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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한시 기행
박순녀
나는 성격이 자잘부레한 것을 싫어하는 탓이라 연속극은 잘 안 본다. 그 대신 여행프로그램은 즐겨 보는 편이다. 거기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저녁 시간에 tv 를 켰더니, 중국 한시 기행이라는 프로가 방영중이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호감이 가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나의 경우는 복지관에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터였기에 관심이 가는 편이었다.
한시 기행이란 중국어 교수님이 여행 안내자가 되어서 우리를 인솔하면서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역사, 풍물, 생활 실상들을 직접 한시(漢詩)로 써서 들려주는 것이라니, 호기심이 갔다. tv프로에서 아는 글자가 나오면 저절로 힘이 나서 짧은 밑천으로 라도 따라 읊기도 하고 중국어 교재를 찾아보기도 하니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곳에 가서 교수님이 읊어주실 한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시 기행이라는 말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복지관 교수님이 한시 기행을 말씀하시며 권유를 했다. 현재 중국어 공부도 하는 중이니까, 이왕이면 현지 경험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하기가 어려웠다. 여비는 그렇다 치더라도 주부로서 가정을 비우고 혼자만 먼 곳을 떠난다는 것을 결정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을 혼자만 마음에 담고 있다가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일은 쉽게 풀려 한시 기행인 중국 여행이 결정되었다.
중국은 상상 이상으로 넓은 나라여서 패키지 여행이 좀 편하겠지만 교수님은 수학여행이라고 생각해서 다니기에 힘이 덜 드는 서남쪽 변방 도시를 우리 힘으로 돌아보자고 하셨다. 그쪽은 SNS 친구가 초대를 하며 도와주겠다는 연락이 와서 새로운 힘이 생겼다.
패키지 여행은 아니더라도 SNS 친구가 있고 중국어 교수가 안내를 한다니, 출국은 순조로웠다. 목적지는 중국의 변방 도시 베이하이(北海)라는 곳으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사람의 심리는 이름이 생소하면, 호기심도 더하고 기대도 부풀게 된다.
중국을 도착한 후 입국 수속을 하고 배낭에 짐을 챙겼다. 거기가 목적지가 아니었다.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두 시간 넘어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제남공항에 도착하였다.
모든 수속은 교수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호텔체크인만 하는데도 호텔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거기가 중국이라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떠날 때 교수님이 말씀하셨 듯이 우리는 한국에서 배운 중국어를 현지에서 실습하기 위한 수학여행이라는 생각으로 기회만 오면 중국인과 이야기를 해볼려고 노력했다. 짧고 서툴지만 의사소통을 하다가 보니, 서로 이해가 되었다. 서툰 솜씨로 지하철 발권도 하고 시장에가서 물건 흥정도 해보았다. 한 가지 새로운 일을 해낼때마다 우리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사람들은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지하철은 서울과 별차이가 없는데 젊은 애기엄마들이 가슴을 들어내놓고 수유하는 모습은 조금 불편했다. 옛날 우리 엄마들도 저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웬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 하루를 지내고 베이하이로 출발하였다. 또 두 시간 넘게 걸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 부산보다 훨씬 큰 도시였다. 관광객이 참 많았다. 대부분 동남아 쪽 사람들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교수님은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한시(漢詩)를 쓰거나 책에서 찾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좀 특별한 기행이었다.
교수님의 중국 친구 ‘뮤뮤’라는 분이 마중을 나왔다. 젊은 분이라 대학생인가 했는데, 북해법원에 근무한다고 했다. 우리는 많이 서툴지만 중국말을 하니까 참 기뻐하며 상상 이상으로 반겨주었다. 베이하이(北海)는 해변도시라 바다 구경을 가게 되었다. 해변이 얼마나 긴지, 수평선이 가물가물하게 멀리 공중에 떠있었다.
