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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경 - 인류의 새로운 장래
날 짜 : 1975년 4월 14일
장 소 : 한국 서울 장충체육관
행 사 : 희망의 날 한국 9개 도시 순회강연
오늘 저녁에 이와 같이 모여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 앞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과 같이 생각하려는 말씀의 제목은 ‘인류의 새로운 장래’입니다. 지금 우리는 혼란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중세 이후에 몰락하기 시작한 신본주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인본주의 시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물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유물주의 시대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상을 거치면서 그 누구도 확실한 내용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탈이데올로기라는 수습할 수 없는 시점에 처해 있습니다.
절대적 하나님의 대상인 인간의 가치
지금 문제 되는 것은 사람이나 물질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에 대한 확실한 관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신관을 통해 인생관이나 유심사관을 새로이 설정하지 않고는 인류세계의 새로운 장래가 나타날 수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확실히 하나님을 안다면 중세에 몰락하기 시작한 불분명한 신관, 현세의 인본주의 사조, 유물주의 사조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저녁 여러분 앞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어떻게 남겨 주느냐 하는 것을 본인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참되고 영원하며 불변한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를 고대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변하는 인간을 통하여서는 이와 같은 이상적 요건을 성사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시점에 처해 있는 세계 상황을 바라보게 될 때 여실히 증거되는 사실입니다. 이런 때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유일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러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견지에서 참된 사랑, 참된 이상,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의 기원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보는 신관, 하나님 자신으로 보는 인생관, 하나님 자신으로 보는 물질관, 이것을 확실하게 하는 데에서부터 비로소 새로운 평화와 새로운 행복의 세계를 우리는 맞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도 혼자서 사랑이니 이상이니 행복이니 평화니 하는 것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이니 이상이니 평화니 행복이니 하는 말은 혼자 성립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 요건 밑에서 형성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절대적인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 앞에 상대가 없게 될 때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절대적 사랑, 절대적 이상, 혹은 절대적 행복, 절대적 평화도 성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대상적인 존재로 등장할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외에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인간만이 하나님의 이상을 성사시킬 수 있는 대상이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대상이요, 하나님의 행복과 하나님의 평화를 완성시킬 수 있는 대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주체요 인간은 대상입니다. 참된 사랑의 왕이 될 수 있는 하나님, 참된 이상의 왕이 될 수 있는 하나님, 참된 평화의 왕이 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대상인 인간 자체를 두고 볼 때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는 하나님
본인이 여러분 앞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청춘시대에 어떤 남자면 남자가 자기 상대를 취하게 될 때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취하고 싶었느냐, 아니면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취하고 싶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묻는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보다 잘난 상대를 취하고 싶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이 태어날 때 자기보다 못난 자식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느냐 하면 그런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잘난 자식, 자기보다 훌륭한 자식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 상대나 자기 자식이 잘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 본성의 욕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구를 닮았기 때문입니까? 인간은 어디까지나 원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결과적인 존재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대상이나 자기 아들이 자기보다 잘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러겠습니까? 원인 되시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자기 가치를 형편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야 이거 무가치한 것이다.’라고 동물과 같이 자기를 취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한 가지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보다 잘나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돌아간다면 이는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당한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에서만이 참다운 사랑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요, 참다운 이상과 참다운 행복과 참다운 평화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자들은 창조주와 피조물은 대등한 자리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이상적 하나님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이상적이면 무엇합니까? 