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저씨들 곤명, 석림, 구향을 다녀오면서
Ⅰ. 여행을 떠나며.
정년퇴임 1년이 지나고 2년차 시기에 2002년 1월에 이어 2008년 10월 6일 5박6일간 중국의 남쪽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나라와 경계에 있는 하남성의 곤명, 석림, 구향 등지를 다녀왔다. 인천국제공항에서 6일 밤7시 10분 곤명행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약4시간30분의 비행 끝에 곤명에 도착하였다. 곤명에 오니 어두운 밤으로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화창한 날씨로 가이더 즉 지종석 군의 안내로 곤명 국제공항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버스에 탑승하여 5박 6일간 동행할 서울 등 경기지역의 일행과 합류하여 곤명의 중심가에 위치한 사꾸라 호텔에 도착 여장을 풀었다.
이 글은 퇴임 후의 인생 여정의 한 드라마로 글로 남기고 싶어 쓰는 것이라 가이더의 안내 말 기역과 인터넷 및 우리 일행이 둘러 본 곳을 일정별로 기억에 남는 대로 정리하여 보고자 하였다.
Ⅱ. 여행의 개요
1. 여행일시 : 2008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5박6일
2. 참석자 : 최창락, 강혁희, 김태희, 권혁진, 임병세, 이의홍, 한규직, 장재항, 한재선 9명
3. 여행지
1일차는 대한항공 7시10분 곤명행(KE886) 밤10시40분 도착, 사쿠라호텔 여장
2일차 당나라의 건축예술을 집대성한 '원통사', 곤명 시민들의 휴식처 '취호공원', 곤명시 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서산공원', 중국에서 6번째로 큰 담수호 '곤명호', 찻집 쇼핑센터 와 꽃시장 '가멍화훼시장',
3일차 운남성 24개 소수민족의 풍토를 보여주는 '운남민족촌', 보석상 쇼핑, 세기금원 온천욕,
4일차 대석림(大石林), 소석림(小石林), 천연동굴 풍경구인 구향동굴, 라텍스 실크 쇼핑센 터 및 북한 상품안내소, 발맛사지
5일차 식물원, 구리로 만들어져 중국의 4대 동전(銅殿)으로 알려진 도교 사원 '금전', 곤명시박 물관, 시인들이 풍월을 읊었던 '대관루', 보이차 쑈핑.
6일차 저녁식사후 공항으로 이동 밤12시10분 공항이륙 인천 국제공항 도착 5시5분 (대한항 공 3시간 40분소요. 풍향으로 1시간 단축)
Ⅲ. 둘러본 곳
1. 곤명'의 특징
곤명은 일년 내내 꽃이 피는 도시로 곤명(昆明) 즉 (쿤밍)으로 불리 운다. 곤명은 중국 남서부 운남성(云南省)의 성도로 운남성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인 동시에 2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역사와 여행의 도시라 한다.
지리적으로 운귀(云貴)고원 중부에 위치하여 기후가 온화하고 여름에는 혹서가 없고, 겨울에도 혹한이 없다고 한다. 사계절이 봄과 같고, 4계절 끊임없이 꽃이 핀다고 하여 사람들은 '춘성(春城)'이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특히 곤명은 중국 최고의 여행지로 중국 서남쪽 변방에 위치하며 베트남, 미안마, 라오스 삼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운남성은 오색찬란한 화려한 성으로 각인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운남성의 서북쪽은 드높은 기세의 험준한 협곡이 펼쳐져 있어 우뚝 솟은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옥룡설산, 합파설산, 매리설산 등은 그 기묘하면서 험준한 봉우리가 있고, 동남쪽의 산간 평지에는 합니족이 대대로 경작해온 계단식 밭이 층층이 겹쳐져 있는데, 매년 9월이면 노란색의 유채꽃이 산과 밭을 가득채워 마치 그 모습이 땅과 하늘을 황금색으로 가득 채운다고 한다.
이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곤명은 백족, 합니족, 태족, 납시족 등 25개 소수민족들이 운남성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납시족의 동파문화, 대리의 백족문화, 태족의 패엽문화 등 그들의 다양한 신화, 가무, 그림, 음악은 운남의 독특한 민속문화와 명승고적이 매우 많아서 도시전체가 하나의 관광지라고 한다.
특히 곤명은 고대에 이 지역에 있던 부족의 명칭으로 이족(?族)의 고대 언어의 음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1274년 원대에 곤명현이 생기면서 운남성의 성도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1919년 중국 지역을 공식적으로 분할 정리하면서 운남시 정부가 생기고 1922년 정식으로 곤명시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관광지로 '천하제일기경'이라 불리는 대/소 곤명은 한때 프랑스의 주차지로서 가톨릭 대성당, 수녀원, 프랑스인들이 출입하는 클럽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하노이에서 시작되는 협괘 열차는 1895년~1904년 프랑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지끔 까지도 운행이 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가 원한 것은 이 지방의 주석, 등이었다고 한다. 이 지방은 또 목재, 고무 쌀 등이 풍부하다고 한다. 곤명은 태평양 전쟁에는 토호들의 수중에 있었으며 일본의 동남아 침략의 교두보로도 이용 되었다고 한다.
석림, 중국의 6대 담수호 중 하나로 고원명주(高原明珠)로 불리우는 곤명호, 각 소수민족의 정수를 농축시킨 운남 민족촌이 있고, 그 밖에도 구향동굴, 대관루, 서산공원 등은 곤명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사계절이 모두 봄처럼 따뜻하여 언제나 꽃이 만발하고 산이 푸르며, 이런 자연환경에 어울려 수많은 명승고적이 자리하고 있는 중국 최고의 여행지로 불리운다고하여 이곳을 우리 일행은 찾게 되었다.
