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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현재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국립공원에는 다
보탑을 비롯하여 국보 11점, 보물 22점, 사적 9개소와 함께 다양한 문화역사자원이 있어 대표적인
문화역사테마 여행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경주국립공원은 토함산(746m), 만호봉(522m), 단석산(827m), 입암산(688m), 금오봉(467m), 고
위봉(495m), 선도산(380m), 옥녀봉(214m), 송화산(147m), 구미산(594m), 소금강산(177m) 등에
둘러 싸여 있으며 남산부석, 일천바위, 상사바위, 단석, 바둑바위, 거북바위, 곰바위, 이무기바위, 삼
형제바위, 도깨비바위 등 다양한 기암이 존재한다. 또한 남산(용장), 토함산(황용), 단석산(우중골),
구미산과 같은 계곡이 있고 용연폭포 등 뛰어난 자연경관 위에 많은 유적들이 어우러져 있다.
1996년에는 용도지구를 변경하여 대본 탑마을 자연환경지구를 취락지구로 변경하였으며, 2001년
에는 국민호텔, 야영장, 궁술장 등을 모두 폐지하는 용도지구 변경이 있었다. 2008년에는 국가관리
체계로 변경되면서 국립공원 경주사무소를 개소하였으며 이후 같은 해에 토함산 분소도 개소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동식물은 총 2,000여 종으로 식물 703종, 동물, 636종, 기타 661종이 서식하고 있다. 주요 식물상
에는 소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등이 있으며, 주요 식물군락으로는 소나무군락, 곰솔군락, 굴참나
무군락, 상수리나무군락 등이 대표적이다.
서식하는 동물로는 너구리, 고라니, 청설모와 같은 포유류와 박새, 물까치, 꿩, 조롱이, 말똥가리,
갈매기 등의 조류가 서식한다. 특히 멸종위기의 야생 동·식물로서는 노랑붓꽃, 노랑무늬붓꽃, 삵, 잿
빛개구리매, 조롱이, 말똥가리, 수리부엉이 등이 있다.
2009년경주국립공원은 대표 동·식물인 깃대종으로 소나무와 원앙을 선정하였다. 소나무는 경주국
립공원 식물종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지역주민들이 소나무에 가지는 애정이 남다르
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반면 원앙은 전국 산간계류에서 번식하는 흔하지 않는 텃새로 경주국립공원
구미산 및 토함산지구에 사계절 관찰되며 현재 천연기념물 제327호로 지정되어 있어 개체 수 증가
와 서식지 증대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상태이다.
경주국립공원을 절대적으로 차별화시키는 특징은 바로 풍부한 역사·문화자원이다. 먼저 토함산지
구에는 대표적인 문화재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서기 751년김대성에 의해 중건된 불국사에는
국보 제20호인 다보탑과 21호인 불국사 삼층석탑, 22호인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등 6개의 국보가
존재한다. 아울러 석굴암 석굴, 신라태종무열왕릉비 등을 포함하여 모두 11점의 국보가 있다. 아울
러 불국사 사리탑, 석굴암 삼층석탑 등의 보물도 22개가 존재한다.
사적으로는 경주 남산일원, 경주 남산성, 신라 탈해왕릉 등이 존재하며, 기림사 삼층석탑,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등 12개의 유형문화재도 분포하고 있다. 경주국립공원이 가진 역사·문화자원의 우수성
은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역사유적지구 등이 각각 1995년과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서 확인되었다.
경주국립공원을 몸소 체험하기 위한 탐방로는 총 21개 소로 55.50㎞에 이른다. 대표적인 탐방로는 옥룡암∼전망대, 삼불사∼바둑바위, 약수골∼금오봉 등이 있으며 2009년에 남산자연관찰로가 지정되어 신라역사와 석탑, 지역유래 등 문화해설을 시작하였다. 경주국립공원의 연간 탐방객 수는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2010년에는 310만 6,903명이 다녀갔으며 월별로 따졌을 때 5월에 58만 7,585명으로 가장 많은 탐방객이 다녀간 것으로 조사됐다.d
3. 계룡산 국립공원
지도상으로 대전·공주·논산을 연결하여 세모꼴을 그린다면 그 중심부에 자리 잡은 것이 계룡산이
다.
이 산은 대전에서 서남쪽으로 25㎞ 지점에 있는 동학사 지구와 공주에서 동남쪽으로 19.6㎞ 지점
에 있는 갑사 지구로 구분된다. 동경 12.7°7′∼12.7°19′, 북위 36°16′∼36°28′에 있으며, 총 면적은
65.34㎢인데, 공주시에 42.45㎢, 계룡시에 11.9㎢, 논산시에 2.12㎢, 대전광역시에 8.86㎢로 걸쳐
있다.
산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天皇峯, 845m)에서 연천봉(連天峯, 739m)·삼불봉(三佛峯, 77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계룡산은 풍수
지리에서도 우리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힐 뿐 아니라, 관광지로도 제5위를 차지하여 국립공원으로 지
정되어 있다.
특히, 계룡팔경은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삼국시대부터 큰 절이 창건되었으며,
지금도 갑사·동학사·신원사(新元寺) 등 유서 깊은 대사찰이 있다. 특히, 철당간·부도·범종, 각종 석
불, 『월인석보』의 판목 등은 현전하는 중요한 불교 문화재이다.
또, 숙모전(肅慕殿)·삼은각(三隱閣) 등 충절들을 제사하는 사당과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오누이탑, 그리고 조선 초에 왕도를 건설하다가 중단한 신도안 등 명소가 많다.
이 산은 『정감록(鄭鑑錄)』에 피난지의 하나로 적혀 있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때
신도안을 중심으로 수많은 신흥종교, 또는 유사종교들이 성하였으나 지금은 정리가 되었다. 계룡산
은 공주·부여를 잇는 문화 관광지로서, 유성온천과도 연결되는 대전광역시 외곽의 자연공원으로 크
게 각광을 받고 있다.
계룡산 일대의 지질은, 대체로 서북부에 쥐라기의 편마암·화강암, 남부 및 동남부에 쥐라기의 복운
모(復雲母) 화강암, 그리고 동학사를 중심으로 중앙부에 백악기(白堊紀)로 보이는 홍색 장석화강암
이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능선 따라 남북 방향으로 반암류(斑岩類)가 관입하였고, 부분적으로 염기성맥암(鹽基性脈
岩)과 산성맥암이 대체로 남북 방향으로 관입하여 산체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계룡산은 지리산에서 뻗어 나온 한 갈래의 산줄기가 덕유산에서 다시 갈라져 300리를 거슬러
올라와, 공주 동쪽에서 반달 모양으로 휘감아돈 형세를 이루고 있다. 차령산맥 중에서도 비교적 험
난한 이 산은 유연히 흐르는 금강의 풍치와 어울려 독특한 산악 경관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쌀개봉(828m)·연천봉·문필봉(文筆峰, 796m)·삼불봉·수정봉(水晶峰,
662m) 등이 에워싸고 있으며, 이 밖에도 관음봉(觀音峰, 766m)·막적봉(莫積峰, 664m)·임금봉(553
m)·형제봉(520m)·장군봉(將軍峰, 410m)·도덕봉(道德峰, 524m) 등 크고 작은 20여 개의 봉우리들
이 연봉을 이루고 있다.
또한 주능선이 남북으로 크게 뻗은 가운데 다시 서에서 동으로 두 개의 능선이 나란히 뻗어내려 F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들 주요 봉우리 사이의 7개 골짜기에서 발원한 노성천(魯城川)·구곡천(九
曲川)·용수천(龍水川)·갑천(甲川) 등이 금강으로 흘러든다.
이 계룡산은 금강을 허리에 두른 채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논산시 두마면, 대전광역시 중구 유
성 지역 등에 걸쳐 있다. 계룡산은 풍수지리설에서 대단한 명산으로 꼽아 일찍이 조선 왕조가 이 산
기슭에 도읍 터를 고려해 보기도 하였다. 또한 그 뒤 수많은 신흥 유사종교들이 모여든 것도 계룡산
을 풍수설에서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풍수가에 따르면, 용세가 제 몸을 휘감아 제 꼬리를 돌아보는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이루
었고, 상봉인 천황봉이 형제봉·중두봉(中頭峯)·종봉(終峯)을 이루어 이것을 제자봉(帝字峯)이라 한
다.
계룡산은 산형이 수체(水體)로서 동서로 병풍같이 둘려 있고, 산이 북에서 동서로 싸안으니 두 쌍
의 봉황이 서로 희롱하는 형상이요, 흙빛이 바래서 흑기(黑氣)를 벗으니 백옥이 되었다고 한다.
힘차게 뻗어 내린 주룡이 북으로 가니 한줄기 한줄기가 조각난 황금 같고, 청룡은 겹겹이 감싸서
주봉을 호위하고 백호는 국사봉(國師峯)의 호랑이가 얌전히 엎드린 형상이라 한다. 다시 안쪽을 내
려다보면 멀리 장군봉·천쌍봉(天雙峯)·함지봉(咸芝峯)·함박봉(咸朴峯) 등이 주봉을 향하여 하례하니
군신이 다정하다.
수세는 골육수(骨肉水: 무덤이 있는 산 밑에서 흐르는 물)로 좌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앞으로 모
여 양수합금(兩水合襟)을 이루었고, 주위 봉우리들은 사방에서 사신팔장(四神八將)이 둘러싸 나성
(羅城)을 이루었으며, 삼길육수방(三吉六秀方)의 영봉들이 정기를 내뿜어 신도안을 비추는 형국이라
한다.
동식물 분포는 식물이 860종, 포유류 25종, 조류가 52종, 곤충류가 1,184종, 양서·파충류 16종, 담
수어 25종 등으로 약 2,100여 종의 동식물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물에는 황매화·팽나무·벗나무·회나무·느티나무 등이 있고, 산짐승에는 노루·담비 등, 조류에는
딱다구리·까치·두견이·뻐꾸기·왜가리 등, 곤충류에는 참매미·호랑나비·여치 등, 기타에는 두꺼비·청
개구리·살모사 등이 있다. 계룡산의 수목 분포는 54% 이상이 침엽수이고, 활엽수가 6%, 나머지 4
0%는 떨기나무덤불이다.
관다발식물[管束植物]은 양치류(羊齒類)가 12과 23속 38종 3변종이고, 나자식물(裸子植物)은
5과 12속 20종 1품종이며, 속씨식물[被子植物]은 102과 372속 612종 8아종(亞種) 146변종 24
품종으로 충청남도에서 사는 식물 중 76%나 차지하고 있다.
한편, 관다발식물 중 목본은 304종으로, 그 중 뽕피나무·털피나무·합다리나무·예덕나무·고광나무·
오동나무·참느름나무·딱총나무·참조팝나무·산앵도나무·회양목·긴잎회양목·소사나무·말채나무·개비
지나무·단풍나무·지포나무·청복분자딸기·복분자딸기 등 19종이 한국 특산이고, 초본은 528종으로
좀닭의장풀·개맥문동·골잎원추리·금관초·벌개미취·산바랭이 등 6종이 한국 특산종이다.
이끼식물[蘚苔植物]은 25과 38속 58종으로 이 중 선류(蘚類)가 11과 11속 15종, 태류(苔類)가
14과 27속 38종이다. 이끼식물은 하천이 흐르는 동학사·갑사·신도안 주변에서 각각 43종, 37종이
분포되어 있다. 균류(菌類) 중 담자균(擔子菌)은 광대버섯속·그물버섯속·젖버섯속·낙엽버섯속·주름
버섯속 등이 우점종(優占種)이다.
식용버섯으로는 향버섯(능이)·넓은솔버섯·싸리버섯·바늘싸리버섯·나무싸리버섯·꾀꼬리버섯 등이
분포되어 있다. 동물 중 포유류에 대하여 충남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가 1981년 10월, 현지 조사와
주민들의 상황 청취를 통하여 작성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두더쥐와 오소리가 굴속에서, 쪽제비가
개울가나 인가에서 발견되었고, 고슴도치도 상당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묘포장에 해를 끼치는 고라니·노루도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팔색조와 계룡산 산정에서 발견된 큰부리까마귀가 가장 특이한 것이다.
동학사에서 갑사 사이의 우점종으로는 흰배지빠귀 24.64%, 박새 16.36%, 산솔새 10.9%이고, 백
암동에서 신원사 사이의 우점종은 흰배지빠귀 15.69%, 붉은머리오목눈이 13.73%로 나타나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이른바 ‘신라5악’ 중의 서악으로서 제를 올려 왔다. 조선 시대에는 묘향산의 상
악단(上嶽壇),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이 산에 중악단을 설치하고 봄가을에 산신제를 올렸다. 계람
산이라는 이름은 계곡의 물이 쪽빛같이 푸른 데서 나온 것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산 또는 4대 진산이라고 일컬어 왔으므로 역사가 얽힌 유적
과 유물이 많다. 그 중 갑사와 동학사가 유명하다. 갑사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절로서 화엄
종 10대 사찰의 하나이다.
420년(구이신왕 1)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4년
인호(印浩)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는 보물 제256호인 갑사철당간 및 지주, 보물 제257호인 갑사부도, 보물 제478호인 갑사
동종, 석조약사여래입상·석조보살입상·사적비·표충원(表忠院)·공우탑(功牛塔)·대적전(大寂殿)·천불
전(千佛殿) 등을 비롯하여 31개의 『월인석보』 판목 등이 있다.
갑사에서 용문폭포를 따라 1.3㎞쯤 오르면 왼쪽에 신흥암(新興庵)이 있고, 그 뒤쪽에 천진보탑(天
眞寶塔)이 있다. 이 천진보탑은 천연 석탑으로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한다.
갑사와 등지고 있는 동학사는 비구니의 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 때 회의(懷義)가 그의 스승 상원(上願)의 사리탑을 세우고 창건하였으며, 절
동쪽에 학바위[鶴巖]가 있어서 ‘동학사’라 하였다. 이 절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
를 지냈던 숙모전과 길재(吉再)가 공민왕과 정몽주(鄭夢周)를 제사지냈던 삼은각이 있다.
갑사 대웅전으로 가는 다리 밑 계곡에는 군자대(君子臺)가 있는데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 오경감(吳景鑑)이 퇴관한 뒤 이곳에 와서 울창한 수목과 기묘한 암석 사이를 굽이치는 맑은 물을
보고 가히 군자가 수양할 만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원사(新元寺)는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고찰이다. 652년(의자왕 12)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절 이름은 본디 신정사(神定寺)라 하던 것을 뒤에 신원사(神元寺)라 하였다가 1885년(고종
22)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경내에는 동쪽에 중악단(中嶽壇), 동남쪽에 5층석탑이 있다.
중악단은 신라 시대 이래의 산신 제단으로 조선 초에는 무학(無學)의 현몽으로 태조가 이곳에서 계
룡산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단은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산신 제단으로써 1879년에 중수하였
다.
그리고 이 절의 부속 암자인 고왕암(古王庵)은 660년에 창건하고 1419년에 중건한 암자로, 백제
말에 의자왕이 이곳에 숨었다가 소정방(蘇定方)에게 붙잡혔다는 전설이 있다.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도중의 청량사(淸凉寺) 터에는 남매탑(男妹塔)이라는 두 개의 탑이 있는
데, 7층탑을 오라비탑이라 하고 5층탑을 오누이탑이라 하여 합해서 오누이탑으로 불린다. 이 탑들은
고려 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하나, 백제석탑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백제의 왕족 하나가 이곳에 와서 수도하고 있을 때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주었더니,
호랑이는 며칠 뒤 예쁜 처녀 하나를 업어왔다. 왕족은 그 처녀를 고이 돌려보냈으나, 그 부모가 딸을
다른 데로 시집 보낼 수 없다 하고 다시 왕족에게로 보냈다.
왕족은 하는 수 없이 누이로 맞이하여 남매가 함께 수도하여 마침내 성도하였다. 그들이 죽은 뒤
몸에서 많은 사리가 나와 사람들이 이 탑을 세워 오누이를 공양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조는 이곳으로 천도하기 위해서 궁궐 영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조운(漕運)의 불편 등 왕
도로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따라 중단하였으며, 지금도 부남리에는 초석으로 다듬어진 암석이 94
개나 있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동문거리·서문거리 등의 지명과 함께 신도 역사의 인부들이 일을 마치고 짚신을 털어 봉
우리가 되었다는 신터리봉도 있다. 사적지와 명승지로서 널리 알려진 계룡산에 신비감까지 보태준
것이 곧 『정감록』이다.
이 책은 여러 이본이 있어 종잡을 수 없는 대목도 많은 것 같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
은, 완산백(完山伯)의 두 아들 이심(李沁)과 이연(李淵)의 형제가 정공(鄭公)이라고 일컬어진 사람과
의 문답을 중심으로 한 「감결 鑑訣」이 있다.
그 밖에는 세전(世傳)하는 예언적 문서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인 만큼 통일성이나 일관성이 없는데
있는 그대로 계룡산에 관한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정감록』에 적힌 계룡산은 크게 미래의
도읍지라는 것과 피란지라는 것의 두 가지로 집약된다.
먼저 도읍지로서는 「감결」에서 이심이 “……산천의 뭉친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니 정씨 800년
의 땅이다.”라고 하여 한양에 도읍한 이조 500년이 지나면 계룡산에 도읍한 정조(鄭朝) 800년의 시
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어서 정공은 “계룡 개국에 변(卞)씨 재상에 배(裵)씨 장수가 개국원훈이고, 방(房)씨와 우(牛)가
가 수족과 같으리라.” 하여 개국의 상황까지를 구체적으로 내다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체적 예언은 「감결」의 부록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記)」에도 “계룡산에 도
읍지가 있으니 정씨가 이곳에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복덕(福德)은 이씨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밝
고 의로운 임금이 많이 나와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피란지로서는 장차 ‘12년 병화’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큰 변란이 일어나는데, 그 시기를 암시
하는 말들 가운데 ‘계룡의 돌이 희어질 때’라 하였다. 이런 큰 난리를 피하여 살아남을 곳으로 이른
바 ‘십승지’라는 것을 열거하였는데, 그 중 계룡산 또는 계룡산 인근 지역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승지는 「감결」에 두 군데 외에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蓭山水十勝保吉之地)」
등에 보여 지명도 들쭉날쭉 일정하지 않다. 처음 나온 십승지에서는 계룡산이 아예 빠져 있으나, 이
어서 여러 문답 끝에 “계룡산의 남쪽 바깥의 네 고을 또한 인민이 보신할 만한 곳이다.”라 하였다.
두번째 나온 십승지에는 “공주 계룡산 유구(維鳩) 마곡(麻谷) 양수지간의 둘레 200리 안은 가히 난
리를 피할 만하다.”고 명기하고, 다시 “동북 정선현(東北旌善縣) 상원산(上元山) 계룡봉(鷄龍峯) 또
한 가(可)하다.”고 하였다.
남격암은 십승지에는 넣지 않았으나 그 밖의 ‘장신지소(藏身之所)’라 하여 17개의 명산을 적었는
데 그 열 번째에 계룡산을 들었다. 이와 같이, 계룡산은 문서에 따라 십승지에 들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였으나 빠진 경우에도 그냥 빠뜨리기가 아쉬워 꼭 언급하고 넘어간 것을 보면, 역시 피란지로서
공인을 받았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어떻든, 한말부터 세태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정감록』 등의 도참설에 매혹되어 계룡산에 관
심을 점차 가지기 시작하더니, 민족 항일기 말기에 들어서는 무속 등 전래의 토속 신앙을 비롯하여
각종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계룡산 신도안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중 주류를 이룬 것은 동학(東學)과 정역사상(正易思想)이었다. 이들 신봉자들은 처음에는 단순
한 수도장으로서 피란처를 겸하여 들어왔으나 차차 종교적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분파에 분파를 거
듭하여 수없는 유사종교의 집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 동학계통의 시천교(侍天敎) 교주 김연국(金演局)이 1912년 신도안을 답사하고 이듬해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그러다가 1920년 교당을 신축하여 이듬해 시천교의 본부를 그곳으로 옮긴 뒤 각
종 신흥종교가 따라 들어오거나, 이곳에서 새로 일어나고 분열되고 하면서 마침내 계룡산은 사교의
요람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비록 웅장한 산은 아니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골물이 쪽빛처럼 맑아서 멀리 보면 전체적 인상이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보면 그윽하여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래서 예로부터 온갖 종교가 번성하여
수도장이 되었고, 명당이니 피란처니 하여 도참설이 성행하기도 하였으며, 또 시인 묵객을 비롯한
탐승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계룡산은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종교적 성지가 되기도 하며, 관광의 명소로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경도진산(京都鎭山)으로 개성의
오관산(五冠山), 한양의 삼각산(三角山), 진잠(鎭岑)의 계룡산,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의 넷
을 들고,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는 가운데 계룡산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계룡산은 웅장하기가 오관산에 미치지 못한다. 골짜기가 깊숙하게 들어앉은 것이며, 국(局) 안
쪽에 용연(龍淵)이 있어 심히 깊고 넓게 흘러서 국 안에 큰 시내를 이룬 것은 개성이나 한양에는
없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갑사·동학사 등 명승지를 소개하였다.
