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 없는 인생(04)
욥기 1장 13-22/2:1-8
“앰비규어스해요”
“왜 앰비규어스해요?”
“그 본문이 원래 그래요.”
“성경이 모호하면 안 되잖아요. 이것이면 이것, 저것이면 저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해 주어야 하지 않나요?”
미국 시카고의 휘튼 칼리지에서 있었던 29회 코스타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신 말대로 온몸이 병원 그 자체인 마르바 던이 오전의 주제 강사이었다. 코스타의 주제가 “우리의 약함, 예수의 능력”이었기에 외국인이 강사로 초빙된 전례가 드문 코스타인데도 특별히 모신 모양이다. 목요일 오전, 그녀는 자신의 약함과 더불어 바울의 약함에 대한 고린도전서 구절을 강해했다. 본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이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여기서 표준새번역은 후반절에 ‘내’라는 단어를 덧붙였지만, 본래는 없단다. 둘 중 하나인데, 하나님 아니면 바울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던은 통상적인 이해와 달리 바울의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고 해석을 했다.
그날 저녁, 코스타를 섬기는 자원봉사자가 「나의 사랑하는 책,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신학자 김도현교수를 붙들고 캐묻고 있다. 왜 성경이 애매하냐고, 자기는 그런 것이 잘 용납이 되지 않는단다. 김 교수는 텍스트가 원래 그렇다, 문맥을 봐서 해석해야 한다, 등등을 열심히 설명한다. 성경이 본시 모호한(ambiguous) 구석이 많다. 책의 부피가 얇은데도 불구하고 내게 강력한 영감을 준 책이 하나 있다. 하버드의 구약학자이었던 폴 핸슨이 쓴 「성서의 갈등구조」(한국신학연구소)이다. 특히 구약에는 제사장과 예언자라는 상호 대립되어 보이는 갈등 구조가 있었고, 그 대립과 긴장으로 인해 성서가 풍성해진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러기에 마르바 던의 말이나 김 교수의 설명이 낯익다.
그래서 옆에 있던 내가 참견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잖아요. 깔끔하게 재단되지 않고 까끌까끌한 면이 많지요. 우리네 삶이 애매모호한데 성경이 어찌 매끌매끌할 수 있겠어요. 아니 성경이 그래서 그런지 삶이, 세상이 성경을 닮아서 뒤죽박죽이네요.” 주변에서 와, 명언이다, 라고 웃는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성경 때문에 우리가 그런 건지, 아니면 우리가 그래서 성경이 그런 건지 모를 때가 많다. 둘이 하도 닮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삶은 애매하고, 그래서 선택지가 있고, 성경은 모호해서 다양성이 풍부하고, 우리가 개입될 소지가 다분하다. 불안해할 이들이 많을 것 같아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성경은 당신의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한다.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성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생도 그렇다. 인생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모르겠다. 인생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 도통 모르겠다. 공자의 언어를 빌린다면, 참된 지식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에 관해서는? 공자는 귀신에 관해 묻자 사람 일도 모르겠는데 어찌 귀신을 알리오, 라고 답했다. 그의 귀신에 관한 이해는 차치하자. 그가 말한 귀신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인간사를 벗어난 초월적 존재를 사랑하고, 그의 덕을 힘입어 사는 나로서는 그가 말한, 그가 안다고 말한, 그가 알려고 노력한 인생에 대해, 인간에 대해 도무지 모르겠다.
사실, 여기서 말한 인생은 엄밀히 말하면 미래다. 내일이다. 그러니까 어려서 많이 불렀던 안이숙 선생의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내일 일은 난 몰라요’다.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다. 내 영역 밖의 일이다. 하지만 알 수 있다고 해도 모르는 것이 좋다. 만약 내게, 20대의 내게 내가 죽도록 공부하다가 죽을 뻔 하겠지만 결국 교수도 못된다고 알려주었다면, 30대의 내게 목회하다가 뜻 아닌 원수를 만나 죽을 고생할 것을 귀띔을 해 주었다면, 아예 신학교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경험하게 될 일을 누군가가 슬쩍 일러준다면 너무 무서울 것이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끔찍한 온갖 상상이 든다. 그냥 생각을 말자. 생각을 않는 것이 좋다. 그걸 다 알면 지금 콱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모르는 게 약이다. 예전의 어느 핸드폰 광고 카피처럼, 알면 다쳐!
그러니 부질없이 점쟁이 찾아다니고, 용한 무당 만나 굽실거리고 돈을 갖다 바쳐도 아무 소용없다. 미래를 알 수도 없고, 알면 더 힘들다.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시간이면 그 시간에 욥기나 읽어라. 돈만 날리지 말고. 시간 버리지 말고. 욥기가 보여주는 냉혹하고 냉정한 사실주의가 읽기 어렵고, 고개를 돌리고 싶기도 하지만, 그게 인생 사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욥은 자기도 모른 체,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의 판돈이 되었다.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나를 나 빼고 저들끼리 마음대로 갖고 논단 말인가. 아이들 말대로 갖고 놀았으면 제 자리나 갖다 두지, - 하기는 42장은 제 자리에 이전 보다 더 좋은 상태로 고이 모셔두는 것으로 욥기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게 얼마나 돌고 돌아 돌아간 자리인가 – 죽을 고생 시킨단 말인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
느닷없이, 정말 황당하게도 욥에게 엄청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진다. 누가 알았겠는가, 욥에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욥이 당하는 재앙의 성격은 한 마디로 총체적이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그리고 하늘과 땅에서, 사람과 자연을 통해서 온갖 재앙이 연방 폭발한다. 다음으로 연속적이다. 한번 어려움을 겪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성숙하고, 고난을 담담하게 맞이할 여유 – 사실 이런 것은 없다. 언제 어떻게 닥치든 고난은 무지 힘들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 도 주지 않고 마구 몰아친다. 또한 긴급하다. 재난 소식을 전하는 전령들의 발걸음이 숨 가쁘다. 앞 사람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음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다. 마지막으로 점층적이다. 갈수록 강도가 세 진다. 처음에는 가축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욥의 자녀들의 죽음 소식이다. 숨 쉴 겨를도 없이 달려와서 전하는 소식은 경천동지할 만하다.