2. 우리가 둘러 본 곳
◆ 1일차 9명의 아저씨들 인천공항을 출발하다
설래이는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고 집을 나서 인천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처음 타보는 공항철도는 타국을 연상하듯 조요한 가운데 여행객을 싯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공항으로 출발하는 열차는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생각할 정도로 모든 시설이 완벽할 정도로 갖춰져 여행객을 더욱 마음 속으로 살찌우개하였고 특히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이곳이 우리가사는 대한 민국 인천인가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천공항에 아저씨들 9명이 모여 여행사로부터 미팅을 하고 짐을 부치고 난 후 출국 수속을 받고 28케이트에서 7시 10분 곤명으로(KE886)출발하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기다렸다. 공항의 면세점은 많은 물건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며 목적지가 다른 여행객들은 그져 표정이 밝아보였다. 우리는 비행기 출발시간을 기다리며 이곳 저곳을 두리 번 거리며 들뜬 마음을 달랬다. 드디어 비행기 탑승을 완료하고 자리에 앉아 이륙을 기다리며 집에다 잘 다녀오마하는 전화를 남기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비행기는 괭음을 내며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비행기 탑승객은 주로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도 약간 있었다. 곤명과 우리나라의 시차는 1시간차로 시계바늘을 앞으로 1시간 돌려놓았다. 밤 10시40분경 곤명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 아저씨들은 지동식이라는 가이더를 만나 장미꽃송이를 나누어 주며 미팅을 하고, 곤명시 중심가의 사쿠라호텔에 도착 방 배정을 받고 여장을 풀게 되었다.
우리는 호텔로 오면서 중국인들의 아슬아슬한 교통질서 묘기는 볼 만하였고, 한편으로는 가슴을 조일 정도로 자동차, 자전거, 오토바이의 질주 행열은 위험하기 짝이 없어 이곳에서의 교통질서 지키기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의 소주파티가 있었다. 첫날 소주 5병, 맥주 2병을 해치우고 옆방에서는 또 소조파티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 호텔에서 첫밤을 보내며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며 엎치락 뒤치락하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술 냄새가 버스에 진동을 하였다.
◆ 2일차
몇번 중국에 다녀왔지만 중국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발전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못하겠다. 거리도 깨끗하고, 거리의 사람들의 모습도 종전보담 한곁 깨끗해 보인다. 그러나 교통질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날씨가 따스하고 넓은 땅이 있으니 여유로워 보이는데...우리는 지금 촛불집회, 국가 정책에 대한 반대만하는 정치싸움 정말 부끄러울 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주변을 산책하다보니 우리가 묵은 싸꾸라호텔이 곤명의 중심가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곤명시의 정부 청사와 상무위원회 건물이 주변에 있었다. 호텔에 들어와 3층의 식당으로 향하였다. 메뉴가 단조로우면서 입맛에 맞아 맛있게 먹었다. 요즈음 나의 식사량이 많이 늘었다. 몸이 좋아진 것 같지만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해 걱정이다. 식사량에 절재가 되지 않았다.
◉ 원통사 : 2일차 첫 번째로 찾은 곳은 당나라의 건축예술을 집대성한 '원통사' 사찰이다.
원통사(圓通寺)는 곤명시내의 원통가(圓通街)에 위치하고 있으며, 1200여년 전에 건설된 곤명에서 최고로 오래된 불교사찰 가운데 하나이며, 규모가 가장 큰 사찰이다. 이 사찰은 중국의 서남지역 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원통사에는 푸른산, 비취색의 물, 여러 색깔의 물고기, 하얀색의 다리, 붉은 정자 등 조화로운 색깔의 경치로 인하여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찰은 남향으로 지어져 있으며,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며, 모든 사찰 내의 건물들은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앞에 연못이 있고, 양쪽으로는 회랑이 설치되어 있다.
원통보전 내에는 청나라 광서 연간에 만든 3개의 부처상이 있으며 정 중앙에는 두 개의 10m나 되는 기둥이 있으며, 각 기둥마다 화려한 색깔의 용이 기둥에 꽈리를 틀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또한 사방의 벽에는 오백나한상이 만들어져 있어 중국 사찰 중 걸작에 속하는 절이라 하였다.
안내자에 의하면 원통불교는 중국의 3대불교, 즉 대승불교, 소승불교, 라마교의 사찰들로 구성되어있는데, 그 중 대승불교를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원통사를 찾아서>
◉ 곤명 시민들의 휴식처 '취호공원',
취호공원에 도착한 우리는 입구 건너편에 노란색의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옛 육군사관학교 건물이라하였다. 우리나라의 독립군 이범석 장군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였다. 공원에 들어서니 이 곳 시민들이 이곳 저곳에서 자유롭게 건강을 위해서인지 땐스를 하는가 하면 혼자서 춤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면적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늘어진 버드나무와 푸른 호수물이 주요 특색을 이루기 때문에 1900년 초기에 "취호"가 정식명칭이 되었고 원래는 하나의 만(灣)이었는데, 점차 수위(水位)가 내려가면서 나중에 푸른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취호는 크게 5곳의 풍경구로 나뉘고 호심도(湖心島)는 호심정(湖心亭)과 관어루(觀魚樓) 등 청대 건축물이 주를 이루고, 동남쪽은 수월헌(水月軒)과 금어도(金魚島), 동북쪽은 죽림도(竹林島)와 구룡연못(九龍池), 남쪽은 호로도(葫瀘島)와 구곡교(九曲橋), 서쪽은 해심정(海心亭)이 있었다.
