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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성령을 받으라(요20:19-23; 행2:1-11).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아들은 표현이시며, 성령은 교통 곧 신성한 전달이시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의 역사는 두 방면이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역사의 두 방면에 관하여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성령에 관한 진리를 합당하게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세 위격(person)의 한분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세 분의 하나님들이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의 하나님께서 세 위격, 곧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신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근원(根源)이시고, 아들은 표현(表現)이시며, 성령은 교통(交通) 곧 신성한 전달(傳達)이다. 성령은 아버지의 어떠하심과 아들이 표현하시는 바를 전달하고 교통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 단계의 물로서 예시할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근원 곧 원천에의 물이고, 두 번째 단계는 샘의 물이다. 물은 근원인 원천에서 나오고, 샘은 그 물을 담는다.
세 번째 단계는 흐름, 곧 그 물을 흘려내고, 그 물을 모든 것으로 가져가며, 그 물로서 다른 곳들에 이르게 하는 흐름이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물들이 아니라 세 단계에 있는 물, 곧 원천의 물, 샘의 물, 흐름의 물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근원이시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한 우물 곧 신성한 샘이시다. 성령은 우리에게 도달하는 신성한 흐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께서는 바로 성령으로서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에게 도달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도달하실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 아들 안에서 표현되실 때조차도 그분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도달하실 수 없다.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 영(성령)으로서, 곧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우리를 방문하시고,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다. 그러므로 신성한 경륜, 곧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서 성령은 하나님께서 흘러나오셔서 우리를 방문하시는 그 세 번째 단계 곧 마지막 단계이시다.
<내적인 생수와 외적인 옷>
요7:37-39절은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말씀 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중점이 있다. 먼저 제자들이 영접하려고 하는 성령은 곧 그들 안에 계실 것이고, 또 그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실 것이다. 성령은 여기서 마실 수 있는 물로 비유된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주께 나아와 이 생수, 곧 성령을 마실 수 있다.
<“우리 안으로(into)”와 우리 위의 “높은 곳에서(upon)”>
요14:17절에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은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성령이 마실 수 있는 생수이고,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이 성령의 한 방면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약속을 처음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약속은 서신서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온전히 발전한다.
그런데, 눅24:49절은 성령의 또 다른 방면을 보여준다.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약속은 성령이다. “높은 곳(위에, upon),” 이 말씀에 주목하라. 그것은 “안에(in)”와는 다르다. 이 구절에서 성령은 우리 안으로(into)가 아니라 우리 위에 임한다. 능력을 입는 것은 능력으로 옷 입는 것이다. 요14:17절에서 성령은 마실 수 있는 생수에 비유되지만, 눅24:49절에서 성령은 우리의 입는 옷에 비유된다.
<우리 안의 “생명”과 위로부터 오는 “능력”>
물과 옷은 서로 다르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그것은 우리 속에 있고, 우리가 옷을 입을 때 그것은 우리 위에 있다. 옷처럼 우리를 입히는 성령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고, 반면에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마시는 물처럼 생명을 위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을 우리 속에 생명으로서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성령을 우리 위에 임한 영으로서 가지고 있다.
우리 속에 생명으로서 계신 성령은 마실 수 있는 물로 비유되고, 우리 위에 임한 성령은 옷으로 비유된다. 왕상2:9-15에서 엘리야가 하늘 속으로 들려 올라갔을 때, 그는 겉옷을 엘리사에게 넘겨주었다. 엘리사는 바로 그런 식으로 엘리야가 가졌던 능력을 받았다. 그 겉옷은 엘리야가 위로부터 능력을 옷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2:2-4절에서 주님은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하셨고, 그분의 영을 하늘로부터 옷처럼 내려 보내셨다. 이제 우리는 이 능력으로써 옷 입었다. 한편으로 성령은 우리가 마시는 물로서 우리 속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성령은 우리의 겉옷으로서 우리 위에 임하고 있다. 이것들은 성령의 역사의 서로 다른 두 방면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능력은 모두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이다.
<첫 열매>
행2:1절은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라고 말한다. 오순절이란 단어는 오십 일째 되는 날을 의미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유월절(요19:14) 후 둘째 날(그 주의 첫째 날, 눅23:54-24,1),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부터 계산할 때 칠 주가 되는 오십 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것은 맥추절(출23:16)이라 불리는 칠칠절(신16:10)의 성취였고,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린 날부터 일곱째 안식일의 다음 날까지를 계산한 것이다(레23:10-11, 15-16). 첫 이삭 한 단을 드린 것은 그분이 부활하신 날(요20:17), 곧 안식일 이튼날에(요20:1) 하나님께 드려진 부활한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날부터 오순절 날까지가 꼭 오십 일이었다. 오순절은 수확물 가운데 한 단의 첫 열매를 드린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이었다.