해변을 한참 걸어가다가 보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둥근 돔 모양의 커다란 구조물이 다가왔다. 중국의 최남단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 곳은 베트남 근접 도시라 말은 중국 말인데 톤은 베트남 언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교수님의 한시는 어려워서 대충 듣고 그러려니, 했지만 중국말이 베트남 언어의 톤을 갖는다거나 식사에 빵과 콩죽 같은 두유와 달걀이 많이 나오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음날은 뮤뮤씨의 안내로 북해에서 배를 타고 세 시간 정도 소요되는 위주도라는 섬으로 갔다. <위주도 국립 지질공원>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위주도는 화산 폭발로 생긴 섬이라는데 땅이 온통 붉은 흙으로 덮여있었다. 거기에 성당이 있었는데 인가도 없었을 외진 섬에 이백 여년 전에 천주교가 들어왔다고 하니 종교의 힘을 새삼스레 느끼게 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는 서울에 있는 성당처럼 스테인드 글라스 무늬가 선명하여 이백년 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성당 앞에는 최신 웨딩 촬영이 한창이었다.
이백 년 전 종교 생활과 현재의 결혼문화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현장이었다.
한시 기행 현장학습이라고 했지만 한시(漢詩)보다는 이국의 색다른 문물을 참 많이 보고 듣고 배운 기행이었다. -끝-
<수필>
통일을 꿈꾼다
박 순녀
같이 글공부하는 친구가 통일에 관한 책을 주셨다. 『문학과 통일』이라는 기관지였다. 나로서는 특별한 관심도 없이 지내왔던 '통일' 이라는 낱말을 대하고 보니, 생경한 느낌이 들며 이 ‘낱말’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못으로 박혀있는 단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자신의 무관심이 부끄러웠다. 그 책에는 존경하는 우리 선생님 글도 있고 잘 아는 문우들이 쓴 통일을 염원하는 시도 게재되어 있었다.
나도 통일에 관한 내 생각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내가 쓴 글이 분단된 조국 통일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고, 또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하더라도 관심은 가져야 될 것 같았다. 국토가 동강나고 민족이 분열되어도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그래서 나도 통일을 생각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나는 친정이 6.25때 북쪽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남으로 내려온 월남 가족이다. 그래서 어린시절 나의 트라우마는 '이북사람' 이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온 압박감이었다. ‘월남 가족, 이북 사람, 이산가족’이라는 말이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이라도 오시면 숨어버렸고, 다음날은 학교가 가기 싫어 부모 몰래 마을 냇가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부모님들 모임이라도 있는 날이면 어머니의 유창한 함경도 사투리 때문에 나의 정체가 밝혀져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다.
짖궂은 친구들은 어머니의 함경도 사투리 흉내를 어찌나 잘 내는지 그들이 월남 가족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물론 그들이 흉내내는 것이 북한 사투리와 다르더라도 내가 듣기에는 꼭 그런 것 같아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나의 잘못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 따지고 보면 지독한 착취와 독재를 피해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온 것은 부끄러움보다 자랑스럽고 나라로부터 당당하게 보상받을 일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부모 형재들을 생이별하고 오로지 생명을 걸고 그 비참한 전쟁속에서 자식들만을 살리려고 남으로 피해온 것인데, 그것이 수치이고 불명예라면 남북통일을 빌고 있는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어머니는 꿈에도 잊지 못하는 부모형제들과 두고온 고향산천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그래서 항상 고향 이야기를 했고, 한겨울 추울 때는 이북 고향 추위에 비하면 여기 남쪽은 봄날씨라고 하면서 이북의 겨울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가 겨울이 춥다고 웅크리면 벌받는다며, 너희들은 호강하고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어쩌다가 반찬투정이라도 하면 북쪽의 굶주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못 들었느냐며 나무랐다. 그러면서 이렇게 잘 먹고 잘 입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니 얼마나 좋으냐며 남으로 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했다. 이렇게 살게되니 북한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하며 어머니의 '친정 동생들'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해주곤 했다. 동생들을 그리워했는데,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그 심정을 알게 되었다. 통일이 되면 만나지겠지 하며 기대하고 또 바랐었는데 아이러니한 일을 겪게 되었다.
