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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방편: 고집멸도와 수지독송해설서사
주영박사 한창희, 창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chhahn@changwon.ac.kr
2011년 1월 16일
一. 머리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에 보니, 중생들의 ‘생로병사’가 너무나도 가슴 아프셨다고 합니다. 물론 당신 앞에 현실로 펼쳐진 생로병사도 가슴 아팠지만 당신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생각하시니 가여워서 더욱 마음이 저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출가하셔서 그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중생들에게 알려주시면서 후세에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16가지의 범주’인 ‘생로병사ㆍ희로애락ㆍ사농공상ㆍ인의예지’에 대해서 ‘제도(濟度)와 장엄(莊嚴)을 하는 방법’을 ‘묘법연화경’에 ‘촉루장엄’하시고는 ‘오탁악세’에는 이렇게 법화경에 의지하면서 살아가라고 후세 중생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고통은 별 것 아니고 제 고통만이 가장 큰 줄로만 여기고 삽니다. 석존께서는 이미 중생들의 그러한 품성을 다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방편’이란 어떤 것인 줄 아느냐, 하시면서 법화경에서 서품 바로 뒤에 방편품을 넣어두시고는 ‘방편제법실상의 이치’를 설파하신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남의 아픔은 뒷전이고 저의 고통이 가장 다급하고 절실한 당면 문제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괴로울 고(苦)’의 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화성유품제7에 다음과 같은 경문(經文)이 나옵니다.
爾時에 大通智勝如來께서 受- 十方諸梵天王과 及十六王子-請하시고 卽時에 三轉十二行法輪하시니
若沙門婆羅門과 若天魔梵과 及餘世間의 所不能轉이니 謂- 是苦며 是苦集이며 是苦滅이며 是苦滅道며
及- 廣說十二因緣法하시니 無明緣行하고 行緣識하며 識緣名色하고 名色緣六入하며 六入緣觸하고 觸緣
受하며 受緣愛하고 愛緣取하며 取緣有하고 有緣生하며 生緣老死憂悲苦惱하나니라 無明滅則行滅하고
行滅則識滅하고 識滅則名色滅하고 名色滅則六入滅하고 六入滅則觸滅하고 觸滅則受滅하고 受滅則愛滅
하고 愛滅則取滅하고 取滅則有滅하고 有滅則生滅하고 生滅則老死憂悲苦惱滅하나니라
위 내용 중에 여기서는, “謂- 是苦며 是苦集이며 是苦滅이며 是苦滅道며”라는 ‘사성제(四聖諦)’가 “법화
경의 방편”과 어떻게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인 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팔정도(八正道)’라고 알려져 있는 ‘도성제(道聖諦)’와 ‘법화경의 수지독송해설서사’가 어떻게 관련되는 것인 지에 대해서 저의 견해를 피력코자 합니다.
二. 구마라습선생님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선생님은 티베트 근처의 구자국(龜玆國: 지금의 중국 신강성)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시어 서역(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오셔서 대승을 설파하시니,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졌다고 합니다.
서력 401년 후진왕(後秦王)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 영접되어 경전의 번역에 종사시니, 총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셨는데, 그 역문이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 406년)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중국에 오시게 된 사연
구마라습선생님께서 중국에 오시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마라습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시어 72개 종족의 언어에 통달하셨다고 합니다. 구마라습선생님께서 불법을 배우실 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아들의 뛰어남을 보고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월지국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수행하던 아라한이 어린 라습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미는 35세가 되면 널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서 수많은 사람을 제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깊이 믿는 가운데 하루는 라습에게 말하기를 “한없이 넓고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동방에 전하여 널리 드러내는 것은 오직 너에게 달려 있느니라.”고 하였답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고구려에 불법을 전해준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큰 세력을 떨칠 때였습니다. 하루는 전진의 왕 부견이 관중에 있는데 태사(별점을 보는 천문관)가 말하기를 “덕성(德星)이 서쪽하늘에 나타났으니 아마 크게 지혜로운 사람이 앞으로 나라를 도와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부견은 이에 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서역에 라습이라는 스님이 계신다고 하는데 아마 그 사람인 것 같다.”고 하면서 서력 383년 장군 여광으로 하여금 구마라습선생님을 모셔오시게 하였답니다.
이리하여 여광에게 붙들려 중국 양주(凉州)까지 오게 되셨는데, 그곳에서 부견이 죽었음을 알게 된 여광이 나라를 세우고 왕으로 즉위하면서, 구마라습선생님은 16년간을 양주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시며 중국어와 한학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그 후에 불교를 신봉하던 후진왕 요흥이 홍시(弘始) 3년(401)에 양주를 정벌하고 구마라습선생님을 장안으로 모셔와 국사(國師)로 대우하는 한편,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서 여러 경전을 번역케 함으로써 비로소 대역경사(大譯經師)로 이름을 떨치게 되셨고, 구마라습선생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경전의 번역과 강의에 종사하셨다고 합니다.
(2) 구마라습선생님의 일화
‘구마라습선생님’과 ‘전진의 장군 여광’, 그리고 ‘후진의 왕 요흥’과 관련된 일화(逸話)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여광이 구마라습선생님을 체포하고 보니, 굉장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한낱 어린 승려(당시 19세였다고 함)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얼마나 훌륭한가를 테스트해 보려고 구마라습선생님과 구자국의 왕녀(王女)를 한 방에 가두고는 술을 마시게 하여 서로 정(情)을 통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② 그 후에, 후진왕 요흥은 구마라습선생님이 너무 잘생기고 천재적인 학자였기에 그 재능에 반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구마라습선생님의 혈손을 남기게 하고 싶어서 자신의 후궁들 가운데 열 명을 선발해서 선생을 모시게 하자, 구마라습선생님은 아무런 반대도 없이 그런 처사를 모두 받아들여 낮에는 중국 역경사상(譯經史上) 미증유의 대번역사업(大飜譯事業)에 몰두하시다가 밤에는 집에서 미녀들의 시중을 받는 생활을 계속하셨다고 하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진흙 속에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오로지 연뿌리를 캐러 진흙탕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을 만큼 구마라습선생님께서는 그것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구마라습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나의 번역은 시종일관 원문(原文)과 틀린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만약 이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화장(火葬)된 후에 혓바닥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는데, 과연 다비(茶毘)를 한 뒤에 찾아보니 온 몸은 다 타 버렸는데 혓바닥만은 조금도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③ 구마라습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말씀하셨다는 저런 이야기로 판단컨대, 구마라습선생님께서 수기품제6의 첫 문장인 “爾時世尊께서 說是偈已하시고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
사대”에 나오는 구절의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를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부처님
의 자리에까지 가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학무학인기품제9에 나오는 말씀처럼 부처님의 법장을 펴기 위해서 방편으로 세상에 나오셨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제대중(諸大衆)’이란 ‘만물’을 말합니다. 특히,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크겠다고 생존경쟁을 하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일러 ‘제대중(諸大衆)’이라고 하며, ‘고제대중(告諸大衆)’은 ‘그런 만물, 특히 모든 생명체들에게 명령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여시창언(唱如是言)’을 한다는 것은 ‘내 말이 이러하니 듣고 따라서 행동으로 옮겨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수기(授記)’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자리’에 간 사람만의 이런 한 말씀에 만물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큰 소리를 친다고 만물이 따라서 움직이겠습니까?
