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래정〔歸來亭〕
안동에 있으며 개성 유수 이굉(李浤)이 주인이다.
희고 흰 백발로 조정에서 벼슬하던 사람 皤皤須鬢廟廊身 파파수빈 묘랑신
퇴직하던 그해에 이 사람을 보았네 乞退當年見此人 걸퇴당년견치인
오늘 정자 안에는 옛 주인 없으니 今日亭中非舊主 금일정중비구주
한 잔 술 들고 수건에 눈물을 적시네 一杯雙淚忽沾巾 일배쌍루홀첨건
큰 들 옆에 서 있는 정자 높다란 난간 亭臨大野敞危欄 정림대야창위란
그 아래 맑은 강엔 푸른빛이 묻어있네 下有澄江蘸碧寒 하유징강잠벽한
서쪽은 영호루에 닿아 물결 더욱 너르고 西接映湖波更闊 서접영호파경활
펼쳐진 흰 비단이 숲 끝에 묻혔네 平鋪素練沒林端 평포소련몰림단
관청에는 세속의 일 번거로워 싫은데 官家塵事厭悤悤 관가진사염총총
중국 사신 모시고 연회자리 함께했네 陪忝皇華燕席同 배첨황화연석동
날 저물자 흥 다해 작은 배에 오르니 日暮興闌乘小艇 일모흥란승소정
강산은 어둑어둑 보일 듯 말 듯하네 江山暗淡有無中 강산암담유무중
나도 선성에 비옥한 땅이 있으니 我有宣城負郭田 아유선성부곽전
한 구역 천석을 늘그막에 차지하리라 一區泉石老將專 일구천석노장전
공의 정자에 오르니 정이 더욱 이는데 登公亭上情尤發 등공정상정우발
계륵과 구맹을 어찌 모두 온전히 하랴 鷄肋鷗盟豈兩全 계륵구맹기량전
젊은 날 전원 돌아가리 다투어 말했는데 少年爭自說歸田 소년쟁자설귀전
늘그막에 머뭇머뭇 뜻이 한결같지 않네 晩歲依違志不專 만세의위지불전
백발 늙은이로 강가 정자에 노니는 형제 白首江亭兄及弟 백수강정형급제
관직 명예 절조가 한 집안에 오롯하구나 宦成名節一家全 환성명절일가전
[주1] 귀래정(歸來亭) : 안동시 정상동(亭上洞)에 있는, 고성 이씨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인 낙포(洛蒲) 이굉(李汯, 1440~1516)의 정자이다. 이굉은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ㆍ상주 목사ㆍ개성 유수 등을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1513년(중종8) 벼슬에서 물러난 이굉은 안동으로 낙향하여 부성(府城) 건너편 낙동강이 합수되는 경승지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뜻을 취해 당호를 ‘귀래정’이라 하였다. 이굉을 비롯해 이현보(李賢輔), 이우(李堣), 이식(李植), 윤훤(尹暄) 등 3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다.
[주2] 오늘 …… 없으니 : 정자 주인인 이굉이 1516년 세상을 떠난 뒤에 1517년 겨울에 이현보가 안동 부사로 부임하여 정자를 찾았기 때문에 이른 듯하다.
[주3] 계륵(鷄肋)과 구맹(鷗盟) : 계륵은 갖고 있기도 싫고 버리지도 못한다는 뜻으로 벼슬살이를 말하였고, 구맹은 갈매기와의 약속이라는 뜻으로 초야에서 한가로이 사는 것을 말하였다. 계륵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양수(楊脩)가 “대저 닭의 갈비는 버리자니 아까운 생각이 들고 먹자니 먹을 것이 없다.[夫雞肋, 棄之如可惜, 食之無所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1 武帝紀》 구맹은 황정견(黃庭堅)의 〈등쾌각(登快閣)〉 시에 “만 리 돌아가는 배에 젓대 부니, 이 마음 백구와 맹세하였네.[萬里歸船弄長笛, 此心吾與白鷗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