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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페.톡Cell)회원에게 함께 있을 지어다▷
💖乙巳年 (Cell)가족 방문의 해(前)💖
◇내가 보낸 자를 영접(迎接)하는 자는 나(예수)를 영접(迎接)하는 것이요, 나(예수)를 영접(迎接)하는 자는 나(예수)를 보내신 이(하나님)를 영접(迎接)하는 것이니라"(요13:20)
† 구약(舊約) ☆ (歷史書)
생명의 양식(진리의 복음)을 하찮게여기면, 사탄에게 영생의 기쁨을 빼앗겨 침체 됩니다.
스7:1-28절) 에스라의 귀환(歸還) .
예루살렘의 성전(聖殿)이 불에 타고 망(亡)한 지, 70년 후(後)에 스룹바벨이 바벨론에 올라와서 성전(聖殿)을 다시 건축(建築)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제사장(祭司長)들이 매일 하나님께 번제(燔祭)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전(聖殿)을 다시 건축(建築)할 목적(目的)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聖殿)은 일종(一種)의 구형(舊型)컴퓨터와 같았습니다.
중요(重要)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전(聖殿)을 통(通)하여 신앙적(信仰的)인 대혁명(大革命)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聖殿)을 지은 지, 58년 후(後)에 에스라라고 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올라오게 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성전(聖殿)지어졌을 때 왔기 때문에 더 이상 성전(聖殿)공사(工事)를 하는데 정력(精力)을 빼앗길 필요(必要)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절대적(絶對的)인 후원(後援)과 경제적(經濟的)인 후원(後援)을 힘입어서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연구(硏究)하는 데만, 즉 율법(律法)을 연구(硏究)하는 데만 전념(專念)할 수 있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聖殿)의 특징(特徵)은 성전(聖殿) 건물(建物) 자체(自體)가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重要)한 것은 58년 뒤에 에스라가 일으킨 *말씀 부흥 운동*이 핵심(核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신약(新約) 교회(敎會)가 어떤 모습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典型的)인 것입니다. 즉 신약(新約) 교회(敎會)의 성전(聖殿)은 우리 믿는 자들이 모이는 모임입니다. 즉 신약(新約) 교회(敎會)의 성전(聖殿)은 땅도 아니고, 교회(敎會) 건물(建物)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百姓)으로 모이는 모임 자체(自體)가 성전(聖殿)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聖殿)안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 그것은 곧 에스라가 일으켰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부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百姓)들 중(中) 에서 *생명의 말씀의 부흥*이 있을 때는 이것이 모세의 성전(聖殿)보다 더 낫고, 솔로몬의 성전(聖殿)보다 더 위대(偉大)한 성전(聖殿)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祝福)은 바로 거기에서 다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에스라의 귀환(歸還)(상)
에스라는 유다 백성(百姓)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2차 귀환(歸還)을 주도(主導)한 사람입니다. 1차 귀환(歸還)이 스룹바벨의 영도하(領導.下)에 약 5만명 정도가 돌아온 것이라면, 2차 귀환(歸還)은 에스라가 약 1,800명을 데리고 귀환(歸還)한 것입니다.
물론 에스라의 영도하(領導.下)에 귀환(歸還)한 유다 백성(百姓)들의 숫자는 1차 귀환(歸還)에 비(比)하여 숫자가 형편없이 적었지만,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聖殿)의 가치(價値)는 이 에스라가 일으킨 *말씀의 부흥 운동*으로 그 가치(價値)가 완전히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本文)을 보면 에스라에 대(對)하여 두 가지로 소개(紹介)하고 있습니다.
7:1절)이 일 후(後)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曾孫)이요”라고 해서 에스라의 족보(族譜)가 위로 거슬러 올라가 7:5절 아론까지 가고 있고,
또
7:6절)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學士)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 (求)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하나는 에스라의 이스라엘 안에서의 신분(身分)을 밝히고 있고, 다른 하나는 에스라의 세상(世上)속에서의 신분(身分)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에스라의 신분(身分)이 이스라엘 안에서는 아론의 후손(後孫)인 제사장(祭司長) 계통(系統)이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의 멸망(滅亡)으로 이 제사장(祭司長)의 계보(系譜)는 더 이상(以上) 제사(祭祀)를 드리지 못하는 계보(系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론의 후손(後孫)이었고, 사독의 자손(子孫)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스라야는 예루살렘이 멸망(滅亡)할 당시 대제사장(大祭司長)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에스라는 1차 귀환(歸還)때, 스룹바벨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고, 처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세상적(世上的)인 직위(職位)는 학사(學士)였습니다. 여기서 이 학사(學士)라는 지위(地位)가 아마 페르시아의 직위(職位)인 것 같습니다.