사람들이 일러온 ‘공주십경’ 중에 ‘계악한운(鷄嶽閑雲)’을 꼽았거니와, 성종대의 문인 서거정(徐居
正)은 이에 대하여 “계룡산 높이 솟아 층층이 푸름 꽂고 맑은 기운 굽이굽이 장백(長白)에서 뻗어왔
네/산에는 물 웅덩이 용이 서리고 산에는 구름 있어 만물을 적시도다/내 일찍이 이 산에 노닐고자 하
였음은 신령한 기운이 다른 산과 다름이라/때마침 장마비가 천하를 적시나니 용은 구름 부리고 구름
은 용을 좇는도다.”고 읊었다.
또 세종조의 학자 남수문(南秀文)은 「독락정기(獨樂亭記)」에서 “남쪽으로 계룡산을 바라보니
은하수 위로 솟아난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숙종∼영조조의 학자 남하정(南夏正)의 「계룡기행」
이 그의 문집 『동소유고(桐巢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상황과 비교하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침에 동학사를 찾았다. 동학사는 계룡산 북쪽 기슭에 있는 옛 절인데, 양쪽 봉우리에 바위가 층층
으로 빼어나고 산이 깊어 골짜기가 많으며,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칠절목(七絶木)이 많다. 지금은 절
이 절반쯤 무너지고 중이 6, 7인 뿐인데, 그나마 몹시 용렬해서 옛일을 이야기할 만한 자가 없다.
……물을 따라 동구를 나와서 남쪽으로 밀묵령(密默嶺)을 넘으니 이것이 신도(新都) 북문이다.
아래로 전목정(栴木亭)에 이르니 나무는 불에 타고 반쯤 남았는데도, 그 그늘이 소 열마리는 가릴
만하니 그 크기를 알겠다. ……봇도랑의 옛 제도를 찾아 보노라니 절터에 옛 주춧돌이 보인다. 패사
(稗史)를 상고하건대 우리 태조 2년에 도읍 터를 이 신도에 잡고 성을 쌓고 대궐을 세울 계획을 세웠
는데, 어느 날 밤 꿈에 상제가 불길하다고 현몽하므로 이를 취소하고, 대신 한양에 터를 정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곧 그때의 남은 터이고, 지금도 이곳을 ‘신도’라고 하는 것은 이 까닭이다.”
다음으로 현대의 한학자 김철희(金喆熙)는 계룡산 시에서 “한 번 계룡산에 오르니 만산의 꼭대기
인데, 여기 서서 황도(皇道)가 크게 열리는 때를 보네/곤륜산의 원기가 뻗어오기를 멀리하였고, 황해
의 정신이 와서 모이기를 멀리하였네. /안으로 불교요 밖으로 유교를 믿는 것이 까닭이 있고, 하늘을
높이고 땅을 낮추는 것이 이치가 모두 그렇겠도다 /내가 온 것은 아름다운 경치 보려는 것뿐이 아니
라, 산신령께 빌어 함께 신선이 되려는 것이었네/거꾸로 계룡산에 오르니 높다랗게 하늘에 닿았는
데, 사방으로 둘러싸인 모든 산이 비단 병풍과도 같네.”라고 찬양하고, 이어서 계룡산에 대한 시편들
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우리나라 공주에 있는 산을 이름하여 계룡산이라 하는데, 그 산의 생김새가 엄연하고 따뜻해서
마치 군자가 예양(禮讓)하는 모양과 같으며, 아름답고도 곱고 덕이 맑은 가인(佳人)의 고요하고
한가로운 얼굴과 같으면서도, 높고도 커서 호걸스럽고 잘난 선비가 우뚝 서서 건드리지 못한 것만
같다. 이 태조가 도읍 터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정여립(鄭汝立)의 불령스러운 옥사가
있었으니 그 신령스러운 기운이 평범하지 않은 것은 비록 아는 자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이장
이 이 산 속에 수년 동안 살면서 봉우리 이름과 물의 명칭의 연유와 대(臺)·바위·절·민사(民社) 등
의 토속 유래까지를 다 조사하고, 가는 곳마다 절구(絶句) 한 수씩 지어 이것을 합쳐서 『계룡시첩
鷄龍詩帖』이라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한 걸음도 걷지 않고서 산의 안팎 모든 명승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가히 넓다고 하겠다.”
계룡산의 산지는 대개가 키 작은 나무로 구성된 산림지대이고, 갑사·동학사·신원사 등 큰 사찰 부
근에 땔나무 숲이 약간 산재해 있다. 농경지는 산 주위의 계룡면과 반포면 계곡에 전답이 약간 있어
쌀·보리·콩과 그 밖에 약간의 과수가 재배되고 있다.
광산자원으로는 공주시 반포면 하신리에 연간 생산량 1,800t 규모의 아연광(亞鉛鑛)이 있었으나
10여년 전부터 채광이 중단된 채 폐광되었다.
계룡산의 자원적 가치는 관광자원이 으뜸이다. 계룡산은 봄철의 춘산백화(春山百花), 여름철의
녹음방초, 가을철의 만산홍엽, 겨울철의 심계백설(深溪白雪) 등 철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은 용문(龍門)과 은선(隱仙)의 두 폭포를 이루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1964년 우리나라의 8대 관광지를 인기 투표하였을 때 계룡산은 제5위를 차지할 만큼 손꼽히는
명승지로서, 1968년 12월 31일자로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의 국립공원이 되었다. 교통편은 고속도
로를 이용하는 경우 서울·대전·대구에서 3시간 이내에 갈 수 있고, 대전 및 공주에서 시내버스가 내
왕하고 있어 비교적 편리하다.
계룡산에는 백제 문화의 유적과 대찰, 그리고 명승지가 많아 역사 관광 또는 자연 관광지로서 좋
은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다. 산의 모습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골짜기마다 푸른 늪이 있고, 시원한
폭포가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 세 곳의 큰 절이 동학사는 동쪽에, 갑사는 서북쪽에, 그리고 신원사는 서남쪽에 알맞게 배치되
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계룡산 안에는 지정 문화재가 15점, 비지정 문화재
가 13점이 있고, 크고 작은 사찰이 22개소나 있다. 자연경관으로는 산봉우리가 15개, 계곡이 7곳,
폭포가 3곳, 이름난 암굴도 5곳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계룡팔경은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제1경은 천황봉의 일출
로 계룡산의 최고봉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에 그림 같은 조망이 펼쳐진다. 특히, 아침에 보는 해
돋이는 너무도 장엄하여 가히 첫 손가락을 꼽을 만한 장관이다.
제2경은 삼불봉의 설화(雪花)로, 삼불봉은 세 부처님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
다. 이곳 나무숲에 눈이 쌓이면 신비로운 경관을 이룬다. 제3경은 연천봉의 낙조로, 산 높이로는 계
룡산 중 여섯 번째이지만 산 모양이 준수하기로는 으뜸이다.
갑사계곡과 신원사계곡을 좌우로 두고 우뚝 솟아 발 아래에 상원들과 계룡지·경천지 등의 절경을
안고 있다. 이곳의 지는 해는 천황봉의 일출과 쌍벽을 이루는 장관이다. 제4경은 관음봉의 한운(閑
雲)으로 관음정에 누워 한가로이 떠다니는 흰 구름을 바라보면 세상사가 한낱 물거품과 같다 한다.
여기서 쌀개봉으로 이어진 철쭉 길은 관음봉의 자랑이다. 공주십경의 하나인 ‘계악한운’은 곧 관음
봉의 한운을 가리킨 것이다. 제5경은 동학계곡의 신록으로, 학바위 앞에서 관음봉 고개까지 3.5㎞에
이르는 계룡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다.
흔히 ‘춘 동학, 추 갑사’라 하는데, 이 계곡의 울창한 숲에 신록이 돋아나면 온 산에 생기가 약동한
다. 제6경은 갑사계곡의 단풍으로 계룡산 단풍은 널리 알려진 가경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갑사를
싸안고 오리숲에서 금잔디고개에 이르는 갑사구곡의 단풍은 마치 불타는 듯하여 가을 계룡의 으뜸
가는 경관이다.
갑사구곡은 남쪽으로 난 계곡에 있는데 ① 용유소(龍遊沼), ② 이일천(二一川), ③ 백룡강(白龍崗),
④ 달문택(達門澤), ⑤ 군자대(君子臺), ⑥ 명월담(明月潭), ⑦ 계룡명암, ⑧ 용문폭포, ⑨ 수정봉이
그것이다. 특히, 제6곡인 명월담에는 취사장이 마련되어 있고, 왼쪽 바위 밑에 석조약사여래상이 있
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용문폭포를 거쳐 금잔디고개·오누이탑·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연천봉·관음봉·은선폭포를 지나 동학사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제8곡인 용문폭포는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절경이며, 제9곡인 수정봉은 이름 그대로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피라
미드 모양의 바위산이다.
제7경은 은선폭포의 운무(雲霧)로 동학사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약 20m 높이에서 내리 쏟아지
는 물줄기는 동학계곡의 유일한 폭포이기도 하다. 폭포 앞의 기암절벽은 자연경관의 극치이고,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쓸개봉의 위용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옛날에 신선이 숨어 살았대서 이 이름이
생겼다 한다.
제8경은 오뉘탑의 명월로 오뉘탑은 남매탑이라고도 하나 제대로의 이름은 청량사지쌍탑(淸凉寺址
雙塔)이다. 삼불봉의 기슭에 있는 이 탑은 둘이 한 쌍을 이루는데, 큰 탑은 화강석조의 7층탑으로 상
륜부는 결실되었고, 작은 탑은 원래 5층탑이었으나 4층까지만 남아 있다.
이 작은탑은 부여의 정림사지석탑(定林寺址石塔)을 충실히 모방한 걸작품이다. 이들 탑에 얽힌 의
전설을 생각하면 숲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은 신비감에 젖게 한다. 이들 팔경 외에도 용추폭포 등 명
승지가 많다.
용추폭포는 신도안에서 신원사 쪽으로 2㎞ 지점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숫용추가 있고, 동북쪽 용화
사(龍華寺)쪽으로 3.2㎞ 지점에 암용추가 있어 이 두 폭포를 아울러 이른다. 이곳은 영험한 곳이라
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계룡산에는 갑사 입구의 갑사저수지(또는 계룡저수지)와 신원사 입구의 신원사저수지(또는 경천양
화저수지)가 있어 공해 없는 낚시터를 찾아 낚시꾼들의 사랑을 받는다. 계룡산에는 여러 개의 등산
코스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두 길이다.
제1코스는 주차장·동학사·오누이탑·금잔디고개·신흥암·용문폭포·갑사·주차장으로 이 코스는 총 8
㎞에,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이 길은 거꾸로 갑사에서 시작하여 동학사로 나가도 좋다.
제2코스는 주차장·동학사·은선폭포·관음봉·연천봉·갑사·주차장으로 총 8.8㎞에 3시간 정도가 소요
된다. 계룡산을 찾는 관광객은 유성온천에 온천욕을 겸해서 가기도 하고, 또는 대전국립묘지 참배를
겸해서 가기도 한다.
국립공원 계룡산 지구의 자연환경 및 관광자원 보호를 위하여 일대 5m에 걸쳐 자연환경 보호지구
를 설정하고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의 진입로의 건설 및 확장, 그리고 도로의 포장을 서둘러 시행하
였다.
계룡산에는 현대 시설 지구가 있는데 삼불봉과 관음봉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학사 지구와 서쪽에 사 지구의 두 집단 시설지가 있다. 계룡산은 우리 국토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어 전국 어디에서나 찾기 쉽고, 역사적·자연적으로 우수한 관광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탐방객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공주·부여 등을 연결하는 문화 유적 관광축으로, 계룡산 국립공원과 주변의 휴양지인 칠갑산 도립공원·대둔산 도립공원 등과 상호 연계되기 때문에 다양한 관광권을 형성하고 있다.
4. 내장산 국립공원
내장산은 원래 본사 영은사(本寺 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리었으나 산 안에 숨겨진
5.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흑산,홍도 지구
천연기념물 170호로 지정된 홍도, 홍어 특산지로 유명한 흑산도가 위치한 지역의 홍도 10경과 흑
산 8경이 유명하다.
조도지구
새떼가 모여있듯 많은 섬이 몰려있어 조도라고 부른다. 3백년 이상된 소나무 숲과 해수욕장이 있는 관매도가 주요 관광지.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맹골수도 조도지구에 속한다.
비금,도초 지구
이름대로 비금도가 제일 큰 섬이고, 명사십리, 우이도 해수욕장, 시목 해수욕장, 지금은 반쯤 천일염 염전 등이 위치해있다.
소안/청산 지구
사적 제368호인 윤선도 사적지가 위치한 보길도와 영화 서편제 촬영지 등이 위치해있다.
금오도 지구
금오도가 중심지이며, 아름다운 남해안 일출로 유명한 향일암이 위치해있다.
나로도 지구
외나로도와 내나로도가 중심지. 천연기념물 제362호 봉래면 상록수림, 나로도 해수욕장, 그리고 나로호가 발사된 나로우주센터가 위치해있다.
거문/백도 지구
거문도와 백도가 중심지로 다도해 최남단으로 해수에 의한 침식지형과 절리 및 단층이 발달한 지역이다.
팔영산 지구
팔영산은 높이 608m으로 고흥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원래 도립공원이었는데 201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 지구로 편입되었다. 다도해상국립공원을 구성하는 8개 지구중 유일하게 해역이나 해변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지구이다.
흑산,홍도 지구
천연기념물 170호로 지정된 홍도, 홍어 특산지로 유명한 흑산도가 위치한 지역의 홍도 10경과 흑산 8경이 유명하다.
조도지구
새떼가 모여있듯 많은 섬이 몰려있어 조도라고 부른다. 3백년 이상된 소나무 숲과 해수욕장이 있는 관매도가 주요 관광지.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맹골수도 조도지구에 속한다.
비금,도초 지구
이름대로 비금도가 제일 큰 섬이고, 명사십리, 우이도 해수욕장, 시목 해수욕장, 지금은 반쯤 천일염 염전 등이 위치해있다.
소안/청산 지구
사적 제368호인 윤선도 사적지가 위치한 보길도와 영화 서편제 촬영지 등이 위치해있다.
금오도 지구
금오도가 중심지이며, 아름다운 남해안 일출로 유명한 향일암이 위치해있다.
나로도 지구
외나로도와 내나로도가 중심지. 천연기념물 제362호 봉래면 상록수림, 나로도 해수욕장, 그리고 나로호가 발사된 나로우주센터가 위치해있다.
거문/백도 지구
거문도와 백도가 중심지로 다도해 최남단으로 해수에 의한 침식지형과 절리 및 단층이 발달한 지역이다.
팔영산 지구
팔영산은 높이 608m으로 고흥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원래 도립공원이었는데 201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 지구로 편입되었다. 다도해상국립공원을 구성하는 8개 지구중 유일하게 해역이나 해변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지구이다.
6. 덕유산 국립공원
덕유산은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에 걸쳐있다. 주봉인 향적봉(1,614m)을 중
심으로 해발 1,300m 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을 향해 장장 30여㎞에 뻗쳐있다. 북덕유에서
무룡산(1,491)과 삿갓봉을 거쳐 남덕유(1,507m)에 이르는 주능선의 길이만도 20㎞를 넘는 거대
한 산이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계류는 북쪽의 무주로 흘러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에 유입된다. 설천까지의 2
8㎞ 계곡이 바로 「무주구천동」이다. 구천동계곡은 폭포, 담, 소, 기암절벽, 여울 등이 곳곳에 숨어
"구천동 33경"을 이룬다.
청량하기 그지없는 계곡과 장쾌한 능선, 전형적인 육산의 아름다움, 그리고 넓은 산자락과 만만치
않은 높이를 갖고 있어 산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산 정상에는 주목과 철쭉, 원추리 군락지
가 있어 봄, 가을 산행이 운치를 더한다
덕유산은 철쭉 또한 아름답다. 특히 주능선에는 철쭉이 산재하여 있어 "봄철 덕유산은 철쭉 꽃밭에
서 해가 떠 철쭉 꽃밭에서 해가 진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북덕유정상 향적봉에서 남덕유 육십령까
지 20㎞가 넘는 등산로에 철쭉군락이 이어진다. 가장 화려한 곳은 덕유평전. 평평한 능선에 철쭉
밭이 화원을 이루고 있다. 보통 6월25일 전후 6월 5일경이 절정이다.
덕유산은 무주구천동을 끼고 있어 여름철에 각광받는 곳이지만 가을단풍으로도 유명하다. 매우 다양하고 아름다운 단풍경승을 자아내는데 산속으로 안길수록 더욱 깊고 그윽한 맛을 풍긴다. 대표적
인 코스는 구천동 33경을 보면서 북덕유산 정상을 오르는 코스. 하지만이 코스는 단풍 절정기에
너무 많은 인파로 붐비는 게 흠이다
조용하고 깊이있게 단풍을 즐기려면 덕유산 제2의 고봉인 남덕유산이 좋다. 남덕유산 정상에 오
르면 푸른빛의 구상나무와 어우러진 단풍이 한껏 멋을 풍긴다. 삿갓재에서 왼쪽 골짜기로 내려서면
원통골. 원시림지대여서 단풍이 더욱 찬란하다. 하류쪽에 조성된 잣나무 단지의 푸른빛과 참나무들
의 갖가지 단풍빛이 썩 잘 어울린다
겨울의 덕유산은 마치 히말라야의 고봉들을 연상케 한다. 첩첩산중으로 장쾌하게 이어진 크고 작
은 연봉들이 눈가루를 흩날리며 선경을 연출한다. 덕유산은 남부지방에 있으면서도 서해의 습한 대
기가 이 산을 넘으면서 뿌리는 많은 눈 때문에 겨울산행 코스로 최고의 인기를 모으는 곳이다
구천동계곡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다른 계절에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정취를 자아낸다. 눈 쌓인 능선
길을 올라 정상인 향적봉에 닿으면 눈옷을 입고 있는 철쭉군락과 주목, 구상나무숲이 보여주는 설화
가 감탄을 자아낸다. 향적봉-중봉 구간에 있는 구상나무군락의 설화는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기에
우리나라에서 인기 명산 4위이다.
7. 무등산 국립공원
무등산은 전체적인 산세는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고 마치 커다란 둔덕과 같은 홑산이다.
무등산의 특징은 너덜지대인데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
는 볼 수 없는 경관이다. 무등산은 완만한 산세로 대부분이 흙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태만상의 암석들이 정상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널려 있어 그 웅장함으로 인하여 도민의 신앙대상
이 되어온 신산으로 알려 졌다. 특히 서석대, 입석대, 규봉의 암석미는 대단하다.
무등산의 삼대 절경인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를 일컬어 무등산 삼대석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봄의
철쭉, 여름의 산목련,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등 변화가 많은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19
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3월 4일 국립공원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등산국립공
원은 전체면적 75.425㎢로 광주광역시(북구, 동구)와 전라남도(담양·화순군)에 위치하고 있다.
무등산에는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규봉암 등의 사찰과 산의 북쪽 기슭인 충효동에 환벽당과 식
영정, 소쇄원 누정 등의 유적이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은 광주, 전남 도시민의 휴식처이자 사계절 산행지이다. 10-11월의 억새와 단풍 테마산행으로 많이 찾고, 이른 봄 봄맞이 산행지로 인기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 가까이에는 원기둥 모양의 절리(節理)가 발달하여 기암괴석의 경치가 뛰어나고, 도시민의 휴식처이며, 도립공원으로 지정(1972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이 있는 증심사(證心寺)와 원효사(元曉寺)가 유명하다
8. 변산반도 국립공원
동쪽은김제시와 정읍시, 북쪽은 부안만, 남쪽은 곰소만, 서쪽은 황해에 접한다. 범위는 대체로 부안군의 면적과 일치한다. 북동쪽의 동진강에서 남서쪽의 반도 해안 끝까지의 길이는 약 90㎞이다.
반도의 동반부는 광활한 호남평야의 일부가 되어 곡창지대를 이룬다. 서반부는 노령산맥(蘆嶺山脈)에서 분리되어 생긴 산괴(山塊)인데, 숲이 우거진 산과 계곡이 모래 해안·암석해안과 어울려 뛰어난 경승지를 이룬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외변산, 내륙부를 내변산이라 부른다. 중앙 내륙부는 1999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격포리(格浦里) 해안의 채석강(彩石江)·적벽강(赤壁江), 신라 때 창건된 내소사(來蘇寺), 직소폭포(直沼瀑布), 고사포해수욕장(故沙浦海水浴場), 월명암(月明庵) 낙조대(落照臺) 등 관광자원이 많다.
이 곳에서 자라는 곧고 큰 소나무인 변재, 야생 난초인 변란, 자연산 꿀인 변청을 삼변이라.