쿤밍시내의 서북쪽에 있는 공원으로 14세기 중엽 원나라 때부터 개방되었으며, 이름의 유래는 8개의 물비취(水翠;호수의 갯수), 4계절의 대나무비취(竹翠), 봄여름의 버드나무비취(柳翠)라 하여 '취후(翠湖)'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공원의 산책로는 십자형으로 되어 호수를 크게 4등분으로 나눈다. 남북으로 난 길은 '위엔티(院堤)'라고 하는데, 윈난 총독인 위엔웬팡(院元傍)이 수축한 것을 기념한 것입니다.
특히 이 호수는 겨울에 장관을 이루워 '붉은입 갈매기'라는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들기 때문에 한덩어리에 1위안씩 파는 빵을 쪼개어 던져주면, 물에서, 공중에서 받아먹는다고 한다.
<정문에 있는 옛 육군사관학교 건물과 곤명 시민들의 휴식처 '취호공원' >
◉ 곤명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서산공원', 중국에서 6번째로 큰 담수호 '곤명호',
서산공원에 오르기 위해 곤명의 변두리를 빠져나왔다. 흙먼지로 자욱한 거리, 잘 정돈되지 못한 시가지 및 건물들 지저분하기 말이 안이다. 한참을 가니 골목으로 들어가 중국식의 3층건물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가지고간 고추장, 장조림, 깻잎, 짐 등을 꺼내 비벼 먹으며 기름이 강한 중국 음식을 먹었다. 나는 어떠한 음식도 잘 먹었다. 점심을 마치고 서산공원으로 향하였다.
산세가 미인이 잠을 자고 있는 듯하다 하여 '잠자는 미인산'이라 불리기도 하고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이라 하여 '와불산(臥佛山)'이라 불리기도 하는 서산은 그 정상에 있는 용문석굴의 채광이 오전에 가장 좋다고 합니다.
날씨가 흐린 가운데 비가 간간히 내리는 열대성 기후의 특징을 맞보며 우리는 케이불카를 타고 산림이 우거진 곤명호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공원으로 올라갔다. 절벽 같은 산 주변을 등산로를 사람이 손수 3대에 몇 년인지는 잘 기억이나지 않지만 수백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돌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곤명호를 바라보며 주변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었다.
서산 산림공원은 가이더의 말에 의하면 화정산, 태화산, 나한산 등의 크고 작은 산군을 통틀어 이른다고 한다. 서산은 곳곳에 명소와 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나한산 벼랑위에 위치한 용문까지는 벼랑 옆으로 길이 뚫려 있는데, 약 7km에 이르는 길을 가다보면 화정사와 태화사, 도교사원인 삼청각등을 볼 수 있었다. 메모가 잘 되지 못해 정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서산은 해발 2500m의 높이로 면적이 2만평방미터에 이르고, 웅대한 삼림이 공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서산의 주요 유람지로는 화정사(華亭寺), 태화사(太華寺), 니얼묘, 삼청각(三淸閣), 용문석굴(龍門石窟), 전지(澱池) 등이 있고, 제일 높이 있는 용문석굴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걸어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니 전동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이를 타고 출발지로 나와 다음 행선지인 찻집과 꽃시장이 중심인 쇼핑센터로 향하였다.
<곤명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서산공원'd에서>
◉ 찻집 쇼핑센터와 꽃시장 '가멍화훼시장',
꽃의 도시라고 불리울 만큼 전 세계의 희귀한 꽃들까지 볼 수 있는 시장이다 매년 국제 엑스포가 열릴 정도로 곤명지역의 유명한 관광지역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잘 몰라서 그런지 꽃이 꽃이지 뭐 다른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에서 들어서면서부터 커피를 코너를 옮길 때 마다 안내원들이 주워 그저 마시기만하였다. 종착에 다다르니 역시 커피를 구매하는 것이였다. 나도 사고 싶은 충동은 많았으나 잘 못사가면 그 잔소리 어떻게 듣지 잘 사왔느니, 못사왔느니 말이다.
이 곳을 나오니 꽃시장이였다. 아름다웠다. 그저 말이다. 생화, 조화들이 혼재하면서 중국인들이 도매로 거래하는 것 같았다. 이 곳 쇼핑쎈타는 향수 판매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는 워나 먼 거리를 강행하다보니 생리현상이 나타났다. 화장실을 찾아도 안보였다. 참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버스 뒤편 노상방류를 한다던가 아니면 가이더의 안내로 주변 식당의 화장실을 이용하여 급한 생리현상을 마감하였다. 이의홍 교장에게 감사할 뿐이였다. 배가 살살 아푼 사람은 이교장을 찾아 약을 먹으면 만사형통이였다. 한의사를 둔 사위의 덕분이였다. 나는 남은 약을 얻어 집으로 갖고와 지금도 배가 아프면 먹으면 금방나았다. 지금은 거의 다 떨어져갔다.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 또 좀 져달라고 하였으면 좋을 터인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2일차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에 들었다, 잠을 자는 동안 동료인 임병세 교장이 모임 불편을 느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아침 우리는 궁금하여 병원을 찾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그냥 호텔로 돌아왔으나 이미 임교장님은 호텔에 도착하여 평온을 되찾았다. 곤명이 워낙 고산지대에 위치하였고 또 다시 서산공원을 올랐으니 산소결핍증이 있었던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나 다행히 잘 이겨 내여 동행하게 되었다. 건강이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아저씨들 모두 건강하세요.
<찻집 쇼핑센터와 꽃시장 '가멍화훼시장, 저녁을 먹은 식당 간판>
◆ 3일차
◉ 운남성 24개 소수민족의 풍속토를 보여주는 '운남민족촌'을 둘렀다.
