 증광문과.병과급제 1737년 병조정랑.청양현감.동래부사.경주부윤을 거처 1757년에 승지에 올랐다.
1731년도에 선생이 사관으로 있을때 영조임금과 자주 독청(임근과 단둘이서 대화)을 하였는데 이때 가뭄이에 흉년이들어 백성들의 고초가 심할쯤.임금이 묻기를" 근본 문제는 그렇다고하나 우선 궁지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법은 어찌할꼬? 하문하니 公께서 답하기를"
"첫째는 비축된 양곡을 고루 배급합이요.부역의 회수를 줄여야하며.조세를 감면해야만 되고.
둘째로는 지출을 제한하고.사치성 소비를 억제하여 검소한 생활을 권장해 이일은 궁중에서 부터 실천하여 조정대신들이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하니...조정에 모여있던 대신들이 경탄했고 영조임금이 크게 놀라며 칭찬하며 그렇게 하도록 하명를 내리며 짐이 먼저
실천할것이니 조신들도 짐에 뜻을 따라라 했다.
또한 공이 사헌부 지평에 있을때 조정의 예법을 고치고 1733년 국상이 일어나자 대신들이 흰 가죽신을 신는 것을 보고 예법에 어긋남이니 삼으로 만든 신을 신게 고치니 왕이 감동하여
상례 보편에 기록케 했다.1737년에 청양현감으로 부임한것으로 부터 여러 고을로 정임할때 마다 명관의 이름을 떨첬다. 또 공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길에 공이 성밖을 나서자 이상하게도 뭇개들이 뛰어나와 미친듯이 짖어대는지랴.이상히 여겨 개는 원시 도둑을 보고 짖는 법인데 하고 행차를 멈추고 행장을 공이 몸소 점검하니 이상이없어 다시 길을 떠나려니 또다시 개들이 짖으며 따라오는지랴.,다시 행차를 멈추어 자기가탄 가마를 뒤지어보니 아닌게 아니라 자기가 앉은 방석밑에 은방석이 있었다...공은 전송나온 아전들을 불러 이유를 물은즉...
아전들이 엎드려 말하기를.."사또께서 고향인 영천으로 가시면 그 다음날 부터는 끼니를 이을 길이 없을것을 소인들이 잘알기에 몰래 한두푼 모아 숨겨 보내 드린것이니 받아 주소서,"하고 애원했다. 선생은 묵묵히 행차를 돌려 다시 관아로 돌아가 모금한 명부를 보고 일일이 은을 나누어 주고 길을 재촉하니 성중에 개들이 짖지 않았고 얼마 못가서 도중에 행장을 조사하는 관찰부 관원이 나타나 샅샅이 뒤져보나 아무것도 없고 서책 몇권만이 공의 먼길의 동무하니
관찰부 관원장이 사과하며''돌아갔다.. 이는 공의 청백함을 개들도 알고 공이 가시는길에 불상사가 나지않게 알려준 일이니 공의 청백리로 노선된 일을 짐작 하겠도다.
공의 형極극의 애상과 형을 뒤 따라간 이야기는 따로 실었다....
*명고당*
[梯 제 21대]1689~1765
자는 가승이요 호는 남창으로 창대 대임의 5세손으로 명고간의 3종 형이며.사제의 아들이다
훈지수선생의 문인으로 학행과 문장이 세상의 종사가 되었고 문집이 3권이나 되며 공의 그릇됨을 참판 이헌경이 지은 행장을 보면''공의 풍모를 들어면 가히 욕심 많은 사람들은 청렴해지고 얇은 사람은 두터워져 땅을 편안히 여기고 하늘을 즐기리니 공의 아마도 거기에 가까울 진져!"라 했으니 공또한 곤경한 뜻을 알지어라...공의 초가집에 거처하는 방의 남쪽에 창문을 내어 햇빛이 들어오게 하여 공부함을 즐겨하여 자호를 남창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사후에 창대서원에 배향 되었다.
*남창 제의 묘소*
[拭 식]1664~1719
자는 敬叔경숙.정언 道成도성의 아들로 1687년 진사 1699년 정시문과 장원하여 正言정언으로
노론의 거두인 조태채와 이이명을 탄핵하다 파직되나 이듬해 문학으로 등용되어 안핵어사를 거처 수찬.교리를 역임. 1716년 응교로 가례원류 서문에서 소론의 영수인 윤증을 비난한 권상하 를 논척하여 이를 파면시켰고.승지에 오르고 1719년 현신들을 무고한 혐의로 원주에 유배되어 적소에서 별세하였다.
