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음선생유고 서(梧陰先生遺稿敍)
김상헌(金尙憲)
지금의 영의정인 치천 상공稚川相公 윤방尹昉께서 하루는 상헌尙憲에게 명하기를, “선인先人의 문자가 망실되어 열에 두셋도 얻지 못하였으나, 끝내 전함이 없을 수는 없다. 이제 장차 출간을 하려고 하니, 그대가 서문을 쓰라.” 하셨다. 상헌이 고사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마침내 몸을 바로하고 말하기를,
“불녕不佞이 일찍이 두 아우분과 사귀어 자주 선先 상국相國의 문하에 올랐었습니다. 자고 나서 평시의 행동을 엿보니, 아침에 일어나 책상을 정리하고 정좌한 채 점필佔畢하셨는데, 치란에 관계된 것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반복하기를 마치 직접 그때에 나아가 그 일을 맡은 자처럼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야 마침내 공의 경세제민의 대업이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어떤 이가 저에게 묻기를, ‘세상에서 오음 상공梧陰相公의 공업功業과 월정月汀 선생의 문장을 칭하는데, 두 공이 과연 편중된 것이 있는가?’ 하기에, 제가 답하기를, ‘그런가? 그렇지 않다. 천리마驥에게 힘을 일컫지 않는 것은 덕에 비해 손색이 있기 때문이고 옥에 꾸밈을 가하지 않는 것은 기물에 비해 손색이 있기 때문이다. 구요咎繇에게 노래를 가지고 칭하지 않는 것은 계책謨에 비해 손색이 있기 때문이고 윤길보尹吉甫에게 송頌으로 이름 짓지 않는 것은 훈로勳勞에 비해 손색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 임진년(1592, 선조25)에 임금께서 몽진蒙塵을 가시어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철류綴旒와 같았는데, 그때 오음 상공께서 홀로 정승을 맡아 우리 선조宣祖를 도와 우리 방가邦家를 재조再造하시니, 생민生民의 무리들이 지금까지도 고마워하고 있다.
공적이 기상旂常에 기록되고 이정彛鼎에 새겨져 있으니, 중세 이후로 찾아보더라도 필적할 만한 이가 드물다. 공은 경생經生으로 기신起身하여,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대과大科에 발탁되어 석거난실石渠蘭室에 출입하였다. 맡은 바 조사藻思가 변화무쌍하고 한묵翰墨은 진진하여 비록 아로새기고 첨삭하는 기교를 부리지 않더라도 준웅駿雄하고 호일豪逸하였다.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잡기 어렵다고 여기니, 찬란하게 성대하다고 이를 만하다. 월정 선생의 경우에는 전대專對에 선발되어 나라의 무고를 밝게 씻었으니, 공렬은 조종祖宗을 빛내고 이름은 해내海內에 퍼졌으므로 또한 사한詞翰으로만 일컬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월정의 문장은 그 장점으로 인해 세상에 이름이 났고 오음공의 경우에는 여사餘事로 일컬어졌으니, 그보다 큰 것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대개 천지의 정영精英한 기운이 모여서 사람이 되니, 그것을 온축하면 도덕이 되고 발하면 사업이 되며 드러내면 문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겸하여 지닌 자는 천백 년 동안에 겨우 몇 사람뿐이었고 형제가 쌍벽을 이루어 이난二難이 아울러 아름다우며, 조정에 발을 들여놓아 간책簡策에 빛나기를 우리 두 공과 같이 하였던 자들은 더욱 탁절卓絶하여 보기가 드물다. 편중되었다고 하는 것은 국한되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 두 공에게 갖다 댈 수가 있겠는가.’ 하니, 물은 자가 마침내 물러갔습니다.”
하였다. 상공이 듣고서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기록할 만하다.” 하기에, 마침내 써서 서문으로 삼는다.
숭정 5년 임신년(1632, 인조10) 3월 자헌대부 지돈녕부사 겸 동지성균관사 세자우부빈객知敦寧府事兼同知成均館事世子右副賓客 안동安東 김상헌金尙憲은 삼가 서하다.
[주1] 두 아우분 : 오음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자 윤방의 동생인 윤휘(尹暉)와 윤훤(尹暄)을 가리킨다.