수확 가운데 한 단의 첫 열매에 관하여 레위기 23:10-11절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튼 날에 흔들 것이며”라고 말한다.
레위기 23장에 따르면, 수확 가운데 첫 열매 한 단은 안식일 다음날 요제로서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 첫 열매 한 단은 부활 가운데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고전15:20, 23). 구약에서 수확물이 익었을 때, 그 수확물 가운데 첫 열매 한 단은 하나님께 드려졌다. 이 한 단은 그분이 부활하신 날 하나님께 드려졌던 부활한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부활안에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드림은 그분이 아버지께 은밀히 승천하신 것을 암시한다. 요20:17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그분을 만지려고 했을 때, 그분은 그녀에게 “나를 만지니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분을 만지려고 했을 때, 그분이 만지지 않기를 원하셨던 이유는 그분이 아버지의 누림을 위해 부활의 신선함 가운데서 그분 자신을 드리려고 아버지께 가시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날 당일에 주님은 은밀히 하늘로 가셨다가 저녁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이날이 초실절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신 후에 그분은 그분 자신을 그들 속에 생명주는 영(고전15:45)으로 불어 넣으셨다.
<성령을 받으라>
요20:22절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그들 안으로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연기(演技)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출23:19절에서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라고 말한다. 첫 열매로서 그리스도는 새롭고 신선하시다.
부활하신 날 아침에 그분은 아버지께 직접 가서 그분 자신을 첫 열매로 아버지께 드리실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막달라 마리아 때문에 지체하셨는데, 마리아는 그분을 부활안에서의 ‘곡식 한 단’으로 누렸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당일에 수확물 중 첫 열매의 예표가 성취된 것이다.
그런 다음 오십 일 후 오순절 날에는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물의 수확을 누리는 누림이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부어진 성령으로서, 그분의 구속된 사람들에게 완전한 누림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 영 곧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좋은 땅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오순절 날에 넘치는 성령을 받은 것은 비단 그들이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과 승천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분깃인 그리스도의 넘치는 풍성에 참여했음을 가리킨다.
<은밀한 방면과 공개적인 방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은밀한 방면과 공개적인 방면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밀한 승천은 부활하신 날의 아침에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공개적인 승천은 그로부터 40일 후에 발생하였는데, 그때에 그분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감람산으로부터 승천하셨다.
그리스도의 은밀한 승천은 그분 자신을 부활안에서의 첫 열매로 아버지께 드리기 위함이었다. 같은 날 그분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그분 자신을 그들 속으로 불어 넣으셨다. 요20:22절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럼으로써 제자들은 수확물 가운데 한 단의 첫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누림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리스도를 첫 열매로 누린 후에 제자들은 더 나아가 오순절 날 그분을 수확물로 누렸다. 내적인 생명으로 성령을 누리는 것은 첫 열매 한 단으로서의 누림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인 능력으로 누리는 것은 드러나게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수확물로 충만히 누리는 것이다. 빌1: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수확물 가운데 첫 열매로 받는 공급은 신선하지만 넘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오순절 날 풍성한 수확물을 갖게 될 때라야 비로소 넘치는 공급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 두 방면의 성령을 모두 체험해야만 한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 위로부터 오는 사역을 위한 능력의 영(성령세례를 말한다)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날 수확물의 풍성한 위로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 곧 성령세례를 체험해야만 한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다.
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이며 복음의 축복이다. 사도행전 1-2장의 위로부터의 능력의 성령 체험을 사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 분별과 귀신을 쫓는 능력 있는 사역은 불가능하다.
<성령의 두 방면의 표현>
성경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믿는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두 방면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계시한다. 한 방면은 그분이 우리 영 안에 있는 것이며, 또 한 방면은 그분이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그분이 생명의 영으로 내적인 본질의 영이 되는 것이며, 우리 위에서 그분은 능력의 영으로서 외적인 경륜의 영이 되는 것이다. 본질적인 면은 생존과 생활을 위한 생명을 얻게 하며, 경륜적인 면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능력과 은사와 증인이 되게 한다.
요14:17절은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고, 여러분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와의 내적인 방면의 관계를 언급하는 표현이다. 행1:8절은 “그러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임하시면 여러분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실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와의 외적인 관계를 언급하는 표현이다. 주님은 한 면에서는 우리 안에 계심을 말씀하셨고(거듭남), 또 한 면으로는 성령이 우리 위에 계심을 말씀하셨다(성령세례).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거듭남과 성령세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감동기쁨충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