9. 북한산 국립공원
북한산국립공원은 15번째 국립공원으로 1983년 지정되었으며, 그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8.5㎢,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공원전체가 도시지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수도권 이천만 주민들의 자연휴식처로 크게 애용되고 있다. 연평균 탐방객이 500만에 이르고 있어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 정상에 서면 맞은편의 깍아 지른 듯 인수봉이 서 있다.국망봉, 노적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모두 발밑에 있음은 물론 도봉, 북악, 남산, 남한산, 관악산 등 멀고 가까운 산들이 모두 눈앞에 들어온다. 시계가 넓은 날에는 서쪽으로 강화도, 영종도 등 서해상의 섬들도 볼 수 있다.
백운봉 서쪽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문수봉에서 비봉능선으로 이어진다. 주능선 남쪽으로는 진달래능선, 칼바위능선, 대성능선 및 형제봉능선이, 북쪽으로는 숨은벽능선, 원효봉능선, 의상능선 등이 뻗어 내린다.
북한산 기슭에는 세검정과 성북동, 정릉, 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과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道詵寺), 태고사(太古寺), 화계사(華溪寺), 문수사(文殊寺), 진관사(津寬寺) 등 100여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 유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한 뒤 진흥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진흥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이유 등이 기록돼 있으며, 대부분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으며 비봉에는 복사본이 설치되어 있다.
북한산은 백운봉(백운대 836m), 인수봉(810m), 국망봉(만경대 800m)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는 데서 유래해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1000여년 동안 삼각산이라 불려져 왔다. 1915년 조선 총독부가 북한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후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북한산이란 명칭이 공식화됐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한강 이북의 서울지역을 가리키는 행정구역명인 '북한산'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호란 때 김상헌(1570-1652)이 청나라로 끌려 가면서 읊었던 그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공식문서와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서울 강북구는 2003년 10월 백운봉 등 3개 봉우리가 있는 지역이 삼각산이란 이름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서울시와 중앙정부에 명칭복원을 건의하고 '삼각산 제이름 찾기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삼각산 제이름 찾기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국립공원 북한산은 수려한 경관과 문화유적 등이 많고 산행코스와 기점이 다양하여 도시민들의 휴식처로 사계절 두루 인기가 있다.
최고봉인 백운대를 위시하여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등 경관이 수려하고 도시민들의 휴식처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1983년)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북한산성, 우이동계곡, 정릉계곡, 세검정계곡 등이 유명.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道詵寺), 태고사(太古寺), 화계사(華溪寺), 문수사(文殊寺), 진관사(津寬寺) 등 수많은 고찰이 있다
10. 설악산 국립공원
1970년 3월 24일 설악산은 우리나라 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현재 그 지정 면
적이 398.539㎢에 이른다. 설악산은 크게 4개의 지역으로 구분하는데, 서쪽의 인제군 쪽을 내설악,
동쪽의 속초시와 고성군 양양군 쪽을 외설악이라고 하며, 이를 다시 북내설악 남내설악 북외설악,
남외설악으로 구분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설악산은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신록의 푸르름이 협곡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암봉 사이로 불타오르며, 겨울에는 환상의 파
노라마를 연출할 정도의 설국을 이룬다. 이렇게 계절마다 다양한 색깔로 바꿔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설악산은 눈과 바위의 산으로 금강산에 버금가는 남한 제일의 명산이다. 일반적으로 지리
산은 장중한 육산의 능선이, 주왕산은 기암절벽, 그리고 오대산 소금강은 계곡미가 가장 뛰어난 자
랑이라면, 설악산은 이 세 산들이 가진 특징을 모두 갖춘 명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악산을 '산중
제일 미인'이라 부른다. 설악이란 지명은 겨울에 흰 눈이 덮인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어서 지어진 이
름으로 설봉산, 혹은 설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설악산의 진미는 역시 단풍이다. 비록 내장
산 단풍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기암괴석, 맑은 계곡 등의 요소가 두루 갖추어진 설악산의 단풍 풍경
은 일명 '단풍 제일명산'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큰 산을 보통 '악산(岳山)'이라 하였는데, 그 중 바위가 높이 솟은 산 이름에
보통 '악(岳)' 자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절집을 떠도는 승려와 풍수를 공부하는 지관
들은 서울의 관악산(冠岳山), 충주의 월악산(月岳山), 전주 모악산(母岳山), 원주 치악산(雉岳山), 개
성의 송악산(松岳山), 속초의 설악산(雪嶽山)을 6대 악산으로 뽑았다. 설악산 일대는 세계적으로 희
귀한 자연자원의 분포 서식지로 1982년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생물권보전지
역으로 설정되었으며, 2005년 12월 IUCN(세계자연보전연맹)은 설악산 일대를 '카테고리 Ⅴ(경관보
호구역)'에서 '카테고리 Ⅱ(국립공원)'로 승격시켜,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
하고 웅장해 금강산에 비견되는 남한 제일의 명산이다. 설악산국립공원 구역 안에는 다양한 동·식
물상이 분포하고, 천불동계곡, 백담계곡을 비롯한 수많은 계곡과 비룡폭포, 대승폭포를 비롯한 28개
의 폭포가 있다. 이밖에 권금성, 울산바위, 공룡능선 등의 기암괴석과 신흥사와 백담사 등의 각종 문
화재 및 사적, 오색온천, 달기약수 등 휴양자원이 많아서 많은 탐방객이 찾고 있다. 설악산은 강원도
인제, 고성, 양양, 속초 등 4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동서 길이 약 18㎞, 남북 길이 약 15㎞의 다변형
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정상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계곡과 능선이 방사상으로 뻗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설악산의 주능선은 남에서 북으로 향하여 가칠봉(1,165m)에서 점봉산(1,424m), 한계령(1,004
m), 대청봉(1,708m), 마등령(1,327m), 황철봉(1,391m), 미시령(826m) 등을 거쳐 신선봉(1,204m)
에 이른다. 설악산은 남북 주능선을 기준으로 백담사와 수렴동계곡이 있는 내설악과 신흥사 천불동
계곡이 있는 외설악으로 구분된다. 또한 설악산의 남북능선이 교차하는 방향으로 동북동 능선과 서
북서 능선이 있어 내설악과 외설악을 각각 다시 가른다. 즉 이 능선은 동쪽의 관모봉(889m)에서 설
악산을 지나 대승령(1,210m)에 이르는 구간으로, 여기서 내설악을 북내설악과 남내설악으로, 외설
악을 북외설악과 남외설악으로 나눈다.
내설악은 수렴동계곡, 백운동계곡, 백담사계곡, 흑선동계곡 등이 주변의 부드러운 능선과 어우러
져 여성적인 우아함을 보여주는 반면에, 외설악은 깊은 협곡인 천불동계곡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솟
아오른 암봉들이 남성적인 웅장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설악과 외설악은 지형뿐만 아니라 기
후에서도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다. 외설악 지역인 속초와 양양은 연평균기온이 11.5℃로 내설악 지
역인 인제(9.2℃)보다 따뜻하다. 이러한 원인은 속초나 양양이 설악산 동쪽에 위치하여 겨울철 쿠로
시오난류의 영향으로 겨울철 기온이 거의 영상에 머무는 해양성기후를 보이는데 반해, 설악산 서측
즉, 내륙에 위치한 인제는 겨울철 내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대륙성기후의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
이다.
11. 소백산 국립공원
높이 1,439m이다.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소백산맥 중의 산으로서 비로봉(1,439m)·국망봉
(1,421m)·제2연화봉(1,357m)·도솔봉(1,314m)·신선봉(1,389m)·형제봉(1,177m)·묘적봉(1,148m)
등의 많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북서쪽은 경사가 완만하며 국망천이 흐르고, 동남쪽은 경사가
심하고 낙동강 상류로 들어가는 죽계천이 시작된다. 지질은 화강편마암이 중심을 이루며 주변으로
는 중셍대의 화강류류가 분포한다.
식물은 한반도 온대중부의 대표적인 식생을 갖는 지역으로서 낙엽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철쭉 등 관다발식물 1,000여 종, 동물은 멧돼지 등 1,700여 종이 분포한다. 주봉인 비로봉은 수많은
야생화와 함께 희귀식물인 에델바이스(외솜다리)가 자생하고 이곳에서부터 국망봉 일대에는 주목
(천연기념물 244)의 최대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고구려 3국의 경계에 있어서 문화유적이 많다. 죽계천 쪽으로는 석륜광
산(石崙鑛山)·초암사(草庵寺)가 있고 이곳의 북동쪽으로는 석천폭포(石川瀑布)·성혈사(聖穴寺)가 있
다. 남서쪽으로는 국망봉에 이어 제2연화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 동남쪽 기슭에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한 희방사(喜方寺)와 내륙지방에서 가장 큰 폭포인 희방폭포(높이 28m)가 있다.
아름다운 골짜기와 완만한 산등성이, 울창한 숲 등이 뛰어난 경치를 이루어 등산객들이 많은데, 주
요 등산로로는 희방사역에서부터 희방폭포와 제2연화봉을 거쳐 오르는 길과 북쪽의 국망천, 남쪽의
죽계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다. 죽령과 제2연화봉 산기슭에는 국내 최대의 우주관측소
인 국립천문대가 자리잡고 있다.
일대에 수려하고 웅장한 산과 주변의 명승지가 많아 1987년 12월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
다. 공원면적 320.5㎢로서 경상북도 영주시·봉화군, 충청북도 단양군에 걸쳐 있다.
12. 속리산 국립공원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 있으며 높이는 1,058m이다.
태백산맥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오는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솟아 있다. 784년(신라 선덕여왕 5)에
진표(眞表)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
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 수도하였는데, 여기에서 '속
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 하
였고, 광명산(光明山)·미지산(彌智山)·형제산(兄弟山)·소금강산(小金剛山)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1,032m)·문장대(文藏臺:1,054m)·관음봉(觀
音峰:982m)·길상봉(吉祥峰)·문수봉(文殊峰) 등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 팔경(八景) 가
운데 하나에 속하는 명산으로, 화강암의 기봉(奇峰)과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고, 산중에는 1000
년 고찰의 법주사(法住寺)가 있다.
봄에는 산벚꽃,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 유명하다.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문장대에 서면 산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흰 구름과 맞닿는다 하여 문장대를 일명 운장대(雲藏帶)라고도 한다.
이 외에 입석대(立石臺)·신선대(神仙臺)·경업대(慶業臺)·봉황대(鳳凰臺)·산호대(珊瑚臺) 등 8대와
8석문이 있고, 은폭동계곡(隱瀑洞溪谷)·용유동계곡(龍遊洞溪谷)·쌍룡폭포(雙龍瀑布)·오송폭포(五松
瀑布) 등 명승이 많다.
법주사에는 법주사 팔상전(국보 55)과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5), 법주사 석련지(국보 64), 법주
사 사천왕석등(보물 15),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216) 등 국보·보물을 비롯해 각종 문화재가 있
다. 그밖에 망개나무(천연기념물 207), 까막딱따구리(천연기념물 242)·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20
7) 등 627종의 식물과 344종의 동물이 서식한다.
1970년 3월 24일 주변 일대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4년 인근의 화양동구곡(華陽洞
九曲)·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쌍곡구곡(雙谷九曲)이 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매년 200만 명 정도
의 관광객이 찾는다.
13. 오대산 국립공원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홍천군에 걸쳐 있는 산.
오대산은 설악산과 더불어 태백산맥에 속하는 고산준령으로 주봉인 비로봉(1,563m)을 중심으로 호령봉(虎嶺峰)·상왕봉(象王峰)·두로봉(頭老峰)·동대산(東臺山) 등의 고봉들이 솟아 있다.
산의 가운데에 있는 중대(中臺)를 비롯하여 북대·남대·동대·서대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고 있고, 산세가 다섯 개의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과 같다 하여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오대산의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고, 주요 산정부가 대부분 평정봉(平頂峰)을 이룬다. 암반의 노출이 적은 데다가 오랜 풍화와 침식으로 인해 토양층이 비교적 두껍다. 주요 하천으로는 월정천과 내린천이 있고, 척천과 월정천이 합류된 오대천이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동대산과 노인봉(老人峰) 사이의 진고개는 오대천과 연곡천(連谷川)의 분수령이 된다.
오대산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산림지대로 생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오대산에는 총 2,748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월정사(月精寺) 옆의 금강연(金剛淵)은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와 메기·탱수·뱀장어 등이 서식하고 있어 ‘특별어류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식물은 전나무·분비나무·신갈나무·자작나무를 비롯하여 총 1,040종이 서식하고 있고, 비로봉 일대의 측백나무·주목나무군락, 호령봉계곡의 난티나무군락, 두로봉과 상왕봉 능선의 철쭉·금강초롱 등은 유명하다. 특히 월정사로부터 상원사(上院寺)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잇는 10㎞의 계곡은 수백 년이 넘은 전나무와 고산식물, 잡목이 우거진 숲으로 수려하고 웅장하다.
1975년 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대산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잘 보존된 생태계로 널리 알려져 있고, 유서 깊은 사찰과 문화재가 곳곳에 있다. 오대산국립공원의 면적은 약 304㎢로 크게 월정사 지구와 청학동(靑鶴洞)·소금강(小金剛) 지구로 나뉜다.
청학동·소금강 지구는 오대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인 1970년 1월 이미 명승(名勝) 제1호로 지정되었다. 노인봉에서 발원한 청학천을 따라가면 곳곳에 기암괴석·층암절벽·폭포·담소 등이 있는데, 경치가 절경이라 일컬을 만큼 빼어나다.
소금강과 청학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의 명현 이이(李珥)가 ‘소금강’이라 하고, 「청학산기」를 남긴 데에서 유래하였다. 소금강은 무릉계(武陵溪)를 경계로 내소금강과 외소금강으로 구분된다.
내소금강에 명소가 많은데, 천하대(天河臺)·십자소(十字沼)·연화담(蓮花潭)·식당암(食堂巖)·삼선암(三仙巖)·청심대(淸心臺)·세심대(洗心臺)·학유대(鶴遊臺)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구룡연(九龍淵)이라고 하는 구폭구담(九瀑九潭)의 구룡폭포와 만물상(萬物相) 일대는 특히 경치가 아름답다. 구룡폭포 부근의 아미산성(娥媚山城)은 고구려와 신라가 각축하던 싸움터이고, 연화담 위에 있는 금강사(金剛寺)는 여승만 있는 사찰이다. 또한 금강사 주변은 천연기념물인 장수하늘소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오대산국립공원 내의 사찰로는 월정사와 상원사가 유명하다. 또한 중·동·서·남·북의 오대(五臺)에는 각각 사자암(獅子庵)·관음암(觀音庵)·수정암(水精庵)·지장암(地藏庵)·미륵암(彌勒庵) 등의 암자가 있다. 월정사 경내에는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月精寺八角九層石塔, 국보 제48호)·월정사 석조보살좌상(月精寺石造菩薩坐像, 보물 제139호) 등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있다. 월정사 북쪽에 위치한 상원사에도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鐘, 국보 제36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겨울에 오대산 능선에 오르면 앙상한 고사목과 적설 등이 어우러져 겨울 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비로봉을 지나 상왕봉까지의 4㎞ 구간은 갈대밭으로 덮여 있어 절경을 이룬다. 오대산은 가파른 계곡이 없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도 눈사태의 위험이 없기 때문에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14. 월악산 국립공원
충청북도 제천시·단양군·충주시와 경상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는 산.
월악산의 높이는 1,092m이며, 소백산맥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악지대이다. 충주호(忠州湖)에 바로 인접하여 있고, 산의 동북쪽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이, 남서쪽으로는 속리산국립공원이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남쪽과 북서쪽으로는 약간의 퇴적암층이 있다.
신라 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
산의 능선은 크게 세 방향으로 뻗어 있다. 북서쪽 능선은 충주호에 닿아 있고, 북쪽 능선은 시루미에서 광천(廣川)과 만난다. 주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쪽 능선은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곳까지 이른다. 산의 동쪽에는 광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달천(達川)이 흐르는데, 이 두 하천은 산의 북쪽 탄지리에서 만나 월악산을 에워싼다.
과거에는 이렇게 합쳐진 달천이 계속 북서로 흘러 한천리에서 한강에 합류되었다. 그러나 1984년충주댐이 완성됨에 따라 이 두 하천의 합류점은 충주호가 되어 곧바로 한강에 흘러든다.
월악산은 월광폭포(月光瀑布)·망폭대(望瀑臺)·학소대(鶴巢臺)·수경대(水境臺)·자연대(自然臺)·수렴대 등의 8경과 상봉(上峯)인 국사주봉(國祠主峯)에서의 탁 트인 일망무제의 풍광이 예로부터 유명하였다.
특히, 월악산의 남쪽 포암산(布巖山, 962m)에서 시작하는 달천이 월악산을 끼고 흐르면서 만든 계곡을 월악계곡 또는 송계계곡(松界溪谷)이라 하는데, 기암괴석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과 울창한 삼림이 가히 절경을 이룬다. 계곡은 약 7㎞에 달하는데, 계곡을 따라 또한 여러 사적지가 분포한다.
자연적인 월악산의 형성은 고생대 암석 사이로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이 관입하면서 형성되었고, 삼국시대부터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이자 통행로였다.
많은 사적지와 문화재를 가진데다가 남한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댐인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더하여져 1984년 1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08년 현재 공원 면적은 288㎢이며, 제천시를 비롯하여 충주시와 단양군, 경상북도의 문경시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상모면 미륵리에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말년에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마의태자(麻衣太子) 남매가 도중에 머물러 사찰과 미륵, 탑 등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미륵리사지(彌勒里寺址)가 있다.
이곳에는 괴산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괴산미륵리오층석탑(보물 제95호)·중원미륵리석등(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중원미륵리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큰 돌거북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석불입상은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미륵사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산 남쪽 기슭에는 마의태자와 동행하던 누이 덕주공주의 이름을 딴 덕주사(德周寺)가 있는데 윗산에는 망국의 한을 품은 덕주공주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는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이 있다. 미륵리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약 3.5㎞ 지점에 넓은 암반과 맑은 물이 아름다운 팔랑소가 있다.
다시 약 1㎞ 북쪽에는 용추(龍楸)와 농바위[籠巖], 와룡대(臥龍臺)가 있으며, 그 서쪽 언덕의 빈신사터[頻迅寺址]에는 고려 현종 때 세워진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보물 제94호)이 있다. 농암 건너편에는 덕주산성의 남문이 산비탈을 타고 내린 석성과 연결되어 있다. 이곳 산성은 이웃한 조령관성(鳥嶺關城)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또한, 월악산의 동쪽 산록에는 신륵사(神勒寺)가 있으며, 산의 동쪽을 흐르는 광천은 대미산(大美山)·문수봉(文繡峰)·하설산(夏雪山)에서 흘러나와 월악리를 거치면서 송계계곡 못지 않은 신륵사계곡을 전개한다.
공원 내에는 문수봉·황정산(皇廷山)·용두산(龍頭山)·금수산(錦繡山) 등이 포함된다. 월악산 동북쪽의 남한강 건너편에 있는 금수산은 용담폭포·도화동천(桃花洞天) 등 별천지를 연상하게 하는 비경이 많은데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여기에는 단양팔경의 일부가 포함되는데 하선암·중선암·상선암·구담봉·옥순봉 등이 그것이다. 월악산은 소백산과 속리산의 중간에 있고 문경새재도립공원과도 연계되어 있어 주요한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서남쪽의 수안보온천과도 인접하고 있어 중부 내륙의 대청댐·수안보·충주로를 잇는 내륙 순환 관광권을 형성한다.
신단양에서 월악산 북쪽 한수(寒水)나루에 이르는 수상 관광로는 월악산 관광로의 새로운 통로이며, 널리 알려진 단양팔경은 물론 충주를 포함한 중원문화권(中原文化圈)과도 연계되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15. 월출산 국립공원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809m. 소백산계에 속하는 해안산맥의 말단부에 높이 솟은 산체는 견고한 석영반암과 분암류로 구성되어 있어 수목이 잘 자랄 수 없는 급경사의 지형을 이룬다. 기암괴석이 많아 남국(南國)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린다.
산의 최고봉은 천황봉(天皇峯)이며 남서쪽에 연이은 구정봉(九井峯, 743m) 능선을 경계로 북쪽은 영암군, 남쪽은 강진군이 된다. 구정봉 남쪽으로는 도갑산(道岬山, 376m)·월각산(月角山, 456m) 등이 있으며 천황봉의 북쪽으로는 장군봉(將軍峯)·국사봉(國師峯) 등이 연봉을 이룬다.
대체로 영암군에 속한 북쪽은 날카롭고 가파른 골산(骨山 : 돌산)이지만, 강진군에 속하는 남쪽의 산들은 비교적 산세가 완만한 육산(肉山 : 흙산)으로 되어 있다. 월출산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때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 때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렸다. 월출산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의 칭송을 들어왔다.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는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지며 개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며 기이함을 자랑하누나.”라고 예찬하였다.
