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4편) † 나의 저녁기도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80년 가까이 살아온 나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이 시(詩)가 나의 저녁기도가 되어 버렸다! 지난날 수많은 삶의 고비를 넘으면서 우연히 보게 하신 이 시편의 8절로 인하여, 그 두렵고 무서운 공포로 둘러싸여 떨고 있었던 나에게, 이 시는 얼마나 큰 위로와 평화를 주었는지 모른다!
혹 당신도 지금 고난 중에 있다면, 당신도 이 시편을 기도로 불을 붙여보라!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십니다.”(8절). 아멘>
<개요>
성경학자들은 시편 4편이 3편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시편은 표현과 구조에 있어서 모두 위급한 상황 속에서 지은 시(詩)인 것 같다. 다윗은 시편 4편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다윗)를 택하셨다고 선언한다. 다윗은 대적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운 자신을 대적하는 죄를 중단하라고 촉구한다. 다윗은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확신하며 기뻐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詩)는 3편과 함께 다윗이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면서 지은 애가(탄식) 시라고 말한다. 이 시는 하루 종일 어렵고 두려운 고통 가운데에(2-6절) 있다가, 늦은 저녁 잠자기 전 하나님께 드리는 저녁기도요 묵상이다(8).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인생의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굳건한 믿음과, 마침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쁨과 평화와 안전으로 감싸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깨달을 수 있다.
원수들의 공격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부르짖은 후, 다윗은 그의 원수들에게 자기를 해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사랑으로 그를 지키시며 보호하심으로 그를 구분해 놓으셨으며, 저녁 잠들기 전에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확인함으로써, 이제 다윗은 원수들의 공격에 직면해서도 평화와 안도를 느끼게 된다.
<본문 해석>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시편 4:1절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 여기서 “내 의(義)의 하나님”은 “대적으로부터 핍박받고 있는 내 권리를 찾아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또한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NIV에서는 명령형)는 완료시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이미 자유롭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곤란에 처했을 때 이미 구원을 베푸셨다! 이 하나님께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는 문자적으로 “넓게 하셨고”인데, 이 내용은 이미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뜻이다.
다윗은 과거에도 자기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그럽게(히르하베타: 넓게 하다)대해 주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다윗을 넓은 길로 인도하셨고, 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며,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이 하나님께 다윗은 죽음 같은 고난에 처할 때마다 자기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부르짖을 수 있었다.
<원수들에 대한 경고>
2절은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반역과 궤휼로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셀라)”라고 말한다.
의로우신 하나님(1절)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의 원수들은 그저 탐욕에 젖은 부족한 인간일 뿐이다. 여기서 “인생들”은 문자적으로 “인간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대조되는 나약한 존재를 말한다.
다윗은 그들에게 “어느 때까지 반역과 궤휼로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할 것이냐”고 묻고 있다. 여기서 궤휼(詭譎)은 “거짓 신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만일 여기서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마음에 두고 말했다면, 압살롬의 음모는 다분히 다윗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이다(삼하15:3).
다윗은 자기를 배반하고 압살롬과 함께 자기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인생들"이라고 부른다. 다윗의 그들에게 언제까지 그의 영광을 모욕 거리로 만들고 헛된 일을 사랑하려고 하느냐? 고 묻는다.
다윗은 그들이 자기를 대적하는 일을 헛된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정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이 아닌 거짓된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대적하는 헛된 노력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셀라”라는 말은 감정이 격앙된 부분에서 음이나 낭독자의 음성을 높이는 것. 또는 다른 방법으로 그 부분을 강조하도록 지시하는 음악 기호일 것이다. 이 용어는 시편에서 71회 사용되었으며 노래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지휘자가 지시한 표시로 추정된다.
3절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다윗의 마음, 곧 두렵고 괴로움(2절)과 충고(4절)의 근거가 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위해 경건한 자(다윗)를 선택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경건한 자(헤세드)란 자애로운 자, 충성스러운 자,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을 위해 경건한 자를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신실한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된다.