시내 중심에서 4km 떨어져 있는 소수민족을 테마로 한 중국식 민속촌. 버스를 내려 좌측에는 윈난 민족박물관 우측에는 윈난 민족촌 입구가 있습니다. 윈난성의 바이족, 지눠족, 사니족,티벳족을 비롯한 24개 소수민족의 문화와 생활, 민속자료와 민속 춤 등을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 가이더가 입장권을 구매하는 동안 입구에 통나무와 같이 모든 나무가 이어져 있어 신기하기도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콘크리트로 만든 모조품으로 그 위에 나무를 올려 심은 담장에 불과하였다. 이 곳으로 들어가니 소수민족의 특산품이라며 천원, 이천원하며 외쳐대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한국 관광객이 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윈난의 26개 소수민족 중 약12개 민족의 촌락을 실제 형태로 모아놓았다. 한 자리에서 각 민족의 주거형태와 풍속 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곳이 따이족(泰族) 촌이다. 일반적으로 거기서 시작하여 '백탑(白塔)'을 지나는 코스를 택한다. 민족촌을 시계방향으로 돌면 좋으며, 시간에 맞추어서 장소에 따라 소수민족의 민속 공연이 펼쳐지므로 알맞게 걸음 속도를 조절한다.
태족촌은 풍치가 제일 짙고 가장 아름다운 촌 가운데의 하나이다. 열대와 아열대 식물들로 빼곡하게 가꿔진 가운데 정교하고 우아한 태족의 대나무집들로 점점이 단장되어 있다.
백족(白族)촌은 가장 호화롭다. 백족예술관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진품이 가장 많은 나비전시관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대리석 진품관내에는 기괴한 돌들이 매우 많아 눈길을 끈다. 몽고족의 집에 둘러 내부에 들어가니 TV에서 본 그 모습으로 낯설지가 않았다.
우리 일행 24명은 운남민족촌을 빠져나와 점식을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였다. 오는 도중에 큰 건물들이 새로지워 매우 웅장하였다. 이 건물들은 새로 이사할 운남시청, 검찰청, 상무위원 등 관청들이라고 한다.
점심을 하고 난후 일행은 천원, 삼천원짜리 장난감피리와 부채를 샀다. 식당 바로 1층에 위치한 보석상으로 안내되었다. 무엇이 좋은지 모르겠다.
<운남성 24개 소수민족의 풍속토를 보여주는 '운남민족촌'에서>
◉ 세기금원 온천욕장에 들어갔다온 후 야간 술집을 찾아서.
우리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곤명 관광버스를 약 30분 정도 타고 우리가 즐길 세기금원대반점(世記金源大飯店 -EM Park Grand Hotel)의 부속 건물에 있는 온천장으로 들어갔다. 호텔은 5성급으로 운남성에서는 가장 크고 호화로운 호텔이라고 하였다. 온천장에 들어서며 우선 신발을 맡기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온천장에 들어갔으나 온천장인지 온수탕인지 알 수 없었다. 온천장 이곳저곳을 두리번 거리며 쉴 곳을 찾아았으나 찾을 수 없어 그냥 나오려고 하는 순간 재선과 규직 동료인 아저씨를 만나 1시간 30분간 푹 쉴 수가 있었다.
온천장을 나온 우리는 저녁 을 먹고 호텔로 들어와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하였다. 술집을 찾는 것이였다. 한참을 찾다 호텔로 돌아오는 순간 대포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안주 4개에 맥주 2병, 술은 우리가 갔고 가서 먹기 시작하였다. 안주는 아주 짜서 먹기가 힘이들었으나 그런대로 먹을 만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났다. 생리현상이다. 화장실을 찾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주인이 알아채고 우리를 안내하였으나 200미터나 되는 먼거리에 공중화장실이 잇었다. 중국돈 2각이었다. 중국돈이 없어 나중 술값에 언져 계산하기로 하고 볼 일 보게 되었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또 소주 파티에 들어갔다. 나는 모른척하고 잠을 잦으나 자나마나였다. 왜 그렇게 밑이 찔긴지 말야 누구냐고 최창락이하고 강혁희지 뭐 앞으로 고쳐야 할 것 같다. 알았지 나이를 먹는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아저씨 모두들 술 조금만 먹어라 명심해야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말야. 과거 교직에 근무할 때 그렇게 술 좋아하던 친구들 벌써 많이 가고 또 지금은 몸이 불편하여 거동을 잘 못하더라 적당이 먹어라.
<점심을 먹고 피리를 구입 동심의 세계로, 세기금원 온천욕장 앞에서>
◆ 4일차
오늘이 이곳에 온 보람을 느끼는 하일나이틍트인 대석림(大石林), 소석림(小石林), 천연동굴 풍경구인 구향동굴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몸의 피로를 푸는 발맛사지를 하기로 되었다, 2002년에 왔던 때를 생각하며 하루의 관광을 보내기로 하였다.
◉ 대석림(大石林), 소석림(小石林),
2002년에 이 곳을 찾을 때는 비포장 도로였다. 그러나 지금은 잘 포장된 고속도로로 변하였다. 석림은 운남성 석림이족 자치현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곤명에서부터 서북쪽으로 약 100km정도 떨어져 있는 중국의 유명한 풍경명승지로서 "천하제일기관-天下第一奇观"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관광지란다.
