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환의 역사산책-열국지
작성자:shchoi
작성시간:2018.01.19 조회수:74
댓글5
≪ 공손무지 - 관중 - 포숙아 ≫
천하의 문제아 제양공/齊 襄公이 연칭과 관지보에게죽고 공손무지가 그 뒤를 이었다. 齊 襄公
에게는 아들이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魯나라 여자가 낳은 公子 규(糾)이고 둘째가 거(莒)나라출신
여자가 낳은 소백(小白)인데 모두 서자(庶子)들이다. 중국 역사상 유명한 인물에 꼽히는 관중(管仲)
과포숙아(鮑叔牙-포숙이라고도 함)는 이 때의 인물들이다.
관중(管仲)은 대단한 정치가이지만 포숙(鮑叔)이 없었으면 그렇게 큰 인물이 되지못했을 것이다.
둘은 어려서부터 아주 가깝게 지내는 소위 "불알친구" 였다. 가난한 관중(管仲)을 위해 포숙(鮑叔) 은
언제나 신경을 써 주었고 사회, 군대 등 여러 곳에서 관중이 이기적이고 안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
으로 평가 받을 때 마다 老母를 모신 가난한 친구를 위해 변명해 주고 동업을 해도 기꺼이 이익을 더
떼어주는 정말 누구도 할 수 없는 혜택과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관중의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字는 중(仲) 이었다.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출신이고생몰연대 (生沒
年代)는 대강 BC716 ~ BC645 로 추정한다. 춘추시대 법가(法家)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치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관중은 규(糾)를 포숙아(鮑叔牙)는 소백(小白)을 主君으로 모셨다. 공자 소백은
아버지 제양공의 음행을 간(諫)하다가 발로 걷어차이고 나서 포숙아와 함께진즉 거(莒)나라로
달아났고 제양공을 죽이고 새로 등극한공손무지가 자기들을 부른다는 것을 듣고 자기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판단 하에 관중(管仲)은 主君인 규(糾)와 함께 규의 외가인 魯 나라로 달아났다.
공손무지와 연칭, 관지보는 역 쿠데타로한 달 만에 살해되었다. 역 쿠데타가 성공한 후 역신(逆臣)
이라고 연칭과 관지보의 간을 꺼내 제양공에게 제사를 지냈다고하는데 개차반인 제양공이 뭘 잘
했다고 그런 제사를 지냈는지.. 열국지를보면 임금을 살해한 경우 그 임금이 아주 개차반 이거나
도저히 임금으로 볼 수 없는 경우에도임금이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살해한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거나 그들을 죽이는 일이 신하 된 도리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이는 단순히 임금이라는
것으로 그렇게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그와 반대로나중에 맹자가 주장하는 "폭군방벌론
(暴君放伐論)"이 어느 때에 적용되어야 하는 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 齊桓公 - 管仲 - 鮑叔牙 ≫
공손무지가 죽자 임금의 자리를 두고 올림픽 경주 아니 우리나라 군대에서 가장 기본으로 하는
"선착순"이 벌어졌다(지금 군대에서도 그걸 하나?). 魯 나라에 있던 규(糾)와 관중(管仲)도 魯 나라
병사와 함께(보위를 도와주면 이익이 많으니까 남의 나라일이라도 같이 뛰는 것이다.) 齊 나라로
뛰고 거(莒)에 있던 포숙아와 小白 공자도 뛰기 시작했다. 이기면 임금이고 지면 쫓겨 나거나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莒)가齊와 가까웠기 때문에 아무리 우샤인 볼트라도 魯나라에서 뛰어서는 이길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관중이 이런 불리한 상황을 알고 혼자 먼저 가서 小白을 죽이려고 활을 쏘았는데 혁대에
맞았고 小白은 죽은 척해서 상대를 속인 뒤 먼저 齊나라에 도착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선착순에서이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제환공/齊桓公이다. 춘추5패(春秋5覇)의 최고 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상황에서 헛다리 짚은 사람이 있는데 魯의 莊公이다. 자기 아버지인 魯桓公이 외삼촌인 제양공
에게 죽었고 국력의 차이 때문에 齊에 보복도 못한 터에 원수인 외삼촌제양공의 지시에 따라 鄭
나라 일에 참전하고 이제 "규"와"소백"의 보위 쟁탈전에 끼어들어 糾를 지원하고 齊의 국경까지
쳐들어 갔다가 소백 측의齊 나라 군대에게 얻어맞고 땅까지 뺏기고 돌아갔으니 뭐 하나 시원하게
되는 게 없었다. 뭣 주고 뺨맞은 것보다 더하다.
