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가 《월간천관》에 '이청준문학관 건립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故 이청준 작가의 인물과 문학세계를 심층적 소개 중이다.
2022년 8월호를 시작으로 9월호, 10월호, 11월호, 12월호, 2023년 1월호, 2월호, 3월, 4월호, 5월호, 6월호, 7월호, (8월호 쉼), 9월호, 10월호, 11월 12월호, 2024년 1월호, 2월호, 이번이 열여덟번째 연재기고이다. (편집자 주)
1, 들어가는 말
대부분 소설의 시공간은 허구적 상상력의 터전일 것이지만, 때로는 실제로 작가가 체험한 것일 수 있다. 또는 그 시공간적 요체를 현실에서 끌어오면서 살짝 변용할 수 있겠다. 이청준 소설세계에는 대덕과 회진, 천관산, 진목리 경우 보다는 덜 하겠지만, 'ㅈ읍, J읍. 전남 C읍'이라는 시공간이 등장하고 있다. 비록 장흥읍에서 거주한 적은 없었지만, 그가 써낸 고향소 설의 상징성에 'ㅈ읍, J읍. C읍'도 일정한 역할을 보태고 있다. 장흥(長興) 고을은 고려 중기에 '장흥부(長興府)로 승격한 이래 조선시대 내내 '부사(종3품관) 고을'이었으니 그 인근 지역의 '군수, 현감, 현령 보다는 훨씬 상위 관등이었다. 그런 연고로 일제기에는 그 주변 남녘 일대를 관장하는 법원과 검찰청이 장흥읍에 들어서게 되었다. '서편제 남도소리'의 모태가 되는 악인(樂人)과 소리꾼을 배출한 '장흥신청(神廳)'도 부사고을 장흥에 있었다. 그 조선 시절 내내 장흥 땅이었던, '웅치면 회천면'은 일제기 1914년에야 보성군으로 이속되고 말았다.
2, 'ㅈ읍, J읍. 전남 C읍'
<비화밀교· 1985>에는 "Y읍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서 '읍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2층 '휴게실 남녘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청준은 호남선으로 귀향하는 입장이기에 위 Y읍은 '영산포읍'에 대응된다. 대덕 회진쪽 사람들 역시 예전에는 대부분 Y읍을 거쳐 광주로 가게 되며, 또한 서울로 상경할 때는 위 기차가 닿는 Y읍으로 가야만 했다. 이하, 장흥읍으로 짐작되는 배경공간이 등장하는 소설들을 살펴본다.
<줄광대·1966> 취재하는 南 기자의 고향이다. '전남 C읍'으로 광주에서 4시간 거리이다. 아마 그 시절은 4시간도 족히 걸렸을 것이다. 1949년경 C읍에서 공연을 하던 서커스단이 파산한 사건이 있었다한다. 줄광대가 사망하였으며, 소설에 등장한 '사쿠라 공원에 대응되는 '남산공원이 장흥읍에 존재하고 있다. 일제기에 벚꽃공원 겸 참배장소'로 조성되었다. (이청준 선생님이 장흥읍과의 상관성을 따로 언급하신 적은 것 없는 것 같다)
<과녁 1967> 소설에 '읍공원 활터'가 등장한다. 장흥읍 남산공원에도 '흥덕정활터가 있었다(지금은 그 공원 아래로 옮겨졌다) 소설에는 '북호정'과 '석주호 검사'가 등장하는데, 일제기 이후 장흥읍에는 장흥지청이 있어왔다. 이청준은 신혼시절에 서울 중구 약수동에 거주하였는데, 서울 남산의 장충단공원 쪽에 있었던 '석호정은 그 위쪽으로 옮겨졌다.(소설 <따뜻한 강.1975>에는 그 '석호정낙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사랑을 앓는 철새· 1973> '전주, 광주, 영암, 해남, 장흥, 장흥해안 등 남도일대를 떠도는 여성 철새들이 그 야기가 등장한다. 그 철새들 행로가 <서편제>의 '송화을 의남도소리길과 겹쳤을 수도 있다.
<눈길·1977> 새벽 고갯길 신작로 역시 장흥읍을 거쳐 광주로 닿게 된다
<살아있는 늪 ·1979> 버스길은 '장흥읍 시장(市場)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소리의 빛·1978>- "주막집은 '장흥읍'을 아직 10여리쯤 남겨놓고 탐진강 물굽이의 한자락을 끼고 돌아 앉아 있었다." 그 같은 자리에서 3대째 내려왔다는 '천씨 주막'이 위치한 장흥읍 탐진강(천)은 일제기에 부여된 것으로 현금의 행정적 명칭이다. 조선시기 내내 '예양강'이었고, 일제기 한시에도 '예양강으로 나오고 있다. 조선후기 이래로 장흥 예양강에는 '예양강 8정자가 위치하고 있다.
<겨울광장·1979> 장흥읍 위치로 짐작되는 '읍광장 합동정류소'가 나온다. 광주시로 짐작되는 부근 G시가 언급되고 있다. '읍 광장'을 배회하는 '완행댁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딸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결국에 허구로 판명되었다 해도, 겨울광장, 읍 정류소'는 혼돈과 절망 속에서 서로 위로하는 공간이 될 수 있었다.