그런데 부처님 자리에 가서 만물에게 명령은 하지 못하더라도, 평범한 사람 역시 ‘고제대중’하고 삽니다. 다만 그 명령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고 ‘반복 효과’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필자가 이전의 저술에서 ‘일승묘법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마음의 틀’을 만들어서 반복적으로 되뇌게 되면 우주만물의 기운인 부처님의 힘이 그곳에 스며들어 일이 성사된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걸 ‘언참(言讖)’이라고도 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부처님께서 지나가는 구름에게 비를 뿌리라고 명령을 하면 구름이 그 말씀을 듣고는 비를 내리는데, 보통 사람들은 단체로 기우제를 올려야 비가 올까말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이야기들 잘 들어 두셨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남들에게 일러주실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 된 것입니다.
성서에도 보면, 마가복음(11장 12~25 인용)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베다니로 나가셨는데 몹시 시장하셨다. 때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무화과를 따 드시려고 가까이 가서 찾는데 정작 기대했던 과일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잎사귀만 무성한 그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 그러자 그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리고 말았다.
이런 걸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라고 설명 드리면 아시겠습니까? 약왕보살본사품제23
에도 보면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일월정명덕불께서 열반하시자 자신의 팔을 태워서 공양했는데, 제자들이 걱정을 하니까 일체중생희견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내가 두 팔을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님의 금빛 같은 몸을 얻을 것이다. 만약 참되어 헛되지 아니할진댄 나의 두 팔이 다시 예전과 같이 되돌아와 지이다.”라고 서원을 세워 말을 하니 그대로 되었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와 유사한 경문입니다.
약왕보살본사품제23의 다음 내용 중에 빨간색 부분이 제가 인용한 내용입니다. 이때도 보면 ‘대중 가운데서 이런 서언을 세우되’ 또는 ‘대중 가운데서 서원을 세워 말하되’라고 나왔으니 ‘대중(大衆)’이 뭔지 이제 아시겠지요?
于時에 一切衆生喜見菩薩이 於大衆中에 立此誓言호대 我捨兩臂하고 必當得佛金色之身호리
라 若實不虛인댄 令我兩臂로 還復如故하소서 作是誓已에 自然還復하니 由斯菩薩의 福德智慧
가 淳厚所致니라
참고로, ‘만물(萬物)’이라는 한자의 어원을 보면, ‘물(物)’자가 ‘생명력이 없는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어떤 대상’을 말한다고 합니다. 사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은 원자나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나 소립자는 물리법칙에 의해서 그 내부에 생동하는 것처럼 활동하고 있습니다. 생명체와 같이 자기 복제의 기능은 없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정지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약동하는 현상을 그 내부에 지닌 것이 바로 원자나 소립자입니다.
‘우주자연현상의 법칙’은 제1원리인 ‘방편제법실상의 원리’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제2원리입니다. 즉, ‘우주자연현상의 법칙’은 ‘방편제법실상의 원리’의 자식 격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방편제법실상의 이치’를 깨우치게 되면 ‘우주자연현상의 법칙’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를 하실 수 있는 것이고,
하다못해 지나가던 구름도 비를 뿌리라면 뿌리는 것입니다.
제바달다가 바위를 굴려 석존을 죽이려 할 때, 바위가 다른 곳으로 떨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나, 코끼리를 술에 취하게 하여 석존을 들이받게 해도 코끼리가 앞에 와서 꿇어앉았다는 불전의 말씀도, 석존께서 이렇게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를 하실 수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3) 구마라습선생님과 한문역경
구마라습삼장께서는 총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역출하셨는데,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항상 강설을 겸하셨으니 배움과 번역을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승만경 역출에는 100인, 대품반야경 역출에는 500인, 유마경 역출에는 1,200인, 법화경과 사익경 역출에는 2,000인이 넘게 동참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를 볼 때 그분의 번역과 강설이 성대하고 수승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불교 번역사상 많은 역경 삼장들이 출현했지만, ‘구마라습삼장’을 구역의 대표 삼장으로 꼽고, 널리 알려진 ‘현장(玄獎)삼장’을 신역의 대표 삼장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구마라습 삼장께서 한문으로 ‘妙法蓮華經’이라고 번역하기 전에 중국에서는 ‘법화경’을 ‘살담분타리가소다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샷트라마푼타리카수트라’의 음역(音譯)입니다.
구마라습선생님께서 묘법연화경을 번역하실 때는 8백여 명의 학승(學僧)과 2천여 의학(義學)을 모으시고, 그때까지의 법화경 구역을 모두 구하시어, 비교하시고 교정하시면서, 서하어본(서하는 11∼13세기에 중국 서북부에 번영하였던 불교국가입니다.) 법화경을 원본으로 삼아, 3년간의 역사 끝에 서력 406년에 현행 본 ‘묘법연화경전7권’을 완성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법화경을 번역하실 때는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는지,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말머리만큼 크게 보여야만 비로소 그 자리에 그 한자를 넣으셨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이렇게 법화경과 구마라습삼장과의 인연이 특이함을 볼 수 있으며, 그분께서 힘을 다하여 전한 용수보살과 제바존자의 삼론종지는 천태지대사의 마하지관으로 이어져 천태종과는 더욱 법맥의 인연이 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현재 번역에 쓰고 있는 묘법연화경은 후대에 천태대사께서 고친 부분이 있는 교정본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저의 견해는 “제바달다품의 대의”라는 저서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습니다.
三. 필자는 왜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하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침소봉대(針小棒大: 바늘만한 것을 몽둥이 만하다고 말한다는 뜻으로, 곧 작은 일을 크게 과장하여 말하는 것을 이른다)’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즉, 누구나 자기의 아픔을 크게 과장하면서 산다는 것인데, 반대로 남의 고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사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오해를 살 소지가 있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쓰겠습니다.
저는 법화경 ‘69,384’ 자 하나하나를 모두 다 부처님으로 생각하면서 바라봅니다. 과학자가 무슨 그렇게 종교를 믿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법화경에 대한 저의 신념은 이렇게 ‘유원세존(唯願世尊)ㆍ유원세존(惟願世尊)’하는 자세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의 문제들이지만 제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그렇게 많지 않더라는 사실을 깨우치고 난 뒤부터이기 때문입니다.
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저의 당면 문제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찌하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열일곱 살 때 설송대법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별로 없었고 그냥 훌륭한 말씀을 잘하시는 좋은 분 정도로만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가끔 찾아뵙고 제 인생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정도? 그러다가 그분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 게 신통하게도 적중되는 경우를 접하면서 ‘아, 그게 아니다. 뭔가 있긴 있다!’하고 법화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과학자입니다. 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일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스런 사람입니다. 이런 태도가 저의 ‘증상만(增上慢)’이었지만 저는 법화경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의 그런 태도로부터 고통이 시작되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 고통은 차례로 새끼를 치면서 늘어갔습니다. 정말로 견디기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젓한 대학교수가 뭘 그리 어려운 일들이 많겠느냐고 생각하시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런 글에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쓰는 것은 감상적인 글이 되므로 개략적으로만 적겠습니다.
