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10(수)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읽고, 이야기 나누었다. 아무래도 왜 캐러웨이는 개츠비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라는 의문에 집중한 모임이었다. 그 '위대함'이란 데이지에 대한 숭고하기까지 한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물론 그렇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향해 질주하고, 몰락한 인간이다. 만일 개츠비가 몰락이 아니라 데이지와의 사랑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몰락하는 존재에 대해 이토록 흥미와 감흥을 느끼는 것일까? 모든 위대한 이야기는 어떤 몰락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미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 예정된, 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락을 향해 걸어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 그 비극적 이야기를 보았다. <모비딕>은 신에 저항했던-이미 몰락이 필연적이었던-에이허브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몰락이 없다면 인간의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우리는 개츠비의 데이지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순수한 사랑의 의지 뒤에 감추어 두었던 개츠비의 몰락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캐러웨이가 개츠비에게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한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2. <위대한 개츠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떤 이는 여기서 개츠비의 데이지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읽고, 어떤 이는 무너져 내리는 미국의 꿈(아메리카 드림)을 읽고, 또 누구는 돈과 환락, 속도,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고독 – 미국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라-을 읽을 수도 있겠다. 혹 누구는 톰 뷰개넌과 데이지 뷰캐넌, 조던 베이커, 개츠비 등의 인물이 그리는 아침에 상영되는 막장 드라마, 그 적나라한 인간 욕망의 물고 물리는 한편의 치정극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나아가 이것을 제이 개츠비의 성공과 몰락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 소설을 캐러웨이가 만든 한 허구적 인물의 허구적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읽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 개츠비의 몰락 - 개츠비에게 더 많은 가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밤마다 벌이는 그 만화경 같은 환락과 쾌락의 파티는 그가 쓴 가면이다. 그 가면은 너무나 정교하여 그의 파티에 참여하는 어느 누구도 그 가면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 그는 살인자이며,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용감한 장교이며,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며, 혹은 왕족의 피가 흐르는 귀족의 후손이다. 그리고,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개츠비는 익명의 존재이다. 어느 누구도 개츠비에게 인칭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 사이에서 부유하는 안개, 혹은 재의 골짜기를 뒤덮은 뿌연 먼지 같은 존재이다. 즉, 사람들은 개츠비가 누구인지 모르며,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개츠비는 환영과 상상의 동물이다. 그는 수백개의 가면을 능숙하게 쓸 줄 알며, 변장술의 대가이다. 어쩌면 개츠비의 몰락은 그 최후의 가면을 벗어던지려고 했던 부질없는 몸부림 - 과거를 반복될 수 있다는 그 믿음-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개츠비가 마지막으로 벗어던지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가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환영과 상상의 세계가 진리인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몰랐던 개츠비의 몰락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가? 남편/아내, 아버지/어머니, 아들/딸이라는 가면속에서는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능숙하게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교사라는 가면을 집어 던지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몰락의 시작이다. 몰락 이후 우리가 도달할 곳은 어디인가? 개츠비의 죽음은 그가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려는 순간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4. 과거가 없는 존재 - 데이지는 과거가 없는 존재가 아닌가? 개츠비가 자신의 환영, 상상이 만든 과거를 무한 반복하고 싶어하는 존재라면 데이지에게는 그런 과거가 없다.(혹은 망각되었다.) 개츠비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자신만을 사랑했다는 과거에 대한 증명은 데이지에게 애초에 없던 것이었으며, 그것은 가당찮은 요구였던 것이다. 데이지의 현재는 과거가 끊임없이 지워지면서 - 그건 마치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과 같다. 자동차는 우리에게 세상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며 과거를- 지나온 도로를 끊임없이 지워버리고 내 앞에 펼쳐진 도로를 순간 순간 정복하며 삭제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도달하는 어떤 지점이며, 그 현재마저도 곧 지워지고 삭제되고 망각될 것이다. 어쩌면 과거가 없는 존재로서의 데이지는 곧 미국이라는 환영과 상상의 나라가 아닐까? 17세기 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이민자이며, 망명자이며, 떠돌이며, 추방된 자, 곧 유토피아를 찾는-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자들에게 과거는 망각되어야 하며, 지워져야만 한다. 그들이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그 경이로움은 어쩌면 망가된 기억, 망각된 역사를 가진 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5.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자신의 삶이, 생애가 꾸며진 것이고, 가상의 세계이며,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고(혹은 눈치채고) 그 가상의 공간으르부터 탈주한다.(혹은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탈주하여 마주하는 세계는 어떤 세상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막이 아닐까?
https://youtu.be/IwDFZVmB0Zk?si=T7FiRsGWFXWWj-1J
장 보드리야르는 미국을 디즈니랜드라고 하였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그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찾은 곳, 정문에서 티켓을 끊어 디즈니랜드 입장하는 순간부터 디즈니랜드가 주는 환상과 환영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서 다시 지루하고 고단한 일상을 지속한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은 디즈니랜드가 아닌가? 디즈니랜드에서 나와 다시 돌아온 일상이 곧 다른 디즈니랜드는 아닌지 보드리야르는 묻고 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버지/어머니, 아들/딸의 가면을 쓰고 거기에 걸맞는 연기를 해야만 한다. 학교에서 우리가 교사/학생으로 연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트루먼이 저 가상의 스튜디오를 벗어나 마주치는 실재는 어떤 모습일까? 트루먼은 저 실재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을까? 당신이 트루먼이라면 어떤가? 일찍이 플라톤이 설파한 것처럼 현실의 그림자, 그 가상의 공간 너머에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이데아가 존재하는가?
어쩌면 데이지가 견디지 못했던, 그래서 거부했던 세계는 게츠비가 만든 상상과 환영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그 상상과 환영의 세계는 - 개츠비가 댄 코비를 만나는 순간 '제임스 개츠'에서 '제이 개츠비'로 상상한 순간- 필연적으로 '재의 골짜기'라는 실재의 사막을 내장하고 있었다. 즉 개츠비의 죽음은 윌슨이라는 실재의 사막의 역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를 이렇게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첫댓글 왜 '재의 골짜기'가 필요했을까? 단지 톰 뷰캐넌과 윌슨 부인(머틀)과의 불륜 관계, 톰 뷰개넌의 인물적 특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인가? 혹시 '재의 골짜기'는 이스트 에그와 웨스트 에그라는 환상과 환영의 공간이 숨기고 있는 실재의 사막이라 할 수 없을까? 환락과 쾌락, 화려함의 이면에 숨겨진 삶의 허무, 고독, 우울, 그 무의미의 실재가 바로 '재의 골짜기'는 아니었을까?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가 배출하는 쓰레기, 먼지, 그 재를 흡입하는 공간으로서의 그곳은 우리가 애써 가리고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삶의 이면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재의 골짜기'를 응시하는, 신과 같이 응시하는 T.J. 에클보그의 눈 - 얼굴은 없고 노란 안경을 쓴 홍채만 있는 눈은 실재의 사막의 공포스런 응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