그리고 조선 세조 때의 시인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도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 하고 노래하였다. 월출산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보기에 따라 하나의 거대한 수석(壽石)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나쁘게 말하면 천하의 악산(惡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월출산은 옹골찬 모습의 암석미를 이루어 영암의 상징이자 자랑으로 1973년 3월 서남쪽 도갑산 지역을 합하여 월출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6월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자연 및 문화경관을 보호하고 국민 보건·휴양 및 정서생활 향상을 위한 관광지로서의 개발 가능성이 인정되어 우리 나라 20번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의 면적은 41.88㎢이며 공원 내에는 많은 문화재와 사적지가 있다. 천황봉의 정상 가까이에는 거대한 월출산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이 방형의 감실이 만들어진 큰 암벽 위에 조각되어 있고, 이의 동쪽 사면에는 구절폭포(九折瀑布)가, 서쪽 사면에는 용추폭포(龍楸瀑布)가 있다. 이밖에 칠지폭포·은천폭포·대동폭포 등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유명한 사찰도 여럿 있는데, 특히 도갑사는 고려 시대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고찰로, 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 국보 제50호)·도갑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도갑사도선수미비(道岬寺道詵守眉碑,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8호) 등이 있다.
또, 절의 입구에 있는 구림(鳩林)마을은 도선국사의 어머니 최씨가 빨래터에서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도선국사를 수태하였다는 전설과,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 학문을 전하고 일본황실의 스승이 된 왕인(王仁)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어 역사적으로도 이름난 곳이다. 지금도 도선국사와 관련된 최씨원·백의암, 왕인과 관련된 책굴·돌정고개·상대포(上臺浦) 등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도갑산 남동쪽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무위사(無爲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는데 무위사극락전(국보 제13호)과 함께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과 관음보살상을 그린 벽화가 유명하다. 그 밖에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607호)가 있다. 이 절의 동쪽 월남리의 월남사지(月南寺址)에는 월남사지모전석탑(보물 제298호)과 월남사지석비(보물 제313호)가 있다.
여기에서 월출산계곡으로 들어가면 금릉경포대(金陵鏡浦臺)가 있다. 구정봉 정상 아래 미왕재에는 억새밭이 드넓게 이루어져 매년 가을 ‘월출산갈대제’가 열린다. 월출산은 호남의 5대 명산인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순천의 조계산(曹溪山) 등과 함께 솥의 세 발처럼 우뚝 솟아 있다.
이 월출산의 천황봉에서 중첩한 산줄기 위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일출과 황해를 진홍빛으로 물들이는 일몰 광경, 그리고 구림에서 바라보는 월출은 가히 호남 제일의 장관이다. 특산물로는 궁중진상품으로 이름났던 참빗과 산란기인 3∼5월에 잡은 숭어의 알, 별미 있는 세(細)발낙지·짱뚱어(망둥어) 요리가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산세와 더불어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16. 주왕산 국립공원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에 있는 산. 높이는 721m이다. 청송읍에서 동남쪽으로 13.5㎞ 지점에 있다. 산세가 아름다워 경상북도의 소금강으로 불리는데, 유서 깊은 사찰과 유적지들이 많아 1976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가 당나라에서 반정을 하다가 실패하여 이곳에 와서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 뒤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산 이름을 주왕산으로 하면 고장이 복될 것이라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왕자 김주원(金周元)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하여 주방산(周房山) 또는 대돈산(大遯山)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웅장하고 깎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이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아서 석병산(石屛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선캄브리아기 이전에 석회암을 포함한 퇴적층이 형성된 후 광역변성작용으로 변성암층이 되었고, 그 후 육화(陸化)가 시작되었다. 쥐라기에 이르러 청송화강암에 의해 관입을 받아 다시 변성작용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지질은 능주층군(綾州層群)의 역암(礫岩)·응회암(凝灰岩)·유문암(流紋岩) 등의 화산암으로 되어 있다. 고도는 높지 않지만, 주변의 산세가 서남쪽으로 열려 있는 ‘ㄷ’자 모양으로 그 서남쪽에 주왕산, 동남쪽에 910고지, 북쪽에 금은광이(812m) 등의 고봉이 연해 있다. 그 중앙을 주방천(周房川)이 서남류하면서 제1폭포·제2폭포·제3폭포 등을 만들고 있다. 서식하는 동물은 궁노루·다람쥐·멧돼지·오소리·족제비 등 21종과 양서류·파충류 20종, 조류 65종, 담수어류 27종 등이다. 식물은 전나무·소나무·낙엽송·회양목 등 총 749종이 있다. 특히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와 솔나리·노랑무늬붓꽃·우단꼭두서니·둥근잎꿩의비름·바위채송화 등의 희귀식물과 대왕나비·도이땅딸보메뚜기·하늘나방 등의 희귀곤충 728종이 살고 있다. 882년(헌덕왕 14)에서 825년(헌덕왕 17)까지 김헌창과 김범문이 주왕산에 은거하기 위해 축성했다는 주방산성의 흔적이 있다. 임진왜란 전후하여 피난 왔던 사람들이 내원동·너구동·갈전동·사창동 등에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1970년 화전민 이주사업과 이농현상으로 대부분 떠났다. 2007년 12월에 내원분교를 마지막으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다. 주왕산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조선총독부 농공상부의 관할 국유림으로 관리되었고, 1924년 3월 26일자로 경북산 제249호에 의해 지방비모범림으로, 1933년에는 경상북도 도유림으로 지정되었다. 1960년대에 시행되었던 주왕산 도유림 영림사업은 주왕산이 197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중단되었다. 주왕산은 국립공원 지정 면적이 약 106㎢으로 전체 면적의 97%가 임야지이다. 주방계곡·노루용추계곡·절골 등의 계곡이 있으며, 특히 주방계곡에는 기암(旗巖)·아들바위를 비롯하여 주왕굴(周王窟)·시루봉·망월대(望月臺)·신선대(神仙臺)·연화봉(蓮花峯)·급수대(汲水臺)·학소대(鶴巢臺)·향로봉(香爐峯)·복암폭포(腹岩瀑布)·연화굴(蓮花窟)·좌암(座巖) 등이 있다. 사찰로는 대전사(大典寺)와 백련암(白蓮庵)·주왕암(周王庵) 등이 있다. 대전사는 최치원(崔致遠)·나옹화상·도선국사(道詵國師)·보조국사(普照國師)·무학대사(無學大師)·서거정(徐居正)·김종직(金宗直) 등이 수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승군(僧軍)을 모아 훈련시켰던 곳으로 유명하다. 대전사에는 보광전(보물 제1570호), 보광전 석가여래삼존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6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서남쪽에는 1720년 8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준공된 주산지(注山池)가 있는데, 2013년에 주산지 일원이 명승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정의
개설
명칭 유래
자연환경
형성 및 변천
현황
17. 지리산 국립공원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하동군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915.4m.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의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한다. 동경 127°27′∼127°49′, 북위 35°13′∼35°27′에 위치한 거대한 이 산은 총면적이 440.4㎢이며, 전라북도에 107.7㎢, 전라남도에 87.9㎢, 경상남도에 244.7㎢ 분포한다.
주능선 방향은 서남서∼동북동으로,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칠선봉(七仙峰, 1,576m)·덕평봉(德坪峰, 1,522m)·명선봉(明善峰, 1,586m)·토끼봉(1,534m)·반야봉(般若峰, 1,732m)·노고단(老姑壇, 1,507m) 등이, 동쪽으로는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이 이어진다.
또 주능선과 거의 수직 방향으로 발달한 가지능선은 700∼1,300m의 고도를 나타내며, 종석대(鐘石臺, 1,356m)에서 북으로 고리봉(1,248m)·만복대(萬福臺, 1,433m) 등의 연봉이 나타난다.
이 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나타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청, 남쪽에 하동·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豆流’·‘頭留’·‘斗星’·‘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地理山)·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이칭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삼신산은 중국 전설의 발해만(渤海彎)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으로, 이곳에 신선(神仙)과 불사약(不死藥)과 황금(黃金)·백은(白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사기(史記)』의 기록이 있는데 지리산은 이 중 방장산에 대비가 된다. 그 밖에 봉래가 금강산, 영주가 한라산이다.
여기에 묘향산을 더하여 4대 신산(四大神山)이라 하고, 그에 구월산을 합하여 5대 신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나 지리산을 신산(神山)으로 꼽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서산대사휴정(休靜)은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표현하였다. 또 『팔역지(八域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산수론(山水論)에서 지리산을 조선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되며 12종산(宗山)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호남읍지』, 신경준(申景濬)의 『산수고(山水考)』,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도 모두 지이산(智異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류산·방장산·지리산(地理山)·남악 등의 이칭이 소개되어 있고, 두류의 류(流)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류(留)로 씀이 옳다는 제안도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두류산(頭留山)이라는 이칭이 하나 더 추가된다.
산 일대는 선캄브리아기 중기에 넓은 바다였으며, 여기에 뻘·모래·석회분 등이 퇴적 및 침전되어 셰일·사암·석회암 등의 퇴적암류가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선캄브리아기 중기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세 번 이상의 지각변동과 변성작용이 일어났으며, 이 결과로 이들 퇴적 지층들은 편마암 또는 편암으로 변성되었다.
또한, 선캄브리아기 말기에는 산청·운봉·하동 일대에 어느 정도 규모가 큰 화성활동이 일어나 염기성화성암류(鹽基性火成岩類)가 관입하였다.
고생대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는 다시 바다로 뒤덮여 투박한 퇴적 지층이 쌓였다. 고생대 말기에는 이 일대가 점점 넓은 호수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식물의 잔해인 석탄층이 셰일·사암 등의 퇴적 지층과 함께 두껍게 쌓이기도 하였다.
이들 고생대 지층은 그 뒤 침식작용과 삭박작용을 받아 대부분 소멸되어 버렸고 호남탄전 지대인 화순탄광(和順炭鑛) 일대에 소규모로 남아 있다. 중생대 초기와 중기에 걸쳐 우리나라에서는 격렬한 지각운동·화성활동·변성작용이 일어났는데 이를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이라 부르며 이 지역도 예외 없이 이 운동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대부분 지역이 솟아올라 육지로 되었고 지리산 일대도 이때 높은 산지로 변하였다. 대보조산운동 이후 현재까지 약 1억 5000만년 동안 계속하여 침식·풍화·융기작용을 받아 젊은 고생대 지층들은 다 씻겨 없어졌고 나이 많은 선캄브리아기 암층들이 노출되어 있다.
지리산을 형성하는 암석은 대부분이 변성암류로서 편마암과 편암이 나타나며 이 중 편마암이 거의 전부 덮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편암은 소규모 렌즈상으로 편마암 중에 포위되어 나타나는데 흑운모편암·석영편암·클로리토이드편암 등으로 분류된다.
그 밖에 변성화성암류가 산청·하동·운봉 일대에 남북 방향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고, 화성암류도 형제봉(1,115m)과 산청 일부에 소규모로 분포되어 있다.
또는 쥐라기의 습곡운동이 있은 뒤 간헐적인 융기작용과 이에 따른 침식 및 삭박에 의하여 고도가 서로 다른 평탄면이 나타난다.
대체로 1,000∼1,100m 고도에서 평정봉(平頂峰)으로 나타나는 고위침식면은 백악기말에 지형면이 형성된 뒤 제3기 중신세(中新世) 이래의 신기구조운동(新期構造運動)으로 현재의 고도에 분포하며, 중신세 후기 이래의 신기삭박면은 산간분지와 고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세석평전(細石平田)은 고기삭박면으로 제4기 빙기의 한랭기후에서 주빙하지형형성작용을 받아 비대칭 산릉을 이루며, 유상구조토(瘤狀構造土)가 발달하였다.
이 밖에도 600m 고도에는 중위평탄면이 각 사면을 따라 분포하며, 200m 내외의 저위평탄면은 선상지와 복합된 형태를 띤다.
산의 북부와 동부의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로서 덕천강(德川江)·주천(朱川)·남천(藍川) 등이며, 남부와 서부의 하천은 섬진강의 지류로서 화개천(花開川)·서시천(西施川) 등이다. 이 산지는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농경지는 1.3%에 불과하며 임목 축적량은 12.2㎥/㏊(1978년 현재)이다.
일반적으로 산 일대는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로 분리시키는 중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고도에서 오는 산악성 기후가 뚜렷이 나타난다. 남동쪽 지역에는 빈번한 저기압의 통과와 여름철의 고온다습한 남동계절풍이 남동 사면에 부딪쳐 상승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형성 강우로 인하여 많은 비가 내린다.
겨울에 산지의 북서쪽은 한랭건조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은 데 반하여, 남동쪽은 산지에 의하여 계절풍이 저지되므로 추위에서 보호되고 남해를 흐르는 동한난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하다.
이 지역의 연강수량은 1,200∼1,600㎜이며, 6∼8월에 50∼60%가 내리고 12∼2월에는 10%도 못 되어 여름철에 강우가 집중한다.
연평균기온은 12∼14℃로서 삼림대로 보아 온대남부형에 속한다. 온량지수(溫量指數)는 105∼115로서 난온대(暖溫帶)에 속하며, 1월 평균기온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는 한랭지수는 -14.5∼-7.8이다. 세석은 평지보다 6∼7℃가 낮아 한랭하며, 600∼700m 고지에서는 첫서리가 10월 1일경에 내리는데 다른 지역보다 13일 내외가 빠른 편이다.
또한 1,500m 고도의 만복대에서는 6월초까지 얼음을 볼 수가 있다. 산지의 영향으로 운천일수(雲天日數)가 130일을 기록하고 있어 연중 흐린 날씨가 많은 편이고, 산곡풍(山谷風) 등 국지풍이 탁월하며 안개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형이 복잡하고 산정에 걸치는 낮은 구름과 계곡에 자주 끼는 짙은 안개 때문에 일조시간(日照時間)도 짧은 편이다.
한여름 기온의 차는 15∼20℃를 나타내는데 표고가 높아짐에 따라 기온이 낮아져서 7월 중순 산록에서는 36∼37℃인 데 비하여 산정에서는 19∼20℃를 나타낸다.
식생은 137과 536속 1,369종이며, 이 중 희귀 및 멸종 위기 식물은 32과 56종으로 섬말나리·새우난초·약난초·천마·사철란·구름송이풀·솜다리·삼백초·모데미풀·백부자·세뿔투구꽃·지리바꽃·금강제비꽃 등이 있다. 또한, 한국 특산 식물 407종류 중 46종류가 있고 지리산특산식물은 19종류이다.
지리산 특산식물은 갓대·왕개서나무·지리개별꽃·지리바꽃·얼룩함박꽃나무·지리말발도리·히어리·지리터리풀·늦싸리·지리산싸리·지리강활·물들메나무·긴잎물들메나무·긴잎쇠물푸레·정향나무·지리오리방풀·둥근오리방풀·어리병풍·지리고들빼기가 있다.
야생동물은 포유류 16과 46종, 조류 111종, 어류 30종, 양서류 2목 5과 11종, 파충류 2목 5과 16종, 곤충 23목 271과 2,697종으로 되어 있다.
동물 중 희귀 및 멸종 위기 동물로는 포유류가 붉은박쥐·하늘다람쥐·여우·곰·대륙목도리담비·수달·삵·늑대·표범·호랑이·사향노루 등 11종, 조류가 고니·말똥가리·붉은배새매·새매·조롱이·황조롱이·재두루미·검은등뻐꾸기·소쩍새·올빼미·큰소쩍새·청호반새·아물쇠딱따구리·큰오색딱따구리·뿔종다리·돼지빠귀 등 16종, 어류가 꼬치동자개 1종 등이다.
또한 파충류는 자라·구렁이·능구렁이·대륙유혈목이·무자치·실뱀·까치살모사·살모사 8종, 양서류는 도룡뇽·꼬리치레도룡농·물두꺼비·북방산개구리·아므르산개구리 6종, 곤충류는 붉은점모시나무·상제나비·바둑돌부전나비·대왕팔랑나비·유리창나비·비단벌레·반날개하늘소·알락수염산꽃하늘소·범하늘소·알락수염하늘소·우산하늘소·큰풍뎅이·장수풍뎅이·사슴풍뎅이·톱사습벌레 15종이 있다.
구석기·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던 인간은 무늬없는 토기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산악지대에 거주하였던 것 같지는 않고 대체로 주변의 낮은 구릉에서 원시적인 농경을 행하면서 수렵과 어로 활동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등지에서는 앞에 짧은 돌출부가 달린 진주식(晉州式) 장방형 석곽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가야 지방으로부터의 영향을 말해 주고 있다. 산청에는 원삼국 시대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는 지리산은 산신신앙의 대상으로 부각이 된다. 신라 때에는 삼산오악신(三山五嶽神)을 제사하였다.
삼산은 봉래·방장·영주로 이 중 방장이 지리산에 비견된다. 오악은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서의 계룡산, 북의 태백산, 중의 부악(父嶽)으로, 나라에서 제사하며 국가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계속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때 많은 사찰과 산신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리산은 삼각산(三角山)·송악산(松嶽山)·비백산(鼻白山)과 함께 사악신(四嶽神)으로 정하여져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대표적인 산신 신앙의 예가 수록되어 있다. 그가 마흔 살 되던 해 가을 종도(宗道)와 선공(鮮空)이라는 두 승려의 안내를 받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에 올라 제일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가 당시 목격한 이 성모묘의 모습은 당집의 너비가 3칸이고 양쪽 벽에 중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성모상은 석상(石像)으로 분대(粉黛)로 얼굴과 머리, 눈, 눈썹이 칠하여져 있었다.
머리 부분에 칼로 벤듯한 금이 가 있어 그 연고를 물으니 태조가 등극 전에 이 근처 인월(引月)에서 왜구를 칠 때 크게 패한 왜병이 이 성모의 신조(神助)로 태조가 승첩을 거두었다 하여 보복의 뜻으로 두쪽을 내었던 것을 뒤에 모아 맞춘 것이라 하였다.
성모묘의 동쪽, 바위가 오목하게 꺼진 부분에 돌을 쌓고 그곳에 조그만 불상을 하나 세워 놓았는데 국사(國師)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의 지리산의 위치는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영남과 호남의 양 지방에 걸쳐서 그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위치적 특성과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험하지는 않다는 지형적 특징 때문에 역사상 특이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우선 백제의 망국민 일부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섬진강 유로를 따라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그 도피처로서 지리산을 취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병화(兵火)와 흉년이 없는 피란·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신앙(鄭鑑錄信仰)이 지리산을 찾게 된다.
『정감록』 감결(鑑訣)과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記)』·『도선비결(道詵祕訣)』·『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이토정가장결(李土亭家藏訣)』·『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등 도참서류(圖讖書類)에는 대부분 피란·보신의 장소로 열 군데(이름하여 十勝地라고 함)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운봉두류산(雲峰頭流山), 즉 지리산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정감록 관념은 한말에 이르러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인들이 유민이 되어 흘러 들어오고, 이들 일부가 신흥종교를 개창하였다.
오늘날 계곡 도처에 흩어져 있는 사찰과 산신당 이외에 이러한 민족종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산간 마을이 일부 흩어져 있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갱정유도(更正儒道) 신자들로 구성된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도인촌일 것이다.
그들은 묵계리를 전설상의 청학동(靑鶴洞)이라 일컬으며 댕기머리와 상투와 바지 저고리로 우리의 전통 문화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청학동은 선조 때의 문인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 신선에 대한 기록에서 나온 말로, 우리 민족의 이상적인 길지로 구전되어 오던 곳이다.
이런 명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에서는 좌익·우익의 격전으로 뼈아픈 상처를 남기게 된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사건에서 패퇴한 좌익 세력의 일부가 지리산으로 입산하였으며, 1950년 6·25 때에도 북한군의 패잔병 일부가 노고단과 반야봉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양민 학살, 촌락 방화, 산림 남벌 등의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우리나라 31본산(本山)의 하나이며 10대 사찰 가운데 첫째인 화엄사(華嚴寺)를 비롯한 10여 개의 사찰과 국보·보물·천연기념물 등의 많은 문화재가 있어 곳곳마다 유적지이다.
주능선을 기준으로 그 남쪽 면을 겉지리(表智異 또는 外智異)라 하고 북 사면을 속지리(裏智異 또는 內智異)라 하는데, 민간신앙과 관계된 유적은 주로 속지리 쪽에, 그리고 불교 신앙 유적은 겉지리 쪽에 분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때인 544년(진흥왕 5) 연기(緣起)가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것을 인조 때 벽암(碧巖)이 재건하였다. 일설에는 화엄종(華嚴宗)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의상(義湘)이 전교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3대 목조건물 중의 으뜸인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국보 제67호)을 비롯하여 화엄사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화엄사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화엄사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보물 제300호)·화엄사대웅전(보물 제299호) 등이 있다.
또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38호인 수령 300여 년의 올벚나무[彼岸櫻]가 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무기 재료로 쓰기 위하여 심게 한 것이라 한다.
