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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영망은 군자감이자 승지인 요흠공의 제2남으로
휘時望(시망)은,자는尙輔(상보),승지諱요흠의장자,1594년 장흥부에서 태어났으며
,광해조,1614년에以生員,1615년무과등과하여 병자호란시에는 위산보와함께 창의,평안도 중군절제도위에 임명되어,호군과 맞서 싸운 용장이며 병자년의위국정란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을묘년 왜변시에는 위덕의幕將으로 경상좌도지역의 왜군토벌에 종군하였으며 ,란 직후에는언양현감을 지냈다,配는 파주인 진사 휘廉公格의 여식이다,공은 10년세월동안 호란과왜변등 전란속에서,參軍으로,幕將으로,때로는 白衣의 신분으로 나라를 위해 충절을다하였으며,公이 낙향하여,松湖의 家에 왔을때가 공의歲 60이였으니,配정부인 파주廉씨는 이미 세상을 뜬후이다.낙향할때의 공은 전란중에 얻은 상흔과 병고로 이미 기천의 위중이였으나 독자송룡의 효우로 회복하여 숙종조 1685년에 천양하니 춘추90歲이다.(고거 장흥위보,언양지,기타)
휘 송룡(松龍),호는송은(松隱),字는여경,운경(餘卿,雲卿)이며 승지諱요흠의손이다
인조원년1623년 5월15일,諱시망의孤子로 송호에서 태어났다,,
1639년 을묘년 왜변영향으로 장흥부도 왜구의침입이있었다.
갑작스런 왜구의 내습으로 공은 17세의 나이로 노모를 등에 업고,한밤중에는 50리길을 걸을때도 있었으며,
한달동안 피란하여 노모의목숨을 구하였고,봉양하였다.1643년 등진사 하였으나,
과시를 단념하고,노모에대한 孝憂와 봉양에만 지냈다.병이지나쳐 노모가 돌아가시자
난중이라 홀로슬퍼하였다 ,난중 출사에서 득병하여 돌아온 부친을위해
조석으로 봉양하였고,학유들이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듣지않고
오직 효우에만 힘쓰니,부 휘시망은 90의 천수를 누렸으니 天壽60 이 孝壽90 이라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삼년을 초정배묘(草亭拜墓) 하였는데도 부족하여
송호 정사에 조부와부친등의 선고사당을 짖고,살아계시는것처럼
조석제배 효유하니.향당의유림이 존경하였다.이후 송산 광이家사람들은
대대효우를 제일의 유지(遺志)로 行했으니
"諱시망,영망,준망 삼형제의자 오松,휘의자 오萬,휘의자 칠齊,휘의자 구碩,휘의자,구璞의 오대를 송산효절가라이른다.
공은 송산의 五松의한분으로 효도와 절의로 孝節로 추앙받았다,
配는 장흥인 魏山寶의 여식으로(山寶는 광해7년1620년에 무과급제,軍資監,判官을 지냈고,
장흥위씨보에 전하기를 "기개와 도량이 넓고 언론이 영특하다" 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시에는 인조의 어가를
호송,왕을 안전하게 수원성으로 모시었으며,,인조의 특지로 선전관으로 적진단독으로 가
적장과 담판,적의 군사행동을 일시 저지하였으며,
안전을 보장받는등 병자년 원종공신록에 책록되었다
,後통정행,文化縣令(평안도 신천)을지냈다,)
無后系子 諱만원(휘 송무의 장자)
계배로 해남尹씨 父 安道(생원)가 계시며,
後后로諱萬楨이있다
.................................................
수원백씨 가문의 장흥위씨,
전주이씨 孝烈行 빛나조선 말엽 장흥위씨 烈行-조정에서 ‘孝烈旌閭’ 하사\
전주이씨도 효열 빛나-보사부장관표창 등 수차 수상
수원백씨는 약 40여대의 세대가 내려오고 있으며, 본관은 수원(水原) 단본이다. 문헌에는 수원 등 10여 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한 핏줄이므로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를 발간할 때 각 파의 대표들이 모여 수원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한 후 대부분 수원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중시조 창직(昌稷)의 12대 손인 정신재 백장(靜愼齋 白莊 1340~1411) 공은 고려 말 충신이다. 이태조가 등극함에 반대하여 강원도 치악산으로 은둔해‘두문동 72현’으로 부르는 충신의 한 분이다. 태종이 등극하여 수차례 벼슬을 제수하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불응하고 다시 충남해미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도 회유와 협박이 자주 있었으나 ‘충신지도는 이군불사(忠臣之道 不事二君)’이라며 불응하니,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이란 곳으로 세번째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끝내 운명하니, 태종이 ‘동방의 백이(伯夷)’라며 의정부 영의정 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및 이부전서 보문각대제학(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원주 죽림서원(竹林書院)에 제향되고 상덕사(尙德詞)라 사액하였으며, 황희정승이 애탄하며 후일 묘갈명비를 하사하기도 했고, 장수 월강사와 장흥 기양사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정신재공의 현손인 백회(白繪) 공이 장흥으로 내려와 세거하니, 이분이 수원백씨 장흥입향조이다. 회 공은 맹춘, 맹하, 맹추, 맹동 네 분의 아들을 두었으며 차자인 맹자 하 해성군의 손에서 효열부 두 분이 조정과 성균관으로부터 효열부로 인정받으니, 백씨가문의 큰 영광이라, 여기 그분들의 행적을 소개한다.
