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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衞滿朝鮮)
○ 조선 왕 만(滿)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사기》
○ 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성은 위(衞)이다. 조선 왕을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한서》
○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서광(徐廣)은 말하기를, “어떤 곳에는 번(番)이 막(莫)으로 되어 있다. 요동(遼東)에 번한현(番汗縣)이 있다.” 하였다. ○ 《사기색은》에서 말하기를,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 때라는 것은 육국(六國)의 연이 한창 전성하였을 때를 말한다. 일찍이 연이 진번과 조선 두 나라를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하였다. 조선(朝鮮)을 공략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붙였다. 한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는 멀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여겨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연왕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하였는데, 1천여 명의 무리를 끌어 모은 다음 상투를 틀고 동이(東夷)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鄣)과 하장(下鄣)에 살았다. 《사기색은》에,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낙랑(樂浪)에 운장(雲鄣)이 있다.” 하였다. 위만이 조선을 격파하고 점차 진번, 조선의 만이(蠻夷) 및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복속시킨 다음 그들의 왕이 되어 왕검(王險)에 도읍하였다. 마침 한나라의 효혜(孝惠)와 고후(高后) 때 천하가 비로소 평정되자 요동 태수(遼東太守)가 즉시 위만과 약조를 맺어, 위만으로 하여금 외신(外臣)이 되게 하여 변방 밖을 지키면서 만이(蠻夷)들이 변경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君長)이 중국 천자에게 알현하러 가는 것을 금지시키지 말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이를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은 병권과 재물을 얻어서 주위에 있는 여러 작은 고을을 침입하여 항복시켰다. 그러자 진번ㆍ임둔(臨屯) 등이 모두 다 와서 복속하여 《사기색은》에는, “동이의 작은 나라들은 뒤에 군(郡)으로 되었다.” 하였다. 지역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이 죽으면서 나라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인 우거(右渠)에게 전하였는데, 우거에게 꾀여 중국에서 망명하여 온 자들이 더욱 불어났다. 또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하지도 않았으며, 진번(眞番) 등 주위 여러 나라가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진번과 진국(辰國)’으로 되어 있다. 안사고(顔師古)는 ‘진(辰)은 진한(辰韓)의 나라이다.’ 하였다.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 하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막고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기》 ○ 또 《사기》 자서(自序)에는, “연(燕)의 태자(太子) 단(丹)이 요(遼) 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위만이 도망한 백성들을 끌어 모아 해동(海東)에 살면서 진번을 복속시켜 변방에 성채를 쌓고는 외신(外臣)이 되었다.” 하였다.
○ 원봉(元封 한나라 무제(武帝)의 연호임)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에서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달래었으나, 우거가 끝내 조칙(詔飭)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도로 돌아가다가 경계인 패수 가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서 전송나왔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안사고는, 장(長)은 비왕의 이름으로, 섭하를 전송하기 위하여 패수 가에 이르렀을 때 섭하가 이를 틈타 찔러 죽인 것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비왕 및 장사(將士) 장(長)이니, 아마도 안사고가 잘못 본 듯하다. 즉시 패수를 건너서 요새로 들어갔다. 《사기정의》에, “평주(平州)의 유림관(楡林關)으로 들어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돌아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천자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겨서 섭하를 꾸짖지 않고는 즉시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에 제수하였다. 조선에서는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죽였다. 이에 천자가 죄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쳤다. 그해 가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에서 발해(渤海)로 배를 띄웠는데, 군사가 5만 명이었다. 한편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가 요동으로 나와 우거를 토벌하자,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한 곳에 주둔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왔다가 패하였는데, 다는 도로 달아났다가 군법을 적용받아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이 제의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착하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군(樓船軍)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아채고는 즉시 성을 나와 누선군을 공격하니, 누선군이 패하여 도망쳤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였다가 10여 일 만에 흩어졌던 군졸을 수습해 모았다. 