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집 발문晦齋集跋
고(故) 증 영의정 회재 선생의 도덕과 학문에 대해서는 퇴계(退溪) 선생이 상세하게 말씀하셨으니, 어찌 후생이 덧붙여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선생의 시문(詩文)은 근엄하고 정확(精確)하여 한 글자도 구차함이 없으므로 유림(儒林)과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전집(全集)을 볼 수 있기를 오래전부터 바라왔다. 지금 경주 부윤(慶州府尹) 이후 제민(李侯齊閔)이 관찰사 노공(盧公) 진(禛) 에게 청하여 목재를 모으고 목수를 모집하여 개판(開版)을 마친 뒤 나에게 발문을 청탁하고, 또 서원(書院)의 누(樓)와 재(齋) 등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내가 어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마는, 천 리 밖의 큰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어 삼가 이렇게 써서 보내는 바이다.
선생의 아름다운 덕을 아는 사람들은 선생을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여기고, 모르는 사람들은 한 시대의 으뜸가는 인물로 여긴다. 삼가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면 《소학(小學)》에 힘을 쏟아 《대학(大學)》으로 나아갔으니,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되 도덕의 수양에 주력하는 뜻이 많았다. 그러니 재와 누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또한 선생을 높은 산처럼 우러르면서 이 재에 거하고 이 누에 오르는 많은 선비가 진실로 명륜(明倫)과 경신(敬身)의 근본을 배양하여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가지로 뻗어감으로써 선생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선생이 가르침을 남기고 법을 드리워서 후학을 성취시킴이 무궁할 것이요, 여러 유생도 선생을 저버림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문집을 간행하는 거룩한 뜻이니, 이후는 어찌 이로써 여러 유생을 면려하지 않겠는가.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 2월 초하루에 가선대부 행 홍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동지성균관사 유희춘(柳希春)은 삼가 발문을 쓰다.
<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
晦齋集跋[柳希春]
故贈領議政晦齋先生道德學問。退溪說之詳矣。奚待後生之贅言。第先生之詩文。謹嚴精確。一字不苟。儒林志學之士。願見全集者久矣。今鷄林尹李侯齊閔請於方伯盧公 禛。鳩材募工開板訖。求跋文於希春。且索書院中樓齋等名。希春何敢當。然千里厚望不可孤。謹復之曰。先生德美。知之者以爲泰山北斗。不知者以爲一時第一流。竊觀先生一生。用力小學。以進乎大。蓋篤學力行而主靜之意爲多。齋樓之名。恐不能不出於斯義。抑濟濟章甫。景仰高山。居斯齋而登斯樓者。誠能培明 倫敬身之根。達修己治人之技。以無負先生之敎。則先生之立言垂範。成就來學也爲無窮。而諸生亦無負於先生。此今日刊行文集之盛意也。侯盍以是勉諸生。萬曆甲戌二月初吉。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同知成均館事柳希春。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