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세상의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
인강스님: ‘낮에는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절을 했는데, 절을 하면 눈앞이 어지럽더라고. 그런데도 약을 캐야했지. 노모를 모시고 있었거든.’
인지스님: ‘그 당시는 정말 살기 어려웠어요. 은사스님께서는 어렵게 수행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셔야 했어요. 모친이 86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살겠다고 하시는 모친을 말리지 못한 은사스님은 어쩔 수 없이 모친을 모시고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해현노스님: 8월 20일에 고향으로 왔지. 밭에 세 칸짜리 집을 정돈하여 어머니를 모셔놓고 집으로 가서 솥을 하나 가져왔어.
유풍지거사: 솥 하나를 가져왔다고요.
해현노스님: 우리가 남들이 먹는 것을 먹을 수 있겠어? 채식을 해야지 파계(破戒) 할 수는 없잖아. 고향이라도 집이 어디 있어? 거기가 생산대야.
유풍지거사: 노모께서도 채식을 하셨나요?
해현노스님: 노모는 어려서부터 채식을 하셨지.
유풍지거사: 어려서부터 채식을 하셨군요.
해현노스님: 돌아가시기 전에 음식을 만드셨는데 만두를 만드셨어.
유풍지거사: 직접 만두를 만드셨군요.
저녁에 노모께서는 당신이 직접 만드신 만두를 드시고 자녀들과 손자녀들을 모두 오라고 시키셨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나 갈련다.’라고 말씀하시고 나서는 모친께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정말 돌아가셨습니다. 86세의 나이로 걸림이 없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당시는 모든 조건이 열악한 때라서 해현스님은 모친을 위해서 3일간 염불하고 얇은 널빤지로 만든 관으로 간단하게 모친을 매장하였습니다. 이를 줄곧 마음에 걸려하던 해현스님은 모친의 무한한 은덕에 보답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다가 8년이 지난 후 새로 이장해서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묘소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관 뚜껑에 박았던 대못 몇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습니다.
이는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제불께서 닦으신 정업의 정인이니라(三世諸佛,正業正因). 연지대사(蓮池大師)께서는 ‘부모가 세상의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父母離塵垢,子道方成就).’라고 하셨습니다. 달마스님께서 신발을 걸머메고 신통력을 보이신 것처럼 해현스님의 모친이 보살의 응화신이신지 아닌지는 어찌 우리 범부가 감히 함부로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해현스님의 모친에 대한 지고지순한 효심은 우리로 하여금 감동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어느 한동안, 해현스님은 한쪽에서 자신을 가리키며 쑤군거리는 몇몇 사형제들을 보았는데 나중에 은사스님에게 불려가서 호된 꾸중을 듣고서야 자신이 누군가에게 모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현노스님: 나를 무고하는 온갖 소리를 했다고 하는데 아주 듣기 좋지 않은 말을 했어.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스님은 무고를 당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셨는데 나중에 행각을 다녀온 사형이 돌아와서 시시비비를 가려주었다고 합니다. 사형은 그 며칠 사제인 해현스님과 산에서 옥수수를 걷어 들이고 잠도 함께 자면서 줄곧 같이 일을 하면서 함께 있었다며 오해를 풀어주었습니다.
몇 년 전, 해현노스님은 전기 값을 받으러 온 수금원에게 ‘지난달에 쓴 거와 비교하면 이번 달 요금이 많이 나왔네요?’라고 하였습니다.
인함스님: 수금원이 두말 않고 은사스님의 따귀를 때렸는데 스님은 전기 값을 내어주셨어요. 그 자리에 있던 신도들이 이를 보고서 수금원한테 따지려고 하자 저의 스님은 ‘그만둬, 그만둬, 나를 때린 거는 대신 간지러운 데를 긁어준 셈으로 치고,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세수한 셈 치면 되는 거야. 출가자는 아량이 있어야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 참는 사람이 속이 편해.’라고 하셨어요.
원명사 주지 인영스님: ‘남들이 못하는 것을 노스님께서는 해내셨고, 남들이 참지 못하는 것은 노스님은 참아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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