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스러웠던 여름 해안 트레킹, 서해랑길 88
1. 일자: 2022. 7. 2 (토)
2. 코스: 전곡항 ~ 궁평항
3. 행로와 시간
[전곡항(08:30) ~ 제부도 입구(09:50) ~ 새섬(10:05) ~ 살곶이마을(10:30) ~ 옛공생염전(11:05) ~ 한맥중공업(11:42) ~ 백미리어촌체험마을(12:16~12:45) ~ 곰솔밭/해수욕장(13:15) ~ 궁평항(13:55) /19.8km]
< 서해랑길 88 구간 걷기를 준비하며 >
여러 경로로 서해랑길의 존재를 알리는 소식을 접한다. 그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서해랑은 코리아둘레길의 일부다. ‘한 걸음 한 걸음, 대한민국을 발견하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마음에 와 닿는다. 코리아둘레길 4500km는 우리나라 동해 서해 남해 바다와 비무장지대를 잇는 둘레길로 사람 자연 문화를 만나는 걷기 여행길이다. 동해는 해파랑길, 서해는 서해랑길, 남해는 남파랑길, 그리고 DMZ는 평화누리길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오늘은 총 1800km, 109구간 중 88구간 궁평함 ~ 전곡항 구간을 걸으러 한다. 좋은사람들 카페의 구간 안내 글에서 가야 할 길의 대강을 살핀다. 왁자지껄한 궁평항을 나서면 바로 궁평해변이다. 해변에는 100년이 넘게 자란 곰솔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초병 순찰로를 따라 다양한 어촌체험이 가능한 백미리 마을로 향한다. 이제는 쓸쓸히 저물어 가는 매화리 염전을 지나면 너른 갯벌로 유명한 송교리 살곶이마을이다. 살곶이에 서면 갯벌 건너로 제부도며 전곡항이 눈에 들어온다. 서해의 진주로 불리는 제부도 앞을 지나 정갈하게 정비된 전곡공원으로 간다. 갯벌 너머가 전곡항이다. 하얀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역 방향으로 걸으려 한다. 산악회 안내는19.5km, 8시간이지만, 누에섬과 제부도 탑재산을 가지 않으면 그리 무리한 시간과 거리는 아니다. 걷기가 끝나고 탄도항에서 식사를 하면 되므로 작은 배낭에는 물과 간식만 준비한다. 출발 6km 거리의 제부도 입구와 15km거리의 백미리에서 쉬어 가려 한다.
< 희망사항 >
서해랑길 중 일부는 태안해변길과 안산둘레길 이란 이름으로 걸었으나, 그건 목적을 갖지 않고 그저 우연히 경험한 것이다. 오늘은 서해랑길 이란 이름으로 첫 여정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 시작이 한 때 담당했던 마린 엔진 사업의 현장인 만큼 더 의미가 크다. 특히, 궁평항은 전시회 현장으로 여러 번 오간 곳이다.
그간에 걸은 서해 바닷길은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 걷는 길 내내 바다와 해변과 숲과 마을의 속살을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전곡항과 궁평항은 집에서 차를 몰아 가도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버스 타고 가는 여행은 색다를 게다. 혹, 너무 일찍 날머리에 도착하여 긴 기다림을 주체하지 못할까 하여 궁평항에서 집으로 오는 대중교통 편도 플랜 B로 마련해 둔다.
바다를 볼 생각에 가벼운 흥분이 인다.
< 전곡항 가는 길에 >
사당역에서 7시 반에 차에 올랐는데 1시간 만에 전곡항에 도착했다. 무척 빠르다, 어떤 길로 왔는지 용하다. 코리아둘레길을 안내하는 두루누비란 앱을 설치하느라, (그나마 잘 연결도 되지 않는) 창 밖 풍경도 살피지 못했다. 일행들이 누에섬에 간다고 전곡항 인근 도로에서 하차했다. 시작부터 어수선하다.
< 전곡항 ~ 살곶이마을 >
전곡항에서 바라보는 포구와 바다 풍경은 근사했다. 하늘과 바다가 은은한 코발트 빛이다. 걷기를 시작한다. 공터 곳곳에 요트들이 보인다. 이국적 풍경이다. 이내 도로에서 열기가 올라온다. 잠시 길을 헤맨다. 정상 궤도에 들어서긴 했는데,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가다가 해안 펜스를 따라 길게 걷는다. 길 좌측에는 공원이 이어지고 차박을 하는 이들이 여럿 보인다. 코비드 팬데믹이 낳은 새로운 문화다.
경기둘레길을 알리는 리본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단조로운 해안 철책 선을 지나자 제부도로 향하는 도로와 마주한다. 여름 햇살이 쏟아진다. 어, 이런 길을 기대하고 오진 않았는데 하는 짜증이 났다. 차들이 질주한다. 제부도 입구다. 눈에 익은 식당 앞을 지난다. 지나온 5km의 길은 빵점 수준이다.