혼자서 행복할 수 있습니까? 혼자서 평화니 자유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볼 때 인간은 본연의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렇지, 본연의 가치를 지녔더라면 하나님이 높일 수 있는 인간이 되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최고의 대상이 되든가 최고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 중에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가 1년이나 혹은 10년쯤 있다가 사라져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을 중삼삼고 대상은 영원합니다. 영원불변입니다. 보다 차원 높고 절대적이고 유일적인 자리에서 불변하며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도 그런 것을 요구하는데, 영원하고 불변하며 유일한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그 대상의 존재가 잠깐 있다가 없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니 그 대상적인 사랑의 존재인 사람도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이론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가지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은, 인생은 영원해야만 된다는 결정적인 결론입니다. 그 정도가 되어야 인간이 만물지중(萬物之衆)에 최귀(最貴)라고 하는 말이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영원해야 됩니다. 인생은 불변해야 됩니다. 인생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유일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주체이니 그 사랑과 이상과 행복의 대상인 인간도 그래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 이상적 실현이 가능하고, 사랑의 세계가 가능하며, 또 행복의 세계가 가능하며, 평화의 세계가 가능하며, 참된 자유의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체와 대상적인 관념을 여러분이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천지창조와 타락의 기원
우리는 지금까지 천지창조의 이상적 기원을 어디에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창조라는 그 말 자체는 무엇을 뜻합니까? 모든 것의 투입을 말합니다. 생각하는 그 자체가 생겨나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해당하는 자기 자체의 힘을 투입해야 됩니다. 투입하는 데서부터 존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놓고 하나님이 생각하면 길은 두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대상이 주체를 위하는 길과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그 대상인 인간을 지어 놓고 인간을 위하는 길의 두 길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상적 근원지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주체가 되는 하나님 앞에 대상적인 모든 존재들은 절대복종하라, 주체만을 위하라 하는 날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남성격 주체로 계시듯이 인간 가운데 남자와 여자를 중심삼고 남자가 주체이고 여자가 대상이라면 그 남자도 여자에게 ‘주체를 위하라.’라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왕 되시는 하나님께서 대상을 중심삼고 ‘위하라.’라고 하는 자리를 설정하게 될 때에는 모든 것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이상적 기원은 자기를 위하라고 하는 자리에 둘 수 없고, 상대를 위하라고 하는 자리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타락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도록 되어 있고, 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로 위하여 존재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벗어나서 인간 자체가 자주적 자아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 타락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중심삼고 모든 것을 위하라고 하는 자리에 자기 자신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타락의 기원이 생겼습니다. 천리원칙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위하여 존재하는 원칙
인간이 하나님의 본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했더라면 여기에서 이상세계의 실현이 가능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사람 자체를 중심삼고 주체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타락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의 공식적 결론을 내린다면 모든 이상적 창조물, 존재물은 위하여 존재하는 원칙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부모는 자식을 위해 태어나고 자식을 위해 살다가 자식을 위해 죽는 부모입니다. 그 부모는 아들에게 있어서 참된 사랑의 부모요, 참된 이상의 부모요, 참된 행복의 부모이며, 참된 평화의 주체적인 부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효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태어나기를 자기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태어나고, 살기를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살며, 죽기를 자기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서 죽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자가 생겨나게 된 기원은 어디입니까? 남자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여자가 좋은 옷을 입고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 때문에 하는 여자가 있습니까? 남자 때문입니다. 여자가 태어나게 된 기원은 남자입니다. 서로 위하여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발발합니다.