저는 그런 고통을 극복하려고 술도 많이 마셨고, 그래서 당뇨도 생겼지만, 어떤 한 가지 일, 이를테면 물리학 연구나 취미 생활이나 시 쓰기 등에 깊이 빠져 몰두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잊어보려고 했는데,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되지도 않고 눈덩이처럼 부풀어만 갔습니다. 제가 시집을 내려고 어떤 영문학과 교수님께 발문(跋文)을 부탁했더니, 그 내용 중에 “꽃뱀에게 물리긴 했더라도 그 동반은 도반(道伴)의 길이 되고 그 걸음 발자국마다에 시가 태어나 언제까지나 시를 쓰며 행복해 하는 한창희 교수를 보고 싶다.”라는 글귀를 썼습니다. 속 모르고 쓰신 겁니다. 뭐가 행복합니까?
그런데 설송큰스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래도 가끔씩 찾아뵙고 위안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분께서 그만 돌아가시고 나니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법화경에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저의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되어 가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법화경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다 ‘제불(諸佛)’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제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이다’라고 여깁니다. 그 글자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 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법화경을 ‘사경(寫經)’한다고 하는데, 그 ‘사경’이란 바로 ‘자신의 전생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춰보는 것’을 이릅니다. ‘사(寫)’란 ‘베낀다’는 뜻이지만 ‘사진 찍는다’고 했을 때의 뜻도 가지고 있으니, 바로 ‘자기 자신을 사진으로 찍어보는 행위’가 ‘사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저 자신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바라볼 때 그 글자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저의 고(苦)가 하나씩 정리되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독자들께서도 남은 모르지만 자신만 아는 고통이 있을 테니, 제 말을 듣고 따라해 보시라고, 이런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앞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謂- 是苦며 是苦集이며 是苦滅이며 是苦滅道며”가 다 설명되었습니
다. ‘사성제(四聖諦)’에서 ‘멸제(滅諦)’가 뭐 ‘부처님처럼 깨우쳐서 열반을 얻어 적정(寂靜)한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 헛소리입니다. 입으로만 뇌까리는 말은 아무런 기운도 없는 그냥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신의 당면한 어려움’이 ‘고(苦)’이며, ‘그 고통들이 자꾸 새끼를 쳐서 자신의 심신을 꽁꽁 묶는 것’을 ‘고집(苦集: 괴로움이 쌓이는 것)’이라고 하며, ‘그것들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것’을 ‘고멸(苦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고멸도(苦滅道)’는 무엇입니까? ‘팔정도(八正道)’요? 그게 뭡니까? 저는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하는 ‘8 가지의 실천’이 바로 ‘고멸도’라고 생각합니다. 즉,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하는 수행’을 일러 ‘자신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저는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라고도 말합니다.
보현보살권발품제28는 법화경을 ‘요문(遙聞)ㆍ능득(能得)ㆍ당득(當得)ㆍ필득(必得)ㆍ수지(受持)ㆍ독송(讀誦)ㆍ사유(思惟)ㆍ구색(求索)ㆍ서사(書寫)ㆍ수습(修習)ㆍ정억념(正憶念)ㆍ해기의취(解其義趣)ㆍ여설수행(如說修行)ㆍ자서(自書)ㆍ사인서(使人書)ㆍ수호(守護)ㆍ호조(護助)’하는 17 가지의 공덕에 대해서 설법하고 있는 품입니다.
저는, 묘음보살품제24와 제바달다품제12를 번역하면서 ‘수지ㆍ독송ㆍ해설ㆍ서사ㆍ수행ㆍ기도ㆍ보시ㆍ회향’하는 ‘8 가지’의 ‘16 공덕과 복록’이라는 ‘팔수도법(八修道法)’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런 ‘법화경의 팔수도법’ 중에서 ‘수행ㆍ기도ㆍ보시ㆍ회향’은 불자라면 누구나 실천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제외하면, 법화경을 ‘수지ㆍ독송ㆍ해설ㆍ서사’하는 것이 실제로 법화경 수행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열거한 보현품의 17 가지 수행과 공덕을 압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수지ㆍ독송ㆍ해설ㆍ서사ㆍ수행ㆍ보시ㆍ기도ㆍ회향’하는 8 가지의 16 공덕과 복록이라는 ‘법화경의 팔수도법’이 법화경 전체에 흐르는 수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중에서 ‘수지독송해설서사’만 뽑아서 ‘법화경의 가피를 받는 수행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다음 절에서는 바로 이 ‘수지독송해설서사’라는 ‘법화경의 가피를 받는 수행법’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四. 법화경의 ‘수지독송해설서사’란 무엇인가?
‘오종법사(五種法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하는 사람을 이릅니다. 그런데 ‘오종(五種)’이란 틀린 말이고 ‘팔종(八種)’이라고 해야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덟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다 뜻이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법화경의 가피를 받는 수행법’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한다고 했을 때, 그 각각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드리고 싶은 당부는, ‘수지독송해설서사’란 바로 ‘개개인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태어나는 복덕을 의미하는 글자들’이기도 하며, 또한 ‘그 변화를 제도, 장엄하는 글자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새겨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누구나 각자의 복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렇게 인간 개개인의 복록을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 바로 ‘수지독송해설서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수지독송해설서사’를 ‘팔자’라고도 합니다. 이거 볼 줄 알면 대법사 다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냥 이치만 그렇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온 자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하는 자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즉, 스스로는 모르지만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할 때, 자신의 팔자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하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올바르고, 풍요롭고, 복록을 누리는 자리로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꼭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1) ‘수(受)’의 의미
‘수(受)’는 뭐냐?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초보적인 견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받을 수(受)’자를 보아야 합니다.
‘수(受)’자는 ‘오른손으로 받아든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또 우(又)’자가 ‘오른손’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고 모양으로 보아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기 편리한 접이 의자’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면서 올바르고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 그렇게 배우고 헤아리면서 살면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 ‘받을 수(受)’자의 속뜻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지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행동지침이 바로 법화경인데, 올바르고 편리하게 사는 방편이 그 속에 들어 있으니 그것을 받들고 배우고 헤아리면서 살면 항상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뜻이 바로 ‘수(受)’입니다. 이게 곧바로 되는 사람은 나머지 7 가지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가 없으니 그 다음에 ‘지(持)’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受)’가 되는 사람은 전생에 공덕을 잘 닦은 사람입니다. 받을 게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법화경으로 기도를 했는데, 오른 손을 본다거나 의자를 본다거나 뭔가를 받는 꿈을 꾸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취직이 된다, 뭐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러나 받는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의 글자를 볼 때 이렇게 양면을 다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세상이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걸 음양의 구조로 본다고도 말합니다. 음양이 꼭 남녀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상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법화경을 받는 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법화경을 받는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커다란 경사입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출발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저는 19살 때 설송대법사님으로부터 하늘색 표지의 두 권짜리 한글 법화경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생일대 경사가 지금과 같은 짐이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2) ‘지(持)’의 의미
‘지(持)’는 뭐냐?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초보적인 견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가질 지(持)’자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 뭔가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거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거리 없으면 큰일 아닙니까? 그렇지만 좀 힘이 든다,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런데 법화경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근기가 있다는 뜻이니 짐을 질만큼 주시겠다는 말씀이 바로 ‘지(持)’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화경을 손에 지니는 순간에 힘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손으로 일하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농사꾼이 농기구가 있어야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네 스스로 땅 파서 먹고 살라는 뜻도 됩니다. 공짜 너무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만한 근기가 되니까 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니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지(持)’란 ‘직업’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살아라, 이런 뜻이 되는데, 앞의 ‘수(受)’만 가지고 온 사람은 부모 유산 물려받고는 평생 놀고 먹으면서 사는 사람 같은 이를 말하고, 이 ‘지(持)’를 가지고 온 사람은 먹고살 걱정은 없다, 왜냐하면 연장을 들었으니 어디 가서든지 품을 팔아도 할 일은 있다는 뜻입니다.