<키 작은 자유인·1989> 어린 소년이 고향을 떠나 광주로 올라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54. 4. 3에 모자가 갯벌에 나가서 게를 잡았지만, 그 다음날 4. 4에 광주에서 썩어 버리고만 '게 자루'사건이 있었다. 아마 이때 광주로 가는 경로는 '진목리 < 대덕면소 <관산 <장흥읍 정류소'를 거쳐 가는 상행길이었을 것.(1954년 경이면 아직은 회진면이 없었던 시점이다)
<이 여자를 찾습니다.1989> '장주군 흥덕면 갈평리 출신이라는 박장순 여인의 애달프고 억울한 사연이다. 장흥읍내에 살던 윤씨 노인에게 재취로 들어갔다가 '늙은 남편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쓴 채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17년을 복역하고서 가석방이 되었다한다. 그런데 주변사람들은 모두 무심했고, 그 남동생마저 외면했었다가 나중에도 모호한 태도이다. 소설은 <키 작은 자유인/ 전집21>에 수록되고 있는데, 그녀 박장순 운명 역시 '키 작은 자유인' 그룹에 속했을 수도 있었겠다. 장흥(長興)을 '장주군 흥덕면'으로 풀이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흰옷·1993> 해방 이후 회진초교 주변의 현지주민과 뭔가 구별되는 행색의 '장흥읍 사람들이 소설행간에 지나가고 있다. '읍장 아들'도 따로 구별된다.
<인문주의자 무소작씨 종생기. 2000> 참나무골 출신의 떠돌이 무소작씨의 첫 출향은 장흥읍내의 중국집 배달꾼 잔심부름꾼 1년 생활이었다. "첫 성중살이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 후에 상경하여 떠돌이 출향생활이 시작되었다.
<들꽃 씨앗 하나· 2002> 주인공 청소년이 1957년경에 진학한 K시 상업고등학교와 이청준이 진학한 고등학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청준 청소년의 회상기라 말할 수 있다. 고향에 내려가서 <재산세 무과세 증명원>을 발급받기 위하여 'K시 <영암 돈밭재 <장흥읍 장날 <대흥 면소'를 급히 오고가던 왕복길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만원버스 안의 소매치기 사건에 착안하여 화가 김선두는 <소매치기와 장흥장 풍경>을 그렸다.
3, 이청준은 '장흥읍'을 얼마나 알았을까?
진목리 출신의 소년 시절에는 장흥읍내에서 열리던 경시대회 또는 웅변대회 궐기대회에 참여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읍내 강변에서 열리던 서커스단 공연 소식을 전해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줄광대>에도 '서커스단'이 언급되는데, 장흥읍 공연을 왔다가 홍수피해를 당한 데서 장흥읍 학생들이 모금운동을 한 적도 있었다) 이청준은 2일, 7일에서는 장흥 오일장과 그 장날의 만원버스를 잘 알았을 것이다. 대덕~광주간의 직통버스는 없었으며, 장흥읍을 거쳐 대덕으로 가는 버스라면 장흥읍 정류장에서 상당시간을 대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동안 이청준은 장흥읍 시내와 남산공원을 구경할 수도 있었을 것. 장흥읍에 늦은 시각 도착이면 1박을 할 수도 있었을 것.
4, 다시 <비화밀교, 1985> 제왕산 현장은 어디 인가?
앞서 비화밀교의 현장에 대해 "소설에 등장한 '읍'은 '장흥읍이기에 장흥읍 제암산이 그 '제왕산현장이다."는 짐작은 했지만, 달리 생각해볼 부분이 더 있긴하다.
1)장흥읍 제암산설- Y읍(영산포읍)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로 가는 곳, '제왕산'과 비슷한 '제암산이 있고 소설에 각 언급되고 있는 사정들, 고을어른 '읍장이 있고, 법원과 검찰청이 있기에 변호사'가 있고 동학혁명의 마지막 저항지 석대들이 있는 곳이다. ('J읍
터미널 2층'에 한때 '휴게실 남녘'도 있었다)
2)대덕천관산설- 이청준의 실제 고향은 대덕천관산 일대이며, 마침 천관산에는 소설에 나온 '장화대'와 유사한 '봉화대가 있고, 기우제를 지낸 곳이며, 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억새밭 평원이 있다.
3)광주 무등산설- 장흥 제암산'이든, 대덕 천관산'이든 그 개별적 명칭들의 유사성은 작가가 편의상 선택하는 소설적 배경장치에 불과할 뿐이다. 소설의 비화 밀교 자체를 이른바 광주사태 비극을 위로하는 민속적 제의(祭儀)에 빗댄 것이니, 광주에서 중고교를 나온 이청준은 광주의 역사성과 무등산의 상징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광주 무등산을 제왕산으로 지칭한 것이다.
<추가> 이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평소 중의적이고 우의적인 소설기법을 보여주신 선생님이시니, 광의적 차원에서는 세 견해 모두 일응 성립할 것도 같지만, 결국에는 독자가 선택할, 독자의 몫이겠는데. 아마 이 글을 선생님께서 보신다면 빙그레 웃으실 것도 같습니다. 필자는 장흥 태생에 장흥초, 장흥중, 광주일고를 졸업한 입장입니다.
박형상 변호사(前서울중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