동생이 시사 월간지에 근무할 때이다, 이산가족 방송으로 나라 전체가 들썩할때라 신청을 하자고 어머니 생전에 형제를 만나봐야 되지 않겠냐고 동생이 서둘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쓸데 없는 소리하지 마라 인제는 안 보고 싶다'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의아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동생들 보고싶다고 했잖아요?’ 했더니, '너희들이 내 속을 어떻게 알겠냐' 하며, ‘나는 내 자식이 먼저다.’ 했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잊고 있었던 두려움을 속으로만 품고 있었다. 내 동생은 대학시절에 데모로 투옥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친정은 풍비박산 일보직전이었다. 시국사건인지라 이웃들의 수근거림이며 빨갱이집안이라는 손가락질과 만약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성사된다면, 또 되풀이되는 고통, 그런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했지만, 아들이 겨우 복권되어 대학도 졸업했고, 사회생활이 안정되어 장가도 보냈는데, 그 아들이 다시 어떤 피해를 볼까봐 극구 반대를 했다. '나는 형제보다는 아들이 먼저' 라는 생각이 뼈속까지 단단히 새겨져 있는 어머니는 지난날과는 아예 싹을 끊을 기색이었다. 통일이 된다면, 그런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래서 계속 슬프게 한다.
또 한 번은 나라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을 추진한 적이 있었는데, 북한쪽에서 오는 수행원 명단에 어머니의 동생과 이름이 같은 분이 있었다. 마침 기자였던 내 동생은 그 분이 외삼촌인지 알아보자고 하니 어머니는 표정이 새파래지시며 완강하게 반대를 하셨다. 어머니의 동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한 사람이어서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어머니는 스스로 판단하셨다. 그러니 만나면 가슴만 아플 것이라며 극렬히 손을 저으셨다. 우리들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어머니 생각을 존중해 드리기로 하고 만나는 것을 포기했다. 우리의 현실은 형제의 정도 이념앞에서는 이렇게 맥없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본인이 아니면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혈육의 정을 깊이 묻어두고 사셨다. 당신의 자매상봉은 개인적으로는 아쉬워도 또다시 자식이 연루될까 두려워서 모든 것을 참은 것이다. 왜 통일이 이렇게 어려울까. 답답한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끝-
<수필>
팥죽에 담긴 정
박순녀
오늘은 가계로 장사 나가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바쁘게 청소를 하고 물건을 꺼내서 진열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가스난로에 불을 살피느라고 가계에 손님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분주하게 서두룰 때였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상냥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이 필요하세요?”
가게에는 첫손님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기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상냥하게 맞이했다.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머니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어요."
뜻밖의 대답이라 어리벙벙한 태도로 ‘고맙다는 인사가 뭘까?' 하고 속으로 나에게 반문을 했다. 그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만한 일이 없었다. 내가 망설이자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 덕택에 제가 효도를 했어요. 지난번에 여기에서 팥죽을 사갔잖아요. 그날 우리 어머니가 팥죽을 드시고 매우 흡족해하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그때 여기 팥죽이 우리 어머니 입맛에 꼭 맞을거라고 했잖아요."
그제야 그 남자가 어머니께 드린다며 팥죽을 사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위로를 드립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우리 팥죽을 맛있게 드셨다니, 고맙습니다. 더 오래 사셨으면 팥죽을 더 드렸을 텐데. 명복을 빕니다.”
“어머니가 팥죽을 좋아해서 저도 집에서 팥죽을 끓여드리곤 했는데. 저는 옛날식으로는 못하잖아요?. 요즘 아이들 입맛에 맞춰서 끓이다가 보니 달기만 해서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는데, 여기 팥죽을 드시고는 옛날 맛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아주 편안히 가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리어 내가 고마웠다. 임종전에 입에 맞는 음식을 드시고 편안히 가셨다니 내가 조그마한 적선이라도 한 기분이었고, 일부러 찾아와 인사를 하는 그 분이 참 고마웠다.
좀 오래전 일이었다. 어릴 때 학교 친구의 전화가 왔다. 내가 팥죽 가게를 하는 것을 알고 맛있게 끓이는 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 친구도 병환에 계신 시어머님께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시는 팥죽을 직접 끓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며 가게로 오라고 해서 팥죽 재료를 주고 끓이는 방법도 세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내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 친구는 자기 음식 솜씨가 신통하지 못해서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주소를 알려주면 내가 팥죽을 맛있게 끓여서 택배로 네 시어머니께 보내드릴께. 그래도 괜찮겠지?”