그러면 이상적인 남편은 어떤 사람입니까? 언제나 자기만을 위하라는 사람이 이상적인 남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된 남편, 참된 부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남자는 아내를 위해 태어나 아내를 위해 살다가 아내를 위하여 죽겠다고 하는 그 자리에서만이 ‘아! 이상적인 남편이요, 영원불변한 나의 사랑의 주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남편을 가진 아내는 ‘나는 행복한 부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가정이 평화의 가정이 아닐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라고 하는 남편을 가진 여자는 불행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위해 존재한다는 원칙을 우주 창조의 기원으로 설정하신 지혜의 왕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높이 찬양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하나의 결론을 찾았습니다. 위하여 존재하는 데서만이 참된 사랑이 시작될 수 있고, 참된 이상이 시작될 수 있고, 참된 행복이 시작될 수 있고, 참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이 공식을 우리는 여기에서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우주 창조의 공식을 설정했다면 이 공식을 통하여서만이 하나님이 바라는 사랑도, 하나님이 바라는 이상도, 하나님이 바라는 행복도, 하나님이 바라는 평화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그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애국자·위인·성인은 가장 큰 것을 위하는 사람
이 공식을 적용하면 참된 애국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할 때에 그는 태어나기를 나라를 위해서 태어나고, 살기를 나라를 위해서 살다가, 죽기를 나라를 위해서 죽어 간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그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해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 간 사람이라면 이는 애국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분이 애국자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등급을 매긴다면 더 위해서, 더 위해서 산 사람이 우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비참한 자리에서 지조를 가지고 더 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는 보다 차원 높은 애국자입니다. 이 공식을 통한 결론은 자동적인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 많은 위인과 성인이 왔다 갔는데, 도대체 역사과정에서 제일 위대하고 제일 훌륭했던 그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공식을 통해서 우리는 대번에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냐 하면, 태어나기를 인류를 위해서 태어났고, 살기를 인류를 위해서 살다가, 죽기를 인류를 위해서 죽으면서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복을 빌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이는 역사상의 어떠한 성인보다도 위대한 성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다른 종교 사람들도 많이 오셨을 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한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만민을 위해서 왔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만민과 하나님을 위해서 왔습니다. 또한 자기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천리법도를 따라 좋은 때나 나쁜 때나 위하는 원칙에 백 퍼센트 합격한 분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보호하여 기독교를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 종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위하여 존재하라’는 두 마디로 종결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분석한다면 간단합니다.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라는 것은 천륜의 대도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위함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위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물의 이상적 기원이기 때문에, 이 기원을 설파하고 그 기원에 일치될 수 있는 생애를 걸어간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아무리 내용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 두 마디로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위하여 존재하라고 하는 여기에 다 끝납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라는 역설적인 논법이 천지창조의 원칙적 기원을 통해서 볼 때 진리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영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줄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특정한 은사를 입어서 영계에 대한 내용을 잘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 세계의 구조가 도대체 어떻게 돼 있습니까? 천국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갑니까?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운 자리에 가는 사람은 도대체 어떠한 종류의 사람입니까?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은 못 가는 곳입니다. 이상적 근원이고, 창조의 중심존재인 하나님 자신도 우주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원칙적인 중심존재로 계시는 그 천국 구조는 간단합니다. ‘위하여 존재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라는 결론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우리의 본향, 본연의 세계입니다. 그 본향의 법도에 알맞을 수 있게끔 훈련시키기 위한 장소가 무엇입니까? 종교입니다. 그러면 종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권주의자들과 같이 자기 교파를 위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기의 교권을 넘어서라도 하나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사는 교파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교회를 위해서 살고 자기 교회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대해서 싸우고 인류를 위해서 가는 교파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종교란 어떤 종교인가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라는 것은 그 본향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도록 그 법도에 맞게끔 훈련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이래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던 수많은 종교는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희생봉사하라!’