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 -
청계천복원사업이 이루어지던 2005년 3월 서울특별시에서 지명위원회를 열어 확정한 명칭으로, 청계천의 시작 지점인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 광장을 가리키며, 청계천으로 진입하는 공간으로서 삼색 조명이 어우러진 촛불 분수와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설치되어 있다.
1411 開川
1760 濬川
준천은 영조의 자칭 3대 치적중 하나
1657년 한양인구 8만명
12년후인 1669년 한양인구 19만명으로 급증
경신대기근 : 1670년 경술년, 1671년 신해년의 대기근
기상이변으로 농작물 소출이 급감
일설에는 전체인구의 20%가까이가 사망했다고 한다.
즉 1600년대 기상이변으로 기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한양에 상경
그러면서 개천과 한양주변의 산림이 황폐화되며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영조대까지 이어졌고 영조는 15만의 한성부민과
5만의 고정(고용한 장정)을 동원하여 1760년 개천을 준설하였다.
모전교(종로 시전)
육의전 - 중국산 비단, 국산 비단, 삼베 모시, 무명, 종이, 생선 건어물
무교동
명월관 : 채널 A-일민미술관 자리
기생집 거리
광통교 -
사적 제10호(서울 한양도성) : 서울 주위를 둘러싼 조선시대 성곽(18.127㎞)의 일부로 숙정문으로 향한다. 4대문 및 4소문을 품고있는 우리나라 역사ㆍ문화의 상징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정릉
신덕왕후 강씨(?~1396)
조선 최초의 실질적 왕비
원래는 이성계의 京妻로 개성의 권문세족
이성계의 향처는 신의왕후(~1391)
정릉
조선 최초의 왕릉
원찰 흥천사
한국전쟁시 순정효황후 윤씨의 피난처이기도
흥천사 종
1410년 8월 정릉의 석물로 광통교를 만들다
광교
남대문로
조선시대 주요 교통로
보신각/종루
개화기 서점가
전기수 이야기
광통교 서화사
조선후기 한양의 최고 번화가였던 청계천 광통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글과 그림을 파는 시장.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서화는 상업의 번성으로 여유가 생긴 중인, 왈짜, 평민들도 소비하는 상품이 되었고, 돈만 있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서화는 양반가의 사랑방을 나와 민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인구 증가, 상공업의 발전, 신분질서의 와해와 같은 도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닿아 있다.
조선후기 그림 소비의 이동 : 양반의 사랑방 >> 시장 >> 일반 대중의 집
효경교 : 소경으로 보는 조선의 장애인 정책
(역사채널e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서)
장애는 질병이다.
시정 : 70세 이상 노인 케어하는 사람
장애인을 케어하는 사람
조선판 사회복지사 시정은 잡역 등 면제됨.
장애인 살인사건이 발생한 고을은 level down
장애인을 위한 전문 직업 : 독경사 악공 점복사
명통시 : 시각장애인 단체, 국가공식행사 담당 -예 : 기우제 등
장애인 고위관료
허조 : 척추장애인, 좌의정, 우의정 역임
권균 : 간질장애인, 중종대 우의정 역임
심희수 : 지체장애인, 광해군대 좌의정 역임
이덕수 : 청각장애인, 영조대 대제학, 형조판서 역임
정조반차도 -
1795년 을묘 원행 정리의궤
왕은 어디에?
장통교(을지로 등)
삼일교 (탑골공원, 삼일대로, 삼일빌딩)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삼일로 인근에 위치하여 명칭을 인용했다.
수표교(장충단) -
수표교가 놓여진 것은 1420년(세종2)으로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수표교의 원형은 1959년 청계천을 복계할때 장충당공원으로 옮겨졌다.
1420년에는 마전교라고 부르다
1441년 수표가 세워지며 수표교라고 불리다
1959년 원래의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지다
수표교 아래쪽 을지로 3가역 자리에 있었던 준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