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 지난날 명월관에서 소리를 하고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력거를 덮치는 괴한이 있었다. 녹주는 김유정이라고 판단하고 인력거꾼에게 소리쳤다. – 서지 말아요! 그냥 달아나요 – 김유정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휘둘르자 인력거 꾼은 칼이라고 소리치며 멈췄다. 어서 밖으로 나오라는 유정의 괴성에 혼비백산한 녹주가 내려와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떨자 김유정은 몽둥이를 버리고 소리쳤다. “너는 말이다. 내가 돈이 없는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피하는 게냐 - 대답을 주춤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다.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것은 돈이지? 네가 돈이 필요하다면 나라님 밥상이라도 훔쳐 다 주마!” 이에 녹주가 대답을 하였다. “저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제 잘못입니까?” 녹주의 솔직한 대답에 김유정은 놀랬다. 당차게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유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후에도 유정의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녹주는 미칠 노릇이었다. 말년으로 갈수록 유정은 혈서를 적어 보내왔다. – 오늘 너는 운수가 좋았노라!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에서 가는 걸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네가 나오지 않았다.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린게 세시간, 만일 만났으면 너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다.” 이렇게 보내던 악랄한 편지도 잠시 쉬게 된다. 폐결핵과 늑막염, 치질이 도졌고 녹주도 권번 출입이 줄어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유정도 광주 중부면 상산곡동 누님 집에 얹혀 살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녹주는 이렇게 들려 주고 있다. – 어느 날 신문을 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김유정이었다. 그는 소낙비라는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로 중앙일보에 당선되었다. 그제서야 그가 문학정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쩌면 서양문학에서 나오는 기사도와 로맨스를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늑막염과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와 신경 신경쓰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동정심이었다고 한다. 이후 김유정은 자신의 소설에서 박녹주를 모티브로 한 것 같은 글이 자주 보이게 된다. 생의 반려라는 소설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 기생으로 한고비를 넘긴 시들은 몸이었다. 게다가 외양도 남달라 두드러진 곳도 없었다. 이십전후의 팔팔한 남성으로는 도저히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 그런 인물이었다. 이 내용은 복수심의 산물 같기도 한다. 그 이유는 녹주와 유정의 나이 차는 고작 2살이었다. 그런데 기생의 나이를 퇴기로 표현해 버렸다.
김유정은 생에 마지막으로 사용하던 방벽에 “ 녹주 너를 연모한다 는 혈서가 벽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친구였던 안회남은 녹주를 찾아 가 – 당신이 녹주냐냐 내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사자라고 저주했다고 한다. 김유정은 자신의 소설 곳곳에 녹주를 출현시켜 망가트린다. 단 한번도 유정과 사귄 적이 없는 녹주를 정인이나 뮤즈로 여기는 글도 보이고 김유정의 첫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녹주가 유정을 받아 주었다면 더욱 더 풍성한 문학적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인계의 무분별한 비난을 알고 있던 녹주는 말년에 자신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 김유정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하여 내가 평생 슬하에 자식이 없이 살았나 보오 , 손이라도 한 번 잡게 해 줄 것을….”
그리고 유정의 절친 안회남은 김유정의 별난 녹주에 대한 집착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한 글을 남긴다. – 유정은 애정에 굶주리었다. 기생을 그가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는 그 속에서 여러가지를 보았으리라 즉 어머니로써 동무로써 그리고 연인으로써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 같지 않은 기생이니 유정을 위하야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악담도 늘어 놓았다. 또한 1939년 김유정이 타계 후 출판된 겸허 김유정 전 에서는 박녹주를 김유정의 연인으로 적어 놓고 있다. 그곳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가 맨 처음 연애한 이는 유명한 기생이었다. 녹주는 곡할 노릇이었다.
박봉자는
시인. 박용철의 동생이다.
잡지「여성」(1936년 5월)에 ‘그 분들의 결혼플랜,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공동제목으로 김유정과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유정으로부터 30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은 일절 없었다.
차후 김유정과도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여 김유정을 또 한 번 좌절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