“택한다”는 말(히플라)은 “존귀한 자로 구별하여 세운다.”라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건한 자로 인정하여 세워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대적들은 필히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4-5절은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라고 말한다.
만일 다윗이 반역자인 그의 아들 압살롬을 생각하고 이 말을 했다면, 여기서 다윗은 압살롬과 그의 일당들이 자기들의 동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드린 허탄한 제사(삼상15:12)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대적들에게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더 이상 무죄한 자를 치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다윗의 대적들은 다윗이 지은 범죄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윗을 정죄하며 다윗에 대해 분개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심판을 하실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에게 다윗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권한다.
다윗은 그의 대적들에게 자기를 정죄하려고 하지 말고,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침묵하라고 권한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그의 대적들에게 남의 잘못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될 때,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온전한 제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의 대적들에게 자신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신뢰하라고 말한다. 다윗이 보기에 그의 대적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다윗을 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자가 되었고, 그들이 드리는 제사도 가증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 안에서 잠들 때의 평화>
6절은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냐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곤경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자기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낙심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외적으로는 대적들에게 공격을 받고, 내적으로는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이 가진 회의와 의심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 곤경 속에서 사람의 구원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들어서 은혜의 빛을 자기들에게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고 있었다. 또한 다윗은 적의 공격을 극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의혹과 의심의 소리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요소였다.
다윗은 민6:25-26절의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풀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아론의 기도를 상기했을 것이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 마음속의 의혹과 나쁜 생각의 집착을 극복하고 있다.
7-8절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라고 말한다.
그 순간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속에 용서의 확신과 큰 기쁨을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주신 확신과 평안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농부가 추수할 때와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 크다고 고백하였다. 땀 흘려 가꾼 곡식을 거두는 추수의 기쁨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며, 좋은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사람들의 기쁨은 배가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확신과 평안과 기쁨은 이러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잠자리에 누워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대적들은 다윗을 비난함으로 긴장과 불안을 가져다주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로운 마음을 주시고 단잠을 주셨다!
다윗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셔서 자기를 지켜 주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적이 자기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는 다윗의 결심과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죽음보다 짙은 고난에 처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가 없으면서도, 다윗은 그의 하나님 안에서, 곧 잠을 잘 때에도(5절), 평화와 안전을 누리고 있다! 참된 평화와 기쁨은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예비하심에 따른 것이다(갈5:22; 롬14:17).
<적용>
시편 4편에서 시인이 맞고 있는 위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경험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본 시편은 그러한 위기를 맞은 우리에게 “기도”라고 하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비난하는 자나 핍박하는 자들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환경과 핍박하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하거나, 두렵거나, 어쩌면 병적으로 어떤 생각에 집착할 때면, 나의 저녁기도로 이 시를 묵상함으로써 큰 위로와 평화를 누려왔다! 특히 나는 인간관계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로 고통을 느낄 때, 특히 이 시편4:8절의 말씀을 기도로 읽는다! 당신도 이 시편을 기도로 불을 붙여보라!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십니다.”(8절). 이 구절은 “주님, 당신만이 저를 평안히 살게 하시니, 저는 평화로이 이 자리에 누워 잠이 듭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구하는 “오! 평안히 주님 안에서 잠이 듭니다!” 라고 수없이 되뇌며 회개와 감사와 청원의 기도를 드린다!
오! 주님이시여! 주님의 평화가 내 자신에게도 똑 같이 이루어지소서! 그분께서 바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이 말씀을 반복적으로 내 영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부싯돌처럼 내 마음속에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고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을 확신하는 사람은 모든 대적들이 자기를 칠 때에도 담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들에게 평화와 확신, 그리고 단잠을 주신다!
다윗의 고통과 번뇌가 다른 인간의 말과 행위의 결과라고 하는 사실을 통해, 마찬가지로 나의 이기적인 말과 행동이 부지중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과 두려움과 오해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를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곧 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다른 사람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둘러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솔한 회개와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치유와 빛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