라고 왜 그런지를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희생봉사를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본연의 세계가 위할 수 있는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훈련과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희생봉사를 강요한 것은 역사시대에 하나님이 역사과정을 통해 섭리해 왔다는 사실임을 여기에서 공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종교가 어떤 종교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주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계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독교의 본연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류 구도의 책임을 다해야 됩니다. 그러지 못하면 심판대 앞에 서서 갈 길을 가지 못합니다. 본인이 알아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는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를 위해서 자기의 나라는 물론이요, 자기의 교단이나 자기의 교회를 투입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려 가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 나라를 더 위하고, 누가 세계 인류를 더 위하느냐 하는 원칙을 두고 볼 때에 참과 거짓은 확실히 갈라지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위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하나님은 왜 위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겠습니까? 그 내용적 요건을 내가 몇 가지 말해 보겠습니다. 진정으로 자기 생명을 걸고 여러분에게 신세를 지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들이 100퍼센트의 신세를 졌으면 그 신세를 갚는 데 50퍼센트만 갚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100퍼센트 이상 갚고 싶겠습니까? 여러분의 본성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100퍼센트 이상 갚고 싶은 본심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본심을 따라 구원받을 수 있는 가망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의 왕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위해 사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위해서 살 때는 영생할 뿐만 아니라 번창이 벌어집니다. 거기에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신세를 졌으면 신세를 갚는 데 적당히 갚을 리가 만무합니다. 진정으로 생명을 걸고 그 이상 갚고 싶은 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 위해서 존재하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요인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 가정에 여덟 식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여덟 식구 가운데 맨 나이 어린 동생이 가정을 위하는 데에 있어서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형님이나 누나보다도 그 가정을 더더욱 위하게 될 때에는 어떠한 자리에 나갑니까? 점점 높임을 받아서 중심적 존재로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날 종교에서 가르쳐 준 모든 논리가 역설적인 것 같지만 위해서 존재하는 이 원칙을 따라가 보게 될 때 보다 위하는 존재일수록 보다 차원 높은 중심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돼서 중심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은 만우주를 위해서 존재하므로 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와 같이 닮은 존재를 하나님을 대신한 중심존재로 세우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진정으로 위하는 주체 앞에 진정으로 위하는 대상이 될 때 자연히 중심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정치철학에서 문제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 고심거리였습니다. 여기에서 간단하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위하는 입장에 서서 그 중심존재 앞에 지배를 받고 주관을 받는 것이 오늘날 인간은 부끄러운 줄 알았습니다. ‘남에게 지배받고는 못 살아!’라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자기를 위하는 사람 앞에 완전히 주관받고 지배받을 수 있는 자리가 얼마나 행복한 자리인지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계에 가게 된다면 하나님은 천지의 중심존재로 계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 천년만년 지배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이상의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진정으로 지배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러한 분이 있다면 거기에 참다운 평화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위하는 존재는 중심존재가 되고, 중심존재가 됨으로써 완전히 통일적인 환경을 여기에서 조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요인은 무엇입니까?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랑’ 하면 ‘그것은 내 사랑이다.’라고 생각하기 쉬웠다는 것입니다. ‘사랑’ 하면 그것을 여러분은 자기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사랑은 어디서 옵니까? 사랑은 내게서 오지 않습니다. 이상도 내게서 오지 않습니다. 생명보다도 귀한,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사랑과 이상은 나로부터 올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상대로부터 오게 됩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상대가 고귀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보다 귀한 사랑과 생명보다 귀한 이상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것을 봐서라도 겸손히 머리 숙여야 되며, 위하라는 법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교회를 통일하기 위한 하늘의 작전
문 아무개라는 사람은 재림주라는 이름을 갖고 제일 피해를 많이 입은 대표자입니다. 통일교회가 도대체 어떤 교회냐 하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통일교회 이름 그대로 교회를 통일해 보겠습니까? 교회를 통일할 수 있습니까? 로마 가톨릭과 갈라진 이후 희랍정교가 95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아직까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도 4백여 교파로 분립되어 서로서로 물어뜯으면서 수백년 동안 싸워 나왔습니다. 이것을 통일한다니, 통일교회의 그 문 아무개라는 사람이 정신이 조금 돌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간단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하여서 가능합니까? 위해 존재하는 이 원칙을 통하여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논법에 의해 지금까지 30년 동안 기성교회로부터 별의별 모략중상을 다 받았지만 가만히 있었습니다. 못나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리법도는 너무나 엄연하고 냉혹한 원칙을 가려 가는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묵묵부답으로 나왔습니다. 마치 하나님같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차원 높고 선한 기독교의 한 사람을 죽여 놓으면 몇 백배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맞고 빼앗아 나오는 하늘의 작전이 있다는 것을 본인은 알았습니다. 기성교회가 모두 합해서 통일교회를 반대하더라도 통일교회가 선하게 될 때에는 그것을 통일교회에 손해배상으로 옮겨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넘고 가정을 넘어 종족·민족·국가·세계, 더 나아가서는 이 우주를 넘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위한다고 하는 한 사람, 그러한 하나의 단체, 그러한 하나의 민족, 그러한 하나의 국가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와 같은 것을 찾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앞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그 자리에 나가 보자고 몸부림치는 모습이요 단체인 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상적 실현이 가능한 단계적 법칙과 공식으로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가정은 종족과 친척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또한 종족은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국가는 자기 국가를 위주로 하여 세계 국가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국가를 희생시켜서 세계를 위하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한 국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 실현이 가능한 단계적 법칙
