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선생 사적 (3)
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공은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가서 노력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나라에 도착해서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 갑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 18세였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변(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공을 종사순관(從事巡官)에 임명하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와 징병(徵兵)하고 고격(告檄)하는 글 등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공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나이 28세 때에 희종이 공에게 어버이를 찾아뵈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조서(詔書)를 지닌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이 공을 그대로 머물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수하였다. 공 자신도 중국에서 배워 얻은 것이 많았으므로 귀국해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퇴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太山郡)- 지금의 태인(泰仁)이다. - 태수(太守)가 되었다.
당 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년(893)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7년에 해당한다. 공이 그때에 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서산(瑞山)이다. - 태수로 있다가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당나라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해마다 기근이 들면서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나라에 간 적이 있다.
진성왕 8년(894)에 공이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에 임명하였다.
공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나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나 모두 어렵고 험한 운세를 만나서 걸핏하면 낭패를 당하곤 하였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신세를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할 뜻을 지니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림(山林) 아래나 강해(江海)의 주변에서 소요하고 자적하며, 대사(臺榭)를 짓고 송죽(松竹)을 심는가 하면 서사(書史)를 벗 삼고 풍월(風月)을 노래하였는데, 예컨대 경주(慶州)의 남산(南山)과 강주(剛州)의 빙산(氷山)과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와 합포(合浦)의 월영대(月影臺) 같은 곳은 모두 공이 노닐던 곳이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마음 편히 노닐면서 노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쳤다.
처음에 중국에 유학할 당시에 강동(江東)의 시인 나은(羅隱)과 알고 지내었다. 나은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지은 가시(歌詩) 5축(軸)을 누가 그에게 보여 주자 그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또 동년(同年)인 고운(顧雲)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공이 귀국할 즈음에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에게 심복(心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쌍의 황금 자라 我聞海上三金鼇
황금 자라 머리 위에 높고 높은 산 金鼇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주궁패궐 황금전이요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드넓은 바다라네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옆에 푸른 한 점 계림이 있는데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걸한 인물을 내었나니 鼇山孕秀生奇特
십이 세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뒤흔들다가 文章感動中華國
십팔 세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十八橫行戰詞苑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네 一箭射破金門策
[三國史本傳]
三國史本傳。崔致遠字孤雲。一字海雲。新羅沙梁部人也。公美風儀。少精敏好學。至年十二。將隨海舶。入唐求學。其父謂曰。十年不第。卽非吾兒也。行矣勉之。公至唐。尋師力學。以唐僖宗乾符元年甲午。禮部侍郞裵瓚下一擧及第。時年十八。調授宣州漂水縣尉。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時黃巢叛。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辟公爲從事巡官。委以書記之任。其表狀書啓徵兵告檄。皆出其手。其檄黃巢。有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之語。巢不覺下牀。由是名振天下。及年二十八。僖宗知公有歸寧之志。使將詔書來聘本國。憲康王留公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公自以西學多所得。及來欲展所蘊。而衰季多疑忌。出爲太山郡 今泰仁 太守。唐昭宗景福二年。卽眞聖王之七年。公時爲富城郡 今瑞山 太守。祇召爲賀正使。將入唐。以比歲饑荒。盜賊交午。道梗不果行。其後亦嘗奉使如唐。眞聖王八年。公進時務十餘條。王嘉納之。以爲阿飡。公自西仕大唐。及至東歸故國。皆遭亂屯邅蹇連。動輒得咎。自傷不遇。無復仕進意。逍遙自。山林之下。江海之濱。營臺榭植松竹。枕藉書史。嘯詠風月。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川淸涼寺,智異山雙溪寺,合浦月影臺。皆公遊焉之所。最後帶家隱伽倻山。棲遲偃仰以終老焉。始西遊時。與江東詩人羅隱相知。隱負自高。不輕許可人。人示以公所製歌詩五軸。隱乃歎賞。又與同年顧雲友。善將歸。顧雲以詩送別。我聞海上三金鰲。金鰲頭戴山高高。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傍邊一點鷄林碧。鰲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橫行戰詞苑。一箭射破金門策。蓋心有所服云。新唐書藝文志。載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註云。崔致遠。高麗人。賓貢及第。其名顯上國如此。又有文集三十卷行於世。高麗顯宗時。從祀文廟。諡文昌侯。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라고 기재하고, 그 주(註)에 “최치원은 고려인(高麗人)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상국(上國)에 이름을 떨친 것이 이와 같다. 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주1]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말한다. 본 《고운집》에 실려 있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실린 열전을 전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전재하지는 않고, 간간이 삭제하거나 보충한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의 내용, 불교도와 친분을 나눈 내용, 고려의 태조를 은밀히 도왔다는 내용 등은 삭제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격황소문(檄黃巢文)〉의 내용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에서 따다가 보충해 넣었다. 또한 문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수정한 부분도 종종 보인다. 《삼국사기》의 열전 부분은 기존의 번역서가 많이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병도(李丙燾)의 《국역 삼국사기》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주(譯註)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
[주2]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한다.〔致遠乃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 味呑寺南 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하였다.