뭐 법화경을 맨 날 손으로 들고 다닌다고 모든 게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라고 할 때의 ‘지(持)’를 저처럼 한 번 풀어보시라는 겁니다. 법화경이 뭡니까? 여기서 법화경을 책으로만 보지 마시고, ‘세상이치’ 그 자체라고 보고는 ‘持’자를 파자하여 그림을 그려서 상상하여 풀어보시라는 겁니다. ‘사농공상’에서 농사나 공업에 해당됩니다. ‘지(持)’에도 양면성이 있으니 잘 헤아려보시길 바랍니다.
(3) ‘독(讀)’의 의미
‘독(讀)’은 뭐냐?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초보적인 견해이니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읽을 독(讀)’자를 곧바로 파자하여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이거 다 세상의 이치와 인생의 이치가 담긴 글자입니다.
‘온 사방에 말을 파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말로 먹고삽니다. 그렇지만 직업으로 보면, 선생이나 선비, 또는 장사하는 상인이나 세일즈맨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 사용하면 천 냥 빚도 갚는 거고, 잘못하면 뺨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득도 보고 손해도 본다, 이렇게 됩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큰 코 다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제 말은, 법화경 읽는 것만을 ‘독(讀)’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독(讀)’자를 잘 사용해서 출세했다가 또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이 바로 중국 전국시대 때 주나라의 ‘소진(蘇秦)’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소진이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ㆍ아내ㆍ형수ㆍ동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에 있는 재산을 팔아 멀리 각국을 돌아다니며 출세의 길을 찾으려고 하자, 식구들이 말렸답니다.
하는 수 없이 고향에서라도 벼슬을 해 볼까하고 주나라 주현왕을 만나 소신을 피력했으나 왕은 그를 관사에 머물게만 할 뿐 소식이 없었답니다. 일 년을 기다리다 화가 난 소진은 집으로 돌아와, 있는 재산을 모두 팔아서 좋은 옷과 수레ㆍ말ㆍ하인을 거느리고 돌아다니면서 각국의 왕들을 달래 보았으나 아무도 그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리하여 몇 해를 지나자 돈도 옷도 떨어지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수레ㆍ하인ㆍ말을 다 팔아 노자를 마련해 가지고, 손수 보따리를 걸머지고 걸어서 고향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그의 행색을 보고 혀를 차며 돌아앉았고, 아내는 베를 짜던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만나려고도 않았답니다. 할 수 없이 형수에게 밥을 부탁하였는데, 형수는 나무가 없다면서 응하지도 않았답니다.
‘이 한 몸 궁핍하고 천해지니 자식도, 남편도, 시동생도 없구나! 아, 나의 잘못이다. 누구를 탓하랴?’ 소진이 탄식한 후 더욱 분발하여 귀곡선생(鬼谷先生)이 준 음부경(陰符經)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밤낮으로 읽기를 거듭하여, 일 년이 지나자 하루아침에 세상 이치가 훤히 보였답니다.
다시 자신을 얻은 소진은 두 아우의 도움으로 노자를 마련해 길을 떠났고, 드디어 육국의 재상을 한 몸에 겸하여, 종약장(육국 재상의 합종회의 우두머리)이란 벼슬에 올라 세 치 혀로 천하를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소진이 일을 마치고 초나라에서 조나라로 가다가 고향인 낙양을 지나게 되었을 때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답니다.
각국의 제후들이 사신을 보내 그를 호송하는 바람에 의장대와 깃발이며 사람이 탄 수레와 행차가 20 리에 뻗어 천자의 행차를 방불케 하였고, 연도에는 환영 나온 지방 관리들이 먼지 속을 바라보며 엎드려 절하고, 구경 나온 남녀노소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혀를 차며 부러워했답니다. 주나라 천자는 두려운 생각에 미리 사람을 시켜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대신들을 멀리까지 보내 환영하게 하였고, 소진의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나와 아들의 그 같은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차며 감탄했고, 두 아우와 아내와 형수는 감히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납죽이 엎드렸답니다.
소진이 웃으며 형수에게 “형수께서는 그토록 푸대접하더니 오늘은 왜 지나치게 공손합니까?”라고 말했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었답니다.
“서방님께서 벼슬이 높고 돈이 많으니 어찌 무섭지 않겠습니까?”
소진은 길게 한숨을 쉬며 “한 사람의 귀천이 가족들까지도 이토록 다르게 만드니 남들이야 말해 무엇 하리오?”하고는 천금을 풀어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답니다.
그런 그가 나중에는 암살당했다고 합니다. ‘읽을 독(讀)’은 ‘양날의 칼’처럼 자신에게 ‘약(藥)’도 되고 ‘독(毒)’도 되는 무서운 것입니다. 무릇 책을 읽되, 자신에게 그리고 남에게 ‘약(藥)’이 되도록 읽어야지 잘못 읽으면 신세 망치는 ‘독(毒)’이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앞날이 어찌 변해가는 지를 알고 그에 대해서 준비를 하라는 것인데, 소진처럼 귀곡자의 음부경 같은 책을 읽으면, 세상 이치는 알게 되겠지만 자기 자신을 보전하는 방법은 깨우칠 수가 없나 봅니다.
맹자님도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고 하여 많은 책들을 읽으라고 당부하셨는데, 저 역시 많은 책들을 읽었기에 법화경 해설하면서 이렇게 온갖 이야기들을 인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도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합니다.
책을 읽는 것은 이렇게 세상의 앞날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법화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을 제대로 읽으면 소진처럼 암살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일 년간 법화경을 뚫어져라 읽으니까 ‘법화경의 가피를 움직이는 원리와 방법’을 깨우쳐 알게 되었습니다. 법화경을 정말로 열심히 읽는다면, 세상의 이치나 인생의 이치뿐이겠습니까?
(4) ‘송(頌)’의 의미
‘송(誦)’은 뭐냐?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외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초보적인 견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욀 송(誦)’을 곧바로 파자하여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자도 다 세상의 이치와 인생의 이치가 담긴 글자입니다.
‘욀 송(誦)’은 ‘말을 써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말을 쓰되 그 말에 힘이 붙는 것’을 이릅니다. 대통령이나 사장이 한 말씀하면 부하들이 모두 그 말을 따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 말’에 ‘자리의 힘’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법화경을 공부하게 되면 바로 말에 힘이 생긴다는 것’을 ‘송(誦)’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의 말에도 힘이 있어서 사람을 움직이거나 언참이 되는데, 부처님처럼이야 아니지만 법화경을 공부한 사람에게 그 말의 힘이 없어서야 어찌 법사(法師)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법화경을 제대로 ‘수지독송해설서사’한 법사가 법화경을 풀 때는 그 말이 실상과 부합되어 움직이면서 법력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법화경을 왼다’라고 합니다. 즉, ‘송(誦)이다’라고 합니다. 소진의 일화에서도 그의 형수가 무섭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곧 소진이 ‘독송(讀誦)’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독송’이 된 사람은 그의 말에 힘이 있기 때문에 남을 가르친다거나, 남에게 명령하여 부리는 자리에 오른다거나, 장군이 되거나 합니다. 이런 것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원찮게 생긴 사람이라도 ‘독송’이 된 사람은 그 목소리로부터 뵈지 않는 어떤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독송’이 된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은, 도인이나 용한 관상쟁이가 아니라면 목소리로는 판단하기 쉽지 않고, 그 행동거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리 이원익 대감은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서 영의정을 지낸 분으로, 청백리로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어찌나 청렴하셨던지, 유서에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장지를 고르지 말고, 삼년 및 기제에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르도록 하라. 풍수가의 말을 신빙하지 말고 자손대대 한 산지에 장사하고, 시제와 속절의 모제 제물은 단지 정결히 할 뿐 사치를 숭상하지 말라.’고 적혀있답니다.