요즘의 대학(大學)총장(總長)이라든지, 교육부(敎育部)장관(長官)과 같은 학문적(學問的)으로 높은 직위(職位)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 에스라가 처음부터 율법(律法)으로 페르시아에서 인정(認定)받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인정(認定)을 받았던 것은 바벨론의 모든 신화(神化)나 학문(學問)에 아주 탁월(卓越)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智惠)까지 있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인정(認定)하므로 박수(남자무당)장(長)이라고 해서 점(占)치는 자(者)들의 장(長)을 세웠던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 밑에는 바벨론식으로 점(占)치는 점(占)쟁이들이 수두룩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지혜(智惠)는 그 모든 세상(世上)의 점(占)이나 학문(學問)을 합(合)친 것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스라도 페르시아의 학문(學問)을 아주 뛰어나게 공부(工夫)했던 것 같습니다.그런데 에스라는 그런 페르시아 학문(學問)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율법(律法)까지 정통(正統)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 왕이 에스라를 절대적(絶對的)으로 신임(信任)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에 대(對)하여 7:6절)...왕에게 구(求)하는 것은 다 받는 자(者)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의 절대적(絶對的)인 신임(信任)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라에게는 두 가지 측면(側面)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大祭司長)의 자손(子孫)으로서의 영적(靈的)인 은사(恩賜)와 그가 페르시아 안에서 감당(堪當)하고 있던 세상적(世上的)인 지혜(知慧)나 직책(職責)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의 세상적(世上的)인 직책(職責)이 예루살렘 부흥(復興)에 결정적(決定的)인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부흥(復興)의 결정적(決定的)인 영향(影響)은, 그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문적(專門的)으로 연구(硏究)해서 설교(說敎)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적(世上的)으로도 인정(認定)을 받는 것도 적지 않은 영향(影響)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信仰)이 진정(眞定)으로 살아 있는 신앙(信仰)이 되려면, 세상(世上) 사람들에게도 인정(認定)받는 공부(工夫)나 직장(直腸)생활(生活)을 통(通)해서 나타날 필요(必要) 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적(信仰的)으로 어릴 때는 신앙생활(信仰生活)과 세상(世上) 일 사이에 괴리(乖離)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즉 둘 다 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世上) 일도 탁월(卓越)하게 잘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경우도 6절 끝에 보면“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王)에게 구(求)하는 것은 다 받는 자(者)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信仰)을 이 세상(世上)에 대(對)한 성실(誠實)함으로 나타낼 필요(必要)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世上) 일에 대(對)하여 너무 겁을 먹거나, 너무 덤벼들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가면, 결국(結局)에는 세상(世上) 일도 탁월(卓越)하게 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스라에게서 배울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세상(世上)의 학문 (學問)이나, 지식(智識)을 소용(所用)없다고 생각(生角)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만약 에스라가 페르시아의 학문(學問)이 쓸데없다고 생각(生角)해서 전혀 공부(工夫)하지 않았더라면, 학사(學士)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고, 왕의 신임(信任)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3:8절)...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排泄物(糞)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聖經) 지식(智識)에 비(比)하면, 페르시아의 학문(學問)은 쓰레기에 불과 할 지 몰라도, 역시 세상(世上)에서는 이 쓰레기 같은 학문(學問)을 중요(重要)하게 생각(生角)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시점(時點)에서 쓰레기통에 버렸던 지식(智識)을 도로 꺼내어 사용(所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를 세상(世上)사람들이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또 하나의 장점(長點)은, 세상(世上) 학문(學問)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했더니, 더 탁월(卓越)하게 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이는 자세(姿勢)로 세상(世上)의 학문(學問)을 공부(工夫) 했더니, 세상(世上) 공부(工夫)도 아주 잘 할 수 있게 되어서 최고(最高)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에스라는 한 가지 중요(重要)한 결심(決心)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현재(現在) 자기(自己)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智識)과 열정을 모아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연구(硏究)하고 가르치는 일에 쓰기로 한 것입니다.
7:10절)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의 특(特)이한점은, 그가 세상(世上) 학문(學問)을 열심히 연구(硏究)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律法)의 탁월성(卓越性)을 입증(立證)한 후(後)에는 더 이상 세상(世上) 학문(學問)으로 나가지 않고, 방향(方向)을 돌려서 하나님의 율법(律法)에 자신(自身)의 모든 지식 (知識)과 열정(熱情)을 다 쏟기로 결심(決心)한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라의 2차 귀환(歸還)의 동기(動機)입니다.
사실 세상적(世上的)으로 한창 잘 나가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포기(抛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식적(常識的)으로 이해(利害)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에스라의 의견(意見)에 동의(動議)를 했고, 에스라는 결국(結局) 1,800명이라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그리스 학문(學文)과 율법(律法)을 아주 많이 공부(工夫)한 당시 최고(最高)의 지성인(知性人)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後), 자신(自身)의 모든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연구(硏究)하고, 전(傳)하는 일에 다 쏟았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에스라는 그냥 페르시아에서 학사(學士)의 지위(地位)를 유지(有支)하면서 그곳에서 율법(律法)을 연구(硏究)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굳이 1,8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얼마든지 페르시아 대학(大學)같은 데서 율법학(律法學)같은 것을 개설(開設)해서 연구(硏究)도 하고 강의(講義)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점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연구(硏究)에 있어서 중요(重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百姓)들의 모임 안에서 선포(宣布)되어야만 가장 바르게 그 의미(意味)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百姓)들에게 설교(說敎)할 목적(目的)으로 연구(硏究)할 때, 성경(聖經)을 가장 바르게 연구(硏究)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世上) 학문(學文)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연구(硏究)하는 것의 차이(差異)인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라가 성전(聖殿)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르친 것은 순전(純全)히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전(聖殿)의 바른 기능(技能)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연구(硏究)하고 설교(說敎)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597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만물(萬物)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精神)을 차리고 근신(勤愼)하여 기도(祈禱)하라(벧전4:8)
우리세대와 다음세대,소중한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한(마28:18-20) ◑멸망할 영혼救靈과 避難處설립할 특별기도와 특별기부동역자 찾습니다. 온라인 헌금 농협중앙회 주거래 우대통장 302-8772-0191-01 이름 옆에 헌금종류-6자(예 : 착한이 십일조) ☆네 재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인정(認定)과 순종(順從) 💖진리의 복음💖 |
†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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