[忠 弼충필]1725~1789
초휘는 昌伯창백으로 자는 曰敬왈경.호는 魯宇노우. 煜욱의 아들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경사와 제자백가에 능통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또 성명.이기.도화.천문.지리.상수.의약.복서.등 다방면에 걸쳐 지식이 풍부했으며 불운하게도 과거에는 실패하고 더욱 학문에만 전념하여 楷書해서와 초서에도 뛰어나 많은 *[평풍과 액자]*글씨를 남겼다.
[文 啓문계]1740~1781
자;욱재.로 대사간 象仁상인의 아들로 1762년 생원 1769년에 음보로 참봉이 되고 1775년 구현시에 급제해 이듬해에 승지에 오르고.병조참의를 거처 여주목사에 나아가 임기중에 병사 했다.
[文 升문승]1788~1875
자는 允之윤지. 호는 美堂미당.또는 焦泉초천.시호;孝憲효헌으로 판관 述仁술인의 아들로
1810년 진사.가 되어 세자익위사세마가 되고 여러벼슬을 거처 공조판서.지의금부사.지돈령부사.판의금부사에 이르렀고 *특히*[書畵서화]에 능통해[山水畵산수화]를 잘 그렸다.
*****忠弼충필.+文升문승 이두분을 올린것은 이분들의 호와 자를 원문으로 올렸으니 작품을 잘보고 알아라고 올렸다.*****
[煥 翼환익]1819~
자;성의. 교리 度采도채의 아들로 1847년 정시문과.병과급제.여러 관직을 거처 한성부 우윤이 되고 공조참의.대사간.동지경연사.동지의금부사.중추부사.1902년에는 궁내부 특진관이 되고
장례원경에 이르렀다.
[好 仁호인]1728~1799 ***[가장 용감하고 선조님중에도 실천을 하신 재일 휼륭하신 포은의 후손]***
자;중요. 호는 소재요 포은선조의 후세손으로 1765년 정시문과.병과급제 하여 부수찬이 되고
대사헌를 거처 1780년 개성유수가 되어 있을때 선죽교의 포은선조님이 방원에게 결살되어
순국한 자리인 만큼 公은 기어코 일반 사람들이 선조님의 피 자욱을 밟고 다니는 것을 참아 보기가 민망하여 원래있던 선죽교를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고 대신해 옆아래에
새 다리를 노아 다니도록 하되 절대 여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는 지나갈수가 없게하고 직분과 관계없이 말에서 내려 지나게하니 이를 전해들은 임금이 간탄하여 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또한 공에게 벼슬을 더 하니. 1781년 한성부 판윤.1788년 병조판서에 오르고
뒤이어 판의금부사.육조판서에 이르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瀁 양].~1668
조선의 문신으로 이름난 학자로 자는 안숙.호;부익.으로 철의 손자이다
1636년 병자호란./사림으로서 난을 피해 강화에 들어가니 강화성이 적국에 함락당하여 분열히 자결하려다 주위의 강곡한 만류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후 동몽교관에 기용되고 의금부 도사.광흥창 주부.수운판관등을 거처 지방 수령으로 자청해 나아가 치적을 올렸고 1662년 장령에 올랐으며 학문에는 송시열.유계.등과 가까웠고[어록해를 증수간행]했으며 初諡초시는 貞節정절 뒤에 文節로 改諡개시 했다.
감무공파에서는 이분과 손자 존의 영향으로 송시열 문하생이 빛을 보았다.
[存 존]1659~1724
자는 장원이고 호는 첨의당으로 송강 철의 현손.普衍보연의 아들로 외숙부 민정중에게 배워
1684년 사마시 합격하니 己巳換局기사환국 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문과를 단념하고 송시열을 아련하고 글공부에 전념하는데 스승 송시열이 유배당하자 배소까지 따라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며 스승의 대작인이 된다.
이어 1696년 장녕전 참봉이 되어서 바로 동몽교관.영춘현감.공조정랑.등 여러곳을 거처 금천현감에도 역임했다.
[一 鎭일진]1713~1752
자는 안중 호는 학고이며 해남현감 요산공 호례의 현손으로 일찍부터 1730년에 훈.지수 선생에게 나아가 문하에 급문하여 經旨경지.의 講質강질을 받으며 학문에 깊이 심잠궁구 하였다
또 1738년에는 족제인 일전과 더불어 입암서원에 가서 독서하고 서상을 이어서 강마까지하기도 했다.그러나 公에게는 학문외에는 너무나 불우했다한다 나이30아래에 부모님을 연달아 상하고 동생 일횡과 계부와 종제등 상고가 疊첨出출하여 가세가 바닦이 났으나 公은 항상 탐구경전하며 득실에 자적하였고 저서로는 학고집이 있다.