면적은 350㎢ 이며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카르스트 지형 중의 하나란다. 이곳은 약 2억년전에는 바다로서 많은 석회암들이 퇴적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시기의 조산운동과 지각의 변화로 인하여 암석이 지면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약 200만년 전에는 돌기둥들이 서로 분리되었고, 오랜 시간 동안 바람과 비에 의하여 침식되고 변화를 일으켜, 무순한 석봉들과, 돌기둥, 석순등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이러한 천라만상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석림의 주요관광지는 대략 3분의 1점유하고 있으며, 관광코스는 대략 5km정도 이다. 석림풍경구는 대소석림(大小石林), 내고석림(乃古石林), 지운동(芝云洞), 장호(長湖), 대첩수폭포(大疊水瀑布), 월호(月湖), 기풍동(奇風洞) 7개의 풍경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대소석림은 석림 관광의 중심으로, "대석림(大石林)"과 "소석림(小石林)"으로 나눠 구분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곳을 차례로 보앗다. 정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석림의 숲 속에 조그만한 통로가 있고 이 통로를 따라 대 석림의 전체를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중간에는 연못도 조성되어 있고 넓은 광장도, 정자도 세워져 있다.
석림은 2억년전 바다 밑이었던 곳이 아시아판과 유럽판의 충돌로 이루어졌는데 바위가 숲을 이룬다고 하여 용운이란 사람이 이곳을 석림이라고 부르자고 하여 오늘날 까지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석림은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에서 동남쪽으로 126㎞떨어져 있고, 검회색 감회색의 뾰족한 돌기둥이 350㎢의 산과 들에 온통 뒤덮어있고, 그 바위 의 행렬이 무려 반경 4km나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 속에 들어가면 일정한 길이 없고 미로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혼자 떨어지면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행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전동차를 타고 소석림과 대석림 순으로 달렸다. 전동차 운전은 아름다운 이곳의 이족 부녀자로 아주 예뻣다. 가면서 아름다운 곳에 쉬어 사진을 촬영하였다. 아저씨들하면 모두 모였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우정이 쌓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대석림(大石林)은 방대한 땅에 바위들이 무질서하게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곳이고, 소석림(小石林)은 바위들이 초원이나 연못가에 모둠을 이루며 듬성듬성 있는 곳을 말한단다.
대석림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길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숫가 건너편에는 기기괴괴한 바위들이 산과 마을처럼 모둠을 이루고 서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꽃과 나무와 바위가 호숫가에 어우러져 푸른 물결에 반사되어 비처보이는 비취빛 호수는 비경의 극치였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석림(大石林), 소석림(小石林)에서 아저씨들 하면 자동으로 모여>
석림으로 올라가는 길에 곤명의 대표적인 소수민족 이족 여인들이 눈에 띄었다. 가이드는 이족 여인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족 여인들은 머리에 부리가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부리가 2개면 처녀,1개면 결혼을 앞둔 신부, 부리가 없으면 아줌마라고 하였다.
부리를 함부로 건드리면 큰 코 다친다고 하였다. 이들에게 부리를 건드리는 행위는 ‘청혼’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난으로 함으로 건드리면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 되므로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다.
한참 올라가니 중국의 4대 절경중의 하나로 지상의 천국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대석림이 한 눈에 펼쳐 보였다. 2100년 전 아시아판(아시아대륙)과 유럽판(유럽대륙)의 충돌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신의 창조물이 아니면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절경을 바위로 조화를 꾸몄을까? 눈을 의심해 보며 한참동안 대석림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서히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돌 숲 사이로 몸을 이동하면서 그 절경을 부분별로 보기로 하였다. 돌기둥과 돌 벽의 크기는 5m에서부터 50m정도로 크고 작은 바위들이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고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이루며 서 있었다.
바위들 중에는 특별한 특징을 지닌 것들도 많이 있었다. 장군석, 시인석, 선녀석, 용석, 거북석, 만선석, 쌍 남근석 등이 있었다.
특히 석림의 대표적인 기암괴석인 아스마석은 애인과 이별한 이족 처녀의 슬픈 사연이 서려 있는 전설적인 바위도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영화 서유기의 촬영무대로도 유명하단다.
망봉정에서 바라보는 돌 숲의 모습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곳을 한번 떠나면 또 언제 오려나? 생각하면서 힘들고 버거웠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다.
대석림은 서울의 큰 거리의 빌딩숲이라면 소석림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의 풍경 같기도 하였다. 석림은 지상의 천국이란 별명답게 환상적인 절경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곳의 많은 관공객을 물리치고 빠져 나온 후 식당에 둘렀다. 이곳에서는 우리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의 단체를 촬영한 사진을 팔기 위해서이다. 기념으로 한 장을 구입하였다. 다시; 점심을 마치고 구향동굴로 향하였다. 가는 길은 2차선 도로로 포장이 되어있었다. 가면서 옥수수밭이 줄비하였고 수력 발전소도 보였다. 농촌의 모습과 그들의 주택가도 보았다. 그저 돕고 싶은 마음이 였다.
<아저씨들의 대석림과 소석림에서의 행진>
◉ 구향동굴.
14시 이러한 낭만과 추억을 뒤로 남긴 체 지상의 천국 석림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지하의 천국 구향동굴을 향하여 출발했다.
가는 도중 나는 차창으로 눈을 돌려 이 지역의 자연환경을 보면서 갔다. 이 지역 모두가 소석림과 같은 바위 숲이 논에도, 밭에도, 초원에도 모든 곳에도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정말 신의 조화로 만들어진 신의 땅 같아 보였다.
14시 40분 구향동굴로 들어가는 경내에 도착했다. 이곳은 산세가 험악하고 깊은 계곡을 건너야하기 때문에 리프트를 타고 가야한단다. 그래서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구향동굴을 향하였다. 역시 가이드의 말대로 산세가 매우 험악했다. 계곡의 깊이가 수백미터로 아래로 내려 보이는 나무들이 아슬아슬하게 보였고,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는 계곡물이 내 귓청을 때렸다. 우리 일행은 리프트에서 내려 곧바로 구량동굴로 향했다.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강하니 맑고 깊어 보이는 동굴 형태의 냇가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간간히 하늘이 보이는 깊은 개곡의 물줄기를 따라 한바퀴 돌고 배에서 내려 동굴 형태의 이상한 모양의 통행로로 이동하였다.