그분은 수십 년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험난한 국사를 원만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해 모든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막상 대추씨만한 키에 턱은 뾰족하고 콧날이 불그레하며, 주근깨가 많은 볼품없는 외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에는 항상 부드럽고 온화한 가운데 기품이 흘러나오셨다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옵니다. 오리 이원익 대감께서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젊은 선비 때의 일입니다.
사대부 명문가에 딸을 출가시키려고 신랑감을 찾고 있던 어떤 대감 집에, 소개를 받고 선생께서 그 댁을 찾아갔답니다. 그 집 주인 대감은, 가난이 몸에 찌든 행색과 조그맣고 볼품없는 모습의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물리치기로 결심하고, 식사 때가 됐으니 밥이나 대접해 보낼 양으로 진수성찬을 차려서 식사 대접을 했는데, 그 산해진미가 가득한 밥상을 선생께서 눈이 휘둥그레 져서는 감히 먹을 생각도 못하고 바랑에다 음식들을 주섬주섬 집어넣었답니다.
이를 본 그 집 대감마님이 이상하게 여겨 “왜 자네는 음식을 먹지 않고 바랑에 집어넣느냐?”고 물으니, 선생께서 대답하시기를 “집에 계신 어머니도 못 드셔 보신 이런 귀한 음식들을 어머니께 맛보여 드리고 싶어 그럽니다.”고 대답했답니다.
그 집 대감마님은 선생의 효심에 감복 받아 딸의 배필로 사위를 삼았다고 합니다.
관상이 볼품없어도 그 행동거지나 말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즉, ‘독송’이 된 사람은 이렇게 알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볼품없어 뵈는 선생을 알아본 분들은 역시 ‘독송’이 되신 분들인 서애 유성룡과 율곡선생 이이셨다고 합니다.
(5) ‘해(解)’의 의미
‘해(解)’는 뭐냐?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초보적인 견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풀 해(解)’를 보아야 합니다.
먼저 제 일화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설송큰스님께서 열반하시기 몇 달 전이었습니다. 설송큰스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현불사에 갔습니다. 그런데 시자들께서 말씀하길 “편찮으시니 만나실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영령탑에 참배나 하고 가야겠다.’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한 시자 분이 제게 빨리 들어와서 뵙고 가라는 겁니다. 그때가 아마 오후 서너 시쯤 되었을 겁니다. 설법전에 들어가니 설송큰스님께서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으셨는데 편찮으시다는 분이 아주 거룩하고 편안한 모습이셨습니다.
삼배를 올리고는, 편찮으신 분께 특별히 드릴 말씀도 없고 해서, “석가모니부처님 같이 보이십니다.”고 여쭈니, “그래, 내가 석가모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겁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제가 지금 조계종의 어떤 절에 가끔씩 나가는데, 거기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한다기에 제가 관세음보살품을 번역하면서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그걸 완성해서 책으로 내려는데 괜찮겠습니까?”하고 여쭈니, 하시는 말씀이 “그래, 너는 경을 풀어야 거기서 힘이 나온다. 그렇게 해봐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마지막으로 그 어른을 뵙고는 다시는 생전에 뵐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저를 법화경 해설하는 사람으로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설송큰스님께서는 구마라
습선생님처럼 수기품제6의 첫 문장인 “爾時世尊께서 說是偈已하시고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
하사대”에 나오는 구절의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힘으로 지금 이렇게 법화경을 푸는 것입니다. 이런 걸 ‘수기(授記)’라고 합니다. 제가 일부러 이렇게 맞추려는 의도를 갖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닌데 앞뒤가 딱딱 맞지 않습니까? 이런 걸 ‘해설(解說)’이라고 합니다.
‘해(解)’는 ‘푼다’는 뜻인데, 보따리도 풀어야 뭐든지 나와서 남에게 줄 것이고, 소도 잡아야 사람들에게 먹일 것이고, 곡식도 껍질을 벗겨야 먹을 수 있고, 누에고치도 풀어야 실을 쓸 수 있는 것이고, 법화경도 풀어야 중생을 살찌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먹고 남도 먹일 수 있는 것’을 ‘해(解)’라고 합니다. ‘경을 푼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법화경을 ‘해(解)’할 수 있는 법사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에게 곧바로 재수를 틔워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사 자신은 정작 잘 모릅니다. 그런데 법화경을 제대로 풀게 되면 곧바로 ‘수기(授記)’가 되어 기록이 됩니다. 그래서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가 저절로 이루
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큰 도인의 ‘수기(授記)’를 왜 받으려고 하느냐면, 바로 천지만물에게 고하여 알릴 수 있는 힘이 그런 분들께는 있기 때문입니다. 도인들이 ‘내가 이렇게 이 사람에게 수기를 주노라!’하고 말씀을 하시면, 천지만물과 산천초목이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기록해두고 따르면서 그 사람을 도와주기 때문에, 설송큰스님 같은 분께 수기를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수기품제6의 첫 문장이 “爾時世尊께서 說是偈已하시고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로 시작한 것은 다 저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도인의 한 마디 말씀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한 마디 말씀이 이렇게 천지만물과 산천초목에 그대로 글로 기록되어 고지서처럼 명령이 되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송큰스님께서 은행나무에게 명령하여 장엄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치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6) ‘설(說)’의 의미
‘설(說)’은 뭐냐?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말한다, 설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초보적인 견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말씀 설(說)’자를 들여다보면, ‘말씀이 기쁘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수기품제6의 첫 문장인 “爾時世尊께서 說是偈已하시고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
사대”를 보면 ‘爾時世尊께서 說是偈已하시고’라고 나옵니다. 법화경 28품 중에서 ‘설(說)’자가
첫 문장에 나오는 품은 ‘수기품제6’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시세존(爾時世尊)께서 설시게이(說是偈已)하시고’에서 ‘게(偈)’는 ‘부처님의 싯귀, 또는 쉬다’라는 뜻인데, 이 문구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게 가장 쉽겠습니다.
갓난애를 키우는 애기엄마가 아기를 집에 재워두고 밖에 볼일 보러 나갔는데, 그만 여차한 일이 생겨서 젖먹일 시간이 지났는데도 집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간신히 허둥지둥 집에 들어와 보니 애가 그때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고 있는 겁니다. 그 순간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기쁜 마음이 저절로 발생하겠지요? 이런 걸 ‘이시세존(爾時世尊)께서 설시게이(說是偈已)하시고’라고 합니다.
