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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에 대한 애상哀傷의 염원念願
정홍순(시인)
‘지방사 없는 국가 민족의 역사는 없다’고 하였다. 김종옥 시인은 지역의 아픔과 현안의 문제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인이다. 지난 두 번의 시집(『울 엄니 시집가는 날』, 『꽃밥』)을 통해 제주 4‧3과 10‧19 여순에 대한 역사를 조명하며 모두 기억해야할 이웃들의 상흔을 심도 있게 기록하고, 참여하였다. 그가 보여준 시적 행보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고향심상故鄕心想과 우환의식憂患意識’이었으며, 녹록치 않은 주변인(民衆)들의 애절한 삶을 보듬어주고, 함께 나누는 ‘인간애’를 통한 남도의 판소리 가락과 육자배기 장단에 실어 구성지게 서사(narrative)를 풀어내었다. 김종옥은 그에 그치지 않고 ‘부활’이라는 변혁의 주체들로 다시 소환하고 불러들여 다음 세대를 호명하는 작고 여리지만 생명력으로 가득 찬 남도의 정신을 발원發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시인은 끝없이 변화하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세상을 주목하며 자연의 얼굴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작고 어린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도 있겠지만 지렁이, 뱁새, 동박새 등이 시적 대상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현실의 문제는 인간성 상실이거나 농어촌의 소멸과 대를 잇지 못하고 쇠락하는 생태공간만이 아니다. 78년이 지나도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동족의 비극과 잔혹한 정치적 희생으로 잊혀져가고 있는 민중의 참상을 아파하고 이제는 그들을 위하여 ‘비정상에 대한 애상의 염원’을 담은 ‘애원성哀怨聲’의 한 대목을 놓고 있는 것이다.
애원성은 슬프게 원망하는 소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을 원망하는 것일까. 시인은 비정상에 대한 현실을 이렇게 노래한다.
국민보다 나라님 상전인 세상
과연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물이 배를 띄우고 물이 배를 뒤엎지
언제 뒤집힐 날 오겠지
아래로 아래로 흘러드는 물
위로 위로 올라간다
아리 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이들 홀로 장터에서 피리부네
늴릴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젓대 소리에
아이들 청년들 춤추네
아리랑 춤추네
-「아리랑 춤추네」전문
비정상의 기본의미는 어떤 것이 바뀌어 달라지거나 탈이 생겨 나타나는 제대로가 아닌 상태를 말한다. “국민보다 나라님 상전인 세상”은 주인이 바뀐 세상으로 시인은 이것을 비정상이라 정의하고 있다. 보통 배를 물에 띄운다고 하는데 시인은 “물이 배를 띄우고 물이 배를 뒤엎지”로 언표 한다. 배라는 공동체가, 공동체의 수단이 물에 의해서 뜨고 뒤엎어지는 물리적 구조를 경험한 우리는 세월호의 아픔이 아직도 통한으로 남아있다. 순환의 구조를 역행하는 세상이 다시 순환되는 날이 올 것은 스스로가 알아차리고 깨달아 맞는 아리랑고개를 넘어서는 행위에 있다. 장터에서 부는 피리소리에 누구도 신칙도 않는 슬픈 곡조는 젓대소리의 가락이다. 젓대는 알다시피 대금을 일컫는 말인데 쌍골죽雙骨竹으로 만든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4, 5년생 쌍골죽은 일반 대보다 속살이 두꺼워서 맑고 깊은 소리를 낸다. 젓대소리에 맞춰 아이들과 청년이 춤추는 세상을 넘어가고자 하는 시인이 부르는 노래는 애원성이며 풍류의 한 가락이기도 하다.
