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이라는 갈매기에게 나는 것이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상하리 만큼 '비행'을 좋아했고, 더 나은 비행을 위해 자신의 한계치까지,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까지 비행 연습을 한다. 그렇게 피 나는 노력 끝에 정말 한계를 뛰어 넘은 비행을 터득했고, 그 비행을 갈매기 무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나단의 예상과 달리 조나단은 무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던 중 조나단은 그처럼 비행을 즐기는 비행을 위해 노력하는 무리를 만나고, 그곳에서 원로 갈매기 치앙에게 많은 비행법을 배우고 결국, 다시 돌아와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비행을 보여주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몇몇 생겼다. 그들에게 비행법을 전수한 후 조나단은 비행을 통해 더 나은 차원으로 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빛과 함께 사라진다.
어떻게 보면 참 단편적인 이야기이고, 별 거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 읽었을 때에는 사실 무슨 의도인지도 모르고 그냥 책에 있는 갈매기 그림들이 뭔가 있어 보인다 정도만 생각했다. 중학교 와서 보니 또 다르게 보였다. 중학교 와서는 이제 무언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시기라 그런지 이 책의 가장 유명한 대사인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를 성적, 돈과 같이 성공의 척도로서 바라보았다.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가서 기회가 많은 것이다. 돈을 많이 벌면 할 수 있는 게 많아 지는 것이다. 이렇게 참 어리석고, 속물적인 생각을 가졌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다시 한 번 볼까 했다만 시험기간 인지라 사실 긴 글이 아님에도 부담이 있어서 줄거리로만 다시 보았다. 참으로 신기하다. 같은 책이고, 같은 단어들인데도 어떻게 볼 때 마다 다른 빛깔을 내게 비치는 것 일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문학 시간에 배우는 문학은 인간의 삶을 주제로서 쓰는 글이라고 배운다. 그것이 참으로 옳은 말이지 않나 싶다. 마치 이 세상의 진리를 함축한 이 말을 이번에는 한 번 삶에 대입해서 바라보니 지금의 내 수준에서 '답'이라 여겨질 만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른들께서는 많은 경험을 하라고 말하신다. 성공도 하고 실패도 겪으며 많은 것을 느끼라고 한다. 그 과정이 진정한 삶을 향한 여정이 아닌가 싶다. 그 여정의 끝에 다가가는 것이 점점 '높이 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인 것 같다. 마치 나같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점점 더 많은 경험이 쌓아질수록 나는 한 문장을 다르게 본다. 세상도 다르게 본다. 다만 나는 이렇게 내가 경험을 쌓아가며 다르게 보는 것이 '멀리 본다'를 의미한다고는 떳떳히 말하지 못하겠다. 분명 어렸을 적보다 나는 성숙해졌고, 더욱 깊이 볼 수 있겠지만,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솔직한 시각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한편에서 거짓되고 속물적인 시각이 점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아직 멀리 보는 경지에는 한참 못 미치지 않나 싶다.
저 하늘 위로 높이 날아갈 수 있도록, 단지 높이 날기 위해 편법을 쓰지 않고 성실히 날갯짓을 하는 삶을 나는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