제부도를 지난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번은 코스 곳곳이 공사판이다. 위험 천만이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분이 날 응원한다. 본인도 서해랑을 걷고 있단다. 잠시 힘이 되었다. 새섬 옆을 지나며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멀리 제부도를 오가는 해상 케이블카의 모습도 보인다.
다시 지겨운 해안 철책길이다. 군 초소가 목격된다. 잠수함을 보면 신고하라는 문구도 보인다. 분단의 아픔이 바다에서도 느껴진다. 한참을 걸었다. 해변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 목격된다. 길이 헷갈린다. 리본은 정작 필요할 땐 찾을 수 없다. 도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서자 마치 마법의 나라에 들어선 듯 풍경이 달라진다. 잘 가꾸어진 잔디 정원과 한껏 멋을 낸 고급 주택의 담벼락과 마주한다. 마치 평창동 주택가를 걷고 있는 기분이다. 10여분 살곶이 마을 길을 걷는 건 행복이었다.
< 살곶이마을 ~ 백미리 >
다시 해안 철책이 등장한다. 이젠 새롭지도 않다. 철조망 뒤로 긴 갯벌이 드러난다. 끝 없이 광대하다. 철책을 벗하며 걷는다. 옛 염전 터를 지난다.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하고 폐허가 된 염전 옆에 낚시 터가 들어서 있다. 주변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동네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댄다. 단조로운 해안 길이 무척 길게 이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코 오지 않을 길을 헛되이 걷는다.
흔치 않은 한자로 된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한맥중공업이다. 중장비와 설비가 가동되는 요란한 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그나마 풍경의 변화가 반가웠다. 공장을 크게 돈다. 시골 마을이 나타난다. 벼가 익어간다. 평온한 들녘이다.
백미리가 가까워오자 풍경에 변화가 생긴다. 멀리 감투섬이 마치 거대한 암봉처럼 선명하다. 해안에 캠핑장이 들어섰고 공원도 보인다. 모처럼 철책 없는 해안을 맞는다.
백미리어촌체험마을은 별세계였다. 야자수가 있고 잘 꾸민 광장도 보인다. 카페 2층 창가에 앉는다. 차가운 아이스아메리카의 시원하고 쌉쌀한 맛이 그만이다. 근래 마신 커피 중 단연 최고다. 창 밖으론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사진을 본다. 지루하고 따분한 길이라 여겼는데 제법 멋진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순간의 기록은 과정을 미화했다.
< 백미리 ~ 궁평항 >
남은 거리는 3km 남짓인데 시간은 아직 오후 1시도 되지 않았다. 마음을 굳힌다. 산악회 버스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집에 가야겠다.
백미리를 지나자 제대로 된 트레킹로가 이어진다. 걷기에 나선지 처음으로 언덕을 오른다. 정자가 나타난다. 해안 초소 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감투섬의 모습은 근사하다. 그래 맞다. 내가 기대한 서해랑길은 바로 이런 모습니다. 우거진 숲을 따라 걷는다. 15km 이상을 고생한 보람을 잠시나마 느껴본다.
모래 해변이 등장한다. 궁평항이 멀지 않았다. 너무 변해 버린 주변 모습에 예전 요트가 전시된 마린 박람회 전시장 풍경은 이제 먼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나 보다. 곰솔이 멋진 해안 숲을 걷는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의 표정에서 행복을 읽는다. 휴일 오후의 평화로운 풍경이 해변 곳곳에서 목격된다. 바닷가로 내려선다. 물 빠진 해변은 거대한 갯벌이다. 삼각대를 세우고 추억을 사진에 담는다. 해안 데크를 따라 궁평항에 도착한다. 땀 흘린 얼굴에 차가운 물이 닿자 살 것 같다. 멀고 긴 5시간 23분의 여정이었다.
< 에필로그 >
실망이다. 코리아트레일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정도로 단조로운 데다가 온갖 공사로 어수선했으며, 해안 펜스는 왜 이리 긴지 걷는 내내 잘못 왔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나마 살곶이마을에서 궁평항까지의 길이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면 서해랑길과는 영영 이별할 뻔 했다. 여름 뙤약볕을 안고 긴 길을 걸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기대 이하였다. 특히, 전곡항에서 백미리까지의 길은 무의미했다. 걷는 내내 이건 어니다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오후 2시다. 궁평항 입구 버스 정거장 앞 벤치에 앉는다. 나를 남양연구소 부근 어딘가로 데려갈 버스가 와 있다. 수원으로 가든지 사당으로 가든지 연결 교통편은 꽤 있다. 대장에서 문자를 보낸다. 먼저 간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버스에 오른다. 여름 햇살이 낯선 거리에 내려앉는다. 스르르 잠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