■장흥위씨 백홍수의 처 烈行 수원백씨 중시조 창직의 34세손 백대선의 고조할머니로,
수원백씨 홍수(洪洙)의 처인 장흥위씨는 백씨가문으로 시집온 후,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부군에게는 현처로서의 행실을 다 하였던 현숙한 여인이었다. 부군이 병석에 눕게 되자 온갖 정성을 다했고, 자신의 허벅지살까지 떼어 부군의 쾌유와 회생을 기대했으나, 불행이 32세의 젊은 나이로 임종하며, 일점혈육인 아들 낙흥(樂興)의 장래를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다. 위씨 부인은 오직 자식의 양육에만 분골쇄신으로 정성을 다하던 중, 인근의 불량자 2인이 음모하여 부군 생존시 채무가 있던 것처럼 문서를 위조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누명까지 씌우고 재산을 착취하기에 이르니, 위씨는 너무 억울하고 통분하여 자신의 결백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일념으로 자진하니, 때는 1864(고종 1년)2월 29일이었다. 아들 낙흥이 장성하여 모친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기 위해 관계 요로에 탄원하고, 능주 목사 한치조(韓致肇)가 조정에 상소하니, 마침내 조정에서 위씨부인에게 ‘효렬정려(孝烈旌閭)’를 하사하고, 불량자들을 처벌했다. 이때가 고종 6년 기사 1869년 3월이었다. 그후 아들 낙흥이 정문(旌文)으로 삼정촌 도로변에 정려문(旌閭門)을 중건하여 세우니,
현판문은 ‘명정고학생백공 홍수처 관산위씨열행비(命旌考學生白公洪洙妻 冠山魏氏 烈行碑’이었다.
그후 60여년이 흐른 뒤, 장흥군청으로부터 1천만원을 지원받고
후손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고향인 장동면 입로면에 석정문(石旌門) 중수를 추진하여
2005년 3월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이 석정문은 고속도로 신설로 인하여 다시 이설, 중수할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효렬부 전주이씨 효행 전주이씨 이장심(李長心) 씨는 이창훈(李昌薰)의 여식으로,
수원백씨 승선(承善)에게 출가했다. 이씨는 시집온 후 시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으며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한 가정을 꾸려가던 중 불행히도 부군이 시국의 오해 관계로 젊은 나이에 별세하니, 이씨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였다. 부인은 통곡애절하고 벽용부지(벽踊不止-喪事에 상제가 슬피 울며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그치지 않음)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동반 자진코저 하였으나, 가족의 만류로 자진을 포기하고 거상 3년을 혈루로 보냈다. 그러나 성설가상으로 시어머니가 자식 3형제를 잃으며 한이 맺혀 실명하고 사물을 분간치 못하니 세끼 식사 봉양은 물론 대소변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인데도 이씨는 지극정성으로 수발하니, 가전(家傳)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씨 부인에게는 아직 거쳐야 하는 고난이 끝나지 않았던지, 유고 2남2녀((장남 만포, 차남 인기, 여식 영애, 송지) 중 학업 중이던 장남 만포(滿浦)가 불치의 병을 얻어 쾌유치 못하고 모처의 요양원에 입원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온갖 고난과 고통의 역경 속에서도 이씨 부인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가문을 이끌고 자녀를 올바르게 교육시키다가 향년 74세에 별세했다. 이씨 부인의 이러한 효열행적이 널리 알려지며, 향리에서 표창받은 일은 여러 번이고 중앙정부로부터 보건사회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백씨가문에서도 이씨 부인의 효열을 영세유방(永世遺芳-빛나는 영예가 후세에 영원하도록 기리다) 하기 위하여 종시제(從媤弟)인 대선, 순선이가 작은 정성을 모아 묘비조성을 추진 중이다.
또 최근에는 성균관에 이씨 부인의 효렬 행적이 등재되고,
지난 10월 1일 최근덕 성균관장로부터 포양장(褒揚狀)을 수상,
다시 한번 백씨 가문의 영광을 기릴 수 있게 되었다.
수원백씨 중시조 창직의 34세손 백대선 씨는
“기왕에 근수한 고조비의 정려문과 종백 형수 유인전주이씨 효렬 실적비를 쌍비로 근수할 계획인데,
이는 본인에게도 상당히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 김선욱 기자
smgnews.co.kr/serial_read.html?uid=111047§ion=sc49 새만금일보
준망의 아들 송년이고, 딸은 2명인데 영광인 김하명에게,
은진인 송기재에게 시집감
김급(金汲)
김급(金汲)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8위(78...
제중(濟仲) 신축(辛丑) 1661년(현종 2) 영광(靈光) 장흥(長興)
[문과] 숙종(肅宗) 37년(1711
영광김씨(靈光金氏)
丙科),
김급(金汲, 1661 辛丑生) : 문과(文科) 숙종37년(1711) 식년시 병과(丙科),
김필(1661 辛丑生) : 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식년시 을과(乙科),
김의정(金義精, 1661 辛丑生) : 문과...