구향을 보지 않고서는 운남에 왔다고 할 수 없다고 하리만큼 아름다운 곳이란다 곤명에서 남동쪽 90km 지점에 있으며 석림과는 20km를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한다. 구향명승지는 신전(神田), 자웅폭(雌雄瀑), 혼협(魂峽), 웅사대청(雄獅大廳), 신녀궁(神女宮), 이가채(彛家寨), 지하도림석(地下倒林石), 취협(翠峽), 여유(旅游)삭도 등 9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풍경구에 들어가면 먼저 배를 타고 취협을 유람한다. 취협은 길이가 600m 정도이고, 왕복하는데 약 20분이 소요된다. 취협을 구경하고 원래 길로 되돌아와 혼협으로 들어간다. 협곡의 높이는 100m에 이르고 폭이 제일 좁은 곳은 20m가 채 안되는 것 같았다.
웅사대청은 세계에서 유일한 지하 자연대청으로서 면적이 15,000평방미터에 이른다. 雄獅大廳이란 이름은 동굴 앞의 종유석이 마치 숫사자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이곳에서는 구향동굴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구향기석(奇石)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곳에 각종 수석을 전시하고 있었다.
<구향동굴의 입구부터 아저씨들 행진>
웅사대청을 나와 석판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종유석으로 가득한 신녀궁을 만난다. 웅사대청 남쪽에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높이가 30m나 되는 자웅폭포를 만난다. 폭포대 앞으로 나가면 바로 구향에서 제일 독특한 풍경인 신전이다.
이 곳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굴은 참 길고 올라오기가 숨이 찾다. 한화 5,000원이면 이들이 싫어 올려 보내 준다. 오라오면서 굴 통행로 모양이 마치 산악지형에서 층계를 이룬 밭과 같다. 제일 큰 것의 면적은 100평방m인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유석 기관이다. 전체를 다 돌아보는데는 약 3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구향동굴은 한마디로 규모가 거대했다. 천장의 높이가 2m에서 100m 정도로 높고 낮음이 심했고, 넓이도 다양했다. 어떤 곳은 큰 실내 체육관 정도로 매우 넓은 곳도 있었다.
동굴을 통해 흘러내리는 물은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모두 합해져서 흘러내리기 때문에 우기에 관광할 때는 배를 타고 건너면서 관람을 해야 할 정도로 많은 물이 흐른다고 하였다.
천장과 벽면과 바닥에는 우리나라 강원도 석류굴이나 충북 환성굴처럼 석죽과 다양한 모양의 형상들이 예술 조각품처럼 서 있거나 벽면
형상들의 이름은 종교와 관련된 이름과 동, 식물, 신화적인 내용의 이름이 한자어로 기록 되어 있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부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면 하나하나에 몰두하고 가는 동난 또 새로운 굴이 나왔다. 밖을 나와 산을 돌아 새로운 굴이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는 처음보다 규모는 작으나 아기자기한 면은 더 있었다.
굴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은 경사가 극심한 삼백 개의 계단으로 되어있었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노약자들은 우리나라 가마와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올라가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이것은 건장한 젊은이가 앞뒤에서 들고 가는 교통수단이다. 한번 이용료가 우리 돈 10,000원이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용해 주는 것이 도리인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빈 몸으로 올라가도 땀이 나고 버거운데 나 편히 가자고 그들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인간이 인간노예를 쓴다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냥 걸어갔다. 우리 일행들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렇게 우리 일행은 땀을 뻘뻘 흘리며 급경사진 긴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올라온 다음 리프트를 타고 구향의 주차장에 도달하여 오늘의 관광일정을 마치고 곤명으로 가는 도중 쑈핑쎈타 방문 2곳을 들룬 후 저녁을 하게 되었다.
◉ 라텍스 실크 쇼핑센터 및 북한 상품안내소,
우선 라텍스 실크 쇼핑센터를 둘렀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씰크, 보석 약품 등이 대중을 이루고 이는 모두 믿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충동구매로 호기심으로 사기 마련이다. 서울 일행이 구입한 것 같았다. 그리고 북한 약품 상에 들렀으나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니 하며 체제 선전과 함께 고가의 약품을 선전하였으나 왠지 동포애 보다 싸늘한 이타적 마음이 감돌았다. 이곳에서는 한 사람도 물건을 구매하지 않았다. 국내 국제상황이 북한 핵문제로 좋지 않은 상황에 모두들 같은 감정의 느낌을 받아서 인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저녁을 오래간만에 한식으로 하니 그래도 식사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식당 주변의 짝퉁 물건을 둘러보았다.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도하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곤명 시내에 위치한 유명한 발맛사지를 받으러 같다. 나는 전심 맛사지를 받았으면 좋앗을 터인데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여 발 맛사지만 받기로하엿였다.
<라텍스 실크 쇼핑센터 및 북한 상품안내소 앞에서>
◆ 저녁 발 맛사지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의 넓은 홀에 누울 수 있는 쇼파가 주욱 놓여있고 더운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하나씩 달린곳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조그만 욕조가 있다. 남녀의 음양설에 의해 남자 손님은 여자가 여자 손님은 남자가 발맛사지를 하도록 담당이 정해졌다. 모두 20대 초반 전후의 맛사지를 하는 사람들인데 꾸이린(桂林)에 맛사지 전문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따야 된다고 한다.
