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묘비명(箕子廟碑銘) 병서(幷序) ○ 응제(應製)
은(殷)나라가 망했을 때 세 사람의 행실이 같지 않았으나 공자는 병칭(竝稱)하여 삼인(三仁)이라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 세 사람이 처지가 서로 바뀌었다면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기자(箕子)가 주(紂)에게 충간(忠諫)한 것은 비간(比干)보다 먼저였는데 주가 수금(囚禁)하고 죽이지 않은 것은 하늘이 한 것이고, 무왕(武王)이 다른 나라에 봉(封)하지 않고 조선에 봉한 것도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하늘이 하도(河圖)를 복희씨(伏羲氏)에게 주었으나 팔괘(八卦)의 변화가 그래도 드러나지 않았고 문왕(文王)이 수감되어 비로소 역(易)을 연역하였으며, 하늘이 낙서(洛書)를 우(禹) 임금에게 주었으나 구주(九疇)의 수(數)가 그래도 밝혀지지 않았고 기자(箕子)가 곤액(困厄)을 당하여 비로소 홍범(洪範)을 서술하였습니다. 천인(天人)의 묘리(妙理)가 이에 크게 밝혀지고 제왕의 정치의 대경(大經)ㆍ대법(大法)이 천하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령 문왕이 역(易)을 연역하지 않고 기자가 홍범을 서술하지 않았다면 하도와 낙서는 단지 일개 구멍이 뚫리지 않은 혼돈(混沌)일 뿐이었을 것이니, 하늘이 복희씨와 우 임금에게 이를 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게다가 하늘이 증민(蒸民)을 냄에 반드시 성현을 탄생시켜 임금과 스승을 만들어 삶을 이루어 주고 교화를 세워 주었으니, 복희씨, 헌원씨(軒轅氏), 요(堯), 순(舜)이 중국을 교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동방은 비록 외진 곳이지만 사람들은 역시 천민(天民)입니다. 그러나 단군(檀君)으로부터 인문(人文)이 계명하지 못하여 무지몽매한 상태였으니, 혹여 기자의 팔조(八條)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끝내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자가 동방을 교화한 것은 복희씨, 헌원씨, 요, 순이 중국을 교화한 것과 같은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이 기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세상에 도(道)를 전하기 위해서였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서였으니, 가령 기자가 죽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지 않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그렇고 보면 기자가 사도(斯道)에 끼친 공로는 실로 천하만국(天下萬國)이 다 함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직접 그 가르침을 받은 은덕은 우리 동방이 가장 많았습니다. 삼한만세(三韓萬世)에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한 그 공덕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공자(孔子)의 도가 비록 더없이 크지만 만맥(蠻貊)의 나라에는 교화가 미치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기자가 동방을 교화한 것은 공자가 탄생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공자가 심지어 승부(乘桴)ㆍ욕거(欲居)의 뜻이 있었던 것이니, 예의와 문명의 교화의 소종래(所從來)가 오래입니다. 가령 기자의 교화가 있지 않았다면 후대에 비록 공자의 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교화가 어찌 쉽게 먹혀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고 보면 우리나라가 기자를 숭배하고 그 은덕에 보답하는 예(禮)는 응당 공자와 같은 수준으로 높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향사(享祀)하는 곳이 많지 않고 그 후손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어찌 때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해인 만력(萬曆)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본도(本道)의 선비 정민(鄭旻) 등이 항소(抗疏)하여 말하기를, “사서(史書)에 의하면 기자 이후 41대(代) 만인 준(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축출되었으며, 마한(馬韓) 말엽에 잔손(孱孫)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은 후대에 한씨(韓氏)가 되었고 평(平)은 기씨(奇氏)가 되었고 량(諒)은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선우(鮮于)에게 계통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세계(世系)는, 운서(韻書)에서는 ‘선우는 《성찬자성(姓簒子姓)》에 의하면, 주(周)나라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封)하였고 그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에 선우를 씨(氏)로 삼게 되었다.’ 하였고, 《강목(綱目)》에서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고 그 아들이 우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에 선우를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에 ‘기자의 후손에 구레나룻 좋은 노인 많아라.〔箕子之後髥翁多〕’ 하였으니, 선우가 기자의 후손임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지 않겠습니까. 홍무(洪武) 연간에 선우경(鮮于景)이란 사람이 중령별장(中領別將)이 되었고 그 7대손(代孫) 식(寔)이 태천(泰川)에서 와서 기자묘(箕子廟) 곁에 산 지가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식에게 기자의 제사를 맡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 일을 중히 여겨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자문하게 하는 한편 본도(本道)로 하여금 식을 탐방하고 복계(覆啓)하게 한 결과 모든 사실이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정 의론이 모두 찬성하여 드디어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임자년(1612) 봄에 어명으로 사당에 ‘숭인(崇仁)’이란 전호(殿號)를 걸었고, 선우씨에게 벼슬을 내려 식을 전감(殿監)으로 삼고 자손들이 이 벼슬을 이어받게 하였습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황제(黃帝)와 요(堯)ㆍ순(舜)의 후손을 찾아 세워서 삼각(三恪)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니, 성인의 숭덕계절(崇德繼絶)의 뜻은 천고에 걸쳐 다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윤(府尹)에게 명하여 묘소를 증축하고 사우(祠宇)를 수리하였으며 제전(祭田)과 수호(守戶)를 증설하여 제수를 공급하고 청소를 하게 하였습니다. 또 무릇 성(姓)이 선우인 사람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군적(軍籍)에 넣지도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자의 사당 아래 모여 살게 하는 한편 근신(近臣)을 보내 향을 가지고 가서 사당에 축제(祝祭)하여 고유(告由)하게 하였으니, 기자를 존숭하는 예전(禮典)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이륜(彝倫)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일대(一大) 기회인 것입니다. 아아, 성대합니다.