독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독재주의 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나라를 위주로 하여 수많은 민족과 나라를 짓밟겠다고 하는, 나를 위해서 너희가 살아야 된다고 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인 독재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오늘날 공산주의는 1957년을 한계로 소련과 중공이 결렬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이 슬라브족만을 위한 세계 공산주의를 주장하게 되니까 거기에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소련을 종주국으로 한 공산주의를 꿈꿨기 때문에 그 공산주의는 갈라져야 됩니다. 그러나 소련 공산주의가 세계 공산주의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사상을 가졌다면, 중공과 소련이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은 초민족적인 사상 기준의 설정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주도국가인 미국도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는 어떻게 가야 됩니까? 미국이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하면 민주주의를 거느려 세계를 위하는 데에 있어서 미국을 희생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세계를 버리더라도 미국을 위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미국은 오늘날 비참한 처지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이상과 사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그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구하겠다고 하는 국가와 민족이 나타나거든, 그 당시에는 비참한 자리에서 희생될지 모르지만 25세기나 30세기 이내 어느 한때에 세계가 필요로 하는 때가 반드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가서는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대한민국만을 위주로 한 대한민국을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를 위한 대한민국을 누가 설정하며, 세계를 위한 대한민국을 누가 설정하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위한 대한민국을 그 누가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오늘날 비참한 가운데 놓여 있는 한국 백성이 바로 찾아가야 할 직행길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교회를 희생시켜 가면서라도 공산주의와 첨단에 서서 싸우고 있습니다. 민주세계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희생을 각오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단체가 희생되더라도 이 엄숙한 사상을 남기는 터전 위에는 하나님이 기필코 함께하실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가에서 민족 반역자로 몰려 30대 청년으로 죽은 예수님이 세계를 지도할 민주세계를 창건할 수 있는 국가관의 사상을 가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묵묵히 이 길을 닦아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 세계 25개국에서 찾아온 국제기동대원들에게도 ‘너는 너희 나라보다도 세계를 더 사랑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요, 참된 종교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땅까지 그들은 한민족을 자기 민족 이상 사랑하자는 운동을 제시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을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상세계를 향한 공식적인 삶을 살자
하나님은 세계를 위해서 책임질 수 있는 그 나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그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기독교회 혹은 통일교회의 하나님이 되고 싶소?’라고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기독교회의 하나님이나 통일교회의 하나님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하나님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보다 차원 높은 길을 위해 가는 무리는 보다 차원 높은 자리에 있어서 영원하고 번창하여 그 환경에서 중심이 되어 자동적으로 주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이상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또한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가정은 종족을 위하여 사는 것이 공식적인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개인적 인생관이나 국가관 혹은 우주관이나 신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공식이 나오게 됩니다. 가정은 종족을 위하여, 종족은 민족을 위하여, 민족은 국가를 위하여, 국가는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사는 것이 이상입니다. 여러분은 최고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있다.’라고 하고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위해 있다.’라고 하는 자리에 가야 평화와 행복, 이상, 참다운 사랑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결론을 짓는다면 내 것은 아내의 것이요, 부모의 것은 가정의 것이요, 가정의 것은 종족의 것이요, 종족의 것은 민족의 것이요, 민족의 것은 국가의 것이요, 국가의 것은 세계의 것이요, 세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은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그 세계, 개인으로도 위하고, 가정으로도 위하고, 사회로도 위하며, 국가와 세계적으로도 위할 수 있는, 어디에 가나 위할 수 있는 곳이 우리가 바라는 최고의 이상경입니다. 이상경이기 때문에 참된 사랑이 있고, 참된 평화가 있고, 참된 행복이 있고,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그곳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세계입니다.
또한 지상에서 그런 세계가 벌어지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있다면 지상천국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이러한 곳을 향하여 전진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이렇게 구현된 세계가 벌어지게 될 때 인류의 새로운 장래,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본인의 말씀을 끝마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