[一 鑽일찬]1724~1796
자;학여.호;죽비로 매산공 중기의 둘째아들로 일찍 정훈을 이어받아 두텁게 배우고 집안일에
항상 두루두루 살펴서 잘못된것을 곱게 타이러고 힘써 행하며 은거하여 道도를 구하여 행했고 특히 주자의 글들을 매우 좋와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완상하였다.
통덕랑을 지냈고 저서는[죽비집]이 있다.
[一 銓일전]1714~1796
자;공택 호는 축와로 구계공 중주의 아들로 병와공(이형상) 문하에 공부하다가 16세가 되자 조부 오회당(석현)의 명으로 횡계 훈지수선생에게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후에는 매산공 중기에게 나아가 연마하니 1753년 향시와 사마시에 연달아 합격하고 문사를 뜰치나 영달(벼슬)에는 뜻이 없어 족형 일규.일준.일탁등과 문자제들을 이끌고 횡계서당에 들어가 강마하며 霞谷하곡의 式好窩식호와 鄭燁정엽과 매헌공(정욱) 양公을 모시고 예문을 토론하여 지식을 넓혔으며 몽암(정희) 노우(정충필)등과 마주앉아 자주 자경하기도 하였다.
1777년에는 선조 호수공(세아)과 백암공(의번) 양세를 立祠奉安입사봉안 하였다
1791년에는 이명천.이상원.신체인.과 횡계정사에 회합하여 양수문집을 편집했고 벼슬은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제수받았고 축와유집을 남겼다.
[一 金昌 일창]1721~1793
자는 용약.호;낙포로 삼휴공 호신의 현손으로 매산공 중기의 문인이다.
문과급제하여 참봉과 감찰을 지내다 1793년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만시를 지어놓고 별세하였다.시에는"[한양으로 부터 옛 고향에 돌아온 오로지 한가한 한 노인네여.자양의 호수와 파도 위의 달이요,선바위 그늘 속에 바람이어라,"]고 했다.
[一 壁 일벽]1722~1796
자는 완경.으로 대전동 어봉 호문의 손자 화언(섭양)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근위장군에 오르고 지중추 부사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문학에 독취하여 노력한바 있으나 남아있는 자료가 전무하다.
[夏 浚 하준]1738~1819
자는 경원이요 호는 교와로 학고공(일진)의 아들이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종숙부 매산(중기)에게 수학하였다.
종숙부 매산공 마져 별세하시니 족조 이신 휘;중직을 즐겨 찾아 뵙고 나아가서는 제암.최종겸공과 기와.이사원공등과 더불어 先師선사의 遺文과 에서를 수정하고 산수정을 짓고 釋采禮석채예를 주관하고 또 환구서당에 호수/백암.양세조를 존모하여 묘우를 창건해 시축지소로 삼으며 양세실기를 간행해.조가에 납하고 시시때때로 한양까지 왕래하며 해좌 정범조.번암 채제공.여재 목만중.판서 김노진.참판 채홍리.승지 이헌경등등과 문학을 토론 강론하고 복계영당을 창건하여 명고공(간)선생을 향사케 하였다.
여러문중 사람들과 시조단하(남성제)아래 재실을 중신하고 입암서원을 사림들과 함께 중수한후 환구에서 평천으로 이거하여 후생을 가리키다 일생을 다햇다.
[夏 濬 하준]1737~1806
오회당 석현의 증손으로 자는 희문.호는 운서로 10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숙부이신 축와공(일전)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숙부의 명으로 매산 중기에게 배워 1780년 생원이 되고
향해시에는 3번이나 합격해 동년 국상에 등과 하였다 4년후에는 족질 내휴와 더불어 가전에서 선조 호수/백암 양세의 포전을 청하여 백암공에게[충효자지가문]이라 정여가 내려져 번암 채제공에게 기문을 득하고 호수선조의 시호를 청하니 나라에서 강의 라는 시호를 내렸다.
[一 慶 일경]1738~1812
자는 선주.호는 운강으로 사성공(종소)의 3자 지평공(이심)의 후손으로 벼슬은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
[蓍 休 시휴]1800~1871
자는 용오.로 호는 장암.이며 취성당 시간의 5세손으로 당대의 높은 학행으로 관료와 어사의
추천하는 장계가 여러번 올려졌고 벼슬에는 운이 따르질 못했으나 문사의 道와 덕행이 높은
조선시대 말기 선비로 저서로는 장암문집이 있다.