친구는 그렇게까지 해주면 미안해서 안 된다며 극구 사양을 했다. 나는 친구의 시어른도 나의 시어른과 같은 것이니, 그것쯤은 대접해 드릴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팥죽값을 정당하게 주겠다고 했다. 친구 사이에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자기는 시어머니를 대접하는 일이고, 나는 생업으로 하는 일이니, 친구간에 거래를 분명히 하자고 했다. 나는 친구를 돌려보내고, 가게를 정리한 후 팥죽 한 들통을 끓였다. 이걸 드시고 빨리 친구의 시어머님이 쾌차하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택배를 불러 팥죽을 포장해 보냈다.
몇일 후에 친구가 다시 전화를 했다.
"친구야, 팥죽을 그렇게 보내주어서 말할 수 없이 고맙다. 우리 시어머니도, 너무 좋아하셨고, 우리 남편도, 자기 엄마가 맛있게 드시며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다. 네가 우리 집에 팥죽만 보낸 것이 아니라 온 가족에게 기쁨을 보냈다. 정말 고맙다.“
그러면서 필요한 것에 쓰라며 상품권을 보내왔다. 미안하지만 극구 사양만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사실은 이것이 내 생업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정을 나누는 봉사라는 생각으로 음식에 정성을 더 들여왔다.
그런데 아침 일찍 찾아온 손님에게서도 비슷한 칭찬을 듣고 보니, 새로운 보람을 갖게 되었다.
가게는 내가 노력한 만큼 보답이 돌아왔고, 나이 드신 어른들의 입맛도 맞추어서 기쁨을 준 것이 참으로 보람을 느끼게 했다.
친구에게 팥죽을 택배로 보낸 뒤 한 달여 만에 친구의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대전에 와있다고 했다. 거기에서 또 내 신세를 질 수가 없어 팥죽을 맛있게 쑤는 비법을 여러 가지로 시험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내가 해준 팥죽과 맛이 비슷해졌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입이 까다로운데다가 설탕물인 지금의 팥죽은 못 드시는데 내가 쑤어보낸 팥죽은 잘 드시니, 내가 자기 시어머니께 큰 효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어머니는 이따금 내가 쑤어 보냈던 팥죽을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 일들이 있은 뒤로는 내 생각 탓인지 가게가 더 잘되는 것 같고, 내가 먹어봐도 팥죽맛이 지금 시장이나 가게에서 파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대전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혜경아, 나는 니 덕분에 손님이 많이 찾는다, 수입도 괜찮고 너같은 친구에게 칭찬도 들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나는 그날 다시 정성을 다해 팥죽 한 들통을 끓였다. 정성을 들여 포장을 해서 택배로 대전 친구에게 보냈다.
돌이켜 보면 나이가 들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 별뜻도 없이 심심소일 삼아 시작한 팥죽장사가 인기를 얻게 되고 생각지도 않았던 노인들게 효도를 하는 일이 되어 기뻤다.
-끝--
<심사평>
조국 통일의 일익이 되길
통일문협의 신인상이라니까 소재나 주재를 통일에 맞추려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글이 자연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고 이 단체가 통일부 산하의 법인체인데도 신인상 응모자가 많은 편이 아니다. 그중에서 박순녀의 수필 「통일을 꿈꾼다」등 여러 편은 솔직 단백한 경험 사실의 기록이라 정이 갔다. 그래서 심사원 만장일치로 「팥죽에 담긴 정」,「한시 기행」,「통일을 꿈 꾼다」등 3편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신인상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한시 기행은 복지간 중국어 교수의 인솔로 중국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역사, 풍물, 생활 현실 등을 한문시로 들려주면서 돌아보는 일종의 기행시 수업과 같아서 특이하다. 「팥죽에 담긴 정」은 자신이 팥죽 가게를 하며 경험한 일들이고, 「통일을 꿈 꾸다」는 오로지 자식만은 공산치하에 둘 수 없다며 6.25때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온 어머니의 이야기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우리 현실이다.
통일문협은 이미 휴전선 가까이 대지 6만 평을 확보해 놓고 거기에 통일 시비 동산도 건립할 계회이다. 통일문협 신인상 당선을 충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조국 통일에 일익이 죄길 기대하며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 변우택, 김경수, 김종상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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