‘세존(世尊)’이란 ‘존귀한 분’이니, 애기엄마 입장에서는 갓난애가 바로 세존입니다. 그 아이가 편안한 모습으로 잠자고 있는 모습이 바로 ‘설시게(說是偈)’라 하고, ‘이(已)’는 아이의 그런 모습에 안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 말씀은 ‘세존’을 ‘부처님’으로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說)’이라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얼굴표정이나 사람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무언(無言)의 말’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제25에서 보면 ‘이위설법(而爲說法)’과 ‘이위설법(以爲說法)’가 각각 ‘17번’과 ‘2번’ 씩이나 반복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관세음보살님께서 ‘무언의 말씀’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법화경의 언어는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역설적 언어는 법화경의 도처에 있습니다. 어떤 글에서 제가 여래수량품제16에 나오는 “汝等은 當- 信解如來誠諦之語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여래의 참되고 올바른 말을 믿고 풀어라.)”도 ‘사물이 소리 없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위 두 문장에서 ‘무언의 말씀’과 ‘소리 없는 말’의 차이점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설(說)’은 ‘메시지를 담은 아무런 이야기는 없지만 어떤 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나 상태’를, 여래수량품제16의 “汝等은 當- 信解如來誠諦之語니라”는 ‘메시지를 담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는 있
는데 소리가 없든지 들리지 않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투명한 유리의 방음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보고서 이야기를 합니다. 말이 들립니까? 그렇지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들을 수는 없지만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汝等은 當- 信解如來誠諦之語니라”라고 한다면, 두 사람의 얼굴표정은 바로 ‘설(說)’입니다.
이럴 때 어떤 것이 더 쓸모가 있을까요? 말소리보다는 얼굴표정이지요?
예를 들자면, 선종(禪宗)에서 금쪽같이 여기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설(說)’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염화미소’는 석존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영산회(靈山會)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 지으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인데, ‘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또, 독자들께서는 지금 제가 미국에서 열심히 ‘원목경침(圓木警枕: 중국 북송의 사마광이란 사람이 통나무로 목침을 만들어, 이것을 베고 잠이 들면 머리가 미끄러져 눈을 뜨게 하여 공부했다고 함)’하면서 법화경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물론 제가 카페에 글을 올리니까 그런가보다 하시겠지만 저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시니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독자들에 대한 저의 ‘설(說)’입니다. 제가 지금 글로 설명하는 내용을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를 아는 것 말고, 저의 법화경 공부하는 상태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설(說)’이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을 설(說)할 수 있는 법사는 사실 대법사의 반열에 올라야만 그게 가능합니다. 그런 분의 법화경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재수가 틔는 것뿐만 아니라 제도와 장엄까지 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직업으로 보면, ‘설(說)’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선생이나 법사나 목사 같은 사람입니다. 만일 ‘독(讀)’과 ‘설(說)’을 함께 가지고 온 사람은 유명 연설가나 강연자 등일 것입니다.
제 글을 읽고 제 말뜻을 이해하신 분은 법화경에서 말씀하는 수기가 벌써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다시 수기품제6의 첫 문장인 “爾時世尊께서 說是偈已하시고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
대”를 보면, ‘설(說)’과 ‘고(告)’가 나오는데, 그 차이를 아시겠지요? ‘고(告)’는 ‘그대로 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왜 ‘고지서 날아왔다’는 말을 쓰는데 ‘고지서’란 ‘종이에 써져 있는 내용, 그대로 해야 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또, ‘고(告)’는 ‘소 우(牛)’자 아래 ‘입 구(口)’자 한 글자입니다. ‘소의 입’은 먹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하고,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런데 하나 더 있습니다.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법화경을 ‘설(說)’할 수 있다는 것은 만물, 즉 제대중(諸大衆)에게 명령을 할 수 있다는 뜻인데, 되새김질까지도 하도록 해줄 수 있는 힘이 구비되었다는 뜻이니, 제도나 장엄을 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7) ‘서(書)’의 의미
‘서(書)’는 뭐냐? 여기서는 ‘글 서(書)’로 보지 않고 ‘쓸 서(書)’로 새기는데,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초보적인 견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쓸 서(書)’자를 보아야 합니다.
‘쓴다’는 의미는 ‘세밀해진다, 꼼꼼해진다, 면밀해진다, 분석적이 된다, 논리적이 된다, 조직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글을 자꾸 쓰게 하면 그 사람이 아주 면밀하고 분석적이고 조직적이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자꾸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철두철미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하는 아이가 그냥 눈으로 공부하면 겉으로만 알고 뒤돌아서면 다 까먹습니다. 그래서 자꾸 손으로 수식을 쓰면서 전개하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려운 물리학도 차츰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처럼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이미 연습이 되었으니까 눈으로 읽어도 됩니다. 그러나 논문을 써야 면밀하게 이론이 전개됩니다. 그 쓰는 과정에서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해답도 찾게 됩니다.
저도 지금 이렇게 법화경 해설을 하겠다고 자꾸 글을 쓰니까, 글을 쓰면서 좋은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생각만 해서는 맨 날 그 자리에서 맴돌기만 할 뿐 더 이상 진전이 없습니다. 독자들이 제 법화경 해설을 읽으시면서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 않으신다면, 제 글을 읽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글을 썼겠습니까?
제게 법화경 강의를 들은 분들께서는 제가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양의 법화경 해설서를 썼는지 다 아실 겁니다. 이런 A4 용지로 아마 2,000 쪽 분량은 될 겁니다. 몇 사람들은 제가 일 년 동안 강의한 내용을 한꺼번에 받아 가신 분들도 계시지만, 사실 그건 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법화경 해설서를 쓰다 보니 지금과 같이 이런 ‘서(書)’자도 앉은 자리에서 풀어가며 글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에서 제가 한 번도 풀어보지 않은 글자들이 ‘수(受)’, ‘지(持)’, ‘해(解)’, ‘서(書)’이며, ‘송(誦)’과 ‘설(說)’은 반 정도 풀어보았으며, ‘사(寫)’는 다 풀어보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글을 써가면서 처음으로 풀어보는 글자들을 풀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법화경을 쓴다’는 실천의 힘 때문입니다.
즉, ‘법화경을 쓴다’는 말은 세상이치를 면밀하게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주도면밀하고도 조직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이제 뒤집어서 ‘쓰다’가 아니라 ‘글’이라고 ‘서(書)’를 풀어보겠습니다. 이런 ‘서(書)’의 재능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저처럼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서(書)’와 ‘독(讀)’과 ‘해(解)’를 수승하게 다 가지고 나왔더라면 세계적인 물리학자나 노벨상을 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다못해 한국에서라도 이름이 남는 학자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이렇게 법화경을 풀어서 법화경 ‘해의사리(解義舍利)’를 집필해 놓으면 수백 년은 더 읽히면서 내려갈 것입니다. 설마 하지 마십시오. 설송큰스님 말고 누가 이렇게 법화경을 풀어나 봤습니까?
일반적 직업으로 보면, ‘독(讀)’과 ‘서(書)’를 가지고 온 사람은 학자나 저술가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글’이 뭡니까? ‘기록’이 아닙니까? 법화경을 깊이 읽고, 이 ‘글 서(書)’자를 깨치면 사람의 전생을 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사람은 다 자기의 전생을 ‘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기(授記)’라는 단어 보면 ‘기록할 기(記)’가 나오지 않습니까? ‘기록’이 꼭 흔히 말하는 ‘글자’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암호’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글’이라는 것도 일종의 ‘부호(=기호)’로 되어 있는 ‘암호의 문장’인 것입니다.