따뜻한 물에 누런가루를 타니 약초 풀어 놓은 듯 냄새가 난다. 물에 발을 씻고 나면 발맛사지를 시작하는데 발맛사지가 끝나면 어깨 팔 다리 머리까지 시원하게 안마를 해준다. 여기저기 간지럽다고 킥킥 거리고 또한 "어이구 시원하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시원하고 피로가 확 풀린 기분이였다.
많은 사람이 한곳에서 하기 때문에 일찍 끝나고 늦게 끝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손바닥으로 마사지 소리를 크게 내서 서로 배런스(Balance)를 맞추고 있었다.
2단계는 세수대야의 물을 치우고 아가씨들은 발을 마주보고 낮은 의자에 앉아 발 물기를 제거하고, 한쪽 발은 열이 식지 않도록 수건으로 칭칭 감아놓은 후 다른 쪽 발에 피로를 푸는 연고제를 바르고 마사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발가락 하나하나에서부터 시작하여 발바닥, 말목, 발 뒤 굽까지 빈틈없이 뼈마디와 근육을 풀어주었다. 반대발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마사지를 해주었다
약간 아프기도 하였지만 아가시들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손으로 강약을 조절하며 성심성의껏 해주어 피로가 확 가신 것 같았다. 나는 아가씨들에게 영어로 참 예쁘다. 친절하다. 정성을 다한다, 훌륭한 마사지 사라고 칭찬하면서 농담을 했다. 아가씨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싱글싱글 웃으면서 좋아하기만 했다.
◆ 5일차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로 식물원과 구리로 만들어져 중국의 4대 동전(銅殿)으로 알려진 도교 사원 '금전', 곤명시박물관, 시인들이 풍월을 읊었던 '대관루'를 관광하고 중국여행의 공식일정이 마감되는 날이다.
◉ 곤명 시립 식물원
짐을 챙겨 호텔을 나온 일행은 곤명의 시립 식물원을 방문하였다. 식물원이기 보다는 차리라리 뒷동산 모습을 연상할 정도로 초라한 느낌을 받았다. 이곳을 둘로 보니 그런대로 오래된 곳으로 많은 식물들이 재배되고 있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아름다음을 더했다. 더욱이 이곳에서 노부부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인부들이 공원을 정비하고 있었으며, 넓은 연못은 수생식물들이 잘자라고 잇었다. 우리는 이곳을 나와 다음 행선지에 구리로 만들어져 중국의 4대 동전(銅殿)으로 알려진 도교 사원 '금전',을 향하였다, 지름길로 가는 것 같았다. 비포장으로 주변에는 재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에 온 여행의 옛 모습이였다.
<곤명 시립 식물원에서 아저씨들 모습>
◉ 구리로 만들어져 중국의 4대 동전(銅殿)으로 알려진 도교 사원 '금전',
곤명의 시골길 비포장을 달려 금전에 도착하였다. 금전은 곤명에서 동북쪽으로 15㎞ 떨어진 명봉산에 위치한 도교 사원으로 소나무로 우거진 산을 걸어오르니 금전이라는곳에 다다랐다. 원내에 들어거면 태화궁의 대문위에 이곳의 일년 사계절 봄과 같이 따뜻하다는 온화한 날씨라는 문구가 쒸어져있다.
사원의 대문은 링링문이라 칭하며 문의 양쪽 기둥에는 이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찬양하는 글과 도가 사상을 새겨 놓은 대련이 있다. 1602년 명대에 지어진 이 도교사원은 구리로 만든 건축물로 약 200톤 가량의 구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국가중점 보호문물로 지정되었으며 중국의 사대 동전(구리로 만든 전당) 중 하나로 보존이 가장 잘된 동전이라고 한다.
역시 이곳에도 상점들이 많았다. 한화를 받는 유일한 곳이다. 1000원부터 5000원까지의 일용품들, 그리고 10,000원 내외의 의류들이 많이 있어 이를 구매도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빠져 나왔으나 서울 일행 한명이 없었다. 가이더는 이를 찾으려고 다시 경내로 달려가 한 30분이 경과된 후 찾아 내려왔다.
우리는 점심을 해결하고 다음 행선지인 곤명 시립 박물관을 둘렀다.
<구리로 만들어져 중국의 4대 동전(銅殿)으로 알려진 도교 사원 '금전'에서>
◉ 곤명 시립 박물관
곤명에는 운남 박물관과 시립 박물관이 있는 것 같았다. 곤명 시립 박물관 내부를 들어가니 교포가 한국말로 안내하였다. 박물관의 특징은 매장 물품으로부터 전시되었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매장 문화와 2층에 전시된 공룡 모형들이 였다. 전시 물품들은 잘 몰라서인지 관심이 덜했다.
<곤명 시립 박물관에서>
◉ 시인들이 풍월을 읊었던 대관루
쿤밍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2km 떨어진 교외에 자리 잡고 있었다. 1682년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부터 조성되었고 1696년 윈난을 통치했던 왕지웬(Wang Jiwen)이 2층 목조건물인 대관루(大觀樓) 등을 세우고 둑을 쌓고 나무와 식물을 심어 현재의 공원 모습과 규모를 갖추었다. 이후 대관루는 전쟁과 홍수로 손실되었고 1883년 윈난 통치자인 첸유잉(Chen Yuying)이 3층건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우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웨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난창[南昌]의 등왕루(滕王樓)와 더불어 중국 4대 명루(名樓)로 꼽힌다고 하였다.
