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박씨 구당공.소요당공.명헌공 考
출전 : 함양박씨 소원록(1985년,구당·소요당·명헌공 3파 종친회 간)
함양박씨의 시조는 29대손 셋째 속함대군 언신(彦信)이시다.
신라 경명왕의 9대군의 한분 셋째분이시며,
·첫 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 밀양,임제,태인,영암,태안,구산,
문의,창원, 선산,은풍,여주박씨
·둘 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 고령박씨
·셋 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 함양,삼척,군위박씨
·넷 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 죽산,고성,음성박씨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 상산,상주,충주,평택박씨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 전주,무안박씨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 순천,춘천박씨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 월성(경주)박씨의 8대군파와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밀양 박씨로 분파되었다.
속함대군이 함양에 봉군 됨으로 함양박씨가 탄생되니 함양은 우리 박씨의 발상지 이다.
속함은 함양의 옛지명 이고 신라 경덕왕때 천령으로 고친일이 있어 우리 박씨를 천령후인(天嶺後人)
이라고도 한다.
대군의 후로 구족보에서는 지문(地文) → 해윤(海倫) → 우(禹) → 천우(天禹) 의 이름을 실었으나
세대가 미상하여 상서공 선(善)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묘를 실전 하였다가 조선조 숙종23년(1697년)에 여현(汝賢)이 숲속에서 잘라진 비를 발견,
상도(尙都),기조(起祖),상순(尙淳)이 개봉하고 비를 세웠다.
5세 신유(臣?)는 응천군에 봉군되었으며,충질공의 시호를 받았다.
고종24년(1237) 호남에서 이연년의 난이 일어 났는데 전라도 지휘사 김경손이 나주에서
위태로울 때 어린 나이로 참전하여 출중한 용기를 보이며 적진을 쳐 이연년의 난을
평정하는 대공을 세웠다.
6세에서 6之派로 갈리니 2파중조 之彬은 문원공의 시호를 받았고,
3파중조 之亮은 4파 지수의 아드님 우와, 2파 지빈의 손자 충좌와 함께
고려조 최고의 벼슬을 하시었다.
4파중조 之秀는 副使公派로 고려 충렬왕때 비의어대를 하사받았다.
8세 양계는 이성계,최영등과 공민왕20년(1371)에 김용이 일으킨 변란을 평정했으며왜구가
공주마져 점령하자 연로함을 무릅쓰고 개봉사에서 전투를 벌이다 낙마하여 전몰한 무장이었다.
10세 안은 창왕1년(1388) 박위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여 양혜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조선 태조3년(1395) 전라도안무사로 있을 때 군기 누설죄로 참형을 당하계 되었을 때
아들 실이 정안군(후에 태종)에 애소하여 형을 면했고 후에 태종이 즉위하자
진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1세 실의 효행은 조선실록,연려실기술,동국여지승람에 전해 오는데,통곡하며 구명하는
실의 효에 감복하여 정안군(후에 태종)이 태조에게 주청하여 마침내 받아 들여 심구수에게
"네 힘껏 말을달려 박안을 구하라"라고 명 했으며,심구수는 너무 빨리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바람에 역리를 시켜 명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날이 박안의 형이 집행되는 날이기에 형을 집행 하려는 데 멀리서 한 사나이가 갓을 벗어
휘둘으며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형행관이 형을 멈추어 위기일발 목숨을 건진 것이다. 공의 그 효행을 태종이
귀여이 여겨 중용 하였으며,졸일에는 이틀이나 조회를 폐하였다.
정효공의 시호를 받다.
11세 습(習)은 고려말 태종과 동방급제이고 21인 갑인계원이었다.
태종12년(1412) 전라도 관찰사 때에 김제의 벽골제를 수축하였다.
태종18년(1418) 병조판서에 오르며 16일만에 "강상인之獄"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다.
강상인之獄이란 태종이 상왕이 되었는데 병조참판 강상인이 총제 심정과 금어군을 분속
하면서 상감에게만 이뢰고 병권을 쥐고 있는 상왕에게 이뢰지 않은 사건으로
공은 사천으로 유배 되어 일단락 되었으나,
강상인,심정과 틈이있는 병조좌랑 안헌오가 심정의 형인 심온을 상왕이 못마땅히 여기는
눈치를 잡아 "호령이 두군데에서 나와 한군데서 전일하게 나옴만 못하다"는 참소로
상왕이 격노하여 강상인은 차열당하고 공등은 주살당하고,
또한 강상인,심온,심정의 처자는 종을삼고, 공과 이권은 가산은 적몰하고,
자손은 금고에 처하고,나머지는 귀양을 보낸 옥사이다.
공의 죽음에 대해 당대 학자 변계량이 실록에 그 억울함을 기술했고,세종이 즉위부터
신원의 주청이 있으나 세종은 부왕이 하신일임을 되풀이 하였다.
그후 문종이 즉위하여 에종의 비석을 올리는데 "장인(심온),장모를 죄인으로 놓고 글이
되는가?"하여 같이 신원 되었다.