보성 선씨(寶城宣氏)
시조
선용신(宣用臣), 선윤지(宣允祉)
주요 집성촌
전라남도 보성군
주요 인물
선형, 선거이, 선여경, 선극례, 선세강,
선약해, 선종한, 선준영, 선종구, 선경식, 선동혁, 선두훈, 선병렬, 선동열
인구(2015년)
41,876명
보성 선씨(寶城 宣氏)는 전라남도 보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기원[편집]
선씨(宣氏)의 연원(淵源)은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손인 선왕(宣王ㆍ姬靜), 문왕의 넷째 아들 주공(周公ㆍ姬旦)의 후손인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5세손 선백(宣伯: 叔孫僑如), 송나라 선공(宣公: 商(殷)나라 子太乙의 후손으로 이름은 子力)의 후손들이 시(諡) ‘선(宣)’으로 씨(氏)를 삼았으니 BC800~600년대의 일이다. 이들은 모두 제곡(帝喾)의 직계이며, 황제[黃帝ㆍ姬姓]의 후손들이다.
《한서(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한(漢)나라 말에 많은 선씨(宣氏)들이 해동(海東)으로
피난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예로부터 복호촌(伏虎村; 현재의 전라남도 보성군선형의 고조부인 선윤지
세종실록지리지에 선(宣)씨는 전라도 보성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기록이 있는 성본으로 시조와 연원이 알려지지 않은
광주 선씨(光州宣氏)와 밀양 선씨(密陽宣氏)가 있지만 모두 동원(同源)으로 본다.
역사[편집]
본관은 보성(寶城) 단일본이지만, 선용신(宣用臣)을 시조로 하는 낭장공계열(조도계열)과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하는 안렴사공계열(갈몰계열)로 나뉘어 있다.[1]
낭장공 계열[편집]
시조 선용신(宣用臣)은 고려 고종 때의 진사(進士)로 여진[2] 1421년(세종 3년)
검교 호조참의(檢校戶曹參議)를 지낸 선중의(宣仲義) 호구정장(戶口呈狀)으로 신원이 입증되었다.[3]
선계(先系)는 실전(失傳)이고 부인은 담양 전씨함안 조씨
안렴사공 계열[편집]
시조 선윤지(宣允祉)는 우왕 때 황명(皇明) 문연각학사로 고려
족보[편집]
•신유초고 : 신유년(1681년)에 시작하였으나 초고만 남기고 완성되지 못함. 초고에서
선복주는 오선개조안렴공(吾宣皆祖按廉公)이라는 시를 남겼다. 1738년(무오년)에 보성의
개흥사에서 다시 만나 수보를 시작하였고, 신유초고와 옛 문적을 참고하여
선윤지 후손들의 파를 순서대로 나열한 후에 뒤편에 세계가 확인되지 않은 선씨를 기록하였다.
•기사보 : 1749년 보성선씨 최초로 완성된 족보
•정축년(1757년) 조성과 도촌에 사는 낭장공계열은 선용신(宣用臣)을 시조로 별보를 하였다.
•을사보 : 1785년 보성선씨 기사보를 수정, 보완하여 발간(문송영제 수록,
문송영제란 보성선씨간 시조 논쟁에 대한 1768년의 송사결과 판결문)
•정미보 : 1847년
•정미보 : 1847년 수정발간
•신해보 : 1851년
•을묘보 : 1855년
•을해보 : 1875년
•계사보 : 1893년
•정사보 : 1917년
•경오보(참의공파보) : 1930년
•임오보(옥암공파보) : 1942년
•정해보(선전공파보) : 1947년
•을미보 : 1955년
•무오보 : 1978년 (선윤지 후손과 선원지 후손이 합보하였으나, 선원지 후손이 다시 분파하여 별보를 함)
•정축보 : 1997년
인물[편집]
•선형(宣炯, 1434년 ∼ 1479년) :
선윤지의 5세손.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광유(光裕)이고, 아버지는 증 우찬성 화(和)이다.
1451년(문종 1) 무과에 급제하였다. 1456년(세조 1) 12월 경흥부사로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7년 3월 경상좌도수군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를 거쳐 안주목사·한성부윤·판종성부사(判鐘城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를 수행하였다. 10월에는 회령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한명회의 추천으로 증질(增秩)되었다. 1463년 4월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이듬해 정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4월에는 다시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1465년 정월에 경상도제언순찰사(慶尙道堤堰巡察使)가 되어 경주 북천(北川)의 제언 수축에 공을 세웠다. 1467년 무장이지만 성품이 염간(廉簡)하다고 하여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선군(船軍) 동원을 적극 주장하였다. 같은 해 7월 형조참판으로서 1,000인의 군졸을 이끌고 오자경(吳子慶)·한계미(韓繼美) 등과 1진을 이루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황해도병마사·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동시에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 6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녹훈되었다.
147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우의정
•선거이(宣居怡, 1550년 ∼ 1598년) :
선윤지의 8세손.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판서 형(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상(祥)이다. 1569년(선조 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진도군수를 역임하고 이어 청백(淸白)으로 성주목사를 거쳐 1591년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7월에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병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 때 크게 부상당하였다.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하여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또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수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병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울산 전투에 참가, 명장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에서도 서로 도와 이름이 높았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선여경(宣餘慶, 1551년 ∼ ?) : 조도계열 선용신의 후손. 자는 경숙(敬叔)·응원(應遠), 호는 도암(道庵)이다
.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주부(主簿)‧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의 관직을 수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묘를 하던 중이었으나 두 아들과 종형제들에게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을 말하였고, 어가를 호종(扈從)하였다. 평양성 전투를 전후하여 공을 세우고 이들은 모두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고, 전라남도 보성군 정흥리에 ‘선씨육충유장비(宣氏六忠遺庄碑)’를 세웠다. 사후 숭모재(崇慕齋)에 제향(祭享) 되었다.