좌장군은 조선의 패수 서군(浿水西軍)을 공격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수의 전세가 불리하다고 여겨 위산(衞山)을 시켜 군사의 위엄을 보이면서 우거에게 가서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신을 보고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하기를,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두 장수가 신을 속이고서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절(使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태자(太子)를 보내어 들어가서 사례하고 말 5천 필과 군량(軍糧)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가 그의 무리 1만여 명에게 무기를 들려 가지고 막 패수를 건너려고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 순체가 조선쪽에서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하였으니 사람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명하라.” 하였다. 그러자 태자도 사자와 좌장군이 자신들을 속여서 죽일까 염려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는 도로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서 천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이 패수 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서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서쪽과 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군도 달려가서 성 남쪽을 점거하였다. 이에 우거가 드디어 성을 굳게 지켰으므로 몇 달 동안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본디 시중(侍中)으로 있으면서 천자를 가까이서 모셨고, 거느리고 있는 연(燕)과 대(代)의 군사들은 억센 데다가 승세마저 타서 교만한 마음이 많았다. 누선장군이 거느린 제(齊)의 군사는 바다에 들어온 뒤로 이미 여러 차례 패하여 군사를 잃었고, 그 선봉이 우거와 더불어 싸워 곤욕을 치른 채 도망쳤으므로,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였고 장수들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다. 이 때문에 우거를 포위하게 되어서도 누선군은 화친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고자 하자, 조선의 대신(大臣)이 몰래 염탐을 하고 사람을 시켜 사사로이 누선장군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로 왕래하면서 항복에 관한 말만 하였지, 확실한 결단은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이 자주 누선장군과 함께 싸울 약속을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조선과의 약속을 성사시키고자 하여 좌장군과의 약속을 어겼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시켜서 기회를 틈타 조선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따르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누선장군 쪽에 항복할 마음을 두었다. 그로 인해 두 장군이 서로 반목하면서 협력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장군은 앞서 군사를 패망시킨 죄가 있고 이제는 조선과 친하게 지내면서 항복받지도 못하고 있으니, 아마도 배반할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여겨 의심하였으나 감히 발설하지는 못하였다.
천자가 이르기를,
“장수들이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전에는 위산(衞山)을 시켜서 우거를 항복하도록 회유하게 하자, 우거가 태자를 보냈는데도 위산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좌장군과 계책이 서로 어긋나 마침내 약속을 어그러뜨리고 말게 하였다. 지금도 두 장수가 성을 포위하고서도 또 서로 계책이 어긋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결판을 못내고 있다. 그러니 제남 태수(濟南太守)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고(故) 제남 태수’로 되어 있다.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가서 정벌하게 하되, 《한서》에는 정벌한다는 ‘정(征)’ 자가 ‘정(正)’으로 되어 있다. 편리한 대로 종사(從事)하게 하라.”
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이 말하기를,
“조선을 항복시킬 수가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항복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하면서, 누선장군이 자주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은 사실을 말하면서,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공손수에게 다 고하였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지금 상황이 이와 같은데도 누선장군을 체포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마도 큰 해가 있을 것이다. 비단 누선군뿐만 아니라 장차 조선과 더불어서 우리 군사를 함께 멸망시킬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공손수가 드디어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절(節)을 보내어 누선장군을 소환하면서 좌장군의 군영으로 들어와서 일을 계획하라고 명하였다. 그런 다음 즉시 좌장군의 휘하에게 명하여서 누선장군을 잡게 하고, 그 군사를 병합시켰다. 천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니, 천자가 공손수를 잡아 죽였다.