부호(기호)가 꼭 시각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이비설신의’라는 육근으로 감지하여 인식할 수 있는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부호(기호)로 써져 있는 기록’을 ‘글 서(書)’라고 합니다. 개가 지나가다가 나무에 오줌을 누는 것도 다 ‘부호로 써놓은 암호의 글’입니다. 사람은 읽을 수 없지만 개들은 그것을 다 용케 알아내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글 서(書)’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문을 모르는 사람은 한문 법화경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지 않습니까? 다 ‘부호(기호)와 암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호로 된 암호를 풀어내는 것을 ‘해독(解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解)’와 ‘독(讀)’이라고 하는데, 바로 ‘글 서(書)’가 그런 ‘어떤 부호의 암호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므로, 도인들께서 법화경 ‘수기품제6’을 통해서 ‘수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수기품제6에 “爾時世尊께서 說是偈已하시고 告諸大衆하사 唱如是言하사대”하는 힘이 장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의 부호(=기호)와 암호로 된 글을 어떻게 풀이합니까? 그 부호와 암호는 그림과 상징과 은유와 암시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서 풀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자연법칙’도 다 ‘부호(=기호)로 기록된 암호의 문장으로 된 글’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자연현상을 통해서 그 글을 읽어내면 법칙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묘법연화경’도 ‘한자’라는 ‘부호(기호)’와 ‘한문’이라는 ‘암호’로 된 ‘문장’이 기록되어 있는 ‘글(書)’인데 뭐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바로 ‘방편제법실상의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법화경의 글’은 바로 ‘방편제법실상’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렇게 ‘서(書)ㆍ독(讀)ㆍ해(解)’를 가지고 세상에 나온 사람은 대학자나 세계적인 과학자가 됩니다. 여기다 ‘설(說)’까지 갖추고 나온 사람은 대법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을 읽어내서 풀 수 있다는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설(說)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도인의 반열에 올라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좀 어렵겠지만 적절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법화경의 ‘서(書)ㆍ독(讀)ㆍ해(解)’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체의 세포 핵 속에 들어 있는 DNA는 글이 들어 있는 책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그 글의 기호(부호)가 ‘아데닌(A)ㆍ구아닌(G)ㆍ시토신(C)ㆍ티민(T)’이라는 ‘4개의 염기분자’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지 한 권의 책과 같은 ‘글’입니다. DNA에는 ‘64개’의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가 죽 나열된 하나의 문장이 바로 유전자 하나로, 생명체에 필요한 어떤 하나의 단백질을 만드는 매뉴얼(지침서)이 됩니다. 그 지침서의 명령으로 특정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64개의 단어 하나하나가 20개의 아미노산들 중에 어느 특정한 것을 지정하는 암호가 됩니다. 사람은 약 32억 개의 염기서열이라는 부호와 약 10억 개의 단어와 약 2만 개의 유전자 문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록된 ‘글’이지 뭡니까? 분자생물학에서 그런 하나의 ‘단어’를 ‘코돈’이라고 하면 그 코돈은 ‘3개의 염기가 나열된 것’입니다.
인간은 70조∼100조 개의 세포를 가지고 있는데, 개인마다 모두 다르지만, 그것들의 핵 속에는 그 사람의 DNA가 하나씩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다 ‘아데닌(A)ㆍ구아닌(G)ㆍ시토신(C)ㆍ티민(T)’이라는 ‘염기분자’로 된 부호로 써진 유전자 암호의 글로 되어 있는 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이 70조∼100조 개씩 모여서 특정한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한 생명체의 개체 가지고 있는 모든 세포는 모두 똑같은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포 핵 속에 들어 있는 DNA라는 글을 읽고(讀), 풀(解) 수 있다면 분자생물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한자라는 부호로 된 한문이라는 문장의 글로 이루어진 법화경의 비밀을 풀어내서 설할 수 있으면 대법사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수지독송해설서사’를 이렇게 푸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온 ‘재능ㆍ품성ㆍ복록’이 ‘수지독송해설서사’라는 ‘8 가지’인데, 이와 같은 것이라고 아시면 됩니다.
(8) ‘사(寫)’의 의미
‘사(寫)’는 뭐냐? 제일 쉬운 말로는 ‘법화경을 베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건 좀 초보적인 견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베낄 사(寫)’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해설은 위에서 이미 했으니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그런데 ‘베낀다, 찍는다’는 의미의 ‘사(寫)’는 결국 ‘고친다, 바로잡는다’는 말로 확대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얼굴에 뭔가 묻었으면 바로 그것을 닦아냅니다. 유태교의 탈무드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더러운 때가 묻은 사실을 모르니 그 얼굴 그대로 나다닐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것은 이미 과거의 사실로 굳어진 자신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에 찍힌 자신의 얼굴에 때가 묻었다면, 지난 일이라 부끄럽지만, 그것을 스스로 닦아낼 것입니다. ‘법화경을 베낀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베껴놓고 보니 한 글자가 빠졌거나 삐뚤어졌거나 틀렸습니다. 그러면 다시 베껴야 되지 않습니까? 독자들께서도 이제, ‘사경(寫經)’이 뭔지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사경하면서 누진이라는 때가 벗겨집니다. 자신의 누진을 벗기는 가장 좋은 수행은 사실 법화경 화성유품제7을 정성들여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누진은 물론 조상의 영가까지 천도됩니다. 제가 알아서 이런 글 적는 것이 아니고 설송큰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 나름대로 갖다 붙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경하실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엉터리로 정성 없이 쓰면 되레 마가 붙습니다.
위의 ‘글 서(書)’와 결부시켜서 좀 더 부연하면, ‘사(寫)’란 유전자를 복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잘못 복사하면 암이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을 그대로 베껴야지 틀리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예로, 핸드폰을 만들었는데 그 매뉴얼대로 만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寫)’는 ‘서(書)’를 응용하는데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寫)’를 가지고 온 사람은 ‘발명가’가 되어 세상에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어렵고 긴 설명이었습니다.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하는 위의 ‘8자의 실천’은 바로 ‘법화경 수행 방법’의 핵심이며, ‘자신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하는 목적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방편’과 ‘비유’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수지독송해설서사’라는 ‘법화경의 가피를 받는 수행법’을 실천하는 일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의 수기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전생부터 공덕을 짓고 나와야 법화경을 만나서 가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양력으로 2009년 5월 9일 설송큰스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뒤에 한 달간 제바달다품제12 기도를 마치고는 곧 다음 기도를 했는데, 들어간 품이 보현보살권발품제28입니다. 석 달간 보현보살권발품제28을 번역하면서 제 인생행로의 새로운 좌표가 설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저에게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법화경의 방편에 의해서 발생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법화경의 가피를 받는 8가지 수행방법’은, 보현보살권발품제28에 나오는 ‘요문(遙聞)ㆍ능득(能得)ㆍ당득(當得)ㆍ필득(必得)ㆍ수지(受持)ㆍ독송(讀誦)ㆍ사유(思惟)ㆍ구색(求索)ㆍ서사(書寫)ㆍ수습(修習)ㆍ정억념(正憶念)ㆍ해기의취(解其義趣)ㆍ여설수행(如說修行)ㆍ자서(自書)ㆍ사인서(使人書)ㆍ수호(守護)ㆍ호조(護助)’라는 17 가지의 공덕과, 다른 품들에 주로 나오는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를 비교하여, 그 공통분모를 찾아서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라는 8 가지 ‘재능ㆍ품성ㆍ복록’을 가지고 나오는데, 어떤 것을 가지고 오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그 가짓수를 여기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좀 어렵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제 글을 따라오시면 됩니다.