•선극례(宣克禮, 1556년 ~ 1597년) : 선윤지의 9세손. 자는 예중(禮中), 호는 의재(義齋).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수사로 재임하다가 1598년(선조 31)에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옥배(玉杯)와 녹권(錄券)을 은사 받았다.[4]
•선세강(宣世綱, 1576년 ∼ 1636년) : 선윤지의 9세손.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 아버지는 참의 봉장(鳳章)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광해군 10) 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받았다.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이 된 뒤에 홍주영장(洪州營將)·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장흥의 포충사(褒忠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5]
•선약해(宣若海, 1579년 ∼ 1643년) : 선윤지의 10세손. 자는 백종(伯宗). 아버지는 부사(府使) 의문(義問)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 9)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경상좌수사를 제수받아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와 함께, 금편(金鞭)·초구(貂裘)·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다. 뒤에 평산부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철종 임술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의금부 훈련원도사에 추증되었다.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6]
과거 급제자
보성 선씨는 조선
문과
선문주(宣聞周) 선세휘(宣世徽) 선순보(宣淳輔) 선약봉(宣若奉) 선준채(宣俊采)
선진규(宣鎭奎) 선헌(宣憲)
무과
선거중(宣居重) 선경협(宣景恊) 선귀인(宣貴仁) 선기주(宣起周) 선덕민(宣德敏) 선덕용(宣德容)
선문환(宣文煥) 선봉령(宣鳳齡) 선순웅(宣舜雄) 선순흠(宣舜欽) 선시진(宣時振) 선여경(宣餘慶)
선영길(宣永吉) 선응길(宣應吉)
선응진(宣應軫) 선의남(宣義男) 선익도(宣翊道) 선익성(宣翊成) 선익성(宣翊成) 선익헌(宣翊憲)
선중륜(宣重倫)
선팽(宣彭) 선필영(宣必英) 선호적(宣豪績)\
생원시
선세휘(宣世徽) 선약봉(宣若奉) 선양중(宣養中) 선우빈(宣遇贇)
선정달(宣廷達) 선헌(宣憲)
진사시
선문주(宣聞周) 선병련(宣炳蓮) 선붕익(宣鵬翼) 선세기(宣世紀)
선우해(宣羽海) 선응직(宣應直) 선의문(宣義問) 선인후(宣仁厚) 선탁경(宣倬卿)
음관
선문주(宣聞周) 선원표(宣元杓) 선준채(宣俊采) 선창로(宣昌魯)
음양과
선흥윤(宣興胤)
인구[편집]
•1985년 7,651가구, 33,105명
•2000년 10,821가구, 34,842명
•2015년 41,876명 (남 21,055명 + 녀 20,821명)
각주[편집]
1.이동 ↑ 네이버 지식백과
2.이동 ↑ “1421년 조선 세종때 ‘원본 호적’ 발견 보성선씨 종친회 기탁 자료…
국내서 두번째 오래된 호적”. 《문화일보》. 2010년 2월 4일.
3.이동 ↑ “600년 전 보성군 행정 서비스 '보성군 호구정장' 국정교과서에 실려”. 《이뉴스투데이》. 2014년 3월 25일.
4.이동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선극례
5.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세강
6.이동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약해
7.이동 ↑ 보성 선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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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씨의 관산 定着史
1. 壯元峯에서 平化로 移徙
장흥 위씨는 원래의 보금자리는 장흥읍내 동동리 일대이다.
지금 장흥법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어떤 선조가 터를 잡았는지 모르나 1226년 원감국사(圓鑑國師) 3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로 말미암아 장원봉(壯元峯)의 전설(傳說)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시조와 중시조 그리고 5세조 충렬공(忠烈公) 등 선조들의 고장도 여기가 아닌가 보고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없기에 단정할 수 없다.
장흥은 백제 때 오차현(烏次縣), 신라 때 오아현(烏兒縣), 고려 때 고마미지(古馬彌知縣)․마읍현(馬邑縣)․수령현(遂寧縣)․장흥부(長興府)․회주목(懷州牧)․장흥부와 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선조들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지 22년 후 살던 곳에서 나가야 했다. 중녕산(中寧山)에 있던 부(府)의 치소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이전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옮길 자리가 선조들이 살던 수령현의 옛터로 지목됨에 따라 비워줘야 했다.
당시 주인공은 15세(悳龍)와 16세(溫良恭儉) 4형제로 보인다. 14세 판사공(判事公)은 친위음모가 적발돼 곤장을 맞았으며, 조선건국 후에도 왕의 지근에서 일했음이 왕조실록에서 확인됐다. 그런데 선조들은 판사공의 음모로 3대가 금고령으로 출사를 못했다고 알려졌다. 여기다 1414년에는 보금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찌됐건 5부자는 예양강(汭陽江) 건너편 평화(平化)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았다.
장흥 위씨는 평화로 이전한 이후 분파(分派)가 시작된다. 16세 4형제 중 맏이인 자온(自溫)의 후손은 능주파(綾州派),
둘째, 자량(自良)의 후손은 관산파(冠山派),
셋째, 자공(自恭)의 후손은 사월파(沙月派)로 갈린다.
넷째, 자검(自儉)은 무후가 됐다. 이들 형제 가운데 셋째 자공은 사월방(沙月坊)으로 이사가 얼마간 살다가 둘째 손자(頓)를 데리고 함흥(咸興)으로 떠나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두 형은 평화에서 평생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관산파의 내력을 보자. 자량은 외아들 종복(宗復)을 두었다. 그를 가리켜 한성참군(漢城參軍)이라 한다. 그는 순천(順天) 박씨(朴氏)와 사이에 유형(由亨)과 유정(由貞) 두 아들을 낳았다.
