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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2)
마태 5장 6절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에 들은 말씀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가 고파 죽어 가는 자가
빵 한 조각을 구걸하듯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자가
물 한 방울을 사모 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배부르게 되는 은혜를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배부르다'는 말은
만족, 평안, 기쁨, 등을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세상에 사셨던 분 중에서
가장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신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갈증을 갖고 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꼭 실천해야 될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 가지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은혜 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약간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으면 그만이지,
꼭 순종하고 실천해야만 하는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자녀를 갖게 되지 않습니까?
아이가 태어날 때는
부모가 그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가 다 책임집니다.
책임을 지고 어려움과 고통을 다 감수하면서
정성을 다 쏟아 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내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일단
가정에 태어나 내 자식이 되면,
그리고 그 애가 자라면서
조금씩 말귀도 알아듣고, 분별력도 생기고,
나름대로 철이 들기 시작 하면
그 때부터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엄마 아빠 말을 들어야 해.',
'아빠 말 잘 들어야 사람이 된다.'
이것을 반드시 요구합니다.
만일 이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부모가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 순종하지 아니하면
매를 들어 호되게 다루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순종하게 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으실 때
요구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시어
나 같은 것을 알아 주셨고,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으며,
성령이 오셔서
믿도록 마음을 움직여 주심으로써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심으로
믿게 하셨기 때문에 생긴 것이지,
우리가 잘 나서 믿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다음에는 요구하십니다.
'순종하라.'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는
모든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나 삶을 과소평가하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아직도 진리를 아는데 이르지 못한,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리에 있는
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들은 것만큼 순종하려고 합니까?
배운 것만큼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는 갈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그러나 듣고 다 잊어 버리십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다 하신 후에 내리신 결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화려한 도덕률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강론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7장 26절에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경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5,6,7장을 통해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다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있는 모든 무리들과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탄했습니다. 감동도 받았습니다.
'아, 좋은 말씀이다.'라고
모두가 긍정합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 앞에
모두가 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즉, 말씀대로 사는 순종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놓은
사람과 같아서
나중에는 하나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24절
'그러므로 누구 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21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핵심이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함은 무엇인가?
구원 얻는 믿음의 열매다.'
내가 그 믿음으로 구원 얻었습니까?
그러면 그 믿음은 꼭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서 2장 17절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떠들어도
삶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순종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엉터리 믿음이라면
그 믿음 가지고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기쁨이 없는지 아십니까?
순종이 따라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가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할까요?
그 배후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 보면
순종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실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순종도 하지 않는데 가슴이 뜨겁다면
그것은 자기 혼자 들떠서 그런 것이지
성령의 감동은 아닌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주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잃은 양을 찾으라는 것임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그 간절한 마음인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을 구원하고 나서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기쁘셨던지,
제자들이 점심 드시라고
갖다 드린 음식도 다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내가 지금 저 여인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 하실까?
그러므로 나도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기쁘고 만족스럽다.'
벌써 예수님의 배가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공포와 싸우시면서
겟세 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쏟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하셨습니다.
'비록 무서운 길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길을 가라고 하시니
나는 순종하리라.
십자가를 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눈을 뜨시자
하늘에서부터 천사가 내려와
예수님에게 새 힘을 공급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하직하면서
주님이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의 마음에 평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 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순종하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에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움직일 수 없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평안을
그 마음에 주셨습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때를 따라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시니
배부른 것입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나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니 배부른 것입니다.
상황은
절대 평안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마음껏 엄마 품에서
젖을 먹는 아이처럼
만족스럽고 평안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부름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를 받으면서
세상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나라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뜻을 한 가지로 요약하라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좀더 좁은 의미로 말하면
사람들을 구원해서 자기 자녀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나깨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꿈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비록 지금 나이가 들었지만
남은 여생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6장 3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은 먹고 마시는 문제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앞세우는 문제이며,
날마다 눈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과거에 풍족하게 살지 못하던 때
인사가 어떠했습니까?
눈만 뜨고 나면 '식사 하셨어요?'
또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서로 만나면
'저녁 먹었나요?'가 인사였습니다.
항상 '먹었나? 먹었나?'가 인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큼 절박한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굶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지 않습니까?
너무나 배가 고프게 하루하루를 살았기에
'먹었나? 먹었나?'가 인사였고,
그래서 먹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고,
못 먹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조금 살 만해졌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식사 하셨냐?'고 하면
오히려 모욕처럼 들릴 것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좋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상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더 많이 먹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먹고 마시면서 즐길까?
그래서 건강해서 오래 살까?'
이것이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식당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식당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관광을 갔다 하면
먹자 관광이 아닙니까?
해외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여러 가지 문화를 돌아본다든지,
그 나라의 전통을 공부한다든지,
그 나라 사람들의
여러 가지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한다든지 하는
고상한 관광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어떤 관광입니까?
'먹자 관광'입니다.
'어디 맛있는 것이 없나?
몸에 좋은 것이 없나?' 하면서
있으면 값을 묻지 않고
사 가지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온통 먹자판이요, 즐기자 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모습입니다.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잘 먹고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천대를 받아도 좋다. 120살까지만 살자.'
이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을 앞세우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세워라.
너희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너희들은 그것을 앞세워라.
먹는 것 보다 앞세워라.
마시는 것 보다 앞세워라.
배고플 때도 그것을 앞세워라.
고통 당할 때도 그것을 앞세워라.
심지어 생명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앞세워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를 앞세우면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고 앞세우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 주겠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인식합시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만큼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꿈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내가 성공한 사람이든지 실패한 사람이든지,
내가 청년이든지 노년이든지,
내가 성직자든지 평신도든지 가릴 것 없이,
여자든지 남자든지 가릴 것 없이,
어떠한 형편에 있더라도
우리의 관심사,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해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며,
그 나라가 완성되기 위해서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자를 일컬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리가 좋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생을 살면서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어떻게 성공을 하였는가를 놓고 판단하시기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어떤 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는가로 우리를 판단하신다.'
옳은 말이 아닙니까?
세상에 왔다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공했다고 하는 그 자체도
지나고 보면 다 별 볼 일 없는 것이 아닙니까?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거창한 비석을 세우고
야단법석을 해도
2,30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그것입니다.
성공이나 성공하지 못한 것이나
나중에는 똑 같은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공을 했는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했는가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판단하십니까?
'세상을 살 때, 네 마음에 꿈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평가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이요,
최우선 순위의 과제 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꿈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이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이것을 축으로 놓고
우리의 생활이 항상 회전하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있는 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있는 갈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슴의 최우선 순위가 무엇입니까?
인간성이 무섭게 파괴되어 가고,
자연이 파괴되어 가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은 점점 다가오는 이 마당에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와 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주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여야 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밤낮 꿈을 꾸고
갈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사모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해 주셔서
헛된 것에 분요하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나중에는 우리의 믿음 자체가 무너지는
비극을 겪지않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