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태사(太師) 묘단기(墓壇記)
시조이신 태사 김공(金公) 휘 선평(宣平)은 신라 말에 고창성(古昌城)의 성주였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적에 공이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군(郡)을 가지고 귀의하자, 태조는 그 지역을 얻어 마침내 병산(甁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 때문에 의롭다는 명성이 더욱 퍼져 마침내 견훤을 멸망시킨 것이니, 이는 본디 공 등 세 사람의 힘이었다. 공훈을 표창할 때 맨 먼저 공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은 다음, 세 사람 모두에게 삼한 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태사 벼슬을 시켰으며, 고창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공이 별세한 뒤에 안동 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기리며 관부(官府)에 사당을 세우고 권행, 장길 두 태사와 함께 나란히 향사(享祀)하였는데, 지금까지 향사가 끊기지 않고 있다. 이 일은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이 지은 기문(記文)에 실려 있다.
공이 고창을 다스릴 때에 신라는 이미 운이 다하여 역적 견훤이 임금을 핍박하였으니, 반드시 복수하는 것이 의리였다. 그러나 공의 상황은 외로운 성 하나를 가지고 역적의 군대와 충돌하면 자립하지 못하여 큰일을 이룰 수 없는 형세였다. 그래서 계책을 세워 고려에 붙어서 함께 원수를 멸망시킴으로써 그 의리를 스스로 폈다. 이는 장 사도(張司徒 장량(張良))가 한(漢)나라를 도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은 일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그 유풍에 격발되어 백성들도 용감히 의리를 지켰다. 이를테면, 야별초(夜別抄)와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백성들이 모두 죽을힘을 내어 임금을 보호함으로써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었으니, 공은 참으로 이 지방에 은덕을 끼쳤다 할 수 있고, 사당의 향사를 백대토록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공의 묘소는 오랜 세월 속에 그 처소를 알 수 없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부(府)의 서쪽 옛 태장리(台莊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증조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부군(府君)께서 일전에 일가를 이끌고 두루 찾으러 다니며 글을 지어 천등산(天燈山)에 기도하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부의 서쪽 10여 리 되는 곳에 태장봉(台莊峯)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천등산의 왼쪽 산기슭이다. 그 아래는 지명이 당동(堂洞)인데, 나무하고 사냥하는 촌사람들은 모두 태사묘동(太師墓洞)이라고 부른다. 숭정(崇禎) 병인년에 일가 김인(金𡐔) 등이 그 이름을 가지고 찾아 그곳에 가 보니, 신씨(申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대에 걸쳐 매장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무덤 뒤 10여 보쯤 되는 곳에 오래된 무덤 같은데 평평한 것이 있었다. 그곳은 섬돌 바깥쪽의 둘레와 너비, 무덤의 둘레를 분별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규모가 큰 무덤인 듯했고 그 형국(形局)과 안대(案對)가 또 대부분 옛 전적 및 시골 부로(父老)들의 기억과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열에 여덟, 아홉은 증명할 수 있었고, 또 들리는 말에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매장할 때에 실은 두 기(基)의 옛 무덤을 파내어 다른 곳에 옮겨 묻었으며, 또 섬돌 아래에 묻혀 있던 지석(誌石) 같은 돌을 발견하고는 숨겼다고 하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에 일가가 함께 그 일의 전말을 갖추어 고을에 소송을 제기하자, 고을에서 조사하여 과연 옛 무덤을 파낸 실상을 알아내었다. 그리하여 즉시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의 무덤을 파내었으나 돌은 끝내 발견되지 않아 태사공의 무덤이라는 증거를 댈 수 없었고, 고을에서도 그 일을 끝까지 밝히려 하지 않아 일이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쩔 수 없게 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태사공은 신라, 고려의 교체기에 공을 세워 역사책에 이름이 실려 있으며 고을에 은택을 끼쳤다. 자손들이 그 음덕(陰德)으로 번성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의관(衣冠)이 묻힌 곳을 잃어버려 수백 년 동안 성묘 한번 하지 못하였다. 이제 다행히 진짜 묘소를 찾았으나 간악한 사람에게 점유당하여 산소가 훼손되고 비석이 사라지는 바람에 끝내 진실을 증명하고 봉축(封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애통하고 근심스럽다. 선조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옛날 제사 지내는 방법 중에는 본디 묘소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제단(祭壇)을 세워 제사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지금 그것을 본떠 제단을 만들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선조의 체백(體魄)이 묻힌 곳처럼 느끼게 하고 밭 갈고 나무하고 소 먹이는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예법상 괜찮을 것이다.” 하였다. 모두들 그렇겠다고 동의하므로 마침내 제단 터를 잡고 모년 모월 모갑자에 당동 안에 땅을 고르고 제단을 만들었다.