좌장군이 이미 두 군사를 병합하고는 곧바로 서둘러서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조선(朝鮮)의 상(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살펴보건대, 《한서》에는 한도(韓陶)로 되어 있다.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 살펴보건대, 이계는 예(濊) 음의 반절(反切)이다. 장군(將軍) 왕협(王唊)이 《한서음의(漢書音義)》에 이르기를, “무릇 다섯 사람이다. 융적(戎狄)이 관기(官紀)를 잘 모르므로 모두 상이라고 칭한 것이다. 협의 음은 협(頰)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한서》의 주에 “안사고가 무릇 네 사람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서로 더불어서 모의하기를,
“처음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이미 잡혔다. 현재 좌장군이 혼자서 두 군사를 거느렸으니 장차 싸움이 더욱 급박해질 것으로,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왕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고는, 한음, 왕협, 노인이 모두 도망쳐 나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상동》
○ 원봉(元封) 3년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이 사람을 시켜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왕검성만은 항복하지 않은 채 우거의 대신(大臣)이었던 성기(成己)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의 관리를 공격하였다. 이에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인 장(長)과 항복한 상(相)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시켜서 그 백성들에게 유시하여 성기를 죽이게 하였다. 이에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진번(眞番)ㆍ임둔(臨屯)ㆍ낙랑(樂浪)ㆍ현도(玄菟)이다.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澅淸侯)로 삼고, 한음(韓陰)을 봉하여 적저후(荻苴侯)로 삼고, 왕협(王唊)을 봉하여 평주후(平州侯)로 삼고, 장(長)을 봉하여 기후(幾侯)로 삼고, 최(最)는 아비가 죽었고 자못 공도 있으므로 온양후(溫陽侯)로 삼았다. 좌장군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공을 다투어서 서로 시기하여 계책을 어긴 죄를 적용해 기시(棄市)하였다. 누선장군 역시 군사가 열구(列口)에 이르렀을 때 좌장군이 오기를 기다렸어야 하는데도 마음대로 먼저 출동하여 군사를 많이 잃은 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속(贖)을 바치고 서인이 되게 하였다. 《상동》 ○ 《후한서》에는, 한나라 때 와서 재주와 힘이 있어 광록대부(光祿大夫) 부누선장군(副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시켜 조선을 격파하였다.” 하였다.
○ 처음에 우거(右渠)가 격파되지 않았을 때 조선상(朝鮮相)인 역계경(歷谿卿)이 우리에게 간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 않자 동쪽으로 진한(辰韓) 땅으로 갔다. 이때에 백성들 가운데서 따라가 산 자가 2천여 호였다. 역시 조선ㆍ진번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위략(魏畧)》
태사공(太史公)은 말하기를,
“우거는 견고함을 믿었다가 나라의 제사가 끊어지게 하였다. 섭하는 거짓으로 공을 세웠다고 속여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감이 되기에는 부족하여 서광(徐廣)은 “그 거느린 군졸이 적은 것을 말한다.” 하였다. 난을 당하고 허물에 걸렸으며, 반우(番禺)를 잃은 것을 후회하여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복주(伏誅)되었다. 수군ㆍ육군이 모두 치욕을 당해 장수 가운데 제후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하였다. 《사기》
반고(班固)가 서문에서 찬하기를,
저 조선이란 나라는 爰洎朝鮮
연 땅 바깥에 있도다 燕之外區
한나라가 일어나 잘 어루만져서 漢興柔遠
부절을 쪼개서 나누어 주었도다 與爾剖符
그런데도 지형이 험함만을 믿고는 皆恃其阻
굽신굽신하다가는 교만해짐에 乍臣乍驕
효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서 孝武行師
바다 모퉁이의 조선을 멸망시켰도다 誅滅海隅
하였다. 《한서》
사마정(司馬貞)이 찬하기를,
위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衞滿燕人
조선의 왕이 되었네 朝鮮是王
왕검성에 도읍하여 王險置都
노인을 재상으로 삼았네 路人作相
우거는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右渠首羌
섭하는 천자를 속였네 涉何誷上
화란이 이로부터 시작되어 兆禍自斯
두 장수는 서로 의심을 하였네 狐疑二將
위산과 공손수는 처형되었으니 山遂伏法
시끄러운 그 일들 모두가 형편없네 紛紜無狀
하였다. 《사기색은》
범엽(范曄)이 찬하기를,
우이의 지역에 살게 하니 宅是嵎夷
해가 뜨는 양곡이네 曰乃暘谷
산골짝과 바닷가에 모여 사니 巢山潛海
그 종족이 아홉이네 厥區九族
진나라 말년에 어지러워지니 嬴末紛亂
연나라 사람들이 피난을 갔네 燕人違難
중국 습속 어지럽히고 동이 풍속 물들이고는 雜華澆本
드디어 한나라와 길을 텄네 遂通有漢
위소(韋昭)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만이 조선에 들어가 이미 중국과 오랑캐의 풍속을 뒤섞어 놓았으며, 또 그곳 본래의 습속마저 뒤흔들어 놓은 다음, 한나라와 통하였다.”
