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 부는 작은 바람, 생태관광 소풍
이번에는 평화바람을 만나고 왔습니다.
2016년 4월 23일 2시에 매향리 역사관에서 소풍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은 평소에 매향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분들과 매향리를 알고 싶은 분들이 함께하셨습니다.
경기문화재단 경기창작센터, 연안환경보존네트워크, (사)세상아이, 인천일보 기자님, 서산버드랜드 생태안내자 선생님 등...이 함께 한 매향리 소풍이었습니다.
더불어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화성시 사회적공동체담당관실의 김진관 과장님께서 내내 동행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생태관광 소풍, 평화바람편
「1만 km의 위대한 비행, 도요와 매향리」
매향리 역사관 - 쿠니사격장(존치건물) - 도요새 탐조활동 - 고온항 노을 즐기기 - 지역음식 맛보기
☞「생태관광소풍」 프로그램은 화성시 관광진흥과와 함께합니다.
먼저 매향리 역사관을 만나볼까요?
매향리 역사관에는 엄청난 양의 크고 작은 포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부터 2005년까지 미공군이 매향리 앞바다에 폭격한 포탄들로 사격장 폐쇄 이후 군·경·주민들이 수거하여 마을 입구인 이 곳에 전시한 것으로 54년간의 아픔과 설움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매향리 역사관 바로 옆에는 작은 식물원이 있습니다.
이 공간 역시 주민들의 힘으로 조성한 공간입니다. 정원의 울타리가 모두 포탄으로 만들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매향리에서 나고 자란 이종례 선생님(주민)으로 부터 매향리 50년, 암흑의 역사를 들어보았습니다.
어릴 적 소녀는 "미국은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우방국이다" 라고 생각하며 미군의 주둔과 훈련이 매향리와 한국을 지켜준다는 믿음으로 어린 시절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 소녀에게는 매일 밤낮없는 폭격은 숙명과도 같았습니다. 어릴 때 탄피를 주어 모아서 팔던 이야기며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바다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즉사한 사건들을 들으며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매향리에서 나고 자란 이종례선생님
매향리 역사관 옆에는 같은 자리에 2개의 매향교회가 있습니다.
최근에 지어진 매향교회는 십자가가 높이 올라가 있지만 예전교회는 십자가를 올린 철탑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격훈련하는데 교회의 철탑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고... 주둔 미군들은 대부분 크리스찬이어서 교회를 매우 중요시 하였고 그 이유로 사격장 펜스 역시 이 교회 밖으로 친 것이라고 합니다.
노란꽃 뒤로 보이는 평화의 땅도 예전에는 사격훈련장이었다.
매향리 50년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매향교회
철탑이 없다.
역사관 곳곳을 둘러보며 주민으로 부터 듣는 매향리 풀스토리
이 공간은 2007년 임옥상 작가가 제작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매향리의 시간
임옥상, 2007
푸줏간의 고기처럼 폭탄의 잔해를 진열한다.
갈고리에 꿰어 피를 흘리며 걸려있는 살덩이처럼 폭탄을 걸어 진열한다.
푸줏간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푸줏간에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매향리의 푸줏간은 탈출구가 없다. 미로다.
자반사 유리로 탈출구는 혼돈되고 은폐된다.
흥분해서 길길이 날뛴다고 길이 보일 수는 없다.
흥분할수록 폭탄의 숲에 갇히고 만다. 미아가 된다. 성찰이 필요하다.
사진의 참모습을 찾아야 길이 보인다.
찢어지고, 녹슬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여기에 따거비가 붙었던 폭탄의 잔해들,
시체들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매향리의 현재의 시간은 곧 오늘의 우리 모두의 시간인 것이다.
외부를 둘러본 후 역사관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이 공간 역시 평상시에는 개방되지 않는 곳입니다.
매향리 역사의 산증인이신 전만규 선생님(매향리평화생태공원추진협의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군으로 부터 매향리를 반환받는 투쟁에 젊은날을 모두 보내신 분입니다.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건물내부에는 8~90년대, 매향리를 기억하고 있을 각종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대학 중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매향리에 연대하였다고 하네요. 그 정의로우신 분들 한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이 곳 매향리에서 다시요!!
