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1980년대는 나의 20대이다. 80년대는 또한 광주의 피로 집권한 군부의 독재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몰락해가던 민주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상자료원에 올라와 있는 1980년대의 대표작을 보니, 내가 본 영화가 거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개봉 영화는 거의 종로와 퇴계로를 중심으로 한 서울 중심에서만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소주 한 병 사먹기에도 불안한 경제적 사정이 영화 관람을 더욱 어렵게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권택의 <만다라>는 나에게 특별한 영화였다. 거의 유일하게 대학 시절 개봉관을 찾아가서 본 영화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서클 여자동기와 학교에서 만나 등교하는 학생들과 반대방향으로 이동하며 느꼈던 짜릿한 흥분을 제공한 영화이기도 하였다. 수업을 빼먹고 시도했던 특별한 데이트는 영화의 강렬한 내용을 능가하는 즐거운 젊음의 작은 이탈로 기억된다.
당시 <만다라>의 내용은 일종의 허무에 시달리고 있던 나의 정서에는 맞았지만 그것을 이해하기엔 많은 점이 부족하였다. 다만 승려 법운의 번뇌를 상징하는 창녀촌 장면만 기억될 뿐이었다. 연인 관계가 아닌 친구 사이에는 조금은 어색한 장면이기도 하였다. 1981년 이 영화가 상영되고 38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게 되었다. 과거의 필림을 기술적 조작을 통해서 복원한 VOD였다. 올해부터 시간적 여유와 가능한 자료가 확보된다면, 1980년대의 영화나 연극, 문학, 도서를 다시금 보고 읽을 계획이다. 과거 무기력하게 책도, 영화도 보지 못하고 술과 허무로 보낸 그 시절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자 정리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불행과 좌절 속에서 보냈던 그 시절, 1988년 겨울 술에 취한 채 버스와 충돌로 끝난 80년대의 내 공허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회고적 취미는 결코 아니다. 1980년대의 힘을 분석하고 그것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찾기 위한 일종의 탐색이기도 하다.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두 명의 승려는 지산(전무송)과 법운(안성기)이다. 그들은 번뇌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도전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부와 권력에 굴종하는 불교 종단의 태도에 분노하기도 하며, 안거와 같은 불교 수행 때 전달되는 큰스님들의 법문이 다만 앞선 선승들의 가르침을 반복한다는 것에 실망하며, 육체적 고통도 참다운 지혜에 도달할 수 없고 대중들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교적 수행의 한계에 좌절한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승려 법운은 우연히 만난 파계승 지산의 술을 마시고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속에서도 무언가 진실을 찾는 모습에 이끌려 그와 동행하게 된다. 지산의 옛 연인이 살고 있는 창녀촌의 방문은 그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번뇌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해준다. 지산이 수행승이던 시절 만난 여인은 가정적 불행 때문에 창녀가 되었고 지산은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한다. 그것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으며 고통받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종교적인 희생일 수도 있다. 영화는 우연히 다른 승려에게서 들은 지산의 병자들에 대한 헌신적인 모습을 통해서 종교의 참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불교적 깨달음은 자신의 개별적 번뇌에서 벗어난다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응답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다.
법운의 동기승은 소지공양에도 불구하고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한 후, 참다운 나는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타자에 대한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참다운 나의 모습을 회복하는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방황하는 지산은 견성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그것 이후에 더 큰 허무가 올 때 그것은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고통과 허무는 어쩌면 극복의 대상이나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다른 행위를 통해서만 잊혀 져야 하는 자아의 착각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두 승려의 방랑하는 풍경이다. 주로 겨울을 배경으로 멀리서 잡은 카메라의 앵글은 끝을 알 수 없는 방랑과 구도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현재의 잘 정돈된 길이 아닌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판단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은 오래된 시대의 모습과 잘 어울려 2019년 오늘의 나에게 깊은 추억과 감동을 전달해주었다. 그 때, 왜 그렇게 그들이 걷던 길을 걷고 싶었던가? 아무도 없는 길을 단지 허무와 동반하면서 내가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록 종교적 수행은 아니었지만 나도 1983년 겨울 약 25일간 전국을 기차를 타면서 떠돈 적이 있었다. 어쩌면 <만다라>의 수행길이 나에게 준 영향이었는지 모른다.
<만다라>의 지산은 결국 술을 먹고 돌아오는 중에 동사하고, 법운은 그의 시신을 태운다. 그리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용서한 후 다시 길을 걷는다. 영화 마지막 홀로 걷는 법운의 모습은 깨달음의 실체가 없음에도 도전해야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용기를 상징한다고 느껴졌다. 과거 나의 방랑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현실적 욕망에 의해 방해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가장 강렬한 방해물로 등장하는 육체적 욕망도 단순히 피하고 버릴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의 방식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무책임한 화두의 가르침도 진실이 될 수 없다. 결국 영화는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질문에 대한 해결은 누구에게도 의존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의 길은 나만의 방식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없는 텅빈 길을 걷고 있는 한 사내의 걸음이 보여주고 있다.
과거 약간의 긴장감과 사유의 부족 때문에 놓쳤던 많은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종교의 근본적 문제는 오늘날 오히려 더 커져 버린 규모만큼 악화되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 고민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게 수용되고 종교는 위안이라는 성격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에 대한 성찰을 다시 요구하는 것이었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책 이상으로 생각할 문제를 던진다. 그것이 좋은 배우의 진실을 담은 방식으로 전달된다면 생각의 깊이는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젊고 밝은 눈의 안성기와 달관한듯하면서도 번뇌에 고민하는 전무송의 연기는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참 후에 그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특히 ‘전무송’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오랫동안 기억날 것이다.
영화의 주제는 구도의 길을 다양한 방식으로 찾는 인물들의 고민과 깨달음이다. 비록 종교와 사회라는 또 다른 주제에는 침묵하고 있지만(당시는 1981년이었다)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를 잘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 속 에피소드(비록 중요한 에피소드이긴 하지만)에 불과한 승려와 여인과의 만남, 창녀촌 장면이 영화 선전 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화의 성격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준다. 비록 이러한 장면이 상업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끌어낼 수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첫댓글 깨달음, 각성! 그 길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