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 자리
봄이라 그런지 눈이 일찍 떠진다. 같은 시간, 마당에 풀들도 일어설 채비를 하느라 수런거리고 있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마당에 웬 잡풀이 그리 많이 나는지, 훈풍이 불기 시작하자 맨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성을 부리고 있다. 매일 뽑아도 다음 날이면 또 비집고 올라오는 끈질긴 생명력이 놀랍다.
화단에는 너무 일찍 꽃을 피운 홍매화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다. 작은 호미로 굳어진 땅을 조심스레 매주다가 뭉툭하게 머리를 내밀고 있는 자주색 싹을 보았다. 도톰한 머리를 들어 올리며 나오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이게 무슨 싹일까? 자세히 살펴보니 백합이다. 세상에, 지지난해 가을에 묻어둔 백합 뿌리가 겨울잠을 두 번이나 자고 이제야 싹을 틔우다니.
외갓집 뒤란에는 해묵은 감나무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감꽃이 피기 시작하면 나무 옆 두엄자리를 정리하고 그 위에 모래를 뿌려 덮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감나무 아래 가보면 고운 모래흙 위로 감꽃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는 떨어진 감꽃을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놀았다. 오늘 나는 꽃이 질 자리를 살펴주시던 외할아버지의 마음에 닿아있다. 허리를 펴고 만발한 목련꽃을 바라본다. 인생의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의 눈에는 누추하게 떨어질 꽃잎도 함께 보인다. 오래지 않아 떨어질 목련 꽃잎이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라며 나무 아래 잡풀을 뽑는다. 떨어진 꽃잎이 갈색으로 변해 흙 속에 녹아 들어갈 즈음, 꽃이 진 자리에서는 뽀송뽀송하고 도톰한 연두색 잎사귀가 나올 것이다.
오늘은 먼 곳에 사는 아들네 식구들이 집에 오는 날이다. 어느새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는 집에 오면 먼저 마당으로 내달린다. 제 할미를 따라 작은 호미로 꽃밭에서 땅을 파며 앙증맞은 손으로 흙 만지는 걸 좋아한다. 제 아빠처럼 그림도 잘 그리는데 할머니가 수필집을 낼 때 삽화를 그려주겠다고 한다. 웹툰 작가가 되겠다며 등장인물들의 표정을 제가 꾸며내는 이야기에 딱 들어맞게 표현 해내는 것을 보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몹시 궁금해진다.
가까이 사는 딸도 손주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미운 일곱 살을 넘기고 있는 손자는 광활한 우주에 존재하는 팔 행성에 푹 빠져있다. 말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해와 달을 친구라고 한 아이였다. 어두워진 후에 내가 집으로 갈 때면 제 친구인 달이 할머니를 데려다줄 거라 했고, 뜨거운 한낮에는 할머니 땀 난다고 구름 속에 숨어 있으라며 해를 타일렀다. 먼 훗날 내가 안 보이면 달이나 토성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네 살배기 막내 손녀는 내가 퇴직한 이후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아기 때부터 품 안에서 키워서인지 하루 이틀 만나지 못하면 눈앞에 아른거려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전에는 할머니만 차가 없다며 제가 어른이 되면 차를 색깔별로 사주겠다고 통 큰 공약을 내놓더니, 어제는 내 등에 업혀서 제가 어른이 되고 할머니가 아기가 되면, 날마다 업어주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꿈속에서도 나를 웃게 만드는 이 아이가 내 등의 온기를 몸으로 기억해 준다면 참 좋겠다.
앞마당에 풀을 다 뽑고 뒤란으로 나왔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는데 벙긋거리는 목련 꽃봉오리가 뒤뜰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있는 이웃집 목련꽃은 이미 다 지고 없지만, 우리 집 꽃은 지금부터가 한창이다. 동쪽 하늘에서 반사된 연한 살구색 햇살이 땅을 토닥이는 내 손등을 물들이고 있다. 저녁이면 해가 서산으로 기운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해도 알고 있을 터인데, 하늘은 날마다 새댁처럼 고운 물감을 풀어 치장하고 아침 해를 맞이한다. 그런 하늘의 정성을 알기에 오늘 솟아오를 해도 처음인 것처럼 뜨겁게 떠오를 것이다.
어제는 시 숙부님의 발인이어서 공원묘지에 다녀왔다. 다복한 분이었다. 오랜 병환으로 부인과 자식들을 지치게 하고 목련 꽃잎이 지듯 정을 떼고 돌아가신 탓인지 자식 중 누구도 그리 슬퍼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사촌 시누이 남편의 묘지가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아주버님은 생의 정점에서 ‘툭’ 떨어진 붉은 동백꽃처럼 회갑을 채우지 못하고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왔니? 고맙구나, 사랑한다’라고 새겨진 묘비 앞에서 조카들이 ‘아빠, 아빠’하고 울며 부르는 소리에 가슴이 먹먹했다.
지상에서 내가 소풍하는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시누이 남편처럼 동백꽃이 지듯 황급히 마치게 될까? 아니면 시숙부님처럼 남은 기운을 모두 소진하고 목련 꽃잎처럼 누추하게 떨어질까? 이미 나는 동백꽃이 지는 절정의 시기는 지났으니 언제 소풍이 끝나도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가볍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내 소중한 아이들이 내 빈자리가 허전해 눈물 한 방울 달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면 나는 봄바람이 되어 ‘왔니? 고맙구나, 사랑한다.’하고 살랑살랑 속삭이고 싶다.
수필가 김남숙
Profile
2024년 한국산문신인상으로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동서문학회 회원
제5회 KT&G 복지재단 문학상 대상, 제17회 김장생 사계문학상 대상, 제16회 동서문학상 수필 가작, 제10회 문향 전국여성 문학상 대상, 제15회 복숭아 문학상 대상
이메일 주소: nasukim57@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