하나님과 사탄의 두 번째 대화 이후에 전개되는 재앙은 직접적이다. 물론 욥의 자녀들도 욥에게 직접적이지만, 이번에는 욥의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더 직접적이다. 종기가 나고, 잿더미에 앉았다고 했다.(2:7-8) 단지 질병을 앓았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격리되었다는 뜻이다. 잿더미는 마을 공동체 밖에 있다. 그곳에 앉아 옹기 조각으로 가려운 데를 긁고, 고름을 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마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면, 욥은 정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동방 지역에서 가장 의롭다고 소문난 욥에게, 그것도 그가 그렇게 신뢰하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하루아침에 벌어진 참극이다. 나, 감히 말한다. 미. 쳤. 다. 그런 고통을 허락하는 하나님도, 그런 고통을 견뎌내는 욥도 말이다. 나는 그리 못 산다. 죽는다. 죽어야 살지, 살아서는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약 5년의 고생은 욥 앞에서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새발에 끼인 때만 못하다.
이따금 듣는 것도 버거운 아픔을 겪는 이들을 본다. 갑자기 사업이 망하고, 얼마 안 있어 가족 중 한 사람이 죽고, 또 다른 한명은 오래오래, 그것도 돈이 정말 많이 소요되는 투병생활을 하는 중이다. 죽도록 일해도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 빚 갚기는 물론이고 병원비는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살더라. 그래도 살아야지. 그래도 살아주어서 고맙지만 얼마나 힘들까. 연타에 얻어터지면서 욥처럼 죽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하나님께 거칠게 삿대질을 하기로 결단한 그들은 우리 시대의 욥이다.
인생은 모호하다. 모른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애매모호함이 한편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종잡지 못해 헤매게 한다. 반면, 그 비어있는 틈이 내가 비집고 들어가서 창조적으로 살아낼 여지가 있다는 말도 된다. 알지 못해서 답답하지만, 어차피 알지 못하는 것, 내 맘껏 살 수 있는 것이다.
욥은 어떤 이야기를 살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하나님의 이야기 vs. 사탄의 이야기. 까닭 없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과 까닭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기복적 삶의 한 사례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더 좋은 이야기 vs. 더 나쁜 이야기.
어떤 이는 반박할 것이다. 우리가 꼭두각시냐고.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도구냐고. 그런 분을 과연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어째 하나님은 그리도 쩨쩨하고 좀스럽냐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배우를 생각하면 된다. 배우는 인형도, 꼭두각시도 아니다. 대본을 읽는다고, 암기한다고, 몸짓을 한다고 다 연기자는 아니다. 그들은 대본의 대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실감나게 연기한다. 어떤 배우는 연기를 하는 것인지, 대사를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 어떤 배우는 마치 그 사람이 된 것인 양, 화신이라도 된 듯이 연기한다. 나는 나의 대본인 욥기를 읽고 있는가, 연기하는가, 살아내는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산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는 누차 말했듯이 모른다. 욥은 그 자신도 모른 체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의 판돈이 된 것은 억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우리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도 정당하다고 하실만한 이야기를 살 것인지, 아니면 사탄이 잘했다고 낄낄 거리며 좋아할만한 삶을 살 것인지, 그걸 결정하라는 것이다. 내 삶은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한 삶인가. 아니면 사탄이 좋아할 만한 삶인가.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전에 없던 이야기를 살아낼 것인지, 아니면 남들이 다 걸었던 길을 재미없게, 싱겁게 걸을 것인지.
욥의 세 친구는 틀에 박힌 고루한 하나님 이야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욥은 이전의 모든 사람이 믿었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지도도 없어서 넘어지고 깨지는 고생을 통해서 짜릿한 극적인 반전이 있는, 모험으로 가득 찬 인생을 선택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극장에 내 걸었다면, 당신은 어느 영화를 보겠는가. 그렇게 살자. 그 영화의 주인공으로 하나님은 나를 초대한다. 비 앰비셔스(Be ambitious!)
첫댓글 아멘!
오~~~감동입니다. 사부님의 글발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다 읽고 다시 제목을 읽었습니다. 대본없는 인생!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부님의 삶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탄생이 되네요^^
습관처럼 책을 읽고, 습관처럼 글을 구상하며 겨우겨우 몇주만에 원고지 20매를 힘들게 써냅니다. 그러나 읽어보면 허접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좋아서 읽고 좋아서 씁니다. 언젠가 폭죽이 터질 그날, 그날, 그날..하면서..ㅎㅎㅎ
사부님의 좋은 것들 보면서 내가 변합니다. 내가 좀 멋있게 변합니다. ㅋㅋ...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지만 앞서가는 사부님 따라 꾸역꾸역 즐기며 가겠습니다. 이상 아부의 달인이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