찬 바다의 혓바닥 차갑기도 뜨겁기도 허네
밀물 썰물 해일 수만 번 뒤집혀온 파도여
어느새 외로운 봄바람 가을바람 안고
여름 겨울로 들앉았네
100년 봄 100년 가을
난 어이 못 살아가나
거뭇한 현묘의 도
-「춘추 어떠신지요」중에서
겨울도 아니고 여름에 눈이 내리는 일은 흔치 않다. 여름에 눈이 내리면 어쩌다 있을 수 있는 기후현상 때문이라지만 이 또한 시인에게는 비정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춘추’는 이렇듯 생명의 약동과 결실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일컫는 말로 어른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까. “100년 봄 100년 가을”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가당치도 않을 것이라는 “난 어이 못 살아가나”라고 자조 섞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봄‧가을의 계절보다 깊은 의미가 깔려있다. 측량할 수 없는(거뭇한) 현묘한 도를 깨우치지 못함에 대한 성찰이 빛나는 대목이다.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에 쓰기를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고 하였다. 내용 중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어 이를 풍류風流라 하고, 그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삼교를 포함한다.”고 하였고 “접화군생接化羣生을 통해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노나라 사구의 뜻이다.”는 풍류와 백성을 교화하는 정신을 제시하였다. 즉, 하늘에서는 바람(구름)이 흐르고, 강에서는 물이 흘러 둘이는 서로 만나 새로운 것을 이루는 것을 접화군생이라 하는데 이러한 도를 ‘조화造化’라 하며 ‘조화’는 동학의 중요한 사상이기도 하다.
여순 동박새야 넌 보았지
지리산 진달래 왜 붉은지
오동도 동백숲 동백꽃
세 번 피어 피아골 섬진강
둘러 피었던 꽃무리
여순 동박새야 넌 들었지
동학군 노래 여순 항쟁군
시든 장미의 노래 소리
여순 동박새야 너는 알고 있지
날마다 파도가 뒤엎어지며
서서 오는 바다 울음소리와 함께
소리 없는 대숲 바람 스치며
죽창 일어선다
산하에 꽃바람 불어온다
새야 새야 동박새야
저 바다에 누워있지 말고
가시밭 참새들 동무로
짹짹 울어 제켜보라
-「새야 새야 동박새야」전문
인용한 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완주 지방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고 알려진 구전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패러디한 시다. 동학과 여순은 민중의 혁명이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파랑새(八王새의 팔왕은 全을 가리킨다)를 동박새로 부르고 있는 시인은 보고, 듣고, 알고를 통해 부인할 수 없는 평등세상, 조화로운 세상의 증인으로 동박새를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살아서 한번, 죽어서 한번, 가슴에 한번 피는 꽃이 동백꽃이란다. 동학혁명에 농민들이 있었다면, 여순에는 지리산에 숨어들은 파르티잔들이 있었다. 이렇게 세 번 피는 꽃을 동박새는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노래가 있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부용산>이다.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가사 일부)를 동박새는 들었을 것이다. 여순의 뒤엎어지던 세상 “서서 오는 바다 울음소리”와 동학 농민들이 들고 일어섰던 “죽창”의 바람을 동박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극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동박새를 시인은 “여순 동박새”로 명명하고 있다.
동박새와 꽃으로 여순을 노래하고 있는 시인은 이제 향기로 여순을 승화시키고자 한다. 사실 동백꽃은 향기보다 꿀로 곤충이나 새를 유인하는 조매화鳥媒花다. 그러나 인간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역사로 동백 향기가 비견되고 있다.
나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모롱이 동백숲 이루네
신전마을 신의 망부석
푸석한 손끝 만져보라
다시 살아날 몽돌들
여수 만성리 검정 모래알
산 아래 마을 주민들로 뭉쳐
섬섬 이어져 철철
동백꽃 피었네
몽돌 같은 세월 이고 지고
매고 달고 때론 옆구리
바람구멍처럼
숭숭 뚫렸다
봄바람 꽃불
동백 향기
바다를 넘는다
-「동백 향기」전문
시에서 소개되고 있는 신전마을과 여수 만성리는 비슷한 참화를 입은 곳이다. 신전마을은 1949년 참화를 입어 추석 없는 마을이 되었다. 1949년 10월 8일(음, 8월 17일) 밤, 국군토벌부대인 15연대 군인들이 들어와 마을주민 22명을 집단으로 사살하고 시신 및 가옥을 소각했다. 또한 여수 만성리 학살지는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혐의자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만성리로 끌려와 총살되고 불태워졌다.
김종옥 시인은 신전마을과 만성리 학살지를 통해 누구에 의해서 누가 죽어야 했는가를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시대의 아픔을 달아보고 있다. 총질당해서 타는 형제들과 이웃들의 주검의 냄새는 차마 맡을 수 없는 향기일 것이고, 구멍이 숭숭 뚫린 몽돌과 몽돌이 부서져 검은 모래알이 되었지만 주민들로 뭉쳐 살아가는 바람구멍 난 세월이 “봄바람 꽃불/동백 향기/바다를 넘는다”고 노래한다.