이 보위 쟁탈전에서 진 公子 규(糾)와 대부분의참모들이 자결했다. 하지만 관중은 죽지 않고 옥에
갇혀있다가 포숙아의 추천으로 사면되어 소백(제환공)의 측근 참모가 되었다. 원래 관중을 죽이려고
불렀다가 포숙아가 하도써보라고 하는 통에 얘기를 시켜본 게 사흘 밤낮 을 토론과 담론으로 새웠
다고 한다.
열국지나 다른 책을 보면 이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잘 쓴다. 뻥도 좀 끼워서.. 관중은 포숙아의 배려
도 많았지만 어찌 보면 배신이라고할 만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이런 행동에 대해 유가 (儒家)에서는
후세에 두고두고 비난의 날을 세웠다. 하지만 난세와 다름없는그 세계에서는 이런 행태를 꼭 비난만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朝鮮王朝가 윤리적 책무와 명분(名分), 의(義)에 집착하는 유난스런
행동철학에만 의존했는데 그런 철학과 행동강령으로 어찌 5백년을버텨냈는 지도 신기 하고 그로
인해 왕조 말년, 19세기와 20세기초엽의 팽창적 제국주의(帝國主義)에 대처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관중은 제환공/齊桓公의최 측근 참모가 되었고 일세를
풍미하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소백(小白)과 규(糾)의 경쟁과 거기에 수반된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상반된입장에서 제환공이
合理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현실적인최선의 방안으로 여러 가지 논란이 될 수 있는 관중
(管仲)을받아들인 것은 현재의 한국 사회나 명분을 최고의 덕으로 삼던 조선왕조의 사회 에서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경쟁 상대는 죽어야 만 되는 존재"로 치부하는 黑.白 논리의 우리 정치, 사회에서
한 번 쯤 깨달아야 할 관계다.
제환공이 패자(覇者)가 된 것은 본인의 판단력과 신하인 관중의 능력을 알아보고 절대적인 믿음을
부여한 데 있는 것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도모하고 명분뿐이지만 天子라고 일컫는 周 왕실을
앞세워 列國들을 통제하고 견제함으로써 최고의패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여러 나라가 모여서
회합을 하는 것을 회맹(會盟)이라고 하는데 天子의 칙서(勅書)라는명분과 영향력 있는 힘이 수반
되어야 한다.
UN이나 국제기구 같은 것이 만들어지고 회합을 하는 기본 형태는 지금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다.
여기서맹주로 추대되면 그것은 패자(覇者)로 가는 다리이며 제환공은 9번의 회합을 성공적으로
소집 했다고 한다. 사실상 졸개 급에 속하는작은 나라들은 覇者가 소집하는 게 아니라도 모이라 면
모여야 할 판이기는 하다. 학교 다닐 때나 군대같은 곳에서 힘이 막강하거나 계급이 높은 者가
모이라면 모여야 되는 것은 어느 때나 같은 논리가 아니겠는가?
위에 언급되었듯이 제환공은 前代 개망나니 제양공의 한 살이었던 딸과 노장공(文姜의 아들)의 혼사
를 치르게 했는데 이 것은 전에 문강의 강요에의해 합의되었던 일이었다. 17살과 37살의 결혼이 된
것이다. 뭐 이상할 것도 없다. 요즘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혼사 풍습은 다망쳐놓고 있다. 뭐 말이야
좋아서 "나이가 무슨상관이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하면서저 노장공의 20살 차이는
우습게 알고 25살인가 29살인가 차이가 나는 색시하고 결혼을 아주 스스럼없이 해내는 용감성(?)을
보여주고 있는 세태다. 그게 어떻게 숫자에 불과한 문제인가 말이다.
부부간에 서로 의지하고 믿고 협동하고 도와가며 살아가야 하고 또 부부간의 性 關係문제도 웃고
지나갈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건강한 자식을 낳고 서로 대화가 통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데는 그런 불균형의 조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괜히 흥분 했네..)
옆으로 샜다. 노장공/魯莊公은 이리 저리 치이고 바보 되고 쪼다가 되는 행동을할 수 밖에 없었고
참다보니(?) 齊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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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choi
2018.01.19메뉴
첫댓글관포지교는 시험에도 자주 나오던 두 사람의 관계지요.
김용래
2018.01.19메뉴
잘 읽고 있슴.
답댓글
shchoi
2018.01.19메뉴
독자가 있어야 돼. ㅎㅎ 미술품이나 사진도 관객이 있으면 좋듯이.....
김주명
2018.01.21메뉴
좋아요!!!!
shchoi
2018.01.21메뉴
Willkomen Sie h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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