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문화유적지 ③
성공회 강화성당(聖公會 江華聖堂)
1900년에 세워진 최초의 한옥 형태 교회(성당)
성공회 강화성당은 1896년(고종 33년)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15일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찰스 존 코프(Bishop Charles John Corfe, / 한국 이름 ; 고요한)가 건립하였습니다. 대한성공회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한옥 형식의 교회 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공회 강화성당 본당>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 4리 422번지에 있는 이 성당은 강화읍에 있기 때문에 강화성당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 성당으로 2001년 1월 4일에 사적 4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보호면적은 6,452㎡이며, 대한성공회 유지재단 등이 소유 및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1890년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후 1893년 영국인 왕란도 신부가 강화 갑곶나루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갑곶진(갑곶나루) 근처 초가집을 구입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온 영국교관의 집이 강화읍에 있었는데 해군사관학교가 폐쇄되면서 교관은 영국으로 가게 되었고 그 집을 성공회에서 구입하게 되어 교회가 강화읍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집 근처 지금의 땅을 구입하여 1900년 현재의 성공회 강화성당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정면에서 바라보면 110년의 세월을 지켜내고 있는 건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교회 내부는 서양식 제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도 이 건물에서 매주 예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당을 찾았을 때는 마침 일요일이라 예배가 한창이었습니다.
성당의 건축 규모는 장방형(長方形) 중층 기와지붕으로 1층은 정면 4칸, 측면 15칸이며 2층은 정면 2칸, 측면 13칸의 한식 중층건물입니다. 지붕 용마루 끝에 치마기와 대신 십자가를 올려놓은 것이 기독교 건물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표시입니다.
건물의 겉모습은 전통한옥을 본떠 지어졌는데, 정면에 쓰여진 5개의 주련은 불교 사찰의 것과 흡사하게 보입니다. 한자로 쓰여 있지만 내용은 성경문구를 따온 것입니다. 주련에는 다음과 같이 기독교적인 성구가 적혀져 있어서 전통가옥 혹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주련과는 내용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련의 내용>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
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시다.
宣仁宣義聿照拯濟大權衡(선인선의율조증제대권형)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 만물의 참된 근본이 되신다.
神化周流츉庶物同胞之樂(신화주류유서물동포지락)
하나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은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다.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복음선파계중민생영지방)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강화성당은 서양종교의 건물이 한옥으로 지어진 것은 특이한 예이지만, 한옥 고유의 전통을 살린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당의 팔작지붕을 올려다보면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지붕 용마루의 양끝에 위치하는 취두(鷲頭)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세운 것이나, 궁궐 건축에서 보이는 용두(龍頭)를 올린 것 그리고 건물 정면의 우주(隅柱)와 탱주, 柱聯(주련)으로 장식하고 있는 것 등은 한옥 건물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당 출입 후문>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으로, 현판에는 성공회 강화성당(聖公會 江華聖堂)이라는 글이 한문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에 초대 사제의 묘비가 있습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팔작지붕으로,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여 감사성찬례 때 사용하는 종이 걸려있습니다.
성당의 현판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글이 한문으로 써져있고 팔작지붕과 돌로 되어 있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내부와 외부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한옥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초기 성공회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는 성당건물이기도 합니다.
<성당의 뒤쪽에 위치한 사제관. 원래 주교관으로 1903년 반가(班家)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18칸 한옥이었다.>
성당의 공간 구성은 서양의 바실리카식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구한말 성당 건축 당시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당은 서쪽에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습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입니다.
성당 중문에는 1914년 처음에는 영국에서 들여온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음색이 아름답고 소리가 4방 30리까지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1945년 일제에 의하여 징발되어 서양식 종을 대신하여 1989년 신자들이 모금해 다시 만들어 매단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교회나 성당의 종은 높은 종탑에 종이 달려있으며 안쪽에서 종을 치게 되어있는데, 이 종은 밖에서 종을 치는 사찰에서나 있을법한 그야말로 전통 범종과 같이 별다를 것 없이 보이지만 당좌(撞座)에 양각된 십자가가 있어 범종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고 합니다. 서쪽으로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성당 앞 중문 옆에는 초대 주교인 고요한 기념비, 주교 단공(端公), 아덕(雅德) 기념비, 조선성공회 제3세 주교 조마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백주년 기념비와 초대 주교 기념비 등>
<1896년 강화도 온수리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1906년 전염병으로 타계한 ‘알마 슈터’ 수녀 기념비.>
한옥식 건물로 지어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백두산의 원시림 적송을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해 왔으며, 도목수는 경복궁을 신축한 도편수가 맡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고>
*성공회 강화성당 주변에는 넓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용흥궁 공원’이 있어 이곳에 주차가 가능합니다.
*주변에 ‘용흥궁’과 ‘강화문학관’ ‘고려궁지’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습니다.
*용흥궁과 성공회 강화성당은 별도의 입장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