[煥 直 환직]1844~1907
公의 초휘는 치우. 자는 伯溫백온 호는 東엄으로 삼휴공 호신의 후손으로 영천 검단리에서 출생한 父子부자 분들은 한말의 의병장이시다.
학문을 열심히 닦아 과거에도 급제하나 원래는 의술학에 능하여 한의학 박사 의사로 봉사하다가 문과급제후에 1887년 의금부의 도사에 머무러다 1894년 삼남 참오령에 임명되어 겨울에 다시 토포사에 임명.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 시종관이 되고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로 삼남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피고 1900년 도찰사에 올라 경주부윤이 백성과 농민들에 횡포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지니 이를 나무라 파직하려다 오히려 봉세관에 의해 구금 되어버렸고 석방되자 구리고 구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려고 하나 고종이 허락하지를 않고 다시 중추원 의관에 제수하여 왕이 친히 만류하여 직관하고 1905년 일제강권에 을사조약이 강압되자 공이 불분을 직간적으로 토설하니 고종이 공의
가상한 뜻을 알고 그에게 밀지를 내려 지자 관직을 버리고 아들 용기와 의병을 규합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다 아들 용기는 조총탄에 집중 공격 받고 아버지 보다 먼저 전사하고 공은 분발히 적과 싸우다 포위되어 왜놈의 달콤한 회유에도 격분히 나무라고 영천 조양각앞에서 총살 당했다.
*아~ 조선이여~ 대신들이여 고려때 역신들이 鄭 圃隱을 격살하여 조선을 세우드니 너희가 일장을 앞세워 鄭公을 도우지 않으니 조선은 亡 이니라...
*충효재
[鏞 基 용 기]1862~1907
자는 寬汝관여 호는 丹吾단오.로 동엄 환직의 아들로 아버지가 고종의 밀서를 받고 의병을 일어켜 나라를 구하여려 하자 公은 아버지 대신 직접 뜻을 이루리라 간청간청하여 그해 6월 영덕으로 내려와 이한구.이지포등과 대구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니 친일세력은 불창의 하고 뜻을 보어니 인원이 600명이 불과 했다.
거병한 적은 인원으로 청송.의성.영덕.영해.영양.평해.울잔.삼척등에서 많은 왜군을 격살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나 아버지 환직이 일본 헌병에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를 구하기위해 경주로 이동중에 일본 헌병군에 잡혀 옥사 하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 임금이 칙령을 내려 석방되니 공은 다시 의진을 정비하여 영덕의 신태호와 합세해 청송,영천.신녕.청하 등지에서 일본헌병 분파소등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이어 1907년10월 임압에서 전개된 영천 수비대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애서 公정용기와 이한구.손영각.권규섭등이 여기에서 전사 하였다.
[煥 悳 환덕]1857~1884
자는 응현.호는 退山퇴산으로 鶴巖학암공 時衍시연의 7세손으로 벼슬은 이조참판 시종원 부경에 오르고 고종왕의 측근에 극력보필 하여 한말 궁중비사인 {南柯錄}남가록을 남기신 분이다.
*당대의 영천문중의 높은 학행과 덕망으로 추중받은 선조는 다음과 같이 간락히 기록한다.
[一鎭일진/一珌일필/일성/一鑽일찬/일감/일관/하준/夏稷하직/夏沃하옥/東弼동필/누수공 環休환휴/귀호공 履休이휴/월호공 寅休인휴/주와공 벌/만졸당 裕榮유영/영모공 裕成유성/만오공 裕昆유곤(불천위)/유준/내금위장 유목/월연공 유술/팔우공 희규/동연공 백휴/미산공 도휴/귀휴/봉휴/원휴/복휴/운와공 하원/하오/하준/만휴/담옹공 하영/하간/초재공 유규/치규/치화/치건/치문/치운/치수/치관/치엽/치구/치원/치오/진소/연목/연박/용필/등등 무수히 많은 선비를을 위시한 조부님들이 연이어 있었으니 그 기상이 더 높음을 알만하도다...
*이러한 많은 영천 일가 선비의 후손들이 임진왜란 일기.실기.실록이 분명하나.감히 신녕 의병장 권응수 장군 후손들이 碑를 만들어 영천에 세우려다 致짜 학렬의 고조부님 일파에게 그 碑문의 내용이 권장군이 영천복성을 모두 세운 것이라 기록하여 왔기에 이碑를 영천 조부님들과 유림.유생들이 망치로 부수고 두 동각이난 그 碑를 조양강 다리밑에 버려 그碑를 세우지 못했다...
첫댓글 이모든 글들은 실록을 전재로하여 나온것이지요. 정말좋은 자료입니다.
앞으로 살펴볼일이 태산 같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