당초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본도의 선비들이 성사(聖師)의 유택(遺澤)을 존모하여 부(府)의 서남쪽 창광산(蒼光山) 아래 서원을 세우고 강당을 설치하여 이름을 홍범서원(洪範書院)이라 하여 유생들이 성사를 흠숭(欽崇)하고 도학을 강명(講明)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무신년(1608, 선조41) 겨울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이에 이르러 관찰사 정사호(鄭賜湖)가 조정에 보고하기를, “지금 기전(箕殿)에 명호를 걸고 후손을 세워 치제(致祭)하게 한 것은 수천 년 이래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이 지역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부사(父師)의 문명의 교화를 다시 입은 것처럼 기뻐 용동(聳動)하며 모두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크나큰 경사를 기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유신(儒臣)을 시켜 전후의 사적을 기술하여 사람들이 눈으로 우러러보고 무궁한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좋다고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사적을 서술하게 하셨습니다. 신은 마침 예관(禮官)이라 이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세상에 드문 예전(禮典)을 목도했던 터이므로 명을 받고 황공하여 감히 문사(文辭)가 천루(淺陋)하여 이러한 큰 글을 지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고 명(銘)을 바칩니다.
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큰 법을 내려 주시니 天錫大範
우 임금께서 그것을 본받으셔서 神禹則之
은사이신 기자에게 전해졌어라 以傳殷師
은사께서 뒤이어 출현하시니 殷師嗣興
그 감춰진 뜻이 드러나서 蒙難乃闡
인문이 비로소 밝아지게 됐네 人文始顯
이에 이륜의 이치를 펼쳐서 爰敍彝倫
성인의 물음에 대답하셨으니 以承聖問
이는 바로 상제의 가르침이어라 寔維帝訓
이미 무왕의 스승이 되시어 旣師武王
백성들의 표준을 내려 주시고 錫民之極
의리상 신하로 섬기지 않으셨지 義罔臣僕
하늘과 땅의 변화에서 天地變化
그 바른 이치를 얻어서 我得其正
명이로 자정하였어라 明夷自靖
이에 동토를 돌아보시고 乃睠東土
이에 사도를 미루어 폈으니 乃推斯道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 實天所造
먼 곳도 없고 누추한 곳도 없어 無遠無陋
팔조의 법으로 교화를 펴시어 八條以化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키셨네 變夷爲夏
그 어진 덕이 피부에 스며들어 仁涵于膚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으니 道不拾遺
예의가 잘 구현된 치세였었지 禮義之治
위대하여라 그 성대한 덕이여 巍乎盛德
백세토록 길이 흠앙하나니 百世以欽
그 은덕이 지금까지 이어지도다 受賜到今
패수의 서쪽 기슭에는 浿水西涯
정전의 옛터가 남아 있으니 不沫井洫
신성한 자취가 엊그제 일 같아라 神迹如昨
고려 때 사당을 처음 지었으나 肇祠于麗
예식이 잘 갖추어지지 못했고 禮式不備
세월이 갈수록 해이해졌어라 寢遠以弛
저 아득한 성인의 계통은 遙遙聖緖
후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나 不絶來雲
지파가 흩어지고 나뉘었었지 派散支分
밝으신 우리 임금께서는 惟明我后
홍범을 따라 큰 법도를 세우고 遵範建極
멀리 전승이 끊어진 학문을 이으셨네 遠紹絶學
