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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종교개혁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은 마르틴 루터가 주창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justification by faith)이다. 이후 장 칼뱅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신칭의를 강조한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중세기의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심판 및 죽음에 대해 교육을 받아 왔다. 그래서 루터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수도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1505년 21살 때에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구원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며칠 동안 금식을 하고 다른 힘든 고행들도 겪었다. 그는 딱딱한 마루 바닥에서 자기도 하고, 손과 무릎으로 로마 교회의 계단을 오르기도 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멀어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실시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루터는 '천국에 들어가는 수도사가 있다면 바로 나'라고 할만큼 수도사의 임무에 충실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떠한 방법도 고통에 빠진 그의 영혼에 평안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비텐버거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시편을 연구하고(1513-15년), 로마서를 연구했다(1515-16년).
루터는 처음에는 하나님께 분노했다. 루터에게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심판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일까?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죄를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마침내 풀렸다.
루터는 비텐버거 수도원의 탑 안에서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한다.
루터의 이러한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이 탄생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는 교리야말로 교회의 사활이 걸린 교리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로마 천주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지만 사람의 행위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루터는 배운 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경주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이신칭의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임했다. 당시 로마 천주교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칭의 후에 오는 성화의 행위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사랑이시다. 타락한 죄인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righteousness)를 만족시킬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선행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죄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값을 치르게 하신 후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칭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속량 또는 구속(redemption)이란 말은 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사람을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값이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의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죄로 인한 모든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이 칭의이다. "전가하다"(impute)란 "계산하다 또는 간주하다"라는 말이다. 죄인이 이제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의인으로 간주된다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것이 칭의이다.
‘의롭다 칭함’(justification)은 법정적 용어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의를 보시고 더 이상 죄값을 요구하시지 않고 ‘당신은 의롭다’, ‘더 이상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 ‘죄에서 무죄방면되었다’고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이신칭의다.
이것은 사람의 믿음에 의한 것이므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고 한다. 칭의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신칭의’고 칭의를 얻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신득의(以信得義)다. 한자로는 의(義)가 양(羊)+아(我)인데 ‘내가 어린 양이신 예수 아래 들어갈 때 의롭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중생을 통해 내면이 변하여 영적 의인이 되지만 칭의를 통해 법적 의인이 된다. 중생은 의사가 수술로 사람 몸의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것이고 칭의는 죄값을 치러서 더 이상 갚아야 할 빚-죄값-이 없다고 하나님이 판결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에게 의로다 칭함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믿음으로 얻는 의(이신칭의)와 행함으로 증거하는 의(행함칭의)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신자는 아무런 선행을 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가? 한국 교계에서는 은혜구원론과 행위구원론에 대한 시비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신칭의를 받은 사람은 믿음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선행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 후자를 주장하는 자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비판한다. 믿음으로 진정 칭의된 신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있기 때문에 행위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예수님 옆의 강도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선행을 동반하는 성화가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신자는 믿음만을 통해서 칭의 된다. 강도의 믿음은 예수님이 증명해주셨다. 그래서 그는 믿음만으로 천국에 갔다. “42. (강도가)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2-43).
그러나 필자나 독자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앞장에서 ‘가짜 회심’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 교회 생활을 하더라도 그 믿음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렇다면, 필자나 독자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은혜구원론자들은 행위구원론자를 비판하기 전에 이 점을 밝혀야 한다. 말로만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값싼 은혜(cheap grace)에 매료되어 아무런 행함의 열매 없이도 ‘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고 구원 받았다’면서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야고보서의 ‘행함 칭의’
성경은 믿음의 진정성을 증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야고보서다.
야고보의 이 주장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한 주장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이삭이 태어나기 훨씬 전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함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한다(21절).
그래서 이신칭의를 강조한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서”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루터는 물론 은혜구원론자들이 오해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당시 신앙인들이 입술로 신앙은 고백했지만 바른 행함이 따르지 못하는 고백만의 신앙을 경계하기 위해 이 책을 기록했다.
웨인 그루뎀은,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declare to be righteous)이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칭의는 ‘의롭다함을 증명하는 것’(show to be righteous)이라 말하면서 둘을 구분한다(Wayne Grudem, “Justification,” Systematic Theology. pp. 731-3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짜인가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 행위를 보신 후,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증거되고 열납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기생 라합의 의로움도 마찬가지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군들을 만났을 때 신앙 고백을 했지만(수 2:11), 정탐군들이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도록 행동으로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했다(수 2:15-16; 약 2:25).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의 시험에서 떨어졌다. 사울왕은 처음에는 겸손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이 되자 교만해지고 하나님 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게 되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 상황이 급박하다고 해서 왕에게 허락되지 않은 제사를 드렸다가 선지자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사울 왕에게 다시 한번 순종의 기회를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방해하고 대적한 아말렉 족속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이었다(삼상 15:1-3). ‘진멸하라’는 말은 남녀노소 및 우양을 가리지 말고 모두 죽이라는 말이다. 사울 왕은 아말렉 족속을 쳐서 이겼지만 아말렉 왕과 양과 소의 좋은 것들은 죽이지 않았다. 이 좋은 것들로 제사드리려고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했지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면서 책망한다.
사울 왕은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이 두려워서 그렇게 했으니 잘 봐 달라고 간청했지만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
이후 사울 왕은 전쟁으로 급박한 시점에서 엔돌의 무당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다가 오히려 죽은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으며 나중에 전쟁에서 패배하여 자살하고 말았다(삼상 28장; 31장). 사울 왕은 비록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인해 결국은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께 선택되고 처음에는 믿었지만 거듭된 불순종으로 인해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하고 성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22-23절), 행함이 없는 믿음, 순종이 없는 죽음 믿음이라고 강조한다(17절, 26절). 죽은 믿음은 가짜 믿음이다.
이처럼,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칭의는 자기의 믿음이 진짜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함의 증거로 보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타인에게 인정 받음은 물론 자신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가를 여러 통로를 통해 시험하신다. 아브라함처럼 의도적으로 시험을 하시는 경우도 있고 예고 없이 시험을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 믿음이 진짜라면 반드시 행함의 시험을 거치게 되어 있다.
위의 성경 구절들에서 ‘시험’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명사)와 페이라조(동사)이다. 동일한 단어가 위의 두 구절들에서는 시험(Trial)이란 의미로 번역되었고 아래 두 구절들에서는 유혹(Temptation)으로 번역되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직접 시험하시든 죄와 마귀를 통해 유혹하게 허용하시든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이며, 신자는 시험과 유혹을 통해 믿음이 점검되고 단련되고 성장해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시험과 유혹에 대비하여 늘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키우고 지켜야 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당신은 믿음을 어떻게 시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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