[주3] 부친 : 고운의 아버지는 이름이 견일(肩逸)이며, 일찍이 숭복사(嵩福寺)의 창건에 참여하였다.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이르기를, “김순행(金純行)과 나의 아버지 최견일이 일찍이 이곳에서 일을 하였다.” 하였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4]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 : 율수현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 율양현(溧陽縣)이고, 위(尉)는 도적을 잡고 죄수를 다루는 관직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5] 고변(高騈) : 당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중국 섬서성 유주인(幽州人)이다. 글을 좋아하여 선비를 친구로 삼았는데, 여러 차례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황소의 난을 진압할 때 진격을 늦추자 싸울 의지가 없다고 하여 중도에 병권을 빼앗겼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3쪽》 또 ‘騈’의 음은 ‘변’과 ‘병’ 두 가지인데, 이병도는 ‘변’으로 읽었고, 북한본ㆍ이재호본ㆍ신호열본에서는 ‘병’으로 읽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본에서도 ‘병’으로 읽었다.
[주6] 그중 …… 떨어졌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추가해 넣은 것이다.
[주7] 태산군(太山郡) :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이다.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현재 정읍시 칠보면에는 최치원을 배향한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이병도는 현재의 부여군 홍산면 일대로 보았으나(《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83, 676쪽》)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5쪽》
[주8] 부성군(富城郡) : 신라 웅주(熊州)에 속한 군의 하나로, 현재의 서산시(瑞山市)이다. 고려 인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명종이 관호를 없앴다가 충렬왕 때 서산으로 고쳤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3쪽》
[주9] 진성왕 …… 임명하였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보충해 넣은 것이다.
[주10]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 강주는 지금의 영주(榮州)로, 고려 성종 때 영주에 강주 단련사(剛州團練使)를 두었다. 빙산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이다. 의성은 당시에 영주 소관 하에 있었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주11] 그리고 …… 마쳤다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보면, “모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를 맺었다.〔與母兄浮屠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최치원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편자가 최치원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주12] 나은(羅隱) : 833~909. 자는 소간(昭諫), 자호는 강동생(江東生)이다. 당시에 시명(詩名)을 천하에 진동시키며 특히 영사(詠史)에 뛰어났으나 기풍(譏諷)이 많은 까닭으로 종신토록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난리를 피해 향리로 내려갔다가 절도사(節度使) 전류(錢鏐)에게 발탁되어 종사관으로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舊五代史 卷24 梁書 羅隱列傳》
[주13] 고운(顧雲) : 당나라의 시인으로 최치원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자는 수상(垂象), 사룡(士龍)이라고도 한다. 지주(池州) 사람이다. 두순학(杜荀鶴)이나 은문규(殷文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구화산(九華山)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통(咸通) 15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高駢)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사(從事)하였다. 필사탁(畢師鐸)의 난 이후에는 삽주(霅州)로 물러나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건녕(乾寧) 초에 졸하였다. 저서로는 《봉책연화편고(鳳策聯華編稿)》와 《소정잡필(昭亭雜筆)》이 있다.
[주14] 내 …… 자라 :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전한다.
[주15] 고려인(高麗人) : 신라인(新羅人)의 오기(誤記)이다
[주16] 고려 …… 내렸다 : 《고려사》 권4 〈현종세가(顯宗世家) 1〉에 의하면, 현종(顯宗) 11년(1020) 8월에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그 동시에 선성(先聖)의 묘정(廟廷)에 종사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현종 14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