이종례 선생님의 손주들
이 아이들에게는 전쟁같은 과거를 되물림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매향리를 지켰을 주민들에게 위로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쿠니사격장 중 미군 존치건물의 문도 열렸습니다
미군이 주둔했던 존치건물. 당시 있던 건물 중 일부를 남겨 두었습니다.
(평상시에는 개방되지 않습니다)
내부공개를 몇 컷만 올립니다
미군들이 일과 후에 사용했던 농구장(위)과 술집(아래)
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에는 식당, 세면장, 통신실 등이 있었습니다 (위)
사격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관측하는 관측전망대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농섬이 보입니다.
농섬 왼쪽편에 보이는 작은 섬은 농섬보다 위에 있다고 하여 윗섬(웃섬)입니다.
윗섬 앞에는 아름다운 촛대바위도 있었다지요. 어느 날 이 역시도 폭격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쿠니사격장과 농섬
쿠니사격장은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부터 2005년까지 54년간 미공군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되오던 곳이다. 로켓포, 기관포, 기총, 레이저포 사격이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중 250일간 실시되었고 1일 평균 11.5시간 동안 15~30분 간격으로 행해졌으며 1일 600회가 넘는 사격이 실시되었다.
쿠니사격장이라는 이름은 이 곳의 지명인 고온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미군들이 고온리를 발음하기 어려워 쿠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농섬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숲이 짙게 우거져서 농섬이라 불리웠다. 1951년 처음에 포탄이 떨어진 곳은 농섬보다 마을과 가까운 구비섬이다. 구비섬은 고온항에서 걸어가면 5분이면 닿을 거리이다. 구비섬이 폭격으로 모두 사라지자 미군은 농섬을 조준목표로 하여 사격훈련을 하였다. 수십년 폭격으로 닳고 닳아 원래 크기의 1/3 정도로 작아져 맨살을 드러냈다.
주민에 따르면 3천평 규모에서 1천평 규모로 작아졌다고 하며 예전에는 숲이 우거져서 조업 중에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물새가 낳은 알이 하도많아 농섬에서 새알을 삶아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2014년에만 해도 농섬에 가면 곳곳에 750파운드 짜리 거대한 포탄이 반쯤 쳐박힌 채로 남아 있었으나 2015년 포탄 제거작업과 농섬의 토양 교체작업이 진행되었다.
향후 계획
시는 해안가 12만 2962㎡에 생태습지와 순례길 등을 조성하고 기념공원(4만7947㎡)에는 공연장과 미군 사격장에서 사용했던 전투기와 포탄 등을 전시하고 매화언덕(9만2757㎡)에 매향리 상징물과 커뮤니티 센터, 예술공방이 들어설 예정이다.
열린 숲(10만2687㎡)에는 초원과 캠프장, 산책로를 조성하고 농섬의 숲을 복원할 예정이다.
평화공원 인근지역 23만8000㎡에는 야구장 8면, 실내연습장, 관중석, 놀이시설, 조각공원 등을 갖춘 아시다 최대 유소년 전용 아구장이 들어선다. 향후계획은 2016.02.26 뉴시스/김기원기자 인용
존치건물 내부, 평화조각상(아래)
다음에 들른 곳은 고온항입니다.
고온항은 만조 때에도 좋고, 간조 때에는 갯벌 따라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도요새, 칠게, 방게 등 갯벌 생물들을 만나며 산책을 즐기기에도 손색이 없는 평화로운 곳입니다.
예전에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던 당제가 이 곳에서...
이 팽나무도 마을의 보호수로 지정되고 사라진 당제도 복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코스인 도요새 탐조시간입니다.
저 멀리 도요새들이 보이시나요?
경기창착센터 황순주선생님께서 스마트폰으로 찰영한 사진(위)
도요와 매향리 ⓒ화성시생태관광협동조합
도요와 매향리 ⓒ화성시생태관광협동조합
어깨에 붉은깃이 보이는 새가 붉은어깨도요입니다.
도요는 4~5월, 9~10월에 매향리갯벌에 찾아오는 나그네새입니다.
그 중 붉은어깨도요는 단일종으로 2만마리까지 관찰되고 있습니다. 도요를 위해서도 매향리 주민들을 위해서도 아름답게 지켜지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뜨끈한 우럭매운탕 먹으며 하루 여행을 마무리 했습니다.
저녁식사는 특별히 경기창작센터에서 쏘셨습니다~^^
함께하신 모든 분들 수고하셨습니다.
여 행 문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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