연곡사(鷰谷寺) 역시 연기에 의하여 화엄사와 같은 해에 창건된 사찰로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피아골 남쪽에 위치하여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되었고, 지금은 일부만이 중건되어 남아 있다.
경내에는 고려 초의 석조 예술을 대표하는 연곡사동부도(국보 제53호)·연곡사북부도(국보 제54호)·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연곡사동부도비(보물 제153호)·연곡사현각선사탑비(鷰谷寺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2호)·연곡사삼층석탑(보물 제151호) 등이 있다.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차일봉(遮日峰) 남쪽에 있는 사찰로, 829년(흥덕왕 4) 덕운(德雲)이 창건하였다.
천은사는 본래 감로사(甘露寺) 또는 천언사(天彦寺)라 불리던 것을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1678년(숙종 4)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방문화재 두 점이 있으며 작설차(雀舌茶)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성덕왕 22)에 삼법이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다가 정강왕 때 쌍계사라 이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친필 비문으로 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쌍계사부도(보물 제380호) 등이 있다. 쌍계사 북쪽 8㎞, 화개면 범왕리에는 103년(파사왕 24) 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일곱 왕자를 위하여 지었다는 칠불암(七佛庵)이 있다.
이 절에는 신라 효공왕 때 운공(雲空)이 만든 아자방(亞字房)이 유명하다. 아(亞)자형의 온돌방으로 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방 전체가 데워지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천왕봉 동쪽 기슭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는 548년 연기가 창건한 대원사(大源寺)가 있다. 현재의 것은 1948년에 소실된 것을 1963년에 재건한 것이다.
법계사(法界寺)도 544년 연기가 창건한 가람으로 천왕봉 남쪽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다. 경내에는 자연석을 기단으로 이용하여 만든 법계사3층석탑(보물 제473호)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지리산 서북쪽 기슭 만수천(萬壽川) 강변에는 828년(흥덕왕 3) 증각(證覺)이 창건하였다는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경내에는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호)·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인근 산내면 대정리백장암(百丈庵)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실상사에는 풍수사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의 내원사(內院寺), 산청군 신동면 율현리에 보물 제374호인 대웅전이 있는 율곡사(栗谷寺),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정취암(淨趣庵), 함양군 마천면에 보물 제474호인 삼층석탑이 있는 벽송사(碧松寺) 등이 있다.
율곡사 대웅전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특이하여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조립한 것으로 일명 몽침절이라고도 불린다. 몽침이란 베고 자는 목침의 다른 이름인데, 목공(木工)이 목침을 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문화 행사로 지리산약수제(智異山藥水祭)가 있는데 곡우절(穀雨節)을 전후하여 열린다. 이것은 신라 때부터 행하여지던 제천행사의 하나로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라 하였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남악사(南嶽祠)라 하였다.
현재의 약수제라는 명칭은 곡우 무렵에 거자목(距杍木)에 상처를 내서 나오는 물이 만병통치에 유효하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 약수제는 일제 침략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중단되었다가 1962년부터 노고단을 중심으로 다시 열리면서 지역 주민의 공동체의식의 함양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본 골격이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계가 중추가 된다는 인식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그래서 지리산을 백두산이 흘러내린 산이라 하여 두류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의 지리 사상인 풍수지리설에서도 받아들인 바이거니와,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의 없이 전수되어온 땅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초적인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밝힌 이가 신경준이다. 신경준은 그의 「산수고」에서 산의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산맥세의 흐름을 상세하게 파악한 바 있는데, 뒤에 이것을 기초로 『산경표(山經表)』가 만들어졌다.
백두산을 시작으로 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맥세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리산은 민족의 진원지며 영산으로 추앙받는 백두산의 한반도 남부를 대변하는 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풍수사상에서는 민족적인 주체의식을 상징하는 의미를 띠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실상사의 풍수전설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백두산의 기맥(氣脈)이 이곳을 지나 일본으로 연결되는데 그 지기(地氣)를 끊어 놓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 바로 실상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경내 약사전에 봉안된 4,000근짜리 무쇠로 제작된 약사여래철불은 높이 2.5m로 좌대 없이 땅바닥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富士山)을 일직선상으로 바라보도록 좌정되어 있는데, 맨 바닥에 철불을 모신 이유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지기를 막자는 데 있다는 것이다.
보광전 범종에 그려진 일본 지도 역시 매일 종을 때릴 때 얻어맞는 위치에 일본이 그려져 있어 위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리산 도처에서 들을 수 있는 설화들인데, 남원시 주천면 노치산 갈재의 「숯막이야기」는 고종이 그곳에 숯 수천 가마를 쌓고 불을 놓아 일본으로 가는 지맥을 막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혹은 동학운동 때 또는 의병항쟁 때 왜군을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의 한맺힌 이야기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지리산에는 지리천왕(智異天王)과 여신(女神)숭배의 설화들이 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보면 그는 천왕봉에 발을 딛고 맨 먼저 그 천왕봉에 있는 성모묘에 제를 올리는데, 당집에 들어가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성모상 앞에서 비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 성모상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로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 마야부인상을 숭배하는 전통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설은 후세의 윤색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고려왕계를 성스러운 혈통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고려 왕실에서 도선선사(道詵禪師)로 하여금 이 성모상을 만들게 하였다는 설이다.
성모에 대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지금 지리천왕은 곧 고려태조의 비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고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이야기(三國遺事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를 듣고 이를 그들 임금의 핏줄로 삼고자 이를 만들어 받든다고 하였다.
셋째로 도선이 지리산에 선암(仙巖)·운암(雲巖) 등 삼암사(三巖寺)를 세우면서 이 절을 세우면 삼한을 통일할 수 있다는 성모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뒤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계시를 내린 성모상을 세워 받들었다는 설이다. 넷째로 중국의 여신인 마고(麻姑)가 동쪽으로 와 정착한 것으로 믿고, 그 여신 숭배가 이 성모상을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지리산의 산정에 사는 여신의 이름이 마고 또는 마야고(麻耶姑)로 불린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래서 마고성모라는 복합어를 쓰기도 한다. 「마고전설」은 지리산의 능선을 형상화하고 있는 면도 있다. 마고는 반야(般若)를 사랑하였다. 어느날 반야는 돌아오겠다고 기약하고 떠났으나 오지를 않는다. 마고는 기다림의 초조로 나무를 할퀸다.
이것이 지리산 주능선 부근의 고사목(枯死木)이다. 그 올로 베를 짜던 자리가 세석평전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천왕봉의 돌무덤 위에 앉아서 서쪽 하늘을 보면 낭군봉인 반야봉이 마치 달려올 듯한 산세로 눈에 담긴다.
산 주변에서 익히 들을 수 있는 설화·전설들 외에도 음악에 있어서 민요가 주변 산촌에서 불려지고 있을 법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리산을 주대상으로 삼은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아리랑의 경우, 「남원아리랑」·「하동아리랑」 등이 있으나 지리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지리산을 소재로 혹은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들을 보면 『고려사』 악지나 『증보문헌비고』에 작자나 연대는 알려지지 않은 「지리산가(智異山歌)」라는 백제 때의 가요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지리산에 대한 최초의 문학·예술 작품이 아니었겠는가 여겨진다.
구례의 한 여인이 지리산 밑에 살았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이 그 여자를 데려가고자 하나 죽기를 한하고 듣지 않으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본격적인 지리산 기록은 역시 기행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조선 시대의 기행문으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佔畢齋集 권2), 이륙(李陸)의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東文選 권21), 남효온(南孝溫)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秋江文集 권6), 김일손(金馹孫)의 「속두류록(續頭流錄)」(濯纓集 권5), 조식(曺植)의 「유두류록」(南冥文集 권4), 양대박(梁大樸)의 「두류산기행(頭流山紀行)」(淸溪集 坤), 박장원(朴長遠)의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久堂集 권15), 정협(鄭悏)의 「유두류록(遊頭流錄)」(東文選 권21),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頭流山記)」(淵齋文集 권21) 등이 있다.
이 중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문 내용에서 몇 가지 표현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일행은 종자(從者)를 제외하고 정여창(鄭汝昌)·임정숙(林貞淑) 등 세 사람이며, 날짜는 4월 14일이다.
“단성(丹城) 서쪽으로 15리를 지나 또 비탈을 타고 서너마장을 가니 골짜기 입구 바위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획이 고고(高古)하여 세상에서 최치원(崔致遠)의 수적이라고 전한다.……나무를 휘어 농기구를 만들고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마을이 있어 감탄하니, 따라온 중이 일러주기를, 이런 외진 땅에 사는 것은 이정(里正)의 박해가 없고 과중한 부역의 고통을 받지 않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라 하였다.……길은 없고 다만 천길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마치 은하수를 거꾸로 쏟는 듯하고, 오가는 나무꾼이 작은 돌멩이를 올려놓아 길을 표시하여 두었는데 나무그늘이 하늘을 가리어 햇볕이 들지 않았다.
시내가 그치고 대숲을 헤쳐 나오니 이윽고 땅은 모두 돌인데, 칡덩굴을 더위잡고 굴면서 숨가쁘게 10여 리를 걸어서 한 높은 고개에 오르니, 철쭉꽃이 활짝 피어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우람한 봉우리 세존암(世尊巖)을 만나 마침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 바라보니 천왕봉이 10리 정도 되어 보였다.
여기서 5리쯤 가서 법계사(法界寺)에 닿으니 중은 한 사람밖에 없고, 산꽃이 곱게 펴 저문 봄철을 수놓았다. ……저물녘에 봉우리의 절정에 오르니 바위 위에 한 칸의 판옥(板屋) 한 채가 겨우 서 있었다. 그 안에 여자의 석상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란다.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리었고, ‘김종직·유호인(兪好仁)·조위가 성화 임진(成化壬辰, 1472년)에 함께 오르다’고 쓰여 있었다. 예전에 구경 온 사람들의 성명을 훑어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
위의 일부 인용한 글로써 당시 지리산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묘사가 섬세하다. 또 알려진 한시로는 김부의(金富儀)의 「등지리산(登智異山)」, 김돈중(金敦中)의 「지리산차계부운(智異山次季父韻)」, 이색(李穡)의 「두류산」, 이첨(李詹)의 「두류산」, 양성지(梁誠之)의 「지리산」, 최익현(崔益鉉)의 「등두류산(登頭流山)」·「천왕봉(天王峯)」, 유방선(柳方善)의 「청학동(靑鶴洞)」 등이 있다.
현대작품으로는 이병주(李炳注)의 『지리산』, 문순태(文淳太)의 『달궁』과 『피아골』, 서정인(徐廷仁)의 『철쭉제』 등의 소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가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좌우 대립에 따른 민족의 뼈아픈 과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지리산이 현대사에서 차지하였던 첨예한 이념 대립의 공간적 현장성의 반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 산을 둘러싸고 있는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의 작가들로부터도 시·소설·수필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나, 대부분이 서정성을 짙게 풍기는 것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직접 몸으로 그 뼈저린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쓰라린 상처를 덮어두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혹은 묵중하고 푸근한 지리산의 웅자가 그 섬세한 정기로 모든 인간의 아픔을 감싸안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지역에는 고령토·규석·금·은·니켈·수연 등의 광물이 산출된다. 고령토는 산청·하동 일대에 넓게 분포하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암석인 변성아노르소사이트가 오랜 세월을 두고 풍화작용을 받아 생성되어 매우 품위가 높다.
요업의 원료 광물로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양질의 고령토는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출 위주로 없애기보다는 주요 전략 지원 광물로 비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과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는 반도체 원료로 쓰이는 질 좋은 규석광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편마암류를 관입한 석영맥에서 산출되고 있다. 이 밖에도 니켈과 수연광이 운봉읍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경제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은 남한의 총 삼림 축적량의 19%를 차지하는 방대한 임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전나무·잣나무·가문비나무·주목 등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수종은 기존 임목을 보호함과 아울러 파괴된 식생을 완전 식생으로 복구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사방조림용 임목도 지리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잔디·칡·오리나무 종류를 사용함으로써 생태계를 자연 상태에 가깝도록 유지하는 것이 임산자원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지리산은 산형이 다기다양(多奇多樣)하고 고준광대(高峻廣大)하면서 중후인자(重厚仁慈)하여 아버지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한 웅대한 산악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천왕봉·반야봉·노고단 등의 3대 주봉과 함께 해발 1,500m 이상의 큰 봉만도 십지(十指)를 보유하고 있고, 피아골·뱀사골·화엄사계곡 등 10㎞ 이상의 계곡이 10여 개나 된다. 또한 불일폭포(佛日瀑布)·구룡폭포(九龍瀑布)·칠선폭포·가내소폭포 등이 명소를 이룬다. 북동쪽으로는 남강(南江)이, 남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 강과 산의 조화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은 세석평전을 덮고 있는 철쭉나무 군락, 피아골의 원시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노고목(老古木)과 전설처럼 신비한 고사목(枯死木), 그리고 사향노루·산양 등 동물의 안락한 서식지로서의 가치와 함께 의미 깊은 관광자원들이 많은 곳이다.
거기에 웅대한 사찰들과 유서 깊은 암자들, 국보와 보물·사적·천연기념물들이 지리산의 정취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세석평전에는 매년 5월에 철쭉제가 열리고, 매년 4월에는 자작나무에서 받은 수액으로 약수제를 지낸다.
지리산10경으로 노고운해(老姑雲海)·피아골단풍·반야낙조(般若落照)·섬진청류(蟾津淸流)·벽소명월(碧沼明月)·불일폭포·세석철쭉·연하선경(烟霞仙景)·천왕일출(天王日出)·칠선계곡을 꼽는다.
웅대하고 수려한 산세로 등산객들이 많이 찾으며 다양한 등산길이 정비되어 있다. 등산로로는 화엄사에서 노고단·임걸령·반야봉·뱀사골산장·연하천·벽소령·덕평봉·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 코스, 백무동에서 한신계곡·하동바위·장터목·천왕봉에 이르는 길, 신흥에서 대성동·세석·천왕봉에 이르는 길, 중산리에서 법계사·천왕봉에 이르는 길 등이 있다.
인근 도시에서 버스편으로 당일에 가볼 수 있는 관광지도 있다. 남원에서 16㎞ 떨어진 호경에서는 구룡폭포를 볼 수 있고, 32㎞ 떨어진 산내에서는 실상사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4㎞를 더 들어간 경상남도 마천에서는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구경할 수 있으며 다시 산내에서 8㎞를 더 들어간 반선에는 유명한 뱀사골계곡이 나온다.
화엄사는 구례에서 6㎞인데,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10㎞밖에 안 되기 때문에 쉽게 노고단에 오를 수 있다. 구례에서 연곡을 지나 연곡천을 끼고 8㎞를 더 오르면 내동에 이르고, 여기서부터 피아골계곡이 시작된다. 진주에서 35㎞ 떨어진 중산에서 천왕봉까지는 12㎞밖에 되지 않아 이 길이 지리산 주봉을 오르는 최단 거리이다.
교통편은 경부선·호남선·전라선이 연결되어 남원·구례·진주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어 편리하다. 화엄사의 표고버섯탕과 구례의 은어회가 별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리산 [智異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8. 치악산 국립공원
정의
강원도 원주시 및 원주시 소초면과 횡성군 강림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288m. 태백산맥의 오대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진 차령산맥의 줄기로 영서 지방의 명산이며 원주의 진산이다. 남북으로 웅장한 치악산맥과 산군(山群)을 형성하고 있다.
주봉인 비로봉(飛蘆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峰, 1,043m)·남대봉(南臺峰, 1,182m)과 북쪽으로 매화산(梅花山, 1,084m)·삼봉(三峰, 1,073m) 등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며 그 사이에 깊은 계곡들을 끼고 있다. 남북으로 뻗은 주능선을 경계로 하여 대체로 서쪽이 급경사를 이루며 동쪽이 완경사를 이룬다.
특히 비로봉에서 구룡사(龜龍寺)를 향하여 뻗은 북쪽의 능선과 계곡은 매우 가파른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고둔치 동쪽인 부곡리의 신막골 일대는 비교적 넓은 평탄지대를 이루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서쪽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섬강(蟾江)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흐르는 계류들은 주천천(酒泉川)으로 흘러든다.
조선 시대에는 오악신앙의 하나로 동악단을 쌓고 원주·횡성·영월·평창·정선 등 인근 5개 고을 수령들이 매년 봄·가을에 제를 올렸다. 또 많은 승려와 선비들의 수련장으로 사찰과 사적이 많다. 공원 면적은 182.09㎢이고, 산세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197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큰골·영원골·입석골·범골·사다리골·상원골·신막골·산성골 등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의 아름다운 골짜기가 있으며, 비로봉·남대봉·매화산·안봉·천지봉·투구봉·토끼봉·향로봉 등의 산봉과 입석대·세존대·신선대·아들바위·구룡폭포·세렴폭포·영원폭포 등의 명소가 산재하여 있다. 치악산에는 한때 76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구룡사·상원사(上院寺)·석경사(石逕寺)·국향사(國享寺)·보문사(普文寺)·입석사(立石寺)가 남아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이 창건한 고찰로 거북바위[龜巖]와 구룡소(九龍沼) 등의 경승지가 있으며 대웅전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남대봉 아래의 상원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절이며 용마바위와 계수나무 고목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곳은 꿩의 보은설화로 더욱 유명하다. 또한 고려 말의 충신 원천석(元天錫)의 은거지였기에 그의 묘소, 사적을 기록한 묘갈(墓碣), 재실(齋室)이 있는 석경사, 태종이 찾아와 스승을 기다리던 태종대(太宗臺), 할미소[老姑沼], 수레너미재, 대왕재 등 태종과 원천석에 얽힌 지명과 명소가 많이 널려 있다.
남대봉 서쪽 기슭에는 험준한 산세와 지리적 여건을 이용하여 축조한 세 곳의 옛 산성 터가 남아 있다. 합단(哈丹)의 침입과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영원산성(鴒原山城), 해미산성지(海美山城址), 금두산성이 그것이며, 이것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인 원주를 지키는 천연의 요새로서 치악산의 몫을 입증하는 사적들이다. 남대봉 동남쪽인 상원골 입구 성남리의 성황림(城隍林)은 천연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곳은 전나무·들참나무·층층나무·피나무·가래나무·들매나무·귀등나무·느릅나무·소나무 등 20종의 수목이 울창하였으나 보호에 소홀하여 고유 임상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곳과 구룡사 사찰림에는 파랑새·호반새·오색딱다구리·청딱다구리·꾀꼬리 등 희귀한 조류도 서식하고 있다. 등산로는 종주코스와 횡단코스 등 다양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특산물은 송이, 산채, 닥종이[韓紙] 등이며 매년 9월에는 예총(藝總) 원주 지부에서 주관하는 치악예술제가 열린다.
19. 태백산 국립공원
정의
강원도 태백시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566.7m.태백산맥의 종주(宗主)이자 모산(母山)이다. 함경남도 원산의 남쪽에 있는 황룡산(黃龍山)에서 비롯한 태백산맥이 금강산·설악산·오대산·두타산(頭陀山) 등을 거쳐 이곳에서 힘껏 솟구쳤으며,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소백산맥이 분기된다.
태백산은 북쪽에 함백산(咸白山, 1,573m), 서쪽에 장산(壯山, 1,409m), 남서쪽에 구운산(九雲山, 1,346m), 동남쪽에 청옥산(靑玉山, 1,277m), 동쪽에 연화봉(蓮花峰, 1,053m)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로 둘러싸여 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이 산은 1,560m의 고봉군(高峰群)이지만 산세는 험하지 않다.
북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고 산정 부근에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서남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태백산지는 함백산과 함께 지질구조가 복잡하며 남한 제일의 탄전지대를 이룬다.
대한석탄공사의 장성탄광을 비롯하여 황지 일대에 많은 탄광이 개발됨으로써 작은 마을에 불과하던 지역이 대표적인 광산도시인 태백시로 승격되었다.
태백산은 천년병화(千年兵火)가 들지 않는 영산(靈山)이며, 단종이 악령(嶽靈)이 되었다 하여 단종의 넋을 위무하기 위한 단종비가 망경대(望鏡臺)에 있다. 또한 이 산에는 태백산사(太白山祠)라는 사당이 있었고, 소도동에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1989년에 이 일대는 태백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 지질·지형
태백산 일대는 동해안에 평행하게 북북서 방향으로 종단하는 태백산맥의 한 줄기인 중앙 산맥의 중심부에 해당되며, 여러 방향으로 분기되는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연이어 있다.
주능선의 방향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하여 두 줄기로 나누어진다. 장산·태백산·조록바위봉(1,087m)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선캄브리아기(Pre-Cambria紀)와 캄브리아기의 경계 방향 및 장산규암층(壯山珪岩層)의 분포 방향과 상당히 유사하여 이 지질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능선의 북쪽 부분은 경사 15°이하로 완만한데, 이 지역에는 북북동의 경사 방향을 가진 고생대의 퇴적암류가 분포한다. 이 능선의 남쪽 부분은 25°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는데, 이 지역에는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이 분포한다.
