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대표적인 민족운동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규모나 영향 그리고 역사적 의의에서 3·1운동과 나란히 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히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의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책과 1929年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 1920년대 이후 노동·농민·학생운동의 성장 등 국내외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일어난 것이었다.
1929년 11월 3일은 日王 明治의 탄생기념일인 明治節이었으나, 또한 우리에게는 음력 10월 3일 국조 단군이 개국하신 날이었다. 우리의 開天節에 일제의 神社에 참배를 강요당했던 광주 고보생들의 비통한 심경에 가해졌던 일본 학생들의 무례한 도전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광주학생독입운동은 광주에서의 항일시위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지역에 그치지 않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시위나 동맹휴학 등의 형태로 계속되어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가 참가하였고 참가 학생 수는 54,000 여 명으로 당시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희생당한 학생 수는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당한 사람이 1,462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파급되어 만주의 간도와 吉林省, 중국의 上海, 北京, 그리고 일본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격려하는 집회와 만세시위가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의 항일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新幹會·槿友會·朝鮮靑年同盟 등 당시의 주요 사회단체와 醒進會·讀書會中央本部·朝鮮學生前衛同盟 등 비밀결사의 지원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은 끊임없이 이어져 1940연대 전쟁에 따른 강압적 징병과 공출에 대한 저항운동은 드디어 1943년 5월 광주고보 동맹휴학을 계기로 제2차 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렇듯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고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자랑스러운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 자료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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