이토록 애상哀傷한 노래로 받쳐지는 여순에 대한 제의적 승화의식은 숙련된 장인이나 명인들의 기법 중 하나인 ‘허튼 기법’으로 김종옥의 시는 깊어진다.
시집 장가가기 좋은 나라
때론 좀 서툴게 허튼춤 인생
비틀비틀 자빠지고 엎어져도 좋다
-「청사초롱 밤 밝혀라」중에서
죽은 살 새살 돋듯
몸땡이 맘 단련하네
가시 끝 향기로운 맘
(…)
풀무질 금 제련하듯
분청사기 덤벙사기
가시 꽃 피워
병든 장미
씨앗 품었네
-「가시 미학」중에서
허튼춤은 춤꾼의 재간을 가늠케 하고 기교의 이치를 깨우치는 춤으로 즉흥성을 바탕으로 한 춤과 장단의 합일 체라 할 수 있다. “때론 좀 서툴게 허튼춤 인생”이지만 “비틀비틀 자빠지고 엎어져도 좋다”고 한 시인의 태도는 삶에 천착하는 아픈 인생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언사다. 허튼춤에 허튼장단과 가락이 어울려 춤의 기본을 이루듯이 도자기를 만드는 데도 같은 기법이 통하지 않을까. 시인은 사기골 운대리에서(이곳도 파르티잔의 루트가 있었다) 분청사기를 통해 허튼 기법의 진수를 보게 되었다. “가시 끝 향기로운 맘”은 덤벙 문양으로 탄생하는 불의 묘수를 보았기 때문에 갖는 마음일 것이다. 시「가시 미학」은 “병든 장미”에서 핀 꽃과 꽃이 지고 난 후 맺은 씨앗으로 어둠을 밝혀내는 색조가 짙게 든 미학이다. 하여 시인은 이제 동박새에게 울지 말라고 울음의 끝을 주문하고 있다. “누이여 이젠 울지 마라”(「아버지 세월의 무게」)는 산사람으로 동박새처럼 살다가 고향 산천, 세월 다 털어버리고 죽어 하늘로 가면 “자식들 새 봄맞이 한창”일 것이고 “언 땅 속 새 봄”(「동박새야 울지 마라」) 눈트는 부활을 맞게 될 것이니 이젠 울지 말라고 청한다. 시인은 또한 “새로운 세상에 까막 까치춤 허튼춤/새날 밝아오도록 까우뚱 절름발이 춤춘다”(「허튼춤」)는 춤사위를 통해 부활의 새로운 날이 밝도록 까마귀와 까치가 절름대며 춤추는 춤판을 벌여놓는다.
김종옥 시인은 여순의 아픔만큼이나 광주민주화운동과 부조리한 시대에 폭력으로 당한 상처들을 위무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시인 본인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체육관이 불에 타 육상선수의 꿈이 사라진 것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하였다. 이 또한 어린 김종옥이 겪은 비정상에 대한 아픔의 기억이다.
춘분 지나고 정월 대보름 밝아오는데 광주 담양지역
딸기마을 견학을 간다 구묘역 지난다 수많은 영령들
초등학교 6학년 담박질 선수로 가려다
체육관에 불이 났다고 송기정 마라토너 길 막혔다
날벼락 싸래기 눈발 날린 어린 시절
-「5‧18 구묘역 아래 딸기마을」중에서
시인은 정월 대보름을 기해 담양 딸기마을로 견학을 간다. 5‧18 구묘역을 지나가면서 “날벼락 싸래기 눈발 날린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이 또한 뒤집어진 세월의 파도라는 것을 말하면서 딸기 씨처럼 옹기종기 박혀있는 묘역의 영령들의 기운을 받아 딸, 아들 몸으로 익어 가는 딸기마을의 현실을 주목하고 있다. 김종옥은 ‘딸기’라는 식물성을 통해 5‧18을 상징화한 것처럼 ‘밥’을 통해 몸과 겨레를 살게 하는 공동체와 나눔, 뭉침과 힘의 생명력으로 무등(평등)의 꿈을 짓는다.