이에 반하여 연화산(1,171m)·태백산·구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구조선에 따른 차별침식과 관련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옥석산(玉石山, 1,242m)·선달산(先達山, 1,236m)으로 이어지는 남서 방향으로 소백산맥이 분기되며, 태백산맥의 높이는 남으로 가면서 낮아진다. 태백산의 정상 부근은 상당히 평탄한 지역으로 고위평탄면에 해당된다.
이 지역의 하천은 산릉의 방향과 일치하는데, 태백산을 분수령으로 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낙동강의 지류이고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남한강의 지류이다.
태백산에서 북동류하는 계류는 함백산에서 발원한 계류와 합류하여 태백시 문곡동 부근에서 황지천(黃池川)으로 흘러들고, 남쪽 사면을 동류하는 하천은 곡류하다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또한 서쪽 사면을 흐르는 계류는 구운산에서 발원하여 북서류하는 옥동천(玉洞川)과 합류한다.
이 지역의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변성암류와 이를 부정합(不整合)으로 덮고 있는 고생대·중생대의 퇴적암류, 그리고 이들 지층에 관입(貫入)한 중생대의 화성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선캄브리아기의 고선리층(古善里層)은 녹니석편암(綠泥石片岩)·천매암류(千枚岩類)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은 태백산지의 남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고생대의 홍점통(紅店統)과 묘봉층(猫峰層)·대기층(大基層)·화절층(花折層)·막동층(莫洞層)이 북부에 차례로 나타나며, 중생대의 화강반암(花崗斑岩)은 서북부에 산재한다.
산지의 동쪽에는 남북 방향의 함백산대단층(咸白山大斷層)이 있어 동서의 지질 분포를 구분 짓는다. 이 지역은 선캄브리아기에 셰일(shale)과 사암이 두껍게 퇴적된 후 오랜 시일이 지난 뒤 조산운동(造山運動)으로 육화(陸化)되면서 변성작용을 받았다. 고생대 초에 다시 육지가 침강하여 조선기해(朝鮮紀海)를 이루었는데, 이때 퇴적된 사암·셰일·석회암 등이 조선계 지층을 이룬다.
그 뒤 약 1억 년간의 침식 기간을 거친 뒤 고생대 후기에 해침(海浸)을 받아 평안계를 이루었으나 곧 육화되었고, 중생대에 이르러 호소(湖沼)나 하천에서 육성층이 형성되었다. 그 뒤 함백산대단층이 형성되었으며, 곳곳에 화성활동이 있어서 화강암류가 관입하였다.
이 지역은 중생대 말기 이후의 상승요곡운동(上昇撓曲運動)에 따라 간헐적으로 융기하여 높은 산지를 이루며, 당시의 삭박면(削剝面 : 깍여서 벗겨진 면)이 정상 부근에 남아 고위평탄면을 형성하고 있다.
(2) 기후
태백산 일대는 내륙 고지대에 위치하므로 대륙성기후의 특성이 강하다. 산 북동쪽에 위치한 태백시의 연평균기온은 11.2℃이고, 1월 평균기온은 -3.1℃, 8월 평균기온은 23.8℃로 26℃의 연교차를 나타낸다. 연강수량은 1,019.3㎜이고 증발량은 1,282.4㎜이다. 고지대여서 결빙 일수가 168일이나 되며, 일조율은 44.9% 정도이다.
(3) 생태
조류는 90여 종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참새류가 50여 종으로 가장 많고 쑥독새류가 1종으로 가장 적다. 개체수로 보면 까마귀·찌르레기·꾀꼬리·참새·멧새·종다리·알락할미새·노란할미새·박새 등이 많고, 촉새·무당새는 희귀한 편이다.
포유류는 25종이 알려져 있으며, 양서류는 꼬리치레도롱뇽·무당개구리·두꺼비·청개구리·참개구리·금개구리 등이, 파충류는 도마뱀·표범장지뱀·유혈목·무자치·능구렁이 등이 있다.
어류는 수계(水系)에 따라 분포에 차이가 있다. 남한강수계의 어종은 보통종으로, 버들치·피라미·미꾸라지·종개·퉁가리·메기·둑중개·동사리 등이 있고, 희귀종으로 열목어·연준모치·참종개 등이 있다. 이 중 참종개는 한국특산어종에 속한다.
낙동강 수계는 보통종으로 다묵장어·뱀장어·버들치·피라미·긴물개·붕어·미꾸라지·자가사리·메기·둑중개·꺽지 등이 있고, 희귀종으로 연준모치·수수미꾸라지 등이 있다. 이 중 긴물개·자가사리·수수미꾸라지 등은 한국특산어종이다. 오십천(五十川) 수계에도 버들개는 있으나 유량이 적어 어류가 빈약하다.
곤충류는 340여 종이 있는데 이 중 나비류 83종, 딱정벌레류 71종, 벌류 64종, 파리류 61종, 노린재류 43종 등으로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식물은 635종이 있는데 이 중 14종은 한국특산식물이다.
이 지역은 연평균기온이 10℃ 내외이고 연강수량도 1,000㎜ 정도로 냉온대에 속한다. 온량지수(溫量指數)가 85∼100이므로 낙엽광엽수림대에 해당한다. 산록부에는 아카시아나무·상수리나무·밤나무·떡갈나무 등이 많으며, 하천 주변 지대에는 갯버들·갈대·삿갓사초·물봉선화 등이 혼재한다.
산 중턱에는 소나무·일본잎갈나무·졸참나무·물박달나무·너도밤나무·고로쇠나무·생강나무·층층나무·가래나무·물푸레나무 등이 혼합림을 이루고 있고, 중턱 위로는 신갈나무·철쭉·거제수나무·사스래나무·자작나무 등이 혼재하며, 정상부에는 분비나무·주목·잣나무 등의 천연 침엽수림군계가 발달한다.
이 지역의 희귀식물로는 태백말발도리·좀바위솔·들솜쟁이·산토끼풀·호범꼬리·톱바위취·노랑무늬붓꽃·주목·참꽃나무겨우살이·참바위취·바위괭이눈·노랑만병초·멍석딸기 등이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이나 전설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처음으로 그 명칭이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백산은 토함산(吐含山)·지리산(智異山)·계룡산(鷄龍山)·부악(父嶽 : 지금의 팔공산)과 함께 신라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로서 북악(北嶽)에 해당하였으며, 중사(中祠)의 제행이 행하여졌다.
《삼국유사》에는 자장(慈藏)이 문수(文殊)를 만나 법요(法要)를 토론한 뒤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곳에 와서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척 읍지인 《삼척진주지 三陟眞珠誌》 척주부(陟州賦)에는 태백산의 명칭에 관하여 “태백산 중에서 가장 높고 흰 산이 문수산이며, 여기에 흰 모래와 자갈이 눈 덮인 듯이 쌓여 있어 산 이름을 태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옛날 통신수단으로 쓰인 봉수대 자리가 지금도 있고, 이 밖에 산성터·낙벽사·구령사 등의 절터가 있다. 단종의 묘인 장릉(莊陵)이 여기서 멀지 않은 영월에 있으므로 단종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에 들어와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여기에 연유하여 태백산 산정에는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 쓰인 단종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토속신앙이 성하였으며, 정상을 비롯하여 계곡에 사찰과 기도처가 많았으나 1970년대에 정리가 되어 현재는 작은 사찰 4개와 정상 부근과 당골, 유일사 길목, 백단사 옆 계곡 등에 몇 개의 기도처가 남아 있다.
망경대에 태백산사(太白山祠)라 불리는 사당이 있어 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봄·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에는 제수로 소를 잡아 쓰는 것이 아니라 산 소를 산정 제당까지 몰고 가 제당 앞에 매어놓고 제사를 지낸 다음 소를 그곳에 매어둔 채 제관들이 하산하였으며, 이때 뒤를 돌아보면 불공하다 하여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3일 뒤에 그 소를 몰아 내려오는데, 이렇게 태백산제의 제수로 쓰였던 소를 퇴우(退牛)라 불렀다. 이 습속은 조선 시대에 있던 것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태백산 여러 곳에 있는 토속신앙의 기도처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태백시 소도동(所道洞), 속칭 당골에 있는 산신당으로, 이 당골이라는 명칭도 신당이 있다는 데서 연유하여 생긴 것이다. 현재의 태백시민헌장비(太白市民憲章碑)가 있는 곳에서 등산로를 따라 5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당목이 아직 남아 있고, 그 옆에 사당터가 있다.
당집은 1970년대 태백산 내에 있는 토속신앙을 정화할 때 헐렸고, 지금은 가로 14m, 세로 10m 정도의 축대 위에 시멘트 벽돌 제단이 있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 늘 향이 타고 촛불이 켜져 있다.
이곳에는 또한 단군성전이 있는데 전면 3칸, 측면 2칸의 공포집으로 최근에 지었으며,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다.
이 건물을 짓고 여기서 단군제를 지내기 전에는 만경대의 천왕당(天王堂)에서 태백산록 경상북도 봉화군 사람과 강원도 삼척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단군제를 지냈다.
그런데 처음에는 순수한 조상신제(祖上神祭)이던 것이 주관자에 따라 점점 무속제의식(巫俗祭儀式)으로 변질되자 삼척의 일부 인사들이 따로 단군봉사회를 조직하고 성금을 모아 1978년당골에 단군 성전을 새로 건립하고 제를 지내게 되었다.
태백산의 문화유물로는 사찰과 함께 토속신앙의 기도처가 많이 남아 있다. 사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정암사(淨巖寺)이다. 《삼국유사》에 자장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석남원이 바로 이곳으로, 그 경내의 수마노탑(水瑪瑙塔, 보물 제410호)은 자장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인데 전형적인 전탑의 하나이다.
이 탑은 벽돌 크기의 탑재를 한장한장 쌓아서 만들었는데, 흔히 보이는 석탑과는 축조방식이 달라 이와 같은 축조 방식의 탑은 전국적으로 그 수가 많지 않다.
봉화 쪽에는 조선시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태백산사고가 있다. 한편, 태백산록인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있는 화전민촌의 너와집을 비롯한 민속 유물들이 1975년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이 마을은 외부와의 교통이 좋지 않은 산간오지로 현대문화의 수용이 늦어 최근까지도 격리된 생활을 하였으며, 옛날의 산간 민속이나 생활용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지정 자료는 너와집 2채·물레방아·통방아·채독·나무통(김치통)·화티(화투)·살티(살피 또는 설피)·창(槍)·주루막 등이다.
태백산은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기에 여러 개의 사찰과 토속신앙의 기도처가 있으며, 여기서 연유한 전설이나 민담이 남아 있다. 먼저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자장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태백산 갈반지에서 문수를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노거사(老居士) 한 사람이 누더기 가사를 입고 칡삼태기에 죽은 개 한 마리를 담아들고 와서는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자장이 그 행색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 하여 내쫓으니 노거사가 말하기를, “자장이 해탈의 경지에 든 사람인 줄 알고 찾아왔는데 아직도 그 경지에 들지 못하였구나. 사람을 잘못보고 왔으니 돌아가겠다.” 하고 삼태기를 땅에 내려놓으니 죽은 개가 사자가 되어 이를 타고 빛을 내면서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빛을 좇아 남령(南靈)에까지 올라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진정(眞定)의 출가수도도 그 배경이 태백산으로 되어 있다. 진정이 졸오(卒伍)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중 당대의 고승 의상이 태백산에서 법연을 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고자 하였으나, 차마 어머니를 두고 갈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못하였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도리어 아들의 나약함을 꾸짖어 입산을 시키니, 태백산에서 의상의 제자가 되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법호를 진정이라 하였다.
태백산은 이름이 있는 산이기에 시문이 많으나 오늘 전하고 있는 것은 거의가 한문으로 된 한시문이 많고 개화 이후의 국문으로 된 시문은 거의 없다.
《삼척진주지》의 척주부에는 “푸르고 푸른데 어찌 태백이라 하였던가. 그 위에 당집을 짓고 천왕이라 이름 하였네. 신라·고려 때부터 숭상하여 믿었고, 모두 무당과 박수의 도회로세. 저 동쪽을 바라보니 팽나무도 많고, 저 남쪽을 돌아보니 크고 높은 언덕도 많네(何蒼蒼兮太白 堂其上而天王 自羅麗而崇信 儘巫覡之都會 瞻彼東兮大朴 睠其南兮萃覺).”라고 하여 태백산이 신라·고려 때부터 토속신앙의 중심지였음을 말하고 있다.
고려 시대 최선(崔詵)의 예안(禮安)〈용수사기 龍壽寺記〉에는 “천하의 명산이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역시 고려 시대의 안축(安軸)은 태백산을 소재로 하여 “길다란 동천을 지나 자연에 들어가니, 비로소 높은 꼭대기에 오른 줄 알았노라.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낮아진 듯, 사방의 여러 산이 눈앞에 떨어졌네. 몸이 나는 구름을 따르니 학을 탔는가 의심되고, 길은 높은 비탈에 달려 하늘에 오르는 듯하구나. 비온 뒤 일만 골짜기에 물이 넘쳐 흐르는데, 구불구불한 오십천을 건널 일이 근심된다(直過長空入紫烟 始知登了在高巓 一丸白日低頭上 四面群山落眼前 身逐飛雲疑駕鶴 路懸危磴似梯天 雨餘萬壑奔流漲 愁度縈洄五十川).”라는 시를 남기고 있다.
또한 조선 시대의 김시습(金時習)은 〈망태백산 望太白山〉이라는 시에서 “멀고 아득한 태백산을 서쪽에서 바라보니, 기암괴석이 구름 사이에 솟아 있네. 사람들은 산마루 신령님의 영험이라 말하는데, 분명코 천지의 조화로세(西望遙遙太白山 碧尖高揷聳雲間 人言嶽頂神靈異 辨得乾坤造化關).”이라 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얽히고 설킨 뿌리도 많고 높이 솟은 형세 구름 사이에 들어 있네. 높은 봉우리는 온갖 흰 옥이 선듯하고 절벽에는 온갖 산울림이 들리네.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에 한가롭게 새·짐승 떼지어 다니누나. 무릉도원 깊은 곳에 자리잡고 나의 속세마음 씻고자 하네(合沓盤根大 岧嶢勢入雲 危峰千玉立 絶壑萬雷聞 懮懮干戈世 閑閑鳥獸群 桃源定深處 吾欲謝塵氛).”라 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김방걸(金邦杰)을 비롯하여 한말의 우국지사인 송병선(宋秉璿)·곽종석(郭鍾錫) 등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시문들이 남아 있다.
태백산은 육산으로 금강산이나 설악산처럼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는 경승이 없어 시문에 묘사된 모습도 금강산과 같은 정취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산이 높고 주위에 높은 봉우리들이 서로 이어져 능선을 이루고 있으므로 선계(仙界)와 같은 느낌을 주어 시문에도 신선의 영상과 산정의 영이(靈異)함이 자주 도입되었다.
이는 태백산이 신라 이래로 제행이 올려지는 오래된 신앙처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군봉을 이루고 있는 탓으로 삼척의 오십천 등과 같이 태백산에서 연유한 계류가 많아 산정에 못지않게 계류에 대한 묘사가 시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1) 부존자원
태백산 일대는 산림자원이 풍부하였다. 특히 양질의 소나무가 많은데, 태백산 서쪽 춘양(春陽)에서 나는 소나무는 ‘춘양목’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동쪽의 원덕면 일대에서도 많이 생산되었다.
근년에 이 지역이 석탄 산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소나무를 광산의 갱목으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나무를 벌채한 뒤 낙엽송을 식재(植栽)하여 태백산 주변에는 낙엽송 군락이 많아졌다.
이 지역의 석탄 개발로 수송에 필요한 교통로가 건설되어 있기는 하나, 워낙 험준한 산간오지인 탓으로 아직도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 많이 남아 있다. 광산 주변은 벌채로 인하여 산림자원이 고갈되어가고 있지만 오지에는 적송과 잡목 등 임상(林相)이 좋은 곳이 많다. 태백 산지는 지하자원의 보고이다.
도계·장성·황지·고한·함백·사북 등은 석탄 산지로서 탄광 때문에 생긴 도시인데, 이 일대는 매장량·생산량에 있어서 국내 제일이다. 또한, 영월군 상동(上東)에는 우리 나라 제일의 중석광산이 있다.
이 지역에서 석탄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37년 일본인이 조선무연탄주식회사로부터 광업권을 양도받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도계에서 채탄 작업을 하면서부터이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종업원들의 자치제로 운영되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상공부 광무국 관할로 운영되었다.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발족하여 도계·장성 두 광업소에서 채탄을 하였다.
그 뒤 석탄 수요가 급증하자 석탄 채굴이 확대되어 1960년대에 들어 황지에서 본격적인 채굴이 이루어졌다. 함백·고한·사북·예미 지역은 민영 탄광이 들어와 태백산 일대의 석탄 생산이 본격화되었다.
이들 탄광취락은 원래 작은 한촌에 불과하였으나 석탄 개발 이후 산업철도가 전철화되는 등 교통이 원활하게 되어 도시로 발달하였다. 특히, 장성과 황지는 병합되어 태백시로 승격하였다. 석탄 개발 초기에는 지표 가까운 곳에서 채탄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갱도가 깊어지고 에너지정책에서 석유에 밀려 사양길을 걷고 있다.
(2) 관광자원
고한읍의 정암사 경내에는 수마노탑이 있고, 주변 계곡에는 열목어서식지(천연기념물 제73호)가 있다. 도계읍에는 높이 20m, 둘레 7.5m의 긴잎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95호)와 석회동굴인 대이리동굴지대(大耳里洞窟地帶, 천연기념물 제178호)가 있다.
대이리동굴은 갈매굴·환선굴(幻仙窟)·관음굴(觀音窟)·제암풍혈(梯巖風穴)·양터목세굴·덕발세굴·큰재세굴 등 크고 작은 동굴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 중 대표적인 환선굴은 해발 500m 지점에 위치한다. 환선굴은 높이 15m, 너비 20m이고, 100m 들어가면 4개로 나누어진다. 이들 관광자원은 개발이 되지 않아 교통이 불편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
이 밖에 태백시의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태백산 정상은 사방을 조망하는 경관이 좋고 토산(土山)인 관계로 쉽게 오를 수 있어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등산로는 소도동 쪽 길과 백단사 방향 등 몇 개가 있다.
20. 태안해안 국립공원
정의
충청남도 태안군의 태안반도(泰安半島)를 중심으로 북쪽의 가로림만(加露林灣)에서 남쪽의 안면도에 이르는 국립공원.
면적은 328.99㎢(육지 38.69㎢, 해상 290.30㎢)이다. 리아스식 해안에 해수욕장이 발달하여 있어 북쪽에서부터 천리포해수욕장ㆍ만리포해수욕장ㆍ연포해수욕장ㆍ몽산포해수욕장ㆍ방포해수욕장이 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왜구를 비롯하여 외국인들의 침입을 받았으므로 해미성(海美城)ㆍ안흥진성(安興鎭城)ㆍ백화산성(白華山城)ㆍ만리성(萬里城)ㆍ북주산성(北主山城)ㆍ구도성(舊都城)ㆍ토미성(吐美城) 등 성곽(城廓)과 전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망수대(望守臺)와 능허대(凌虛臺) 등의 사적지와 문두절벽ㆍ학도(鶴島)ㆍ단도(端島)ㆍ가의도(賈誼島)ㆍ목개도(木蓋島)ㆍ군관도(軍官島) 등의 해식애(海蝕崖)와 곰솔[黑松]이 어울린 섬이 많고, 학바위ㆍ떡바위ㆍ옹기바위ㆍ등대바위ㆍ남매바위ㆍ거북바위 등의 명소가 있다.
태안반도국립공원의 지질은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된 변성퇴적암류와 고기관입암류 및 중생대의 화성암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학암포와 구례포는 규암과 흑운모편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면도의 백사장과 삼봉지역은 규암을 포함하며, 만리포 지역은 흑운모화강암이 주변의 변성암류를 관입한 상태로 나타난다. 태안반도는 남북간의 위도 차가 크고 1월 평균 4℃의 등온선이 지나므로 식물의 남북한계선이 되어 다양한 동식물상을 나타낸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은 포유류 8과 11종, 조류 34과 106종, 곤충류 132과 470종, 양서류 6과 8종, 파충류 3과 7종, 담수어류 6과 16종 등 도합 189과 618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해양생물은 해조류 119종, 갑각류 5종, 두족류 5종, 해양어류 44종, 플랑크톤 123종, 저서생물 153종 등 모두 449종이 분포하고 있다. 조류는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큰고니, 제323호인 붉은배새매, 황조롱이와 제324호인 소쩍새와 큰소쩍새, 제326호인 검은머리물떼새도 관찰되고 있으며, 최근 태안해안의 섬지역이 철새들의 중간기착지로 이용되면서 다양한 종의 조류가 관찰되고 있다. 식물상으로 보면 태안해안국립공원 지역은 냉온대 낙엽활엽수림이 남부에 걸쳐있으며 감탕나무, 호랑가시나무, 동백나무, 나도밤나무 등이 자라고 해안에는 곰솔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으로 관속식물은 122과 754종이 분포되어 있다. 특히 간월도(間月島)와 서산 어리굴젓이 유명하며 왕새우와 꽃게가 유명하다.