유정은 다시 행원파(杏園派)로 갈려 나간다.
유형의 자는 자실(子實)이며 승문습독(承文習讀)을 추증(追贈)받아 습독공이라 한다.
그는 평산(平山) 신씨(申氏)와의 사이에 진손(晉遜)․진동(晉同)․진보(晉寶)․진수(晉秀)․진현(晉賢) 5형제를 두었다.
맏이인 진손(晉遜)과 둘째, 진동(晉同)은 무후(無後)다.
셋째, 진보(晉寶)는 인손(仁遜)과 대성(大成)으로 이어져 곡성(谷城)현감파를 이룬다.
넷째, 진수(晉秀)는 광산(光山) 김씨(金氏)와 사이에 경(鯨)․곤(鯤)․태(鮐)․전(鱣)․방(魴) 등 5형제를 낳았다.
맏이인 경(鯨)과 셋째인 태(鮐)는 무후다.
넷째인 전(鱣)은 덕원(德元)과 덕린파(德隣派)를,
넷째 방(魴)은 덕남(德男) 즉 훈도공파(訓導公派)가 된다.
막내 진현(晉賢)은 관산파를 잇는다.
다만 막내가 관산파를 이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관산파의 파조는 16세 자량(自良)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아들 17세 종복(宗復), 장손 18세 유형(由亨) 등은 관산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
관산과의 연고는 파조(派祖)의 증손인 19세 진현(晉賢)이 당동으로 입거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관산파라는 파명(派名)은 1759년 기묘초보를 제작하면서
붙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합리적인 분류는 아니다.
1) 堂洞은 冠山派의 요람
습독공 유형(由亨)의 막내아들 진현(晉賢․1483~1564)은
관산(冠山) 당동(堂洞)의 탐진(耽津) 최씨(崔氏)와 혼인을 함으로써 관산과 인연을 맺게 된다.
후손들은 그를 가리켜 강릉참봉공(康陵參奉公)이라 하나 추증(追贈)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평화에서 태어나 살다가 넷째, 형 진수(晉秀)와 용산(蓉山)의 어산(語山)과 인근에 있는
운주리(雲柱) 봉황동(鳳凰洞)에서 살았다.
이때 아버지 습독공도 평화를 떠나 아들들과 어산이나 봉황동에서 동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참봉공이 최씨 규수와 혼인을 한 시기는 1500년 정도로 보인다. 20세 전후가 당시의 혼인 적령기였기에 그렇다. 탐진 최씨 집안은 고을에서는 부자였다. 최씨 집은 사연을 간직한 집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은 중국 소흥부(紹興府)출신 임호(任灝)로 장흥 임씨(任氏)의 시조이다.
그는 1035년에서 1045년 사이에 중국에서 동래해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고 전한다.
임호는 중국내 국난을 피해 고려의 정안현(定安縣) 앞 돌의도(突衣島)로 동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호의 동래와 정착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우선 그가 동래한 시기라면 북송(北宋) 경우(慶祐)․보원(寶元)․경역(慶歷) 황제 연간에 해당된다. 960년에 건국해서 약 80년 전후라면 국란이 평정된 시기이다. 그런데 국란을 피해 안정된 고려로 귀화했다니 조금 이상하다. 여기다 고려로의 귀화를 계획했다면 왜 하필 국토의 극변인 정안으로 들어왔는가도 석연치 않다. 그리고 그는 당동에 온 직후 고려조정이 있는 개경(開京)으로 진출하나 이상하다.
즉 임씨들은 관산이란 변방에 정착하자 말자 벼락치기로 명문이 된다.
임호는 바로 개경(開京)으로 가서 출사(出仕)한다.
원외랑과 국사설이 있다. 임호의 아들 의(懿)는 곧 고려조정의 평장사(平章事), 손자 원후(元厚)는 중서령(中書令)에 올랐다. 증손녀는 왕비가 됐다. 공예태후(恭睿太后)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태후의 태생지는 당동이며 그래서 그 집터는 예사로운 집터가 아니다.
임씨 이후의 집주인은 탐진 최씨, 장흥 위씨, 수원 백씨, 장흥 위씨 등이다.
왕비에 간택된 배경을 놓고 설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당시 고려조정의 어의인 강진출신 최사전(崔思全․1067~1139)이 추천했다는 설이 있다. 주로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다른 설은 태조 왕건 이후 지방호족들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삼았기에 장흥의 호족 임씨에게도 적용했다고 고려대 박용운교수는 주장하다. 그러니 임씨들은 호족반열로 볼 수 있다. 시조 호의 아들 의는 문하시중 직무대행을 지냈고, 손자 원후 또한 대단한 벼슬아치기 때문이다.
임씨들이 이민 2세부터 고려의 수도 개경에 진출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박교수는 당시 보림사 승려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들고 있으나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어쨌건 왕비로 간택될 때 원후는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자신이 중서령이었다. 둘째, 장인 이위(李瑋․1049~1133)가 문하시중이었다. 셋째, 이자겸의 난으로 그의 딸들이 폐비가 됐다. 넷째, 기이하게도 정혼한 김인규(金仁揆)의 아들이 하필 혼인예정일에 급사한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위의 꿈 얘기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황색의 큰 깃발이 궁궐의 용머리에 걸쳐 펄럭이는 꿈을 꾼 후 외손녀가 1126년 인종(仁宗․4년)의 비로 간택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추천됐다. 연덕궁주는 이듬해(1127년) 의종(毅宗)을 낳고 2년 후인 1129년 왕비로 책봉된다. 언니(娥池)의 꿈을 샀다는 일화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이후 경(暻)과 명종(明宗), 충희(沖曦), 신종(神宗) 등 5형제와 승경(承慶), 덕녕(德寧), 창락(昌樂), 영화(永和) 등 4공주를 낳는다.