뛰어와서 대인시장 엄니들
달려가는 청년들을 먹이네
피투성이 몸을 살려내네
무등 꿈
밥되어 돌아오네
돌덩이 밥덩이 몸덩이
칼보다 강한 밥이여
광주 충장로 금남로
서울 광화문에서 한 덩이
밥으로 뭉쳤다
-「K- 5세대들」중에서
동박새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처럼 어린 김종옥이 본 5‧18의 실상이 고스란히 펼쳐진 시다. “대인시장 엄니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피투성이가 된 청년들에게 먹이는 모습은 광주를 상징하는 무등산을 통해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그 현장에는 “돌덩이 밥덩이 몸덩이”가 “칼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곳이다. 총칼에 맞서서 돌이나 집어던지는 투석전과 밥덩이 들고 달려 다니는 엄니들, 피 흘리며 쓰러지는 몸덩이들이 이뤄낸 민주주의가 윤석열의 계엄에 맞서 눈보라 속에서도 지켜내던 광화문의 한 덩이로 뭉쳐져 되살아나고 있다.
지금까지 시인의 시를 읽으며 역사적인 사건으로 한 비정상적인 면을 살폈다면 이제 다른 측면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비정상적인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다른 측면은 ‘집’이다. 집은 사람이 거처하는 건물(house), 동물의 보금자리(nest), 세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겨레붙이의 한 떼(family), 물건을 담아 두거나 끼워두는 제구(case), 가정(home)을 말한다. 다양한 집에 대한 시인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데, 집은 꿈을 꾸게 만들고 꿈을 이루게 되는 안식의 공간이라는 주제로 읽어보려고 한다.
배추벌레 인간벌레
한 식구끼리 독약 싸대며 전쟁놀이 좋아라
우리 집 옷가지 1년 양식 우릴 내쫓아댄다
약 쳐댄다
배추 애벌레 자로 재듯 제 걸음만큼 걷는다
빨리 먹고 치운 사람들 얼마나 빠른지
사과벌레 제 집 갉아 먹고 들어간다
배추벌레는 제 집 조금만 먹는다
사람 통째로 배추 벌레집 다 먹는다
베트남전 때처럼
빨갱이 잡는 노오란 약 치지 마
백린탄 바다 집에 파란 핵잠수함
대포 쏘지 마 제발제발
-「배추벌레 집」전문
이솝우화같이 재밌게 읽혀지는 시다. 배추벌레와 사과벌레를 통해 절묘하게 집을 다룬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시에는 먹어야 사는 벌레들이 생존의 각축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먹이를 뺏기 위해 살상무기를 쓰는 벌레는 인간이다. 배추벌레나 사과벌레와 인간은 한 식구다. 하지만 독약을 발명한 인간의 식구 됨을 파괴하는 독을 배추벌레와 사과벌레는 먹게 되고 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무농약으로 재배하면 성하지 못한(비정상) 것을 서로 먹고 살 수 있다. 어쩌면 그럴 생각도 없다. 여기에 인간은 결코 비정상을 원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다. 돈이라는 가치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빵보다 석유와 친했고/논밭에 곡식들보다/석유 운석에 눈이 밝았다/귀신같이 아이들 잡아먹는 데만/눈 밝았다”(「돈의 회개」)고 비판하고 있다.
사람의 욕심은 “통째”로 먹고자 하고, 다른 이웃들의 것도 독차지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베트남전에 사용한 독약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맹독성 제초제와 지금 “호르무즈 해협 뱃길 전쟁터로 바”뀐(「수만 번 뒤집혀온 바다여」) 트럼프 전쟁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시인은 지구 밖에서 지구(집)를 바라보는 것으로 잠시 주의를 환기시킨다.