주변에 배후 관광지로서 계룡산국립공원을 비롯하여 유성온천ㆍ도고온천ㆍ온양온천ㆍ현충사ㆍ대천해수욕장이 있다. 몽산포 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만리포해수욕장 등 25개에 이르는 해수욕장과 생태자원을 중심으로 해안공원이 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지난 1978년10월 20일 우리나라의 13번째 국립공원이자 유일한 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총 326.574㎢에 이르는 태안해안국립공원 자연지형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사구(砂丘), 즉 모래언덕이 광활하게 펼쳐졌다는 점이다. 태안반도와 안면도 일대의 해변에는 모래해변이 매우 잘 발달한 데다 겨울철만 되면 강력한 북서계절풍이 몰아쳐 바닷가에는 새로운 모래언덕이 생기며 이렇게 형성된 사구는 태안반도와 안면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서해안 지역의 특성인 큰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갯벌이 전 지역에 잘 발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식환경을 주는 모래, 뻘, 암반 등의 갯벌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갯벌 서식생물의 다양성이 아주 높은 곳이다.
교통은 2000년 11월 서해대교가 완공되면서 서해안고속도로가 준공됨에 따라 경인권에서 서산나들목과 홍성나들목을 통해 안면도까지 2시간권 이내에 들어오게 되면서 육로교통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숙박 시설은 여관과 민박이 많아 국립공원지역 어느 곳에서나 편리하다.
21. 한라산 국립공원
제주도의 중앙에 있는 산.
높이 1,947.269m. 북위 40° 이남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부악(釜嶽)·원산(圓山)·진산(鎭山)·선산(仙山)·두무악(頭無嶽)·영주산瀛洲山)·부라산(浮羅山)·혈망봉(穴望峰)·여장군(女將軍) 등의 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으며, 전설상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銀河水)를 뜻하며, 라(拏)는 맞당길나[相牽引] 혹은 잡을나[捕]로서,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남쪽 하늘에 있는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었으며, 이 별을 본 사람은 장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진산이란 보통 도읍의 뒤에 위치하여 그 지방을 편안하게 지켜주는 의미를 가진다. 한라산을 진산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한반도로 밀려오는 남태평양의 큰 바람을 한라산이 막아주어 한반도의 안녕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두무악이란 머리가 없는 산을 의미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사냥꾼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잘못하여 활끝으로 천제(天帝)의 배꼽을 건드렸는데, 이에 화가 난 천제가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 멀리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산정부가 던져진 곳은 지금의 산방산(山房山)이며, 뽑혀서 움푹 팬 곳은 백록담(白鹿潭)이 되었다고 한다.
원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중앙이 제일 높아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고, 사방 주위가 아래로 차차 낮아져 원뿔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붙여졌다. 맑은 날 해남이나 진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산 전체가 완만한 원뿔로 보인다.
영주산이란 중국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한다. 바다 가운데에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 등 삼신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진시황(秦始皇)은 서기 전 200년경 역사(力士) 서불(徐市)에게 그 약초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부악이란 산정의 깊고 넓은 분화구가 연못으로 되어 있어 마치 솥[釜]에 물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연못은 성록(聖鹿)인 흰 사슴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하여 백록담이라고 하였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4년(세조 10) 2월에 제주에서 흰 사슴을 헌납하였다[濟州獻白鹿]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 연간에 간행된 읍지에 의하면, 한라산을 등산하는 데는 대정현 쪽으로 험한 산길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따라 수목 사이를 헤치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소란을 피우면 곧 운무가 사방을 덮어버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한다.
또한, 5월에도 눈이 남아 있어 얼음이 필요하면 산에 올라가서 가죽 부대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는 것으로 제주 10경 중의 하나이다.
한라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조정에서 해마다 산정에서 국태민안을 비는 산제(山祭)를 지냈는데, 산제를 지내러 갔던 백성들이 동사하기도 하였다. 이에 1469년(예종 1) 목사 이약동(李約東)은 지금의 산천단(山泉壇)에 산신묘를 세우고 이곳에서 산제를 지내도록 하여 그 석단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의 전역을 지배하며, 동심원상의 등고선을 나타내어 순상화산(楯狀火山)에 속한다. 한라산은 약 360개의 측화산(側火山)과 정상부의 백록담, 해안지대의 폭포와 주상절리(柱狀節理: 다각형 기둥모양의 금) 등의 화산지형, 난대성기후의 희귀식물 및 고도에 따른 식생대(植生帶)의 변화 등 남국적(南國的)인 정서를 짙게 풍겨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1970년에 한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 지질·지형
신생대 제3기 말에서 제4기에 이르는 5기(期)의 화산분출로 형성되었다. 제1기 화산분출은 기저현무암과 서귀포층을 형성하여 해저 기반을 이루며, 제2기 화산분출은 표선리 현무암과 서귀포 조면암 및 중문 조면암을 형성하여 육상지형을 이룬다.
제3기 분출기는 열로분출(列爐噴出)에서 중심분출 형태로 전환되는 시기로서, 제주 현무암·하효리 현무암·법정리 조면암 등이 분출하여 한라산 화산체(火山體)가 950m에 달하였다. 제4기 화산분출은 고산 지대에 집중되어 시흥리현무암·성판악현무암·한라산현무암 등을 형성하였다.
제5기 분출기는 백록담 화산폭발로 백록담 현무암이 분출하였고 고산 지대에는 300여 개의 분석구(噴石丘)가 형성되었다.
한라산 일대의 안산암(安山岩)에는 철분이 풍부한 감람석(橄欖石)이 많고, 현무암에는 알칼리 성분이 풍부하다. 이처럼 한라산체는 알칼리감람석현무암질 마그마의 분출로 이루어져 내태평양 지역에 산재하는 화산도와 비슷하다.
한라산의 사면은 고도와 경사에 따라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고도 200m 이하 해안저지대는 경사도 4° 이하로 완만하며, 고도 200∼600m 사면은 중산간지대이고, 600∼1, 200m의 산악지대는 경사도 10∼20°로 다소 가파르며, 1,200m 이상의 정상부는 경사도 20°이상의 고산 지대를 이룬다. 한라산의 사면에는 약 360개의 측화산이 발달하였다.
제2기 분출기에 형성된 조면암질 기생화산은 산방산·화순월라봉(和順月羅峰)·군산(軍山) 등으로 동일 구조선상에 분포하며, 수중파쇄암 기생화산은 성산봉(城山峰)·두산봉(斗山峰)·고산봉(高山峰) 등으로 해중분출지형이다.
기생화산의 60%를 차지하는 분석구는 제5기 분출기에 형성되었으며 200m 이상의 사면에 분포한다. 하천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방사상 형태를 나타내며, 기반암이 불투수층인 경우 조밀하다.
하천은 대체로 직류하며, 사면의 경사가 급하여 침식력이 크기 때문에 계곡이 깊고, 지반의 융기 및 해수면 변동과 관련하여 강정천(江汀川)·창고천(倉庫川) 양안에는 하안단구가 발달하였다.
경사가 완만한 용암대지(熔岩臺地) 지역에는 용암동굴이 많이 분포한다. 만장굴(萬丈窟)은 길이 1만 3268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이며, 빌레못동굴은 길이 1만 1748m로 단일동굴로서는 세계 최장(最長)이다.
용암동굴은 대체로 직선적·수평적이며, 용암동굴선반·용암종유·새끼구조용암 등의 미지형이 발달하였고, 2, 3층의 구조를 나타낸다.
토양은 화산재·화산모래·화산력 등을 모재로 한 화산회토로서, 유기물과의 결합력이 큰 치양토(埴壤土)가 대부분이다. 이 토양은 유기물 함량과 염기 치환 용량은 높으나 염기의 흡착력이 약하고 배수가 양호하여 용탈이 심하기 때문에 작물 생장에 양호한 편은 아니다.
(2) 기후
중위도 난대성에 속하고 해양성이 강하며 남북의 지역 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은 15.5℃이나 남사면이 약 0.7℃ 높다. 연강수량은 북사면이 1,440㎜, 남사면이 1,718㎜로 우리나라 최다우 지역에 속하는데, 계절별로는 겨울철에는 북 사면이, 여름철에는 남사면이 강수가 많다.
이처럼 해안저지에서는 아열대성기후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고도가 증가함에 따라 기온이 하강하여 고도별 기후대의 차이가 뚜렷하다.
(3) 생태
식물상은 300여 종의 특산 및 희귀식물을 포함하여 1,800여 종의 육상식물이 한라산의 높이에 따라 다양하게 분포한다. 식물분포 구계상 중일식물구계(中日植物區系) 중 한일난대아계(韓日暖帶亞系)에 속하며, 표시종(標示種)은 붉가시나무·구실잣밤나무·동백나무 등의 상록활엽수(常綠闊葉樹)이다.
이 구역에는 287종의 수목이 있는데 이 중에서 31%(89종)가 상록수이며, 그 중 62%는 난대성으로 해안에 가까운 계곡과 평지 및 산록지대에서 자생한다. 한라산 보존구역의 중심이 되는 한라산의 식물군집은 고도에 따른 수직적 분포대의 구분이 현저하다. 이 산은 섬에 있어 다른 산들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내륙의 산들에 비하여 그 환경이 비교적 단순하다.
이 산의 식물군집은 무기적 자연환경과 지질사적 요소 및 인위적인 요소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다. 편의상 우점종(優占種)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상록활엽수림은 북쪽에서는 해안선에서 고도 600m까지, 남쪽에서는 700∼1,100m에까지 이른다. 표시종은 남오미자·참식나무·사스레피나무·굴거리나무·좀굴거리나무 등이다.
난대상록수림은 녹나무속·가마귀쪽나무속·후박나무속·벌꿀속·모밀잣밤나무속·가시나무아속·모람속·돈나무속·다정큼나무속·굴거리나무속·호랑가시나무속·보리수과·담팔수속·동백나무속·사스레피나무속·후피향나무속·산유자나무속·황칠나무속·식나무속·쥐똥나무속·마삭줄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난대성 상록활엽수의 80%는 일본과의 공통종이며, 고유종은 8%에 불과하다.
한라산 중복(中腹)의 온대림은 한반도에서와 같이 서나무·졸참나무·단풍나무·산벚나무 등으로 구성된다. 그 윗부분에는 물참나무의 순림(純林)이 발달하였으며, 더 높은 곳의 한대림은 구상나무·고채목 등이 대표적인 종이다. 정상부에는 떡버들·털진달래·눈향나무·시로미·설앵초·담매·들꽃나무 등이 자란다.
이와 같이 한라산에는 난대·온대·한대의 식물대가 분포하는데, 그 한계선은 남쪽이 북쪽보다 높다. 이는 해류의 영향에 따른 기온·강수량·설선(雪線)의 차이 및 계절풍의 영향 등 주로 기상 조건의 차이 때문이다.
특산 식물로는 바늘엉겅퀴·한라구절초·좀민들레·한라송이풀·애기솔나물·두메대극·섬바위강대·게주황기·제주달구지풀·솔비나무·제주당귀·한라개송이·바위젓가락나물·한라꿩의다리·섬쥐송이·섬매자나무·좀갈매나무·병개암나무·시옥물참나무·가시복분자·제주조릿대 등 33종이 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의 중부·북부와 일본의 고산 지대에만 분포하는 들쭉나무, 일본의 서남단부에서만 자라는 참꽃나무, 북방분자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에서만 자생하는 담매·시로미, 난대성식물로서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해녀콩·문주란·파초일엽·한란·목련·환근·비자나무·솔잎란·왕벚나무 등이 있다. 특히, 일본이 나라의 꽃으로 삼고 있는 왕벚나무의 자생지도 제주도이다.
1997년 식생의 구성은 20여 개의 군집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서어나무·개서어나무 군집이 전체 면적의 53.7%를 차지하고, 물참나무·졸참나무 군집이 25.7%, 소나무 군집이 8.3%, 구상나무 군집이 4.5% 로 되어 있다.
동물상은 분포 구계상 구북구(舊北區) 중 북부중국아계의 한국구(韓國區)에 속한다. 제주도는 대륙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대성과 열대성이 섞여 서식한다. 예를 들면, 평지에는 아열대성의 맹꽁이와 난대성의 청개구리가 서식하며, 중복 삼림지대에는 북방산개구리가 살고 있고 산정의 백록담 연안에는 무당개구리가 있다.
북방산개구리와 무당개구리는 모두 북방분자이며, 특히 무당개구리는 중국 윈난성(雲南省)의 고지와 한라산 지대가 분포상 남한계선을 형성한다.
곤충류에서도 한대성인 산굴뚝나비와 아열대성인 암붉은오색나비·남방공작나비 등이 함께 서식한다.
제주도의 동물상은 곤충류 1,602종(제주도 특산 12종 포함), 양서·파충류 17종, 조류 240종, 포유류 19종 등이다. 특산종으로는 모주둥이노린재·제주양코스커딱정벌레·제주풍뎅이·제주은주둥이벌참위영벌 등이 있다.
포유류로는 맹수는 없으나 노루가 많고 제주족제비가 서식한다. 조류로는 팔색조가 번식하고 제주딱다구리·꿩 등이 많다. 산지 동물들 가운데 멧돼지·대륙사슴은 전멸하였고 큰노루·살쾡이·원앙기러기·두루미·흑두루미·재두루미·무당개구리 등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빌레못동굴유적에서 긁개·첨기·홈날석기·돌날 등의 타제석기와 갈색곰·순록 등의 화석과 뼈가 발견되었고, 조천읍 북촌리유적에서 삼각형 점렬(點列)무늬토기와 원형 점렬무늬토기가 발견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는 전역에서 발견되며, 고인돌·옹관묘·석곽묘·공렬토기(孔列土器) 등도 발견된다.
제주도의 삼성신화(三姓神話)에 의하면 고(高)·양(良)·부(夫) 3신이 모흥혈(毛興穴, 삼성혈, 사적 제134호)에서 나와 자손을 번창하게 하였으며, 그 뒤 고을나(高乙那)의 15세 손이 신라에 내조(來朝)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는 삼별초(三別抄)가 여몽연합군에 밀려 들어와 분전하다가 항파두리(缸坡頭里)에서 패하였다.
그 뒤 원나라는 1276년(충렬왕 2)에 몽고말 160필을 들여와 성산읍 수산평(水山坪)에 방목하였고, 말 사육의 전문가인 목호(牧胡)를 파견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제주도의 목장은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성종 때에 100개로 정리되었다.
이 지역은 자연경관과 식물에 관련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은 많으나 사적문화재는 빈약하다. 사찰로는 관음사(觀音寺)·천왕사(天王寺)·산방산사(山房山寺) 등이 있고, 성읍(城邑)에는 향교와 성지(城址)·현청사·돌하루방 등이 있다.
제주도민들은 11세기 초에 두 차례 있었던 한라산의 화산 폭발로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러한 한라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화산 폭발이 있을 때마다 동굴에 숨거나 잠시 테우(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하였을지언정 그들 스스로 이곳에서의 삶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바람 많고 재난 많은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기는 하였으나 한라산이 곧 삶의 터전으로 한라산없는 섬 생활이란 생각지도 못하였다. 더욱이 태풍과 가뭄과 풍랑은 제주도민들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는 재해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여건에 의해서도 끊일 줄 몰랐다. 몽고의 야만적인 지배생활이 그랬으며, 근세에는 일부 파견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이 처하였던 이러한 악조건은 오히려 이들에게 내핍과 인고의 정신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타고난 강인함과 근면성 앞에는 어떤 도전도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산(靈山)인 한라산은 척박한 땅을 주었지만, 정직하고 순박하며 의롭게 살면 마음이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삼무정신(三無精神)이다.
삼무란 도둑이 없고(盜無), 대문이 없으며(大門無), 거지가 없다(乞無)는 것을 의미한다. 도무는 정의의 정신을 일컫는 말이고, 대문무는 상호 신뢰의 정신을 의미하며, 걸무는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근면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제주도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켜져 온 미풍양속인 삼무정신, 즉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은 새마을정신의 모체가 되어 국민 모두의 정신으로 승화되는 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한라산이 준 인고의 정신은 오늘의 풍요로운 제주를 일구는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우리나라 서남쪽의 태평양에 자리한 화산도인 제주도와 한라산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독특한 풍물을 빚어냄으로써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관광지로 부상하였다. 한라산은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에 솟아나 삼라만상이 명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므로 태풍과 전쟁 및 굶주림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원나라가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 삼별초를 이끌고 온 김통정(金通精)은 항파두리전투에서 패하고 붉은오름의 싸움에서 전우들을 모두 잃자 산 위로 올라가 비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주도에는 유난히도 민란이 많았다. 1168년(의종 22)의 양수(良守)의 난을 비롯하여 모두 20여 차례의 민란이 있었으며, 왜구의 침입도 빈번하였다.
이처럼 한라산은 영광보다는 분노를 더 많이 먹고 살았으면서도, 천지의 대주재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고 민족의 산으로서 민족과 함께 숨결을 같이 해왔다.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은 내륙 지방에 대한 바람막이 구실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영남과 호남의 곡창지대는 한라산이 태풍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한라산이 없다면 이 지역의 벼농사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한라산은 이처럼 태풍의 길목에 우뚝 서서 내륙 지방을 지켜주는 수문장 구실까지 해오고 있다.
문학에 투영된 한라산의 모습은 다양하다. 흔히 신비로움과 인고(忍苦)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하나, 희망·평화·사랑의 상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한라산은 이미 제주도 사람들만의 산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한 민족의 산으로 정착되었다. 한라산은 일찍이 금강산·지리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로 꼽힐 만큼 명산이다.
예로부터 많은 선인(先人)들이 힘든 산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며, 산의 신비경을 기행문 등을 통하여 스스럼없이 찬미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더욱이 백록과 선인(仙人) 한라산옹의 전설을 지닌 이 산의 신비경은 오늘날에도 시·소설 등을 통하여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한라산을 기술한 가장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로 김상헌(金尙憲)의 『남항일지(南航日誌)』를 꼽는다. 그는 1601년 (선조 34) 9월 한라산에 올라 산신에게 치제(致祭)를 올리면서 “병이 없고 곡식이 잘 자라며 축산이 번창하고 읍(邑)이 편안한 것은 곧 한라산신의 덕”이라고 말하였다.
특히, 그는 “금강산과 묘향산은 이름만 높을 뿐, 한라산의 기이하고 수려함에는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하여 영산으로서뿐만 아니라 장엄함에서도 백두산 다음 가는 명산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한말의 최익현(崔益鉉)은 삶의 자세를 산행(山行)에 비유하였다. 1875년(고종 12) 3월 한라산을 등반한 그는 『한라산기(漢拏山記)』에서 “산은 도중에서 포기하면 그로 말미암아 뜻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좀 더 태연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인고의 정신을 한라산행에서 찾으려 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산행에 오른 15여명 가운데 정상을 정복한 사람이 겨우 4명에 불과하였다는 기록에 비추어 한라산행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흰 사슴과 신선의 전설을 적극 뒷받침해 주는 기록도 있어 흥미롭다. 선조의 7남인 인성군(仁城君)의 셋째 아들인 이건(李健)은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서 “한라산에는 곰·호랑이·이리 등과 같은 짐승은 없고, 소나 말이 잘 자라며, 사슴이 놀라울 정도로 번식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삼복더위에도 한라산 정상에는 얼음과 눈이 남아 있어 해마다 여름철이면 장정들을 모아 얼음을 날라다 관가에 공물로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한라산의 매혹적인 정경을 한눈에 읽을 수 있게 한다.
이건은 1628년(인조 6) 인성군이 광해군의 복위에 가담하였다 하여 전라도 진도(珍島)로 유배되면서 그 자신은 제주에 귀양 와 8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한라산의 모습 등을 풍토기에 남겼다.
한라산을 소재로 한 고전문학이란 대부분이 기행문 형태이며, 그것도 유배인들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라산의 오묘함과 지리·동물 분포·풍속 등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유배인이었던 임관주(任觀周)의 시에 나타난 한라산의 모습은 신비로움의 극치를 이룬다. 그는 1767년(영조 43)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가게 되자 한라산에 올라 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푸른 바다는 넓고 넓어 아득한데/한라산은 그 위에 떠 있네/흰 사슴과 신선이 기다리는/이제야 그 상봉에 올랐네(茫茫滄海濶 上擧漢拏浮 白鹿仙人待 今登上之頭).”
현중식(玄重植)의 한시 〈한라산〉에 나타난 한라산의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서씨(徐氏)는 먼 옛날 이 산그늘을 일찍 지나갔고/오랜 세월이 되도록 흰 구름 높이 떠 홀로 한가로운데/오르고 또 올라 그 숭엄한 정상에 다다르면/지척 은하를 앉아서 어루만지겠구나(徐子當年曾過去 白雲千載獨浮閒 登登若得到危頂 咫尺銀河坐可攀).”
