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백두白頭비 외 1편
이연자
두만강을 지나 일송정을 지날 때
비가 왔다
나는 빗소리도 좋아
자작나무 숲길을 걸었다
말해 뭐해,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자작나무에 박힌 호랑이 눈을 본 것 같다
흰빛 털이 넘실거리는 백호를 본 것 같다
호랑이는 백두비! 백두비!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높은 데를 좋아하는데
작게, 더 작게 내리는 빗소리를 더 좋아하는데
계단을 오르며
헐떡거림과 발자국을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자작나무 숲에서 하늘을 바라봤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물길이 있었고
징검돌이 있었고
죽어서 보고 싶은 구름마을이 있었다
손바닥으로 자작나무를 문질러본다
상처 있는 자리마다 빗소리가 냄새를 피운다
발그림자 끌면서 몸 다친 바람들도
우두커니 빗소리와 함께 저물면서 반짝인다
― Note
나는 낯선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올여름 휴가 대신 백두산에 다녀왔다. 두만강과 일송정 언덕 그리고 윤동주 생가를 두루 둘러보았다. 사실 둘러보았다고 하지만 흙길에 발자국을 내면서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생의 기미幾微를 엿보았다.
배추씨앗을 파종할 무렵
풀벌레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손이 차가운 사람보다
손이 더운 사람에게 가고픈 밤이다
낮엔 청담동에서 불침을 맞았고
밤엔 과자 부스러기를 찾아온 개미를 바라봤다
죽이지 않았다 저것들도 숨이니까
파종이라는 말 속에서
씨앗은 풀벌레소리를 딛고 자랄까
빗소리 끌어 모아 눈을 달고 자랄까
문득 가을빛과 한몸이 되어가는 것들을 생각한다
마당의 구름이 바뀌니까 바람도 바뀐다
무릇 눈에 안보이던 것들이 잘 보인다
녹차를 마시던 시간이 늘었다
기미(幾微)라는 글자를 좋아하면서도
나는 생각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별자리 같았다
공기가 차가워져야 잘 자라는 배추씨앗에게도
제가 신어야 할 신발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을 일그러트리며 지나가는 밤비,
달과 지붕과 물고기가 차가워진다
지금은 배추씨앗을 파종할 무렵
― Note
올가을은 더디게 왔다. 화원집 마당에 배추 모종을 하고 돌아왔다. 흙을 뒤집어 보듯 나는 메뚜기처럼 가을을 읽었다.
이연자 | 2019년 『문예바다』신인상 시 당선. 시집 (세 개의 심장이 뛰는 연못). 여수해양문학상, 포항소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