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태조는 서울 동대문 밖에 마조단(馬祖壇)을 설치하고 중춘(仲春)에 길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마조란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의 별칭이다. 방성은 천자를 보위하고 천마를 관장한다. 혼인 풍속에서
신랑은 백마를 타고 가는데 이것은 말과 관련된 태양신화, 천마(天馬)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말은 태양을 나타내고 태양은 남성을 의미한다. 무속에서 말은 하늘을 상징하며 날개 달린 천마는 하느님(上帝)이
타고 하늘을 달린다고 전한다. 마조단은 말(馬)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天駟星)
즉 선목(先牧). 마사(馬社). 마보(馬步)를 제사지내던 단(壇)으로 살곶이 다리 서쪽 언덕 위에 있었으며
순종(純宗) 2년 (1908)에 폐지되었다.

한양대 캠퍼스 백남학술정보관 동쪽 녹색공간 그 옛 자리에 세운 마조단 터비다.
마조단 터
馬祖壇 址
조선시대 살곶이 목장(箭串牧場)안에 있던 말의
무병(無病)과 번식을 위해 말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터(祭壇址)
마조단은 ‘말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터’라는 뜻이다.마조단은 단순히 말의 조상한테 제사 지내던 곳이 아니다.
당시 유일한 군대의 이동수단은 말이었다.그 말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목장이 살곶이벌에 있었다.
그 목장의 말이 무탈하게 자랄 수 있게 기원하는 곳으로'국토방위와 국력 신장을 기원하는 제단'이 바로 마조단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조(禮曹)에서 제사(諸祀)의 단(壇)·유(壝)의 제도를 아뢰었다.
"선잠단(先蠶壇)과 영성단(靈星壇)은 높이가 3척(尺), 둘레가 8보(步) 4척(尺)이고, 4방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으며,
선농단(先農壇)은 양유(兩壝)가 같고 유(壝)는 각각 25보(步)이며, 마사단(馬社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
마보단(馬步壇)은 각각 너비가 9보, 높이가 3척이고, 사방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마조단의 기원은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고려시대 의식(儀式)이 있는 것을 보아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답습으로
볼 수 있으나 조선시대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春官通考(춘관통고)』,『文獻備考(문헌비고)』에서도
옛터가 있다고만 기록 되어있다. 영조 25년(1749)에 소의 돌림병 때문에 살곶이 목장 안에 단을 쌓고 선목(先牧)을 제사하였는데
위판(位版)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새로 만들었으며, 또 각 고을에 명하여 고을 중앙에 단을 만들어 선목(先牧)의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재앙과 돌림병을 물리치게 한 기록이 있으며, 그 뒤 정조 20년(1796) 정월에 마조제는 이해부터
중춘(仲春)의 중기(中氣)후 강일(剛日)중 길일을 택하여 지내게 하였다.

<경성부사> 제3권(1941)에 수록된 마조단 근접 사진이다.항공사진은 아닌듯 하다.
사진을 촬영한 장소가 어디었는 지 궁금하다.사진의 위쪽으로 강물의 흐름이 보인다.
그래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담아낸 풍경임으로 짐작이 된다.
한양대 캠퍼스 내의 산등선이 흐름으로 미루어 이같은 사진의 앵글이 나올 수 있는 포인트를
찾기는 쉽지 않다.사진 설명문은 살곶이다리 서쪽 언덕 위라고 밝히고 있다.더욱 이해가 안된다.
살곶이다리 북쪽 언덕이라면 몰라도.이 사진에는 마조단 시설을 대부문 헐려나가고 유구의 흔적만 남아 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제75권 정조조(正祖條)에는 마조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조제 날짜를 금년부터 중춘(仲春) 2월 중기 춘분 강일 병일(丙日) 무일(戊日)에 길을 택해
축문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있는 것을 쓰도록 명하였다.정조 20년(1796) 정월에 마조제는
중춘 후 강일(剛日) 중 길일을 택해 지내는 것으로 상세히 규정 임금이 신하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국가의 전란이나 마필의 수출 또는 중요한 역사(役事)가 있을 때마다
임금이 친히 국조 오례에 따라 마조단의 마필을 위한 마조제를 지냈다.

<경성부사> 제1권(1934)에 수룩된 마조단 일대의 근접사진이다.
이 당시는 마조단의 유구가 상당히 훼손된 상태다.그 터의 흔적이 겨우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 책에는 "사근동 동남모서리 75.9미터 고지 동단(東端)의 절정에 있었다"고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1939년까지는 가까스로 그 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함께 서술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일만분의 일 지형도(1921년 측도)에는 왕십리 정거장과 살곶이다리 일대의
지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빨간 원형 안에 사각형 테두리가 처진 마조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