불로장생초를 캐기 위하여 한라산에 왔던 진시황의 신하 서불의 행적과 함께 산이 높고 숭고하다는 것을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한라산의 모습은 현대문학, 특히 시를 통하여 잘 표출되고 있다. 이은상(李殷相)은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던 1937년에 「한라산기도」라는 시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염원인 광복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그가 한라산에 올라 기원한 기도문의 일부를 보면, “천지의 대주재(大主宰)시여/나는 지금 두 팔을 들고/당신이 내리시는 뜻을/받들려 하나이다/아끼지 마시옵소서/자비하신 말씀을……”
또한, 그는 기행문을 통하여 “아름답다. 신비하다. 저 한라산. 저 제주도. 뉘가 여기 이 같은 절해운도(絶海雲濤) 속에 한덩이의 땅을 던져 해중선부(海中仙府)를 만드셨나.” 하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한라산은 성스럽고 자비로운 민족의 산으로 제주도민들의 애환을 함께 해왔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김광협(金光協)이 쓴 「한라산송」에서도 한라산은 제주민의 성스러운 부성(父性)이며 종교로서 가장 빼어난 명산으로 칭송되고 있다.
이효상(李孝祥)의 「한라산」에서는 한라산을 항상 백두산과 마주서서 묵묵히 이 나라를 지켜오는 자(者)로 표현하고, 언제나 구름 위에 서서 직접 하느님과 단둘이 속삭인다고 했다. 또한 한라산이 남한 제일의 명산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산으로서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서정주(徐廷柱)는 「한라산 산신여인상(山神女印象)」에서 “그네 나이는 구백억세/그 자디잔 구백억개 산도화빛 이쁜 주름살속에/나는 흡수되어 딩굴어 내려가다. ”라는 말로 한라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신석정(辛夕汀)도 「백록담」에서 “……나도 이대로/한라산 백록담 구름에 묻혀/마소랑 꽃이랑 오래도록 살고파……” 하고 목가적 풍경에 넋을 잃기도 하였다.
제주도민들에게 있어 한라산은 정신적 지주였으며, 저절로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는 구심체였다.
이 밖에도 한라산을 소재로 시를 쓴 시인들로는 고은(高銀)·정지용(鄭芝溶)·김대현(金大炫)·조병화(趙炳華)·이영걸(李永傑)·양중해(梁重海)·김시태(金時泰)·강통원(姜通源)·문충성(文忠誠)·한기팔(韓箕八) 등이 있다.
특히, 이영걸이 쓴 전 7부작(138행)의 장시(長詩)인 「한라산」은 제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정지용의 「백록담」 이후 가장 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소설가로는 최현식(崔玄植)·오성찬(吳成贊)·현기영(玄基榮)·현길언(玄吉彦) 등이 있으나 순수하게 한라산을 소재로 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문인들은 한라산을 통하여 애향심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에 충실하였다. 그것은 잦았던 민란과 일제의 압정에 이어 4·3사건과 6·25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와 평화가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을 통하여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인들은 이 산을 ‘고향’·‘젊음’·‘순결’·‘침묵’의 산으로 칭송하였다. 이 섬의 선인들이 바람 많고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높은 긍지와 탐라인으로서의 숭고한 얼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한라산의 고고한 기상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느 작가는 한라산은 식물의 보고(寶庫)로서 신의 은총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이 밖에도 한라산은 산이 높고 넓으며, 초지가 광활하고, 기상변화가 심한 산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 한라산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시인 고은의 제주 체험기인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장 깊이 있게 기술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는 “우미절대(優美絶對)한 산의 모습에 대해 어떤 감동도 그 아름다움에 버금하지 못한다.”고 찬탄하였다.
또, 소설가 박태순(朴泰洵)은 기행문 「국토와 민중」에서 “한라산은 신비하면서 자상하고 푸근하면서 자랑스럽다. 때문에 제주도를 밟는 것은 감미롭게 실종 당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포근하여 마치 꿈속을 걷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시인은 한라산을 ‘이 산하(山河)의 어버이’라고 찬양하기도 하였다. 제주도민의 삶의 터전이요 민족 의지의 상징인 한라산, 풍부한 식물과 4계가 뚜렷한 자연경관을 지닌 한라산의 참모습은 앞으로도 많은 문인들에 의하여 찬미되고 사랑받을 것이다.
한라산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걸작이다. 특히, 녹담만설·영실기암(靈室奇巖)·탐라계곡(耽羅溪谷)·구구곡(九九谷)·어리목계곡 등은 경승이 빼어나 문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화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현대 화가들에 의한 것으로서, 옛 사람들에 의하여 표출된 한라산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구태여 제주 미술의 근원을 찾는다면,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들 수 있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도의 역사적 사실과 한라산 등의 지리적 현상을 28폭에 수록한 원색도(原色圖)로서 가장 오래된 제주도 지도이다.
더욱이 그 중 호연금서(浩然琴書)는 바다 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으로 당시의 한라산 모습과 제주의 정취가 잘 묘사되어 있다. 한라장촉(漢拏壯囑) 또한 산악 지명 등을 소상하게 담고 있다.
한편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를 제주 미술의 근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세한도」는 직접 한라산을 소재로 한 그림은 아니지만 당시 제주의 풍물을 담은 불후의 명작으로서, 후세에 많은 예술인을 배출하는 모체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김정희는 1840년(헌종 6)에 제주에 유배되어 대정현(大靜縣)을 적거지(謫居地)로 삼고 9년여 동안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한시 등 문학에도 정진하여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라산의 풍물을 그린 정통 산수 화가는 없었고, 오직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민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현대 제주 미술의 발단은 6·25 이후로 보는 견해가 많다.
미술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국내 저명 화가들이 전란을 피하여 속속 들어오게 되었다. 홍종명(洪鍾鳴)·장이석(張利錫)·최영림(崔榮林)·이중섭(李仲燮) 등 중앙 화단의 화가들이 이곳을 피난지로 잡아, 불과 1, 2년에 지나지 않는 체재 기간 속에서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고, 그들 자신이 한라산의 수려한 경관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
이에 앞서 일제 강점기에는 제주 출신의 김광추(金光秋)·변시지(邊時志)·양인옥(梁寅玉)·박태준(朴泰俊)·조영호(趙英豪)·장희옥(張喜玉) 등이 일본에 유학하여 미술을 수학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 조영호·장희옥·박태준·김일근(金一根)·고성진(高成珍) 등은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 밖에 1935년 선전(鮮展)에 입선한 김인지(金仁志)를 비롯한 현승배(玄承北)·김보윤(金寶潤)·김창해(金昌海) 등도 이 고장의 미술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 도외(道外) 화단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서울 등지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신진 화가들이 대거 귀향하게 되어 활기를 띠게 된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 제주도 미술계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제주신문사가 1975년부터 해마다 미술전람회를 개최하여 작품 제작의 의욕을 고취하였으며, 이로써 지방 미술인을 대거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많은 화가들은 한라산 곳곳의 4계를 화폭에 담았다.
제주도는 거친 바다와 박토를 유산으로 물려받아야 하였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노동요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풍성하게 전하여 내려온다.
“하루 종일 부르다봐도/부를 노래 수없이 있다/한라산이 내집이 되면/부를 노래 다 불러볼까.” 많은 제주민들은 한라산이 닳고닳아서 한 칸의 집이 될 때쯤에야 노래를 다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라산이 담겨 있는 민요로는 「산천초목」·「오돌또기」·「이야홍타령」 등이 있다. 「오돌또기」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창민요(唱民謠)로 경쾌하고 구성지다. “오돌또기·저기 춘향 논다/달도 밝고/내가 머리로 갈꺼나·……·한로산 허리엔/시러미 익은숭 만숭/서귀포 해녀는/바당에 든숭 만숭(후렴).”
오돌또기는 예쁜 여인이 노는 모습을, ‘저기 춘향 논다’는 저기 예쁜 여인이 나타났다라는 뜻으로, 이렇게 달도 밝은데 내가 앞장서서 놀러나 갈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홍타령」도 「오돌또기」와 함께 제주민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이는 주로 여인들이 부르던 건전한 노동요이어서 리듬이 자유롭다. 「이야홍타령」은 한라산을 신선의 나라로, 또 말들이 살찌는 따뜻한 나라로 찬미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산천초목」은 경복궁 중수 때 부역으로 간 제주도민들이 불렀던 노래로, “흰 눈은 왜 내리나/한라산 선녀들이/춤을 추며 내려온다.”고 눈을 한라산 선녀로 미화하였다. 이렇듯 제주도 음악은 광복 전까지 민요 위주였으며 6·25까지도 현대 음악이 없었다.
6·25로 피난 온 바이올린의 계정식(桂貞植)과 성악의 김금환(金金煥) 등이 학교 교육을 통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미군소령 길버트(Gilbert,C.E.)가 여러 학교에 악기를 기증함으로써 비로소 현대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라산을 소재로 한 노래는 없는 형편이고, 다만 각급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그 정기와 기상을 우러르는 내용을 교가와 시가 등에 포함하여 부르는 정도이다.
(1) 수종
수종은 주목·서나무·졸참나무·벚나무류·구상나무 등이 대종을 이룬다. 1975년 이후의 식재 수종으로는 삼나무·편백나무·졸참나무 등이 많은데 표고 자목으로 활용되고 있다. 표고 재배의 자목으로는 졸참나무·개서나무·서나무·물가리나무·소리나무 등을 원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도별로는 온대림 하부에 졸참나무·개서나무, 상부에 서나무·물가리나무·소리나무가 각각 분포한다.
자목 자원은 풍부하지만 천연보호구역에 묶여 자원량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82년 이후의 표고 자목 벌채 상황은 1982년 2,750㎥, 1983년 3,045㎥, 1984년 3,001㎥, 1985년 3, 121㎥, 1986년 2,829㎥ 등으로 연평균 3,069㎥에 달한다.
또한, 표고 생산 실적은 1982년 6만 8375㎏, 1983년 5만 1535㎏, 1984년 6만 1164㎏, 1985년 6만 3090㎏, 1990년 3만 9700㎏ 등으로 평균 5만㎏에 이른다.
(2) 관광자원
1970년에 한라산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약 151.35㎢이다. 1989년 이후부터 연간 25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계곡은 남측과 북측에 주로 분포하며 U자형으로 되어 있고 그 하부에는 상록수림이 발달하였다. 하천의 수원을 이루는 분수령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한대악(漢大嶽)·볼레오름(1,392m)과 동쪽에 성판악(城板嶽)을 연결하는 산릉이다.
이곳에서 북류하는 한천으로는 별도천(別刀川)·산지천(山地川)·한천(漢川)·도근천(都近川)·외도천(外都川) 등이 있고 남류하는 것으로는 송천(松川)·효돈천(孝敦川)·연외천(淵外川)·정방천(正房川)·강정천·악근내·소가래천(小加來川) 등이 있다. 북측의 하천들은 비교적 직선적이며 폭포가 별로 없으나, 남측의 하천들은 유로가 곡류하고 하류에 폭포가 발달된 곳이 많다.
정방천 하류에는 정방폭포, 연외천 하류에는 천지연폭포(天池淵瀑布), 소가래천 하류에는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가 발달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의 하천은 건천(乾川)이지만 호우시에는 순식간에 물이 넘쳐 교통을 차단하기도 한다.
유명한 계곡으로는 한천의 탐라계곡(耽羅溪谷), 외도천의 계곡, 도근천의 골머리계곡, 효돈천계곡, 수악계곡(水嶽溪谷), 도순천계곡(道順川溪谷) 등 6개가 있다.
성인과 내부 형태로 보아 한라산에 산재하는 용암굴은 구린굴·홍괘·상괘 등이 있을 뿐이다. 홍괘와 상괘는 그 길이가 30m 내외이며, 기타 동굴들은 길이가 5m 미만이지만 높은 지대에 분포하고 있어 방목이나 약초·종자를 채집하는 사람들 또는 사냥꾼들의 잠자리로 이용되고 있다.
구린굴은 관음사 등산로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해발 720m 지점에 있다. 이것은 폭과 높이가 2∼5m이고 길이가 380m 정도인 용암굴로서 한라산 주봉(主峰)을 향하여 다소 위로 경사져 발달하였다.
한라산에는 주봉인 부악 주변에 300여 개의 측화산이 발달하였는데, 이들은 거의가 분화구를 가지며 화구의 형태는 도원추형(倒圓錐形: 거꾸로 된 원굴뿔모양)·구형(臼形: 절구모양)·마제형(馬蹄形: 말굽모양) 등으로 각각 다르다. 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 백록담인데 여기에는 화구호가 있다.
이 밖에도 화구에 연못이 있는 것으로는 사라악(沙羅嶽)·수장올(水長兀, 물장올)·논고악(論古嶽)·동수악(東水嶽)·어승생악(御乘生嶽)·토적악(土赤嶽) 등이 있다.
한라산의 해발 1,000m 이상 지역에는 속밭·상밭·장구목·큰수레밭 등이 발달하였다. 또한 윗세오름 일대 및 삼형제봉 일대에는 작은 고원들이 많이 발달하였다.
한라산 내의 폭포는 구구곡의 선녀폭포(仙女瀑布)가 장관을 이루며, 기타 기암(奇岩)과 주상절리·적설(積雪)·수빙(樹氷: 나뭇가지에 응결하여 된 얇은 얼음 층)·무빙(霧氷: 안개가 나뭇가지에 엉겨 이룬 얼음층 )·설니(雪泥: 눈으로 뒤범벅이 된 진 땅)·일출·일몰·운해(雲海) 등도 유명하다.
한라산을 오르는 주요 등산로는 다섯 가지가 있다. 어리목 등산로는 어리목산장-사제비동산-만세동산-윗세오름대피소-정상이고, 성판악 등산로는 성판악휴게소-사라대피소-진달래밭대피소-정상이며, 관음사 등산로는 관음사-탐라계곡-개미목-용진각대피소-정상이고, 영실 등산로는 영실-오백나한-윗세오름대피소-정상이다.
이 밖에 돈네코 등산로는 다른 등산로에 비하여 가장 길고(12㎞) 상태가 좋지 못한 난코스로 지금은 자연 휴식년제로 통제되어 있다.
(3) 기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동경 126°27′50″∼126。37′55″, 북위 33°19′10″∼33°25′35″에 위치하며 고도가 높아 여러 층의 기후대를 형성한다. 또한 다양한 동식물상을 포함하고 있어 분류학 및 생태학 연구의 보고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인위적·자연적 요인에 의한 훼손이 심화되고 있어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
인위적인 훼손은 증가 일로에 있는 등산객들이 버린 오물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등산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 주변은 토양이 다져지기 때문에 작은 산사태가 자주 발생하고 대피소 지역은 많은 등산객들이 야영을 하여 식생이 파괴되고 있다.
또한, 한라산에는 많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므로 단순한 등산 목적에서 교육적인 차원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개발하여 운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22. 한려해상 국립공원
1968년 12월에 지정, 공포되었으며,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여수시와 경상남도 하동군·남해군·사천
시·통영시·거제시 등의 일부에 걸쳐 있으며, 총 면적은 510.3㎢(육지 부분 165.6㎢, 해상 부분 344.
7㎢)이다.
크고 작은 360여 개의 섬들이 점점이 깔려 해상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족자원이 풍부하
며, 특히 이순신(李舜臣)의 전승, 유적지가 많다. 또한, 기후가 온화하여 난대성식물인 동백나무·비
자나무·치자나무·유자나무·춘란·풍란 등이 자생한다. 이 지역에는 어장과 농경지가 넓은 지역에 분
포하고 있으므로 보호 관리에 단점이 있어 6개 지구로 분할 관리되고 있다.
① 해금강지구(海金剛地區)는 거제도 남동쪽에 있는 북병산(北屛山)·망산(望山) 능선의 동쪽 지역과
해안 부근의 섬들을 포함한다. 갈곶도(乫串島)를 중심으로 하는 거제해금강(명승 제2호)은 오랜 세
월동안 파도와 비바람이 섬의 층암절벽에 온갖 만물상을 새겨 놓아 금강산의 해금강을 방불케한다
하여 해금강이라 불리워진다. 십자굴(十字窟)을 비롯한 기암괴석과 노송·동백숲 등이 조화를 이룬
절경이다. 북부 해안에는 구조라해수욕장이 있고, 그 아래 학동리는 동백림 및 팔색조 번식지(천연
기념물 제233호)이며, 거제도 연안 일원의 아비도래지(천연기념물 제227호)도 있다.
② 한산도지구는 통영시 남쪽의 미륵도(彌勒島)·한산도·비진도(比珍島)·용초도(龍草島) 등 30여 개
의 섬과 바다를 포함한다. 한산도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을 여수에서 이곳으로 옮긴 뒤 삼도수군통
제사로 승격되면서 본영(本營)으로 삼아 한산대첩의 공을 세운 전승지로서 사적 제113호로 지정되
었으며, 제승당(制勝堂)·대첩문(大捷門)·충무사(忠武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통영시의 충렬사(忠烈
祠)·세병관(洗兵館)·착량묘(鑿梁廟), 비진도의 팔손이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63호) 등이 있다.
③ 사천지구는 신수도(新樹島)·늑도(勒島)·마도(馬島)·학섬 등을 비롯한 부근의 섬과 바다를 포함한
다. 명승지로는 남일해수욕장과 각산산성(角山山城)·대방진굴항 등이 있고, 학섬은 백로와 왜가리
번식지(천연기념물 제208호)이다.
④ 노량지구는 남해대교로 연결되는 하동군·남해도의 일부와 노량해협(露梁海峽)을 비롯한 주변 바다를 포함한다. 이곳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곳으로, 노량충렬사(露梁忠烈祠)·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觀音浦李忠武公戰歿遺墟, 사적 제232호) 등이 있다.
⑤ 남해금산지구는 남해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금산(錦山) 주변과 노도(櫓島)·소치도·장도(丈島)에 이르는 바다를 포함한다. 금산에는 대장봉(大將峯)·독대봉(獨臺峯)·향로봉(香爐峯)·일월봉(日月峯) 등의 기봉(奇峰)과 삼불암(三佛巖)·천구암(天狗巖)·사자암(獅子巖)·음성굴(音聲窟)·가사굴(袈裟窟)·쌍홍문(雙虹門)·감로수(甘露水) 등의 38경(景)이 있고, 그 아래 해변에는 2㎞의 백사장과 노송이 어우러진 상주해수욕장이 있다.
⑥ 여수오동도지구(麗水梧桐島地區)는 여수시 전면의 오동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 해상 지역을 포함한다. 오동도는 토끼 모양을 한 약 12㏊의 섬으로, 육지와 이어져 있는 740m의 방파제와 오동도 일주 유람선과 모터보트 선착장이 있다. 그리고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기점이자 종점으로 섬을 일주하는 산책로는 1,350m이며, 난대성인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오동도에서 동백꽃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누대이다.
충무공이 이곳에서 최초로 수군연병장을 만들었고 이곳의 시누대로 화살을 만들어 왜적을 무찔렀다고 전해온다. 시누대밭 앞의 등대와 나란히 서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다도해가 점과 점을 이어 시야에 성큼 다가서고 왼쪽으로 충무공이 순국한 관음포해상과 남해대교가 보인다. 여수 시내에는 이순신의 유적인 진남관(鎭南館)과 수군대첩비가 있고, 해변에는 오천해수욕장과 만성리해수욕장이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교통은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항공, 열차, 고속버스와 남해까지의 일반 버스, 선박이 있다. 그 외 진주에서 상주까지의 일반 버스가 있으며, 고속도로를 이용하여도 좋다.
이 지역을 탐방하는 노선은 금산 입구-금산-보리암-금산 입구(4.6㎞, 3시간 소요), 해금강 산책 등산로(1.5㎞, 2시간 30분 소요), 한려수도 유람선 이용 탐방(3시간 30분 소요), 구조라-학동-해금강-명사해수욕장-다대포 일주도로(35㎞, 2시간 소요)의 4가지가 있다. 해금강지구는 부산에서 거제로 통하는 육로를 이용할 수 있다. 학동리에 선착장이 있어 관광선을 이용할 수 있으며, 숙박 시설로는 호텔과 여관이 있고 민박도 가능하다. 한산도지구는 통영시에서 충무교(忠武橋)를 거쳐 미륵도로 가는 육로와 해상으로 한산도에 가는 방법이 있다.
한산도지구 탐방 방법에는 통영-안정사-산양 일주도로-제승당-비진도해수욕장-매물도, 통영-욕지도-연화도-두미도-사량도-옥녀봉 등 두 가지가 있다. 미륵도에는 충무관광호텔이 있고, 한산도에는 산장이 있으며 민박도 가능하다. 노량·남해금산지구는 남해대교와 이순신 유적지를 거쳐 상주해수욕장까지의 정기 버스편이 있다.
남해에는 여관·산장이 많으며 민박도 가능하다. 여수오동도지구는 여수시의 교통과 숙박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오동도 일주 유람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