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의 묘표
옛날 선묘(宣廟)께서 문치(文治)를 위하여 열심이었는데, 그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몸소 경세 제민의 책임을 지고서 그 당시의 제일인자를 기용해 줄 것을 청하자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모두 그 대상자로 거명했던 이가 바로 우계 성 선생이었다. 선생은 휘가 혼(渾)이고 자가 호원(浩原)인데, 청송(廳松) 성수침(成守琛) 선생의 아들이며 사숙공(思肅公) 성세순(成世純)의 손자이다. 선생은 청송이 정암(靜庵) 선생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가정에서 얻은 것이 많았던 데다, 또 퇴도(退陶)를 존숭하여 사모하고 율곡(栗谷)과는 벗이 되어 산속에서 도(道)를 지키고 있었기에, 내실과 함께 명망도 갈수록 높아만 갔다.
처음에는 유일(遺逸)로 추대되어 누차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계유년(1573)에는 옛 제도에 의해 지평(持平)으로 발탁하여 제수했으나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겸양하였다. 을해년(1575)에야 비로소 억지로 부름에 응했지만 얼마 안 가 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로도 벼슬을 제수하는 명령이 계속 있었으나 그때마다 병을 이유로 사양했으며, 선(善)을 따르고 학문에 힘쓰라는 뜻으로 글월만을 올려 주상으로부터 가납(嘉納)을 받았다. 그 후 여러 번 벼슬이 내려져 장령(掌令)을 제수받고 안거(安車)를 이용하여 오라는 명령까지 들었다. 신사년(1581)에는 편전(便殿)에서 주상을 대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주상이 대도(大道)의 요점에 관하여 묻자 선생은 그 대강의 줄거리를 추려서 명백하게 아뢰었으며, 그리고 물러와서 다시 봉사(封事)를 올려 전번에 말했던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문성공이 그 봉사를 읽어 보고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의론(議論)이다.’고 하였고, 대신들은 선생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실행해 보자고 청했으나 상은 역시 난색을 보였다. 선생은 곧 물러갈 것을 청하고 교외로 나왔는데, 상은 어찰(御札)을 내려 다시 오게 한 다음 일단 접견한 후 비로소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그 후로도 집의(執義)와 여러 시(寺)의 정(正)을 제수했지만, 다 나아가지 않았다. 계미년(1583)에는 특별히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제수하고서 하교하기를, “지금 병판(兵判)이 그대의 친구이니, 한마음으로 역량을 발휘할 때가 바로 지금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선생은 사양하다 못해 직에 임했다. 그때 문성공(文成公)이 그 병조의 장(長)으로서 상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얻기 힘든 만남이었다. 그러나 뭇 소인배들이 그것을 시기하여 틈만 있으면 논핵(論劾)을 했기 때문에 선생이 소를 올려 충성스러운 사람과 사특한 사람을 가려낼 것을 청했다. 이에 뭇 소인배들은 더욱 화를 내어 드디어 선생까지 싸잡아서 논핵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선생은 그날로 파산(坡山)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주상은 그들 소인배들 중에서 더욱 심하게 구는 자를 파출하도록 명하는 한편, 문성공을 특별히 총재(冢宰)로 임명한 다음 선생을 빨리 나오도록 재촉해서 아경(亞卿)으로 승진시켜 발령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문성공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선생은 도(道)가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 돌아갈 뜻을 굳혔었다.
을유년(1585)에 와서 사특한 무리들이 판을 치면서 당색의 명단을 작성하고 선생의 이름도 그 속에다 넣었는데, 기축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상은 선생을 생각하고 다시 이조 참판을 제수하면서 간절히 불렀다. 선생은 마지못해 서울에 들어왔으나 병으로 일을 보지는 못했고, 치도(治道)에 관한 상소만 올리고서 다시 돌아갔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도 선생은 부난(赴難)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선생이 평소에 결심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내용이 우리 선자(先子)와 고례를 들어 주고받은 서신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급기야 세자(世子)의 부름을 받고는 성천(成川)으로 달려갔다가 주상이 있는 곳까지 가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참찬(參贊)으로 승진되고 이어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시무(時務)에 관해 조목조목 지적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너무나 절직(切直)해서 주위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상이 환도(還都)할 때는 병으로 뒤따르지 못했으므로 나중에 들어가 대죄(待罪)하였는데, 상은 불평한 빛을 보였다. 그것은 종전부터 쌓여 온 참소가 있었던 데다가 이어 선위(禪位)를 청한 자까지 있었기에 쌓이고 쌓인 의심이 그때 와서 폭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생은 또 좌참찬으로서 군국(軍國)의 사무까지 겸해서 살피고 있으면서 말을 기탄 없이 올렸기 때문에 상으로서는 기분이 더욱 언짢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자(顧咨) 문제를 꼬투리로 잡았는데, 선생은 그 길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정유년(1597)의 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부난하도록 권고한 자들이 많았지만, 선생의 생각은 임진년 때와 다를 바 없어 끝내 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선생이 세상을 뜬 지 4년 뒤에는 선생에 대한 모함이 더욱 심해진 나머지 벼슬이 추탈(追奪)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론이 안정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으며, 청송서원(聽松書院)에 배향하였던 것이다.