아득히 먼 저 나라를 통역하자니 眇眇偏譯
순종도 하고 배반도 하였네 或從或畔
하였다. 《후한서》
살펴보건대, 위씨(衞氏)는 한 혜제(漢惠帝) 원년 정미에 나라를 세워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 계유에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총 3세(世) 87년간 존속하였다.
[주1] 위만조선(衞滿朝鮮) : 고조선(古朝鮮)의 삼조선 중 단군조선(檀君朝鮮)ㆍ기자조선(箕子朝鮮) 다음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바로 위만조선인데, 이 시기는 고고학상으로는 철기 시대로 편년된다. 위만과 위만조선에 대해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진수(陳壽)의 《삼국지》에서도 이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상의 중국 사서들은 위만이 중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와 조선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학계 일각에서는 위만이 조선계(朝鮮系)의 연인(燕人)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2쪽》
[주2] 진번(眞番) : ‘眞番’의 음이,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전사》에는 ‘진반’으로 표기되었으며, 옥편에도 ‘番’의 음이 ‘땅 이름 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남한에서 발간된 책에는 ‘진번’으로 표기되었기에, 지금 번역을 하면서는 ‘진번’으로 표기한다.
[주3] 번한현(番汗縣) : 요동군의 속현(屬縣)이다. 이병도는 “패수(沛水)와 패수(浿水) 양수의 위치를 상고하는 것이 곧 번한현(番汗縣)의 위치와 요동군의 동계(東界)를 밝히는 첩경이 될 것이다. 패수(沛水)는 지금의 박천강(博川江), 패수(浿水)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 따라서 번한현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에 비정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71쪽》
[주4] 요동의 외요(外徼) : 이에 대해서는 ‘요동군 외부의 간접적 지배 지역’이라는 설과 ‘군(郡) 밖으로 나가서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병사를 주둔시켜 이를 진무하고 그 침략을 차단하는 요새’라는 설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3쪽》 이병도는 이 요동의 외요를 하장(下鄣)으로 보아 대동강 북안(北岸)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2쪽》
[주5] 요동고새(遼東故塞) : 이병도는 요동고새는 바로 번한새(番汗塞)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쪽》
[주6] 공지(空地)인 상장(上鄣)과 하장(下鄣) : 이병도는 “공지는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인민의 거주를 허락지 아니한 까닭에 공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상하장(上下鄣)은 상하 2개소의 장새(障塞)를 말한 것으로, 상장은 번한새(番汗塞), 즉 박천(博川)을 말한 것이고, 하장은 열수(列水), 즉 대동강 북안(北岸)에 비정되어야 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72쪽》
[주7] 왕검(王險) : 왕검성(王儉城)을 말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 북쪽의 평양(平壤)이라는 설과 요하(遼河) 하구(河口)의 영구(營口)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는 지금의 평양(平壤)으로 보았고,《韓國古代史硏究 82쪽》 북한의 이지린은 오늘날의 개평(開平)이라고 하였으며,《고조선연구 88쪽》 《조선전사》에서는 요하(遼河) 하류의 동쪽 유역에 있다고 하였다.
[주8] 비왕(裨王) 장(長) : 비왕은 위씨조선(衞氏朝鮮)의 관직, 특히 국왕을 시종(侍從)하는 무관직(武官職)이 아닐까 생각되며, 장(長)은 인명, 또는 수장(首長)의 뜻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2쪽》
[주9] 누선장군(樓船將軍) : 중국 고대 군직(軍職)의 하나이다. 한나라에서 조선을 침공할 때 양복(楊僕)의 직으로서, 현재의 해군 제독에 비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59쪽》
[주10] 제(齊)에서 …… 띄웠는데 : 제(齊)는 지금의 산동(山東) 지방으로, 한나라의 수군이 이곳에서 출항하여 발해만을 횡단해 왕검성으로 향하였다는 뜻이다.