지구 밖에서부터 일식 월식 변화
서서히 지구의 뿌리가 흔들려 오려나
(…)
이렇게 가다가 지구가 하루아침
지각들이 바뀌어 바다보다 낮은 곳은
점점 수면이 높아져 잠길 것이다
짐승들이 주택 안에 살고
사람은 주택 밖으로 나가 산다
-「달 그대로」중에서
“일식 월식 변화”로 질서가 무너지려는 우려나,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멸종이 염려되는 지구별(집)이 겪을 일들은 종말론적인 예고로 끝날 일이 아니다. 시인은 “짐승들이 주택 안에 살고/사람은 주택 밖으로 나가 산다”고 단언하듯이 뒤집어지는 생태환경을 안타까워하며, 주택(집)이 바뀌고 있는 세태에 통렬히 괴로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다에도 집이 있다고 한다면 바다생물들에게는 당연히 바다가 집이겠지만 전설의 왕궁에 용왕이 산다는 집 말고는 그 큰 집이 무엇일까.
진도 맹골 울돌목 본다
명량해전 울돌목 죽은 수군들이 일어나
바다가 운다 하늘도 운다
수천만 개 바람 되어
노오란 나비들 하늘하늘
산 오르고 마음 내 건너라
-「바다 밑 큰 집」중에서
진도 울돌목은 명량해전의 격전장이다. 물살이 얼마나 세면 “바다가 운다”고 했겠는가. 우리나라에는 물살 세기로 유명한 곳이 있다. 강화도 손돌목, 장산곶의 인당수, 태안의 관장목이다. 그리고 진도의 울돌목이다. 팽목항 앞바다 세월호가 침몰한 곳도 울돌목 중에 하나다. 시인은 세월호의 침몰로 희생된 영혼들이 잠든 바다 밑이 큰 집이라고 부른다. 하여 임진왜란 당시 죽은 수군들과 어린 자녀들이, 인당수에 몸을 던졌던 심청이처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꽃들로 피어나오길 비손하고 있다.
이처럼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집 없이 산 사람들의 생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깔려있는가를 시인은 가족의 이야기로, 역사적 사건으로, 현실적 사회문제로 각각 그 생각들을 편편이 그려놓고 있다.
다들 집이 없어 걱정
있어도 걱정
산 속 집 없이 10여년
살아간 산사람들
따뜻한 봄 되면 제비 집 찾아
해마다 오고
가을밤 뻐꾸기 소리
처량하게 울어 제킨다
집 없이 산
산사람들
우린
아늑한 집에 살아간다
-「집 없는 산사람」전문
집을 가지고 부동산투기를 일삼는 시대는 언제 막을 수 있을까. 부동산정책이 가장 힘든 과제인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다들 집이 없어 걱정/있어도 걱정”이라는 ‘집’에 대하여 정주의 공간과 꿈을 꾸고 이루어가는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는 시인은 파르티잔들이 산속에서 집 없이 살아온 격동의 세월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제비도 봄이 오면 다시 집을 찾아오고, 뻐꾸기도 새끼를 빨리 키워서 돌아가려고 남의 집에 몰래 알을 낳는 버릇이 있어 비난받지만 울음의 격조만은 산을 울려놓고 만다.
파르티잔들의 산속 생활은 계절이 열 번 바뀌어도 빈 둥지의 생활이었다. 그들이 견디다 못해 눈에 찍힌 제 발자국에 입을 맞추고 생을 접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시인은 그래도 그들보다 나은 “아늑한 집에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당부하고 있다. 밤마다 돌멩이로 가슴을 누르고 자는 독수리처럼 가슴 돌에 흘렸을 그들의 눈물이 이 산천을 적셨다. 그 돌멩이 닮은 바위가 시인 앞에 얼굴로 나타났다.
할아버지 죽어 큰 바위 얼굴 되다
저 두방산 엄니 가슴 한켠 비조암 보면
하늘에 새들 날아올라 되살아난다
매 날아들어 부리로
마애불 벼랑부처 얼굴 쪼아댄다
큰 바위 얼굴 쪼아댄다
내 마음 쪼아댄다
나도 이제 새 맘 돋는다
큰 바위 얼굴 실컷 쪼아라
매산 매바위 숲
송골매 날아온다
죽도록 바위에 부리를 쪼아
뒤집혀진 부리에 새살 돋아라
씁쓸한 가슴
흰 미소 푸른 울음짓네
-「흰 미소」전문
독수리는 부리가 낡아 못쓰게 되면 바위에 부리를 쪼아 새부리를 얻는다고 한다. 고통의 순간이다. 그러나 독수리는 가공할만한 발톱과 부리를 가지고 있는 맹수다. 독수리는 부리가 무디면 아무 소용없다. 시인은 집 근처에 있는 두방산에 올라가서 이 엄청난 광경, “내 마음 쪼아대”는 송골매를 만난 것이다. 흰 미소 띤 벼랑부처와 바위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 할아버지의 무량한 자애로움 앞에서 한없이 경건했으리라. 이번 시집 가운데 상투적인 말투처럼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뒤집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새롭게 뒤집혀야 할 것들에 자신의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김종옥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뒤집어질 세상을 위한 새로운 길이 구축된 것이다. 이제 자성의 강력한 이미지로 서게 된 그의 결론을 들어본다.