청나라 때부터 이 공원에서 많은 문인들이 모여 시문을 지었으며 건륭 때 유명한 서예가인 쑨란웡[孫髥翁]의 대련(對聯:중국에서 문짝이나 기둥 같은 곳에 걸거나 붙이는 對句) 등 탁월한 작품이 탄생하였다. 현재는 많은 시민이 쿤밍호에서 배를 타며 즐기며, 매년 음력 8월 15일 윈난성의 소수민족들이 모여 보트놀이 축제를 벌인다고 하였다.
이곳의 국화와 분재 전시장이 인상적이였다. 이곳을 감상하는 동안 사진을 찍으며 아저씨들이 잘 음직여 같이 간 일행들이 왠 남지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하는 말을 듣기도하였다. 대관루를 둘러보는 동안 소나기가 지나갔다. 비를 피해 웅달진 곳으로 피했다. 아름다운 경내의 조경은 잘 이루어졌다.
공원 중앙의 정면에는 이층으로 된 대관루(정각)가 있고 대관루 정문 양옆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한시가 목판에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옛날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문객 시객들이 모여 취호를 바라보며 글과 시를 쓰고 읊었던 곳이란다. 우리가 방문한 시기에 노인들의 음악 합주 연습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공원 한가운데는 넓을 취호가 있고 그 주변에는 아름다운 나무와 사철 꽃피는 일년초로 잘 조경되어있었고 왼쪽은 넓은 공간에는 분재원과 수석원이 있었다. 분재의 대부분 모형은 각종 동물모양(용, 거북, 호랑이, 학, 고니, 갈매기 등)이 많았고 분재들의 나이는 수백년 묵은 나무들이 많았다. 취호의 물은 맑았고 관광객들이 던저 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수천마리의 갈매기 떼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몰리면서 장관을 이루었고, 배부른 갈매기들은 호수 한가운데서 친구들과 짝짓기를 하며 정답게 물놀이를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간곳은 보이차 쇼핑센타로 가는 도중 차장 밖으로 보이는 재래시장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과 자동차, 자전거, 오토바이가 뒤범벅이되어 물건을 사고 파는 모습이 장관이 였다, 골목길인지는 물라도 우리 일행이 가는 거리는 지저분하고 교통질서가 엉망이였다. 보이차 쇼핑센타에 도착하여 안내원ㅇ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차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들은 별관심이 없었고, 서울 일행이 좀 구입한것 같았다.
이로서 중국 곤명의 여행 공식일정이 끝나고 저녁을 먹게되었다. 가지고 간 모든 식품들을 설거지하는 순간이였다. 배가 아프니 소화가 안되니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음식 문화에 적응이 잘 되어 잘 먹고 소화를 시켜 다행이였다. 저녁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우리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곤명국제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을 들러보았다. 좀 초라하였고 우리의 인천국제공항에 비하면 게임이되지 못했다.
<시인들이 풍월을 읊었던 대관루>
◆ 6일차
중국 곤명의 모든 관광일정이 끝이 났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4시간이나 기다렸다. 공항에 가이더의 안내로 깨 장사가 나타났다. 30,000원을 주고 구입하고 짐 정리를 마감하였다.
우리는 곤명 국제공항에서 가이더의 안내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대한항공 23시55분 출발 대한항공기를 기다렸다. 우리를 태우고 갈 비행기가 드디어 도착한 것 같았다. 많은 승객들이 내리고 있었다, 탐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에 따라 비행기에 오르니 벌씨 고국의 품에 안긴 것 같았다. 마음이 평온하고 안정적 이였다.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밥을 먹고 비행소여 시간은 원래 4시간 30분이나 풍향의 영향으로 3시간 40분이 소요된다고 하여 다행이 였다.
드디어 아침 5시 5분에 인천 국제공항 도착에 도착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 그리운 집으로 우리 모든 일행과 아저씨들은 헤어졌다.
<곤명, 석립, 구향 여행을 마치며>
Ⅳ. 곤명 여행을 마치며
이 글을 글로 남기고 싶어 시간이 지나니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잘 정리하지 못하였다. 그때 그때 정리하는 것이 도리이나 게으른 탓으로 여겨진다. 추가로 기억이 되살아나면 추가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정리하였다.
나는 이번 중국의 곤명을 2번째로 여행하면서 중국인들의 찡그리거나 화를 내거나 다툰 사람을 한사람도 보지 못했다. 비록 가난하게 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행복이 충만해 보였다.
우리네 사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정치지도자나 사회지도자들의 터무니없는 억지, 모략중상, 도덕적 불감증, 부정부패, 그것에 동조하는 일부 시민들이나 지성인들의 편승, 지역감정, 파벌주의, 학벌주의, 물질만능주의가 국민들의 도덕적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관들이 우리 사회의 일부를 점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긴 이기적인 사회풍토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특히 국제적으로 북한의 핵문제가 요동치고 있는가하면, 일부의 주동에 의해 벌어진 촛불집회, 각종 정치집회 등은 우리 사회를 더욱 어지럽게하고, 국제적으로 환율의 급락과 경제정세의 불안은 우리의 경제를 흔들고 있는 현실에 사회 통합으로 여야는 물론 전직 국가 지도자들이 국가 정책에 협조하여 발전하는 나라에 평화롭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적인 정신적 가치가 우리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풍부한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 순박하고 정직한마음,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넉넉함,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풍토,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줄 아는 지혜를 보았다. 따라서 중국의 미래는 밝지 않겠는가?
지상의 천국 대석림, 지하의 천국 구향동굴, 땅과 하늘이 맞닿는 서산공원, 문화의 꽃이 핀 이족의 동파문화(상형문자), 세상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곤명의 소수민족촌의 가무쇼, 소수민족들의 긍정적이고 밝은 삶이 중국의 밝은 미래를 말해주고 있었다.
중국의 풍부한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은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의 정신적 문화의 가치는 우리가 꼭 본받아야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