왕후는 아들 의종이 즉위한 후 왕태후(王太后)에 오르고, 묘청(妙淸)의 난과 정중부(鄭仲夫)등 무인정권에서 왕통(王統)을 고수하려 애쓰다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공예태후 시호를 받았다. 공예태후는 당동이 낳은 인물이다.
장흥(長興)이라는 이름도 인종이 모후인 왕비의 출신고장이라 길이 흥할 길지를 상징해서 붙여준 지명(地名)이다.
그의 아버지 원후는 1142년 인종 20년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임씨들은 고려가 폐망하기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동 집터의 두 번째 주인은 탐진 최씨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려가 망한 후 장흥 임씨의 집을 인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최씨들이 약 3대쯤 살던 1490년대 말에서 1500년대 초의 주인은 최수동(崔壽東)이었다.
그는 아들이 없었기에 데릴사위를 삼아 집을 물러줬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동 집터의 세 번째 주인은 장흥 위씨일 것이다.
당시 탐진 최씨는 강능(江陵) 참봉(參奉) 진현(晉賢․1483~1564)을 외동딸의 배필로 삼았다.
진현은 어머니 신씨와 형과 어산(語山)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 습독공은 평화를 떠난 기록이 전혀 없다. 아들 진수와 진현은 어떤 연고로 지금은 용산면인 어산과 운주동(雲柱洞)에 살게 됐는지 자상하지 않다.
이들이 어산에서 살았던 시기는 15세기 후반이거나 16세기 초라고 볼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은 진수의 묘소가 그곳 봉황대(鳳凰臺)에 있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또 1937년 운곡재(雲谷齋)를 건립한데서도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다 진현은 최씨의 딸과 결혼하면서 당동에 입향한 것이다. 그가 1483년생이니 20세 전후에 결혼했다고 보면 16세기 초로 보인다. 결혼 이후 아버지께서 타계한 이후 어머니를 당동으로 모셔 함께 살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참봉공의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을 것이다. 처가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사위인 진현 또한 아들을 낳지 못했다.
하여 둘째 형 진수의 네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 곤(鯤․1515~1582)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는다.
호가 당곡(唐谷)인 곤(鯤)은
문중에서는 최초로 1549년(明宗 4년)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광주(廣州) 이씨(李氏)와 결혼해서
덕홍(德弘)․덕의(德毅)․덕관(德寬)․덕화(德和)․덕후(德厚) 등 5형제와 두 딸을 낳았다.
집엔 참봉공이 지은 강당인 수각(水閣)이 있었다. 여기서 5형제도 공부했다.
당시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1522~1556)과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은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1582)은 수각을 제(題)로 한 형제의 시를 보자.
古城殘堞半藤蘿 : 고성의 무너진 담 반 틈은 등라가 얽혔는데
烏次餘民有幾家 : 오차의 남은 백성 몇 집이나 있을 런지
山岳不崩江海闊 : 산악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강해는 광활하니
長生我欲問姮娥 : 오래 삶을 내가 항아에게 묻고자 하네
溪南一路入松蘿 : 계남의 한 길 소나무 겨우살이로 들어가니
趁召高軒似到家 : 부름 받고 옛집에 달려오니 벌써 이른 것 같네
盡醉不辭留夜宿 : 취하도록 사양치 않고 머물러 밤을 새우니
小梅香裏候姮娥 : 작은 매화 향기 속에 항아를 기다리 네
이 시는 기봉과 옥봉이 이성(異姓) 재종숙인 당곡(唐谷)을 위해
『당곡수각(唐谷水閣)』을 제영으로 시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봉은 당곡보다 7세 연하이다. 기봉의 집은 안양(安良)인데 왜 관산에 왔을까.
단순히 재종숙이라는 인척관계라서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설(異說)도 없지 않지만
1521년 귀양 온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에게 배우기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
당동 집의 네 번째 주인은 인천(仁川) 이씨(李氏)가 살았다고 한이다. 한 동네 살던 차씨들의 경우 형제가 효자여서 후일 주민들에 의해 마을에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넋을 기렸다고 한다. 높이 180㎝, 너비 45㎝, 비후 20㎝ 크기의 비는 관산읍사무소 뜰로 옮겼다. 1980년 관산 소도읍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 차씨들은 1982년 문제의 비를 방촌리 626의 2번지로 옮겨 세웠다.
다섯 번째는 수원(水原) 백씨(白氏)다. 백씨들이 차씨들로부터 집을 사들였는지 아니면 다른 성씨로부터 사들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장흥 위씨 가운데 당동의 집터에서 살았던 청계공(淸溪公) 후손들은 한 때 백씨들과 한 마을에 살다 성자동으로 옮겼다. 집터를 되찾은 주인공은 의재공(毅齋公)이다. 그는 평소의 소원이 오덕의 태생지를 환수하는 것이다.
노력을 경주한 끝에 마침내 탄생지를 되찾았다.