모냐 맹키로 지낸 일 10년
돌아보면 20년 후 오늘 어떨까
내일 내일 바라보고 돌아온 길
전 지구 아픔 모두 다르랴
자주 잊는다 엊그제 지난 세월
무심코 지나가는 현재 행복의 순간들
눌러대고 미래로 질주질주
너무 와 돌아가지 못한다
한 여름 장마 금방 가더니 불볕더위
기승을 부린다 입추 말복 처서 지나
풀벌레 우는 가을바람 예전 같지 않다
내 인생의 가을도 잠시 한철 지나
눈보라 치는 겨울 폭설 강추위 몰아치리
천년만화 구름 같은 세월
매화꽃 속 숨어드는 봄소식 들려오는데
오동도 동백 골바람 선선한 바람 불어
지리산 골짝 타고
애기 동백 소식도 들려오네
-「제대로 풀어갈 날」전문
모냐는 『가족이 된 고양이 모냐와 멀로』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다. ‘가족이 된 고양이’ 이야기를 서정적인 수묵 담채화로 담아낸 힐링(healing) 그림책이다. 시인은 ‘집’이라는 측면에서의 비정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비극, 사회현실의 문제들인 이번 시집의 두 접촉점에서 철저히 ‘온 가족 사상’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가족으로 안고 살아갈 시인에게는 홀로 계신 어머니(「엄니한테」), 새벽같이 출근하는 아내 미라(「비단결 고운 꿈을」), 양평에서 살고 있는 두 딸(「두물머리 고향」) 등 직계 가족뿐만 아니라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는 고인들, 이웃들, 생명체계의 모든 존재들을 다 가족으로 품어 안고 살아간다. “닭오리 한 우리에 살 듯/뱀과 아이 같이 뒹굴듯/우리 모두 바닷사람/육지사람 모두 항꾸네/항꾸네 살잔께”(「항꾸네 살잔께」)라고 고흥말로 궁굴려대고 있는 시인의 가락을 통해 ‘애원성’이 녹아 있음을 몇 편의 시편들로 살펴보았다.
끝없이 변화하는 천변만화의 세상, 내일 내일하며 살아온 시인에게 “너무 멀리 와 돌아가지 못 하”는 길에서 이젠 시인도 중년의 시기 가을을 맞았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고 폭설과 강추위가 몰아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매화꽃의 개화 소식을 전하는 봄소식이 있듯이 “지리산 골짝 타고/애기 동백 소식도 들려오는” 봄을 맞는다. 시인이 꿈꾸고 염원한 세상이 다시 부활하는 생명의 경이로움으로 나타날 것을 고대한다. 그런 세상, 시인과 함께 꾸는 꿈은 스스로 “하늘 바보”라고 부르는 시인이 바라보는 하늘에 있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올려놓는 시인의 마지막 시편은 간결하지만 간절한 염원이 아니겠는가.
난 이름 명예 아무 것 없다
밑바닥에 살다
하늘나라만 바라보는
하늘 바보
난 하느님 발에 차인
공처럼
텅 빈 채 굴러
살아간다
-「하늘 바보」전문
밑바닥살이가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에게는 이름도 명예도 없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자여서 더욱 흙과 땅, 바다, 숲에 들어 사는 모든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가난한 목자인 것이다. 사실 김종옥 시인은 땅을 통하여 하늘이 이루어가는 법을 알아버렸다. 하느님의 발에 차이는 순간 비의秘義가 발설된 것이다. “텅 빈 채 굴러/살아간다”는 시인의 공은 그래서 공空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염원하는 시인의 노래는 부활의 주체들과 함께 대동 세상을 이루는 날까지 동박새의 노래처럼 천진天眞하게 불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