첫째와 둘째 아드님은 피화이전에 졸 하였고 셋째는 광양으로,넷째는 행적이 자세치 않고
다섯째는 남해로 유배 되었다.
12세 의손(義孫)은 주부로 문과에 급제하니 조선조 최초의 급제자 이다.
유배가는 도중 잠시 몸을 숨긴일이 있는데 의금부에서 상왕에게 보고하자 상왕은
찾지 않아도 유배지로 올 것이라 했을만큼 태종이 공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간신배의 농간은 관찰사,현사,경력,군수등이 공을 가엾이 간장과 소금을 갖다준
것을 2차례나 상소를 올려 파직시키고 옥살이를 시켰으며 공은 관노로 전락 하였다.
유배지 남해에서 관노로 있을 때 어디에 계신지 모르는 어머님과 동거하게 해 달라는
관찰사 최사강에 올린 편지를 관찰사가 그대로 상광에게 일러 바치니 상왕은
의금부에 하옥 시켜 참형으로 다스렸다.
부인 안동권씨는 대제학 권제의 따님이요 대학자 권근의 손녀이다.
가산이 적몰되고 의지할데 없어 동서들이 낙향을 권할 때 신원을 꿈꾸며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며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아 훗일의 영화를 가져왔다.
13세 신동(信童)은 10세에 가화를 입어 외가에 의지하여 학업에 정진하여 영화의 기초를 다지었다.
신원이 되어 벼슬이 내려졌으나 공은 나가지 않으셨다.
14세 중검(仲儉)은 멸문집안이라 결혼을 못하는줄 알았더니 정종대왕의 부마 이관식이 공의
풍채와 학식을 높이사 사위로 삼았다.
홀로된 부인 이씨는 삼형제를 학업에 정진시켜 집안을 세우셨다.
부인이 고진감래하여 말년에 영화를 누리시었다. 유언에 따라 향사에 제주를 올리지 않고
냉수를 올린다.
15세 세영(구당)은 19세에 편모 슬하가 되어 어머니로부터 훈계를 받으며 학업에 정진한다.
어머님을 지성으로 섬겼으며 하세후 주자가례에 의하여 예를 다하였다.
글과 글씨를 잘하여 국서의 표지나 공경대부의 비문,병풍의 글등이 남아있다.
자손들이 고관대작을 지내며 집안이 흥성하기 시작 하였다.
15세 세무(소요당)는 괴산 화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제자인 노수진은 공이 사관으로 있을 때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마전원으로 나가
6년을 숨어 살았다고 비에 썻다.
마전군수 당시 올린 상소문 전문이 실록에 있으며, 조정에서 썩은 대신을 꾸짖는
장면이 실록에 전해지며, 괴산에 우거할 때에는 무당의 작폐를 다스렸다.
공이 자녀교육을 위해 지은 동몽선습은 세계 최초의 교과서이며,
왕세자부터 시골 글방에 이르기 까지 안 읽는 이가 없었다.
공의 친필본은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보존 되어 있다.
15세 세옹(명헌)은 중종을 대면하여 사림을 모해하지 말 것과 상감 자신부터 시비를 정하라는
직언한 내용이 실록에 있다.
전라도승인추쇄경차관으로 있을 때 중이 많은 것은 수령들이 법을 시행하지 않음을
간파하고 부역,병역을 피해 중이된자 3,000여명을 처결 하였고,
그후 승도의 작란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계절을 두어 도별로 여지승람에 없는
절은 헐어 버려 승도를 다스리도록 강연을 하였다.
49세에 졸하니 애석함과 찬송함이 비문에 가득 하다.당개 명류들과 24인 계축생 갑계를
모아 수호 했는데 좀더 수를 누렸으면 자질이나,학문이나,벼슬이나 모두다 집안을 크게
빛낼 분이셨다.
16세 소립은 구당공 장자인 대립과 함께 함양박씨 문중에서 가장 화려한 벼슬을 하였다.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공이 선조를 맞아 대통을 잊게하였다.
정승의 추천을 받은이를 복상이라 하는데 공과 대립이 복상의 영예본 분이시다.
정지연과 공 이인이 피천되었는데 상감이 정지연에 낙점을 하여 우의정이 되고
공은 복상에 그치고 말았으니 애석하게도 조선 500년 동안 정승이 한자리도 없게되었다.
16세 응립(應立)은 20세에 성균관에 들어 생원을 대표하여 세자위 교육에 관한 상소를 올려
상감의 칭찬을 들었다(조선실록).
송화현감때 선정을 베풀러 감사 율곡 이이가 칭찬해 마지 않았으며 고을사람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17세 지인(처사공)은 광해군 혼조에 신창으로 낙향하였으며 후에 인조 반정이 일어나
인재를 물색할 때 형제들은 모두 학문으로 피천되어 서용 되었는데,
공은 질환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西紀 2016年 4月 5日
29세 戊熙 小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