제단이 완성된 뒤에 제사를 지내고 종인(宗人)이 모두 모여 이 뒤로는 봄가을로 무덤에 제사 지내는 의식과 똑같이 향사하여 영구히 준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제단 옆에 비석을 세우고 이 일을 새겨 넣어 후인들이 알 수 있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에 백부가 나 창협에게 그 전말을 초안으로 갖추어 글을 짓는 사람이 채록(採錄)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므로, 위와 같이 삼가 쓰는 바이다.
始祖太師墓壇記
始祖太師金公諱宣平。新羅末。爲古昌城主。麗太祖討甄萱。公與權幸,張吉。以郡歸附。太祖得之。遂有甁山之捷。由是義聲益振。卒以滅萱。本公等三人力也。策功。首以公爲大匡。權幸,張吉爲大相。俱賜號三韓壁上功臣。爵太師。陞古昌爲安東府。公旣卒。安東民。思其功德。立廟府司。與權張二太師並享。至今不絶。事具退溪李文純公所爲記中。蓋當公之守古昌也。羅運旣訖。而逆萱戕虐君父。義在必報。顧公以孑然一孤城。當凶鋒之衝。不能自立而有爲。則決策附麗。共滅讎賊。以自伸其義。此殆與張司徒佐漢滅秦楚。以報韓仇者相類。而其遺風所激。民勇於義。如夜別抄及紅巾賊之亂。皆能出死力。以衛君上。遂成美俗。此尤公之所以爲德於一方。而其於廟食百世。宜矣。獨公墓宅。歲久失其處。勝覽記。其在府西古台莊里。而自曾祖文正公府君。嘗率諸宗人。徧行尋求。至爲文以禱于天燈山而竟不得焉。府西十餘里。有峰曰台莊。卽天燈山之左麓也。其下地名堂洞。而村人樵獵者。皆稱太師墓洞云。崇禎丙寅。宗人金𡐔等。以其名尋求至其地。有申姓者葬其中累世矣。直一墓後十許武。有若古冢而夷者。堦砌外周。廣輪可辨。蓋類大葬焉。而其形局案對。又多與古籍及鄕父老所記者合。旣十八九可徵。而又聞申姓之葬也。實發二古冢。瘞之他所。而於砌下。又得埋石若誌者匿之。益可疑。於是諸宗人。相率具其事。訟之官。官爲逮問。果得其發冢狀。卽掘去之。而石終不可得。無以爲驗。官亦不肯竟其事。事遂已。旣已無可奈何。則有言曰。惟我太師。功在羅麗之際。名顯史策。德施鄕邦。子姓蔭庥。不爲不蕃。而衣冠之葬。失不知處。歷幾百年。灑掃莫及。今幸幾得眞兆。而顧爲奸人盜占。塋域毀傷。碑版泯滅。卒無以驗其實而加封築焉。痛心疾首。其何以慰追遠之思。唯古者之祭。固有望墓而壇者。今若倣而爲之。使來者得以彷像其體魄所在。而耕犁樵牧。亦無敢闌入焉。則於禮其或可。咸曰然。遂卜用某年某月某甲子。除地爲壇於洞中。旣成而祭。宗人咸會。自是春秋享祀。一如上冢儀。期永久遵行。而且謀立碑壇側。鑱記其事。以詔後之人。伯父命昌協草具其本末。以備立言者採錄。謹書之如此云。
[주1] 숭정(崇禎) 병인년 : 숭정은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인데, 숭정 연간에는 병인년이 없고 숭정 2년 전인 천계(天啓) 6년(1626, 인조4)과 60년 후인 강희(康熙) 25년(1686, 숙종12)에 들어 있다. 구체적인 사실 관계의 규명이 필요하나, 후자일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