당동의 집터는 단순한 터가 아니다. 임씨 시조의 집터로 공예태후와 선조들의 태생지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서려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터를 다시 찾아 유장지로 가꾸고 싶어 매입을 타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해 마을 입구에 사당 정안사(定安祠)를 지어 선조들을 기리고 있다.
현재 의재공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으나
5덕(五德)의 탄생지라는 점에서 장흥 위씨 관산파의 성지(聖地)인 것이다.
2) 文鄕전통과 水閣의 역할
수각과 관련, 관산의 문향적(文鄕的) 전통(傳統)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천관산과 방촌하면 위씨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씨하면 존재선생과 한학적(漢學的)지식인을 연상케 한다. 사실 관산 위씨가 향반의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글에 있다. 향촌사족으로 행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은 바로 지식(知識)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향적(文鄕的) 전통은 여러 인물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관산은 벽촌이지만 예사로운 동네와 다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삼국시대와 고려 때 현의 치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당동에서 황실의 태후가 출생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호남 5대명산 중의 하나인 천관산이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여타 지역에 비해 공부하는 선비들이 많다는 점이다.
네 가지 특징 가운데 세 번째까지는 이미 알려져 있으니 설명을 생략한다.
네 번째 이유인 선비가 많은 이유는 어디에서 연유할까.
고려 때 장흥지방에서는 유난히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했다.
관산 당동에서 임호(任灝)의 아들 임의(任懿)의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시작으로 손자 임원후(任元厚)가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다. 임원후의 장인은 이위(李瑋)이고 그의 딸은 공예태후(恭睿太后)이다.
장흥읍 출신 위계정(魏繼廷)도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강진(康津)출신 내의(內醫)로 이자겸(李資謙)의 역성혁명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최사전(崔思全)도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럼 이들 인물들은 우연히 배출됐는가. 물론 우연히 나올 수 도 있다.
그러나 인물은 선천성도 중요하나 후천적으로 가르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들을 가르쳤을 스승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고려 고종 때 장원급제한
위원개(魏元凱)․위문개(魏文凱)와 급제한 위신개(魏信凱)도 배우지 않고 급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가르친 스승을 알 수 없을 뿐이다. 아버지 등 가학이라도 배우지 않고 과거에 장원급제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한 이후 임씨와 위씨는 된서리를 맞는다. 고려를 떠받은 사족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위씨는 판사공(判事公) 충(种)이 시중 김종연(金宗衍)과 이성계세력을 뒤엎으려다 발각되어
3대에 걸쳐 출사를 금지하는 금고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장원봉 아래 집터로 부의 치소를 이전한다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위씨는 평화를 거쳐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살아야 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각설하고 19세 진현은 당동에 입향해 정착한다.
어산(語山) 또는 봉황동에 살던 진수(晉秀)의 둘째 아들 곤(鯤)이 입양한 후 아버지는 수각(水閣)을 지어 공부하게 한다.
그가 7세 무렵인 1521년(辛巳)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장흥으로 귀양을 온다.
영천자는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으로 1519년(중종 8)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던 해에 진사에 장원과 현량과에 급제하고,
2년 후인 안처겸(安處謙)사건에 연루된 혐의이다.
영천자는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과 사제 간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장흥에 적거하면서 기봉을 가르쳤다.
기봉집(岐峯集)에「甲辰四月奉送靈川」(申潛字元亮, 時先生詩山守, 過冠山舊居)
즉갑진년 4월 신잠선생을 삼가 전송하며(신잠은 자가 원량이다.
이때 선생은 시산(泰仁)태수가 되어 관산의 옛 사시던 집에 들른 길이었다)
등 시산잡영편(詩山雜詠篇)에 스승을 위해 쓴 30여수의 시에서 확인되고 있다(기봉집 189쪽).
시를 근거로 몇 가지 사실을 추적해 보자. 영천자는 1521년에 귀양와서 17년 간 지내다
1538년 해배됐다. 해배되면서 전북 시산(태인)군수에 제수됐다.
기봉은 영천자가 시산군수로 있다가 1544년(甲辰) 해남을 거쳐 관산의 예전 살던 집인
죽원(竹院)과 매창(梅牕)에 들른 후 전송한 시다.
기봉이 영천자에게 수학한 시기는 16세까지이다.
그러므로 7세 연상인 당곡공(堂谷公)과 동문수학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장소는 당동의 수각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있다. 이종출(李鍾出) 교수는「조선후기 향촌문화사와 존재 위백규」심포지움「존재 위백규의 가통과 향촌활동」이란 논문에서 위정훈(魏廷勳․1578~1652)이
장흥에 유배 온적이 있는 신잠(申潛)을 배향하는 사우를 건립하는 일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이 또한 선대에서의 인연을 되새김으로서 위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 않았겠지만 명분을 세우고자 하는 중요한 향촌활동의 일환이었다고 했다.
영천자의 교학(敎學)은 관산의 위씨에게는 교훈으로 작용했다.
청계공(聽溪公)은 1573년 중사마시(中司馬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양춘재(陽春齋)에서 후학을 지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금(聽禽), 웅천(熊川), 만회재(晩悔齋), 반계(磻溪) 등 조카들이 그들이다.