[주11] 상(相) : 이병도(李丙燾)는 “상(相)은 중국 제도의 경상직(卿相職)을 모방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관제는 중앙의 장관(長官)이나 지방의 장관직을 막론하고 모두 상이라 하여 그 사이에 명칭상의 구별을 두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으며, 김철준(金哲俊)은 “이것은 아직 고대 국가의 관제가 제대로 성립되지 아니한 데서 온 것으로, 상은 찬(贊)ㆍ도(導)ㆍ면(勉)의 뜻이 있어 한 집단의 영도자의 지도(指導), 권면(勸勉) 등의 기능을 표시하고 있다.”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58쪽》
[주12] 우거의 …… 최(最) : 이 부분의 원문은 ‘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이다. 이 부분에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거의 아들 이름이 장(長)인지 장강(長降)인지이다. 《사기집해》에는 “서광(徐廣)은 ‘《사기》 표(表)에는 장로(長路)로 되어 있고, 《한서》 표에는 장각(長䧄)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하였고, 《사기색은》에는 “《한서》 표에 장각(長䧄)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이에 반해 안사고(顔師古)는 “우거 아들의 이름은 장(長)이다.” 하고, 또 “상 노인이 전에 이미 한나라에 항복하고서 길에서 죽었으므로 항상(降相)이라 한 것이다.” 하여 장(長)을 이름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아마 장은 원래의 이름이고 장각은 투항한 뒤에 고친 이름인 듯하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92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안사고의 설을 따랐다.
[주13] 열구(列口) : 열구(列口)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설이 분분하다. 안정복(安鼎福)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혈구현(穴口縣)은 지금의 강화(江華)이다.’ 하였으니, 혈구(穴口)는 열구의 잘못일 것이며 한수(漢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대동강을 열수라고도 하는데, 이는 옳지 않은 듯하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열수고》 한백겸(韓百謙)은 “한강 이외에는 8백 리 되는 큰 강이 없으니 한강이 열수인 듯하고 열구 또한 한강 어귀에 있는 듯하다.” 하였고,《동국지리지》 이병도(李丙燾)는 《산해경(山海經)》의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의 구절과 그에 대한 곽박(郭璞)의 주인 ‘朝鮮 今樂浪縣……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열양(列陽)은 열구(列口)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대동강인 열수(列水)와 관계 있는 지명으로, 열구가 열수의 하구(河口)의 뜻임에 대해 열양은 열수의 북쪽이란 뜻으로 명명된 것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 한 것은, 열수의 하류 일부가 당시 대방 경내인 지금의 황해도 서북계(西北界)를 흐르고 있던 때문이다. 나는 열구를 대동강 하류 유역인 황해도 은율(殷栗)에 비정(比定)하고, 열양은 대동강의 북쪽 특히 지금의 평양 대성산(大城山) 아래에 비정하고 싶다.” 하여 대동강 입구로 보았으며,《韓國古代史硏究 72쪽》 북한에서는 “열수는 오늘의 요하(遼河)라고 인정된다. 오늘의 요하를 열수로 보게 되는 것은 열수가 발해에 흘러든 강이고 요동 지역에 있었던 강이며, 또 요하의 옛 이름이 열수이기 때문이다. 열구는 발해 기슭의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조선전사 권2 고조선사》
[주14] 조선상(朝鮮相)인 역계경(歷谿卿) : 이 부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모두 ‘조선상인 역계경’이라 하여 ‘조선상’은 관직으로 보고 ‘역계경’은 인명으로 보았다. 그런데 《한서》의 ‘조선의 상 노인(路人), 상 한음(韓陰), 이계(尼谿)의 상 삼(參), 장군 왕협(王唊)’에 대해서, 한치윤은 “이계(尼谿)는 ‘예(濊)’의 반절이다.”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역계’ 역시 ‘예’의 반절로 볼 수 있으며, ‘경(卿)’ 역시 ‘상(相)’과 마찬가지로 관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바, ‘역계의 경’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치 않기에 번역은 ‘조선상인 역계경’으로 하였다.
[주15] 역시 …… 않았다 : 이 부분의 원문은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이다. 이 부분에 대해 이병도는 공(貢) 자를 진(眞) 자의 오자로 보아 진번으로 해석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93쪽》 지금 번역하면서는 원문대로 번역할 경우 해석이 분명치 않기에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주16] 반우(番禺) : 지금의 광동성(廣東省)에 속하는 곳에 있는 옛 지명이다. 처음에 진(秦)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반산(番山)과 우산(禺山)으로 인해 반우란 이름이 생겼다. 《사기》 식화전(食貨傳)에, “반우는 하나의 큰 도회지이다.” 하였다.