사람이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라는 8가지의 ‘재능ㆍ품성ㆍ복록’ 중에서, 하나도 못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1’ 종류, 한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8’ 종류, 두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28’ 종류, 세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56’ 종류, 네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70’ 종류, 다섯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56’ 종류, 여섯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28’ 종류, 일곱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8’ 종류, 여덟 가지 다 가지고 나오는 사람은 ‘1’ 종류, 이렇게 사람의 종류가 나눠집니다. 그러니 총 ‘1+8+28+56+70+56+28+8+1=256’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걸 수학에서는 이항분포라고 하는데, ‘어떤 한 가지를 가지고 나오는 경우’를 ‘a’, ‘그것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b’라고 하면, ‘(a + b)8 = (1a8 + 8a7b + 28a6b2 + 56a5b3 +70a4b4 +56a3b5 + 28a2b6 +8ab7 + 1b8)’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a8’는 8가지를 모두 가지고 태어난 경우고, ‘a7b’은 8가지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이고, 이런 식으로 ‘b8’는 하나도 못가지고 나온 경우입니다.
주역(周易)에서는 26=64 괘로 분류하여, ‘64×64=4,096’ 가지의 점을 칠 수 있는데, 인간이 가지고 나온 모든 복록과 재능과 품성은 총 ‘216=28×28=256×256=65,536’ 종류로 나뉩니다. 이것은 화성유품제7에 나오는 ‘16왕자’, 즉 ‘생로병사ㆍ희로애락ㆍ사농공상ㆍ인의예지’로 분류한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법화경 ‘69,384’ 자에 필적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명이 길고 어진데 화를 잘 내는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직업은 장사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가지고 온 복을 나누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알아야 제도고 장엄이고 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인간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나오는 것을 나누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복록과 재능과 품성을 더 수승하게 가지고 나왔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식과 일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개인의 가지고 온 자리를 제도하고 장엄하여 변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는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고나온 자리가 ‘256가지’라면 ‘법화경의 수지독송해설서사’는 256가지로 인생을 제도하고 장엄하는 방법이고, ‘65,536가지’라면 ‘법화경의 수지독송해설서사’는 65,536가지로 인생을 제도하고 장엄하는 방법이고, 법화경 ‘69,384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가 다 인생을 제도하고 장엄하는 도구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는 모르지만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할 때, 자신의 팔자가 변한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하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올바르고, 풍요롭고, 복록을 누리는 자리로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꼭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五. 요약
관세음보살보문품제25에는 인간이 지닌 고통의 종류를 ‘칠난(七難: 화수풍도귀옥도의 난)ㆍ삼독(三毒)ㆍ이구(二求)’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했습니다. 그것들이 해결되는 ‘해탈(解脫)’이 다섯 종류가 있는데, ‘개득해탈(皆得解脫)ㆍ이득해탈(而得解脫)ㆍ즉득해탈(卽得解脫)ㆍ당득해탈(當得解脫)ㆍ석연득해탈(釋然得解脫)’이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님을 어떻게 부릅니까?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이런 식으로 계속 부르면 됩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까? 답은 이렇습니다.
중생이 ‘관세음보살님을 염원하는 구체적인 행동 방법’은 바로 법화경의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를 늘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제도하고 장엄하는 방법의 지름길은 다름 아닌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 하는 행동력이라는 진리를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구마라습선생님께서도 역시 당신의 당면한 고통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부처님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셨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구마라습선생님 같은 분께서 고통을 받았으며, 중국에서는 왜 그분을 납치해왔을까요? 바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 앉으셔서 ‘동방으로 만팔천 세계’를 미리 장엄하셨기 때문에 그 심부름꾼으로 쓰시기 위해서 중국에서 납치해간 것입니다. 제 발로는 가지 않을 테니 납치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법화경의 방편입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면 360도니까 ‘삼만육천 세계’가 됩니다. 석존께서는 동방 만팔천 세계만 장엄하셨으니 법화경이 이제까지 동양에만 퍼졌습니다. 이제부터는 다시 동방으로 만팔천 세계에 법화경을 광선유포하여 온 지구에 퍼져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견보탑품제11에서 말씀하는 ‘통위일불국토(通爲一佛國土)’가 될 것입니다.
묘법연화경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신사리(全身舍利)’가 들어있습니다. 또한 구마라습선생님의 ‘경전사리(經典舍利)’가 녹아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설송대법사님께서는 ‘설법사리(說法舍利)’로 묘법연화경 전체를 세상에 모두 풀어놓으셨습니다. 저는 이제 그 설법사리를 글로 써서 세상에 유포하기 위한 보편화된 ‘해의사리(解義舍利)’를 쓰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 금생의 ‘목표(目標)’이자 ‘천명(天命)’입니다.
문왕(文王)이 유리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주역(周易)을 찬역하였겠습니까? 사마천(司馬遷)이 궁형을 받는 모멸을 받지 않았다면 사기(史記)를 저술했겠습니까? 허준(許浚)이 거제도로 귀양 가지 않았다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했겠습니까?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지 않았다면 그의 실학사상이 나왔겠습니까?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 가지 않았다면 그의 예술이 나왔겠습니까? 이런 예들은 수도 없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편안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게 되면 나태해지거나 너무 바빠지기 때문에 훌륭한 저술이나 불후의 업적을 낼 수가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입니다. 구마라습선생님도 마찬가지로, 불교사상 유례없는 대역경사를 스스로 원해서 하셨던 일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역경에 처하셨을 때 일거리를 찾아내어 하셨던 것입니다. 저 역시 비록 편안한 삶을 누리는 사람도 아니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떤 자리에 올라 인생을 쓸데없이 낭비할 수 있는 여건은 되기 때문에 그러한 데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한글 묘법연화경’을 만들려는 것이며 ‘법화경 해의사리(解義舍利)’를 저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인생목표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중생제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들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남들이 알 수 없는 고통을 가슴에 앉고 살아오다 보니 이렇게 법화경 69,384자 하나하나를 다 부처님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법화경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바라보면서 제 고통을 비춰보고 제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유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제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시는 의사선생님이 바로 법화경의 모든 글자 하나하나라는 말씀입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법화경을 그저 그런 책 정도로 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당면한 여러 고통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의 천명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 없이 남의 아픔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남은 다급하거나 소중한데 나는 다급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은 법입니다. 이래서는 남의 고통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아픔뿐만 아니라 남의 아픔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씨를 기르게 하는 것이 바로 법화경의 방편입니다.
누구나 다 숨어 있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여래수량품제16에서 말씀하듯이 독자들 여러분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전이 묘법연화경이기 때문에 독자들께서도 스스로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受持讀誦解說書寫)’해야 한다는 말씀이 이 글의 요지(要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상처를 치유함은 물론, 남은 인생도 풍요롭게 사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의 인생 목표를 설정하고 발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법화경의 가피를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