이교수는 앞의 논문에서중부(仲父)에게 경학을 읽히기는 하였지만 거의
자득오해(自得悟解)하는 독학이었다.고 했으나 청계공의 학문적 수준을 과소평가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마시에 합격한 수준이면 결코 만만찮은 실력의 소유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주의 행재소로 왕을 찾아 알현하고 운향관을 제수받고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鐘) 등과 수창(酬唱)한 사실에서도 그의 지식을 가름할 수 있다. 더구나 여응종은 청계공의 인물됨을 아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선생의 수준이 낮아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이해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가당찮은 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오덕의 스승은 알 수 없다.
5형제의 글이 진사와 무과에 급제할 정도였다면 상당한 수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둘째, 청계공(聽溪公)은 임진왜란 때 의주 행재소와 운향관으로 소임을 마치고 구향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에게 배운 제자에는 자신의 아들을 비롯해 모든 조카들이다. 이교수는 반계공(磻溪公)이 그에게 배웠지만 스스로 깨우친 부분이 많다고 풀이하나 옳지 않다. 적어도 진사시에 합격한 실력을 그렇게 보면 안 된다.
막내인 안항공(顔巷公)도 방촌으로 분가해서 후학을 지도했다. 22세들 사촌형제들은 청계공과 안항공에게서 배우고 그들은 다시 23세로 대를 이어 가르쳤다. 그리고 24세 수우옹(守愚翁) 형제는 장흥에 유배 온 노봉(老峯)에게 배웠다. 詩․書․畵 3절이란 삼족당(三足堂)과 아들 영이재(詠而齋)의 스승은 누구인지 모른다. 간암공(艮庵公)은 서울에서 학문을 익히고 하향했다. 25세 잉여옹(剩餘翁)은 외가에서 배워 고흥에서 훈장을 했다.
존재공의 스승은 어릴 대는 종조부인 춘담공(春潭公)이다.
병계 선생 문하로 들기 전에는 주로 간암과 잉여옹에게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문중의 학풍은 계속 이어져 한말에는 최익현(崔益鉉)․송병선(宋秉璿)․기정진(奇正鎭)․정의림(鄭義林)․기우만(奇宇萬) 등에게 배운다. 춘헌(春軒)․죽암(竹庵)․오헌(梧軒) 등의 학덕은 일제도 함부로 하시하지 못할 정도로 문중의 힘으로 작용했다. 관산 위씨의 힘은 역시 글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급제하고, 정명(廷鳴․1589~1640)은 향시에 13번, 1611년 진사에 합격했다.
참봉공의 손자와 증손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칭을 없애고 서궁에 유폐한 사건이 발생했다. 종형제들은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보고 왕(광해군)마저 인륜도덕을 무시한 행위를 목격하고는 과거보기를 단념했다. 저마다 충분한 학문적 자질을 갖추었으나 왕의 패륜에 출사포기로 저항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는 판사공으로 인해 출사를 포기한데 이어 두 번째 출사포기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1623년 인조반정, 1624년 갑자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연거푸 일어났다.
5덕의 자손들 가운데 정열과 정철은 무관으로 출사했고, 임천에 있던 종형제들도 국가를 위해 앉아있지 않았다.
정묘호란에는 정망(덕홍)․정헌(덕의)․정훈․정명(덕후) 등 4명이 소모사(召募生)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격문에 따라 부진했다. 병자호란 때 정훈은 안방준의 창의에 참여하고 동생 정명은 옥과현감 이흥발에게 가담했다.
임진(壬辰)․병자(丙子) 양란에 5덕과 그 자손들의 활약은 곧 위씨를 관산의 사족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고려 때 임씨들이 황후와 시중을 배출했지만 이미 800년 저쪽의 일이다.
문과 등제자는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무과출신 현감이나 군수를 5명이나 배출된 것은 벽촌인 관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넷째 덕화의 집안은 3대가 현감과 군수를 했고,
다섯째 집안도 2명 역임했으니 그 권위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방촌은 유명세가 있는 동네이다.
우선 고려 때 현(縣)의 치소라는 점이 적지 않은 유명세를 지니고 있다.
거기다 넷째의 집은 바로 치소자리이자 현감과 군수가 3대에 걸쳐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안항공의 후손 가운데 둘째 아들 집안도 현조인 정열과 현손인 존재(存齋)가 현감을 지냈다.
한 동네에서 벼슬아치가 이 정도 나왔으면
관존민비(官尊民卑)에 젖어 있는 우리의 정서로 봐서
결코 흔치 않은 사례임이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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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7) 위정훈의 청금유고 및 제15회 향토문화연구 심포지움 관련논문, 25면
출처 :원산 위정철 원문보기▶ 글쓴이 : 야운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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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및 취재
백문창(白文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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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시] 현종(顯宗) 14년(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6위(21/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C31BB38CC3DB1649X0
자 찬중(粲仲)
생년 기축(己丑) 1649년(인조 27)
본인본관 수원(水原)
거주지 장흥(長興)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충의위(忠義衛)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백한경(白漢經)
관직 : 충의위(忠義衛)
[안항:형제]
형 : 백문규(白文奎)
제 : 백문빈(白文彬)
제 : 백문욱(
호는 松隱 자는 운경/열경, 인조에서 숙종조의 문신
생부는 이영망
계부는 이시망
효자 송룡의 아들은 없고
딸은 백서체.신사하 강계우 안도상이다|14대 生進 이송룡(5송)
과거 및 취재 백문창(白文昌)
[진사시] 현종(顯宗) 14년(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6위(21/100) 자 찬중(粲仲) 생년 기축(己丑)
1649년(인조 27) 본인
본관 수원(水原)
거주지 장흥(長興) 선발인원 1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