[주2] 구요(咎繇) : 순(舜) 임금의 신하인 고요(皐陶)를 이른다. 순 임금이 “임금의 팔다리인 대신들이 즐겁게 일하면 임금의 다스림이 흥기되어 백관들이 기뻐할 것이다.”라고 노래하자, 이에 화답하여 “임금께서 현명하시면 대신들도 훌륭하여 만사가 안정될 것입니다.”하고, 또 이어서 “임금께서 잗달게 굴면 대신들도 태만해져서 만사가 폐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임금을 권면한 노래의 전범으로 꼽힌다.《書經 益稷》
[주3] 윤길보(尹吉甫) :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의 현신(賢臣)으로, 험윤(玁狁)을 북벌(北伐)하였고 중흥의 업적을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송(頌)을 잘 지었다.
[주4] 종사(宗社)의……같았는데 : 유(旒)는 관(冠) 위에 매단 장식이다. 종묘사직의 위태함이 철류(綴旒)와 같다는 것은 국가가 위태로운 것이 유가 관에 매달린 듯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5] 기상(旂常) : 기(旂)와 상(常)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깃발이다. 용의 형상을 서로 어긋나게 그린 것을 기라 하고, 일월의 무늬를 그린 것을 상이라고 하는데, 신하 가운데 왕조에 공덕(功德)이 있으면 여기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周禮 春官 司常》
[주6] 이정(彛鼎) : 종묘에 비치해 놓는 제기와 솥을 말하는데, 옛날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들의 사적을 여기에 새겼다.
[주7] 경생(經生) : 원래는 한나라의 박사(博士)를 뜻하였으나, 후대에는 경학(經學)을 공부하는 일반적인 유생을 뜻한다.
[주8] 전대(專對) : 사신(使臣)을 말한다. 《논어》〈자로(子路)〉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경》 삼백편(三百篇)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四方)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처결하지〔專對〕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고 한 것에서 나왔다.
[주9] 이난(二難) : 형제의 덕행이나 학문이 뛰어나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후한(後漢) 때 진식(陳寔)의 여섯 아들 가운데 기(紀)와 심(諶) 두 아들이 가장 덕행이 뛰어났는데, 진식이 그들을 평하기를 “원방(元方), 즉 기는 형 되기가 어렵고〔難兄〕, 계방(季方), 즉 심은 아우 되기가 어렵다.〔難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8》
梧陰先生遺稿敍[金尙憲]
今元輔稚川相公。一日命尙憲曰。先人文字放軼。十不得二三。而終不可無傳。今將剞劂。子其敍之。尙憲固辭不獲。乃作而曰。不佞蚤交於叔季二郞間。屢登先相國門下。竊瞷於燕私之時。朝起拂几。正坐佔畢。理亂所關。必湛思之,反覆之。若身際其時而任其事者。然後乃知公經濟大業所從來矣。間有問於不佞者曰。世稱 梧陰相公功業。月汀先生文章。二公果有偏素耶。余曰唯唯否否。驥不稱力。遜於德也。玉不尙藻。遜於器也。咎繇不言歌。遜於謨也。尹吉甫不名頌。遜於勳勞也。昔在壬辰。國步播越。 宗社之危。若綴旒然。于時 梧陰相公。獨斡鼎軸。左右我宣祖。再造我邦家。生民之類。至今賴之。功績紀于旂常。銘于彛鼎。求之中世以來。蓋亦鮮有倫焉。公起身經生。魁司馬,擢大科。出入石渠蘭室。所居藻思動盪。翰墨淋漓。雖不事雕鏤繩削之巧。而駿雄豪逸。人自以爲難及。可謂彬彬然盛矣。至於月汀先生。則簡膺專對。昭湔國誣。功光 祖宗。名播海內。亦未可專以詞翰歸之也。雖然月汀之文章。以其長名世。而在 梧陰公。則乃稱餘事焉。非以其有大於是者歟。大抵天地精英之氣。鍾而爲人。蘊之爲道德。措之爲事業。著之爲文章。兼而有之者。千百年僅若而人。而兄弟聯璧。二難竝美。接武巖廊。輝映簡策。如我二公者。尤卓絶罕覯。若偏素之云。局而不通。 烏足以儗倫也哉。問者乃退。相公聞之曰。子之言可錄也。遂書以爲敍。 崇禎五年壬申三月。資憲大夫。知敦寧府事。兼同知成均館事。世子右副賓客。安東金尙憲。謹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