衛滿朝鮮。
朝鮮王滿者。故燕人也。史記。
滿。燕人。姓衛。擊破朝鮮王。而自王之。漢書。
自始全燕時。甞畧屬眞番。徐廣曰。一作莫遼東有番汗縣。○索隱曰。始全燕時。謂六國燕方全盛之時。常畧二國以屬己也。 朝鮮爲置吏築彰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燕王盧綰反入㐫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索隱曰。按地理志。樂浪有雲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勿得禁止。以聞。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索隱曰。東夷小國。後以爲郡。 方數千里。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甞入見眞番旁衆國。按漢書。作眞番辰國。師古曰。辰謂辰韓之國也。 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史記。○又自序曰。燕丹散亂遼間。滿收其亡民。厥聚海東。以集眞番葆塞爲外臣。
元封二年。漢使涉何誘諭右渠。終不肯奉詔。何去至界上臨浿水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正義曰。顔師古云。長者。裨王名也。送何至浿水。何因刺殺也。案裨王及將士長。恐顔非也。 卽馳渡入塞。正義曰入平州楡林關也。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上爲其名美卽不詰。拜何爲遼東東部都尉。朝鮮怨何。發兵襲攻殺何。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卽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將軍楊僕失其衆。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天子爲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服降。遣太子入謝。献馬五千匹及饋軍糧。人衆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左將軍素侍中幸。將燕代卒。悍。乘勝。軍多驕。樓船將齊卒。入海固已多敗亡。其先與右渠戰。困辱亡卒。卒皆恐。將心慙。其圍右渠。常持和節。左將軍急擊之。朝鮮大臣乃陰間。使人私約降樓船。往來言尙未肯决。左將軍數與樓船期戰。樓船欲急就其約。不會。左將軍亦使人求間郤降下朝鮮。朝鮮不肯。心附樓船。以故兩將不相能。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疑其有反計。未敢發。天子曰。將卒不能前。及使衛山。諭降右渠。右渠遣太子。山使不能剸决。與左將軍計相誤。卒沮約。今兩將圍城。又乖異。以故久不决。使 按漢書。作使故。 濟南太守公孫遂。往征 按漢書。作正。 之。有便宜得以從事。遂至。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具以素所意告遂曰。今如此不取。恐爲大害。非獨樓船。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爲然。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並其軍。以報天子。天子誅遂。左將軍已並兩軍。卽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按漢書。作韓陶。 尼谿相參。案尼谿。濊音之反。 將軍王唊。漢書音義曰。凡五人也。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唊音頰。○按漢書註。師古曰。凡四人。 相與謀曰。始欲降樓船。樓船今執。獨左將軍並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陰唊路人皆亡降漢。路人道死。仝上。
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誅成己。以故遂定朝鮮。爲四郡。眞番臨屯樂浪玄菟也。 封參爲澅淸侯。陰爲荻苴侯。唊爲平州侯。長爲幾侯。最以父死頗有功。爲溫陽侯。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爲庶人。仝上。○後漢書。來漢有才力。以光祿大夫副樓船將軍楊僕。擊破朝鮮。
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藩。不相往來。 魏畧。
太史公曰。右渠負固國以絶祀。涉何誣功。爲兵發首。樓船將狹。徐廣曰。言其所將卒狹少。 及難離咎。悔失番禺。乃反見疑。荀彘爭勞。與遂皆誅。兩軍俱辱。將率莫侯矣。史記。
班固叙贊曰。爰洎朝鮮。燕之外區。漢興柔遠。與爾剖符。皆恃其阻。乍臣乍驕。孝武行師。誅滅海隅。漢書。
司馬貞贊曰。衛滿燕人。朝鮮是王。王險置都。路人作相。右渠首羗。涉何誷上。兆禍自斯。狐疑二將。山遂伏法。紛紜無狀。史記索隱。
范曄贊曰。宅是嵎夷。曰乃暘谷。巢山潛海。厥區九族。嬴末紛亂。燕人違難。雜華澆本。遂通有漢。韋昭曰。衛滿入朝鮮。旣雜華夷之風。又澆薄其本化。以至通於漢也。 眇眇偏譯。或從或畔。後漢書。
按衛氏。以漢惠帝元年丁未得國。至武帝元封三年癸酉降漢。凡三世八十七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