아, 선생은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은 데다가 세도(世道)를 만회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만약 뜻이 같은 훌륭한 인물들과 함께 사업을 수행하였더라면 아마도 나라가 잘 다스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도(道)에는 소장(消長)이 있고 운명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탓인지 도(道)가 행해질 조짐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결국 행해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어쩌면 기묘년(1579)의 현인들 입장과 비슷했던 것이다.
선생은 행동거지를 반드시 정의에 근본해서 했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출처(出處)가 바르기로는 천지 신명이 보장할 정도였으니, 보통 사람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문성공이 일찍이 칭찬하기를, ‘지조와 행동이 확실하기로는 내가 미칠 바가 아니다.’고 했는가 하면 또, ‘선을 좋아하기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도 남는다.’고도 했으며, 또 ‘세상을 요리할 만한 인물’이라고도 했으니, 그러고 보면 문성공만이 선생을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남들이 선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생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선생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에 태어나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64년을 살았고, 장지는 향양리(向陽里) 선산 뒤에 있다. 짧은 표석에는 관직도 쓰지 않았는데, 이는 선생의 유언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고, 부인은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아들 성문영(成文泳)은 일찍 죽었고, 다음 성문준(成文濬)은 현감(縣監)이다. 맏딸은 별좌(別坐) 남궁명(南宮蓂), 다음은 대사간(大司諫) 윤황(尹煌)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아들로 성문잠(成文潛)이 있다. 현감의 아들들은 성역(成櫟), 성식(成栻), 성직(成㮨)이고, 사위는 신민일(申敏一), 안후지(安厚之), 윤정득(尹正得)이다. 별좌의 아들은 남걸(南杰)과 남우(南𣕃)이고, 사위는 김여옥(金汝鈺)과 윤형은(尹衡殷)이다. 대사간의 아들은 윤훈거(尹勛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이며, 사위는 이정여(李正輿)와 권준(權儁)이다. 그 나머지의 증손과 현손들은 다 쓰지 않았다.
내가 일찍부터 선생 문하에서 노닐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스승을 통해 선생의 출처와 언행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대략 이상과 같이 기록해 보았다.
文簡公牛溪成先生墓表
昔我宣廟銳意文治。時則栗谷李文成公身任經濟。請得當世第一人用之。於是中外咸以牛溪成先生應命。先生諱渾。字浩原。聽松先生守琛之子。思肅公世純之孫。聽松學于靜庵。先生得之家庭。又尊慕退陶而友栗谷。守道丘樊。望實彌彰。初擧遺逸。累官不起。癸酉。復古制。擢拜持平。謙不敢當。乙亥。承召僶勉始起。未幾而還。自後除命隨續。輒辭以疾。上章陳從善典學之道。上嘉納之。屢拜掌令。命安車就道。辛巳。引對便殿。訪大道之要。先生提綱挈領。敷奏明白。退而上封事。申前意而極論之。文成讀之曰。世間不可無此議論也。大臣請行其言。上猶難之。尋乞退出郊。御札召還。晉接始許歸。拜執義,諸寺正。皆不就。癸未。特除兵曹參知。敎曰。兵判爾友也。同心德正在今日。先生累辭不獲。乃就職。文成時長本兵。爲上所倚毗。誠不世際遇。而群小惎之。抵隙論劾。先生上疏陳辨忠邪。群小益怒。遂幷劾之。卽日還坡山。上命黜群小之尤者。特拜文成冢宰。促召先生。陞拜亞卿。無何。文成公卒。先生知道之不行。乃決歸。乙酉。鬼蜮得肆。書名錮黨。竝及先生。己丑逆起。上思先生復拜吏曹參判。勤召不置。乃入京。病不視事。疏陳治道而歸。壬辰寇至。先生不赴難。蓋其平日所定。曾與吾先子有引古答問之語。及承世子召。遂赴成川。轉達大朝。陞拜參贊。移大司憲。條陳時務。辭甚切直。人爲先生懼。上還都。病未隨駕。後入待罪。上旨有不平。從前積讒。繼有請禪者。展轉生疑。至此而發也。旣拜左參贊。兼察軍國事。進言無顧忌。上意益不悅。執顧咨事爲咎。先生卽乞骸歸。丁酉。寇再逞。人多勸赴。而先生之意。則乃與壬辰無異。終不變其素定也。先生沒四歲。而讒搆愈甚。至追奪官爵。後二十歲而公議大定。命贈左議政諡文簡。竝享聽松書院。噫。先生學惟嫡傳。文旣在茲。同德彙征。國其庶幾。而道有消長。命實在天。兆足行矣。而卒不行。殆類於己卯之賢。行止必以其義。夷險不易所守。出處之正。可質神明。非衆人所能識也。李文成嘗稱曰。操履敦確。吾所不及。曰好善優於天下。曰可任經綸。唯文成能知先生。人雖欲自絶。於先生道德。何傷乎。先生生於嘉靖乙未。距卒之年六十四。葬向陽里先兆後。短表不書官。遺命也。先妣坡平尹氏。夫人高靈申氏。男文泳早死。次文濬縣監。女適別坐南宮蓂。次適大司諫尹煌。側室男文潛。縣監男櫟𣏾㮨。女適申敏一,安厚之,尹正得。別坐男杰𣕃。女金汝鈺,尹衡殷。大司諫男勛擧,舜擧,商擧,文擧,宣擧。女李正輿權儁。餘曾玄未盡載。集早遊門下。且因父師習聞。出處言行。略敍如右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