이에 사당에는 아름다운 명호가 있고 殿有美號
서원에는 빛나는 사액이 걸렸으니 院有華額
더욱 빛나고 또 성대해졌도다 益光且碩
후손을 세워 끊어진 계통을 잇고 立後繼絶
대대로 작록을 세습게 하셨으니 永襲世爵
이것이 바로 삼각이라네 式是三恪
사당에 특별한 향사를 모시니 特祀于廟
희생은 살지고 술은 향긋해 牲肥酒香
예의가 가득 넘쳐 흐르도다 禮意洋洋
훌륭하여라 우리 왕이시여 猗歟我王
성인의 가르침을 이으셔서 聖謨其承
이 나라의 중흥을 이룩하시고 賁我中興
실추된 예전(禮典)을 모두 정비하니 墜典畢擧
그 의식의 법도가 찬란하여 縟儀彬彬
천고에 면모를 일신하였어라 千古一新
아아 빛나게 드러나지 않으랴 於乎不顯
문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文在於玆
영원토록 사람들 사모하리라 沒世之思
<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
箕子廟碑銘 幷序應製。
殷之亡也。三人之行不同。而孔子竝稱三仁。朱子以爲易地則皆然。臣竊嘗以謂箕子之諫紂。在於比干之先。而紂之囚而不殺。天爲之也。武王之不封於他方。而封於朝鮮。亦天也。何者。天以河圖授伏羲。而八卦之變猶未著。文王囚而始演易彖。天以洛書授神禹。而九疇之數猶未明。箕子厄而始敍洪範。天人之妙。於是大明。而帝王爲治之大經大法。得傳於天下後世。使文王不演易。箕子不敍疇。則河之圖洛之書。特一未竅之混沌耳。天之授羲,禹。豈端使然哉。茲非天意而誰歟。且天生蒸民。必降聖賢。作之君作之師。以遂其生。以立其敎。羲軒堯舜之敎中土是已。我東雖僻。亦天民也。而曰自檀君。人文未彰。泯泯棼棼。倘微箕子八條之敎。則終未免爲左袵之歸。箕子之敎東方。是猶羲軒堯舜之敎中土。蓋有不可得而已者。此又非天意而誰歟。天之不死箕子。爲傳道也。爲化民也。箕子雖欲死。得乎。武王雖欲不封于朝鮮。得乎。然則箕子之有功於斯道。實天下萬國之所共賴。而其親炙之恩。則吾東國最偏受。三韓萬世。人得以爲人。之功之德。爲如何哉。孔子之道。雖大而無外。蠻貊之邦。猶有所不化。箕子之敎東方。在孔子未生之前。故孔子至有乘桴欲居之志。禮義文明之化。其所從來久矣。倘使箕子之敎。不有以先之。則後雖有孔子之道。其化豈易以入哉。然則我國崇報之禮。當與孔子竝隆。然而享祀之制不廣。立後之典尙闕。誠欠事也。豈亦有待歟。我殿下嗣服之三年萬曆辛亥。本道士人鄭旻等抗疏言。史稱箕子之後傳四十一。而至準爲衛滿所逐。馬韓末有孱孫三人。曰親。其後爲韓氏。曰平。爲奇氏。曰諒。入龍岡烏石山。以傳鮮于。世系韻書曰。鮮于子姓。周封箕子于朝鮮。支子仲食采於于。因氏鮮于。綱目稱箕子封於朝鮮。其子食采於。因姓鮮于。趙孟頫贈鮮于樞詩曰。箕子之後多髥翁。鮮于之爲箕子後。不旣章明較著乎。洪武間。有鮮于景者爲中領別將。其七代孫寔。自泰川來居殿側今十年。請以寔守箕子祀。殿下重其事。命禮官詢于大臣。且令本道採訪覆啓。事皆有據。廷議咸以爲可。遂以鮮于氏。定爲箕子後。至明年壬子春。命揭殿號曰崇仁。官鮮于。寔爲殿監。子孫世授焉。昔周武王求黃帝堯舜之後。立爲三恪。以奉其祀。聖人崇德繼絶之意。可謂千載一揆也。且命府尹封墓道修祠宇。增置祭田及守戶。使之供粢盛備洒掃。凡姓鮮于者復其家。毋籍于軍。俾聚居祠下。仍遣近臣。齎香祝祭于廟。以告厥由。尊崇之典。至是而無復遺憾。此實扶植彝倫。挽回世道之一大機會。嗚呼盛矣。始萬曆丙。本道士子慕聖師之遺澤。立書院於府西南蒼光山下。設講堂。名曰洪範。以爲多士欽崇講明之所。歲戊申冬。命扁額曰仁賢。至是觀察使鄭賜湖上聞曰。今茲箕殿揭號。立後致祭。是數千年來所未有之盛擧。一域臣民。擧歡欣聳動。有若重被父師文明之化。咸願勒之貞珉。以揚閎休。乞命儒臣備述前後事迹。庶幾表著觀瞻。傳示無極。殿下曰可。遂命臣敍之。臣適忝禮官。與聞末議。而獲覩曠世之典。承命秪慄。不敢以文辭淺陋。不足以自效爲解。謹拜手稽首而獻銘。銘曰。天錫大範。神禹則之。以傳殷師。殷師嗣興。蒙難乃闡。人文始顯。爰敍彝倫。以承聖。寔維帝訓。旣師武王。錫民之極。義罔臣僕。天地變化。我得其正。明夷自靖。乃眷東土。乃推斯道。實天所造。無遠無陋。八條以化。變夷爲夏。仁涵于膚。道不拾遺。禮義之治。巍乎盛德。百世以欽。受賜到今。浿水西涯。不沫井洫。神迹如昨。肇祠于麗。禮式 不備。寢遠以弛。遙遙聖緖。不絶來雲。派散支分。惟明我后。遵範建極。遠紹絶學。殿有美號。院有華額。益光且碩。立後繼絶。永襲世爵。式是三恪。特祀于廟。牲肥酒香。禮意洋洋。猗歟我王。聖謨其承。賁我中興。墜典畢擧。縟儀彬彬。千古一新。於乎不顯。文在於茲。沒世之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